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4)
귀족들은 조용히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품은 뜻은 명확했다.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이고 복종하겠다는 눈빛이었다.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모두의 생각이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제국을 위한 일이니, 다들 뜻을 모아주길 바랍니다.”
아직까지 망설이는 귀족들이 변심할 새도 없이, 황태자는 곧장 밀어붙였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니.”
준비는 오래전에 끝났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누구의 희생도 없는 조용한 황위 찬탈. 그것이 황태자의 목표였다.
***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황제는 바람을 쐬기 위해 중정으로 향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애꿎은 꽃만 걷어차고 짓밟았다.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감히…….”
이제 막 공작위를 계승한 주제에, 황제인 저와 동등해진 척 구는 꼴이 무척이나 같잖았다.
“어찌 한 놈도 없는 건가.”
평소 같았다면 그의 발언을 뒷받침해줄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추진하려 했는데, 오늘은 모두가 그를 외면했다. 마치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황제는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황궁 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는 듯했다. 다른 일이 바빠서 계속 무시했으나 더 이상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궁 내에 심어둔 사람도 요즘 소식을 전해 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고가 올라온 지 일주일도 넘은 듯했다. 속이 답답해진 황제는 저를 뒤따라 나온 비서관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
“근래 황태자가 이상하지 않느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네 눈은 발바닥에 달린 게로군.”
비서관마저 제 편을 들어주지 않자, 황제는 분풀이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비서관은 끝까지 황제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황제가 비서관을 쳐다보았다. 비서관은 사무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슬슬 들어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말하자, 황제는 코웃음 쳤다.
“좀 더 기다리라지.”
어차피 자신이 없으면 회의조차 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블레어드가 이런 문제에 조언을 해주었을 텐데……. 황제는 자신이 공작 가문의 일에 직접 개입해서라도, 블레어드를 밀어줄 걸 하며 후회했다. 그랬다면 국무 회의에서도 저를 무시하는 자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카르한이 작위를 계승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로, 블레어드는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 계속 말이 많았으니 자숙하는 걸지도 몰랐다. 고민 끝에 황제는 블레어드를 한번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의논해야 할 것이 잔뜩 있었다.
한참 중정을 돌아다니던 황제는 겨우 분노를 가라앉히고 회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부 꼼짝없이 앉아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 듯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복도는 온통 조용하기만 했다. 지나가는 시종조차 없었다.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며 회의장 앞에 멈춰 서자, 비서관이 문을 열어주었다.
“……?”
안으로 들어선 황제는 그대로 멈칫했다.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일제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무척 낯선 눈빛에, 이질감이 들었다.
스산함을 느낀 황제가 입을 여는 동시에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그 소리가 바깥과의 단절을 알려주었다.
황제는 제게 예를 갖추지 않는 귀족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다들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피고인으로서 재판장에 출석한 기분이었다.
훈계라도 하려고 할 때, 홀로 서 있던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의 비서관이자, 황궁 행정관인 헤인리 블로든이 모든 관료를 대표하여 제국의 황제에게 죄를 묻겠습니다.”
“……뭐라?”
잔뜩 굳어져 있던 황제가 겨우 반응했다. 그러자 헤인리는 종이 한 장을 펼쳐 죄목을 읊기 시작했다.
“흉년에도 지나치게 세율을 올려 폭리를 취한 죄. 귀족들의 후원금을 갈취한 죄.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아넘긴 죄. 그리고…….”
헤인리의 차분한 목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귀족들의 반대에도 독선으로 법안을 개정한 죄.”
헤인리가 읊어나가는 죄목들을 듣던 황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제 앞에서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데, 누구도 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황제는 주먹을 움켜쥐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부딪치자, 황태자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이 섬뜩해서 황제는 어깨를 떨었다.
“이 모든 죄를 인정한다면, 스스로 물러나십시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딴 헛소리를 하느냐!”
헤인리의 마지막 발언에 황제가 노성을 질렀다.
“네놈이 미쳤구나. 안 그래도 블로든 놈이 여기까지 기어들어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당장 내쫓겠다며 황제가 길길이 날뛰었다. 그때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뚝 솟은 몸을 본 황제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르한이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산처럼 범상치 않은 기세였다. 전대 에반테온 공작조차 저 정도의 존재감을 내비치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자, 황제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이제 막 공작위에 오른 애송이라 무시했으나, 착각이었다. 이미 카르한 에반테온은 포식자의 상위층에 도달한 자였다. 다른 귀족들이 카르한을 보는 눈빛이 그러했다.
“더 이상 당신의 폭정을 눈감아줄 수 없습니다.”
카르한의 나직한 목소리가 황제를 찔러왔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본 카르한은 마치 귀족들의 대표라도 되는 듯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말했다.
“에반테온 가문은 황제의 폐위를 요구합니다.”
카르한을 시작으로 귀족들이 하나씩 일어나서 그의 발언에 힘을 실어주었다.
“란체스터 가문은 황제의 폐위를 요구합니다.”
“벨리언 가문은 황제의 폐위를 요구합니다.”
점점 커져가는 목소리에 황제의 입술이 떨려왔다. 그들 가운데 황제를 지지하던 이들도 섞여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을…….
아니, 알고 있었다. 이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괜찮을 거라며 현실에 안주했던 것은 황제 본인이었다. 황제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어서 반역자들을 끌어내라!!”
황제의 외침이 회의장을 가득 울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 하나 없이 고요했다.
“어서, 누구든 좋으니!!”
황제가 절박하게 소리 질렀으나,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는 마치 관중 속에서 독백을 지껄이는 배우가 된 것 같았다. 소리를 너무 질러 헉헉대니, 그제야 회의장을 지키던 기사들이 움직였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들을 붙잡아라!”
황제가 반색하며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장식장 인형처럼 서 있던 기사들이 걸음을 옮기자,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때.
“!”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기사들이 향한 곳은 귀족들이 아닌, 황제의 양옆이었다.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황제의 팔을 붙들었다.
“이, 이거 놔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제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발버둥 쳤다. 바동거리는 황제를 향해 황태자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폐하의 과욕은 제국을 병들게 할 뿐입니다.”
“감히, 네가, 어떻게 나를…….”
“저는 그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황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노쇠한 육체는 지나친 분노를 담아내지 못했다.
“조금만 있으면 네놈이 내 뒤를 이을 텐데…… 어째서 이런 짓을…….”
“기억하십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태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딱 한 번, 제게 동화책을 읽어주셨지요.”
“…….”
“욕심 많은 여우가 끝없이 탐욕을 부리다가 전부 잃고 마는 교훈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황제는 제대로 서질 못하고 자꾸만 무너졌다. 황제를 응시하던 황태자가 팔을 뻗어, 그의 머리에 씌워진 왕관을 집어 들었다. 스스로 왕관을 쓴 황태자가 속삭였다.
“아프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황위를 승계하겠습니다.”
***
에반테온 공작저 뒤편에는 창고가 하나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이곳은 이전에 블레어드가 카르한을 가두었던 곳이기도 했다.
총회가 있던 날, 블레어드는 기사들에게 끌려나와 이곳에 갇히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피워도 그를 상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처분이 정해질 때까지 대기하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오늘이 며칠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빌어먹을.”
손톱을 물어뜯던 블레어드는 기어코 피를 보고 나서야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고요함 속에 내던져지니 지금껏 있었던 일이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들었다.
-넌 공작이 될 수 없다.
증오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레베타가 아직도 선연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의심을 사든 말든 그냥 카르한을 죽였어야 했다. 괜히 신중하게 굴어서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기보다는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제국법대로 죗값을 치르게 된다면 사형 당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블레어드는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역시 황제뿐인가…….”
황제 정도면 판결을 미루고, 자신이 재기할 때까지 지원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아둔한 황제를 움직여서 저를 지지해줄 새로운 세력을 만든 후, 그걸 바탕으로 카르한을 끌어내린다면…….
“그 전에 어떻게 여길 나가지?”
계획이고 뭐고 일단 나가는 게 먼저였다. 그러나 문은 지나치게 튼튼했으며, 창문은 턱없이 작았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고용인은 제 말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블레어드는 고용인을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쪽을 공략하는 편이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미약한 햇빛이 창고 안까지 길게 늘어졌을 즈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용인이 점심 식사를 가지고 온 것이다.
“잠깐!”
블레어드는 고용인이 떠나기 전에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나를 여기서 꺼내주면 10만 크로엘을 주겠다!”
블레어드의 외침이 창고 안을 가득 울렸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해진 블레어드가 문 앞에 다가갔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 상대가 말했다.
“준비가 필요하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상대의 대답에 블레어드는 희열에 떨었다. 역시 하늘은 저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블레어드는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 밖에 기척이 느껴지자 블레어드의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빗장이 내려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절대 움직이지 않던 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햇빛이 눈꺼풀을 찔러왔다. 블레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창고 밖에는 고용인 한 명만 서 있었다.
“말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고맙다.”
블레어드는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한 후 어색하게 말에 올라탔다. 평소에 마차를 타고 다녔더니 익숙하지 않았다. 거기다 늘 호위를 여럿 대동하고 다녔기에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낯설기만 했다.
곧바로 공작 저택을 벗어난 블레어드는 황궁을 향해 달렸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함을 느꼈다. 거리에는 푸른색 깃발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푸른색은 황실을 상징하는 색이었기에, 황실에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황궁에 도착한 블레어드는 신분을 밝힌 후, 황제궁으로 향했다. 블레어드는 황제궁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이 알현을 요청한다고 전해라.”
병사들은 무척 이상하다는 듯 블레어드를 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장이 직접 나왔다.
“황궁 출입을 허한 적이 없으니 속히 돌아가시라는 명입니다.”
“……뭐?”
블레어드는 잘못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잘못 전달된 게 아닙니까?”
블레어드가 시종장에게 따지자, 그가 귀찮다는 시선을 보냈다. 시종장의 태도에 블레어드는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전에 허락 받았습니다. 언제든 황궁을 출입해도 좋다고…….”
“그건 전대 황제께서 약조하신 것이겠지요.”
“……전대 황제라니.”
블레어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얼굴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어디 산골이라도 틀어박혔다 왔느냐는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궁의 주인이 바뀌었단 말입니다.”
블레어드는 아까 길에서 봤던 푸른색 깃발을 떠올렸다. 설마 그게…….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현실을 부정한 블레어드는 시종장을 밀쳐냈다. 그러자 병사들이 그를 향해 창을 들이밀었다. 블레어드가 반사적으로 움찔하자, 시종장이 비웃음을 띤 채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에 불복한다면 무력으로 내쫓겠습니다.”
어깨를 떨던 블레어드는 결국 한 걸음 물러섰다. 소란을 일으켰다간 에반테온 가문 측에서 알게 될 것이다.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블레어드가 말했다.
“제가 왔다는 건 비밀로 해주십시오.”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블레어드는 결국 뒤돌아서서 황궁을 빠져나왔다. 번화가까지 흘러 들어온 블레어드는 말을 맡긴 후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야 하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처럼 막막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지라, 당장 머무를 곳조차 구할 수 없었다. 믿을 만한 지인이 누가 있더라…….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블레어드는 우뚝 멈춰 섰다. 어느덧 막다른 골목까지 걸어 들어온 것이다.
골목은 유독 조용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만이 전부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에 블레어드는 다시 뒤돌아섰다.
“!”
뭔가가 얼굴에 씌워지더니, 순식간에 주위가 깜깜해졌다. 비명을 지르려는 그때, 엄청난 힘이 복부를 강타했다.
신음조차 뱉지 못하고 몸이 고꾸라졌다. 누군가가 억센 손으로 블레어드를 바닥에 엎어뜨리고 밧줄 같은 것으로 온몸을 결박했다. 그리고는 거칠게 그를 끌어당겨 들쳐 업었다.
블레어드는 공포에 질려 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어딘가에 내던져졌다. 탁, 뭔가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았고 욱신거리는 통증과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한껏 예민해진 청각은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까지 전부 담아냈다.
“누, 누구야.”
블레어드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이 벗겨졌다. 시야가 트이더니 맞은편에 앉은 중년 남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블레어드가 멍하니 있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전혀 기억에 없었다. 얼굴을 봐도 낯설기만 했다. 블레어드는 애써 의연한 척 고개를 들고 말했다.
“목적이 뭐야. 카르한이 보낸 거라면…….”
“질문에 대답을 해야지.”
남자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독기 서린 눈동자를 본 블레어드는 바짝 굳어졌다. 분명 평범한 중년 남자일 뿐인데 저 눈빛만큼은 절대 평범하다 볼 수 없었다.
“…….”
블레어드가 침묵하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손을 쓰긴 했지만, 추락이 빠르더군.”
“!”
블레어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현장에서 도망친다 한들, 끝까지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블레어드는 곧바로 불법 모임이 적발되었던 날을 떠올렸다. 현장에서 도망쳤지만, 검은 손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정체 모를 누군가는 블레어드의 모든 죄를 낱낱이 밝혔으며, 소문이 사그라질 법 하면 꾸준히 장작을 넣었다. 설마…… 뒤에서 계속 들쑤시던 자가…….
무심히 블레어드를 응시하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쁜 짓을 저지르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있지.”
뜬금없는 말에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 아들도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니니, 지옥에 있을 테고.”
그가 아들타령을 하자 블레어드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굳게 다물었다.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설마…….
“이제 기억나나?”
“……엘리오드, 백작?”
블레어드가 더듬거리며 이름을 확인하자 백작이 입꼬리를 당겼다.
“그래, 네가 죽인 그 애의 아비다.”
속삭임이 뱀처럼 블레어드를 휘감았다. 뒤이어 지독한 한기가 밀려왔다. 온몸이 떨리며, 이가 딱딱 부딪쳤다.
“지금쯤 그 애가 날 기다리고 있겠지.”
엘리오드 백작이 단도 하나를 꺼내들었다. 잘 벼린 칼날이 블레어드에게 향했다.
“널 죽이고 이제 아들을 만나러 가겠다.”
***
이슈타르 제국은 갑작스럽게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황실 측은 황제가 돌연히 쓰러진 후 계속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알렸다. 황제가 도무지 정사를 볼 수 없는 상태라, 황태자가 황위를 승계한다고 공표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고위 귀족들 외에도, 귀족들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황태자는 이미 황제의 세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황제를 끌어내릴 시기만 노리고 있었고, 이번에 카르한이 공작위를 계승하면서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국 역사 속에서 몇 번의 반란이 있었으나, 피를 보지 않은 적은 없었다.
두 세력이 충돌하면 그만큼의 희생이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도 죽지 않고 황위를 가져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황위에 오른 황태자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전 황제의 흔적을 지우고, 주요직에 제 사람을 올렸다.
원래라면 화려한 대관식을 치렀어야 했으나, 간소한 절차만 따르기로 매듭지었다. 대신 대관식에 들어갈 비용과 황제가 고혈을 짜서 모아둔 돈은 전부 제국민에게 베풀었다.
전 황제의 폭정에 지쳐 있던 제국민은 새로운 황제를 환영했다. 여론이 새로운 황제 쪽으로 치우쳐지자, 마지못해서 황태자 쪽으로 뒤돌아섰던 귀족들마저 충성을 맹세했다.
대강 상황 정리가 끝난 후, 황실은 블로든 가문에 직접 사과해왔다. 그 과정에 블로든이 세금을 더 냈다는 것이 알려지고, 탈세 의혹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카르한, 준비 다 되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차림을 한 일리아가 물었다.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는 가만히 그를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일리아는 작년의 카르한을 떠올렸다. 만날 때마다 어두운 색 옷을 입고 나와서, 보다 못해 옷가게로 끌고 갔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검은 옷을 입어도 그때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분위기와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져서 그런 듯했다.
“그럼 출발해요.”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올라타, 에반테온 공작저로 향했다. 겨울임에도 유독 화창한 날씨였다. 일리아는 오늘과 어울리지 않는 날씨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공작의 장례식이었으니 말이다.
에반테온 공작저는 발 디딜 틈 없이 조문객으로 가득했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와 카르한은 쏟아지는 인사를 받아주었다.
“연회 이후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제 이름은…….”
고인의 명복을 빌기보다는 카르한에게 한 번이라도 눈도장을 찍기 위해 온 조문객이 많았다. 카르한은 적당히 인사를 받아준 후, 후원으로 걸음 했다. 선대 에반테온 공작의 장례식은 후원에서 치를 예정이었다.
화창한 날씨와 달리, 주위는 엄숙한 분위기였다. 온통 조용한 가운데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 석관이 놓인 단상이 있었다.
석관 주위에는 백합이 수북하게 쌓인 채였다. 이미 많은 조문객들이 왔다 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손꼽혔던 권력자의 장례식치고는 무척 간소한 편이었다.
카르한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친척들이나 원로도 몇몇 보였으나, 레베타는 없었다. 다시는 카르한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로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총회가 끝나고 레베타는 친가에 내려갔다고 들었다. 그녀의 친가는 수도에서 먼 동쪽이니, 굳이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면 평생 마주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런 이유로 결국 공작의 직계 가족 중, 카르한만이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다.
“받아요.”
일리아가 백합 한 송이를 내밀었다. 백합을 받아든 카르한은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카르한은 백합을 손에 쥔 채 석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텐데.”
희미한 혼잣말이 흩어졌다. 누가 보아도 선대 에반테온 공작은 최악의 아버지였다. 가정에 관심조차 없던 그는 오직 제게 이득이 되는지만 따졌다.
공작과의 추억을 더듬어봤지만, 빈약한 기억뿐이었다. 함께했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곱씹을 것도 없었다. 카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백합을 내려놓았다.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다음 생에는, 타인으로 만나면 좋겠습니다.
카르한은 마지막 말을 삼킨 채 뒤돌아섰다. 기다리고 있던 일리아가 관 앞으로 걸어갔다. 카르한은 가만히 일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