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5)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거렸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공자께서는 오지 않으셨네요.”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말이…….”
작은 목소리였지만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 카르한의 귀에도 들려왔다. 그들의 말처럼 총회 이후로 블레어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카르한 또한 블레어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고용인을 시켜 창고 문을 열어주게 하였으니……, 그 뒤는 엘리오드 백작이 알아서 처리했을 것이다.
“카르한.”
일리아가 자그맣게 그를 불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요.”
카르한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문객들의 헌화가 마무리 되는 동안, 공작의 애인은 끝내 오지 않았다. 공작은 그녀를 위해 가족을 외면했지만, 결국 그뿐인 관계였던 것이다.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헌화가 끝나자 추도사가 있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손을 맞잡은 채 추도사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관을 안치하고 나서야 장례식이 모두 끝이 났다.
두 사람은 곧장 울적한 기운이 감도는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평소와 달리 일리아도 말이 없었다. 창가에 고개를 기댄 카르한은 공작저를 눈에 담았다.
왠지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에반테온 저택에 남은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남보다 못한 사이긴 했으나, 혈육을 전부 떠나보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진 않았다.
어느새 마차는 에반테온 공작저를 벗어났다. 한참을 달린 끝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블로든 백작 저택이 보이자, 축 가라앉은 기분이 점점 나아졌다. 장소가 주는 위안이었다.
현관 앞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비올레와 클리프가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어서 와요.”
한때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인사였다. 서서히 미소를 지은 카르한이 대답했다.
“다녀왔습니다.”
이제 그가 있을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
세무 조사 결과가 나온 후, 일리아는 한동안 미뤄두었던 업무를 순차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온천 사업은 건물을 올리는 단계였기에 내년쯤이면 본관이 완공될 듯했다. 개장 후에 건물을 증축할 계획이었다. 장난감 사업은 순탄하게 잘 흘러가, 이번 기회에 규모를 확장했다. 내년쯤에는 외국에도 수출할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일리아는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날 때 설립했던 유통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물류 업체를 증설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최종 목표는 산간 지역까지 물건을 운송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어느 지역에 살든 편의를 누릴 수 있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블로든 가문은 다시 금을 시장에 내놓았다. 시세는 이전과 엇비슷하게 맞추어 서서히 양을 늘려갔다. 그사이 제국에는 금이 씨가 말랐기에 사재기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금값 안정을 위해, 황실 측에서 신전을 허물어 금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산사태로 매몰된 광산도 다시 운영을 시작했다.
사치세도 없애버리니 외국으로 밀수출된 금이 돌아오면서 더 이상 금이 부족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좋아.”
서류 하단에 서명을 적은 후 펜을 내려놓았다. 일리아는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중요한 일이 있었다.
집무실을 빠져나온 일리아는 회의실로 쓰이는 홀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이미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가 앉아서 일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니?”
“여기에 앉으렴.”
일리아가 빈자리에 앉자, 헤인리가 헛기침을 내뱉은 후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블로든 가문 회의가 있겠습니다.”
헤인리는 바퀴 달린 코르크나무 판 앞에 서서, 종이 한 장을 붙였다.
“오늘의 주제는…… 소공, 아니 카르한의 생일 파티입니다.”
소공자라고 부르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헤인리가 어색하게 정정했다.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던 일리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거에 카르한과 약속한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 생일 파티는 거창하게 할 거예요.
-얼마나요?
-모두가 축하해줄 만큼.
그때 일리아는 수도 사람들 모두가 카르한의 생일을 알게 될 정도로 크게 열겠다고 다짐했다. 평생 제대로 된 생일 축하를 받아본 적 없는 그를 위해 가장 행복한 날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들 뭐 해줄지 생각해보셨어요?”
일리아가 가족들을 보며 물었다.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가 빠듯해서 공문을 돌린다고 애먹었단다.”
비올레가 장난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옆에 앉아 있던 클리프가 가볍게 턱을 문질렀다.
“그나저나 생일 선물이 고민이구나. 평범한 건 주고 싶지 않은데.”
“건물 같은 건 이제 식상하니까요.”
헤인리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정해 봐요. 그러려고 모였으니까요.”
일리아의 말에 클리프와 비올레가 나란히 의견을 냈다.
“그래서 포도 농장을 선물할까 싶은데.”
“나는 단독 수련장을 지어줄까 생각 중이란다.”
헤인리는 두 사람의 의견을 적어서 판에 붙이며 말했다.
“제 생각엔 당장 쓸 수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뭐지?”
“업무에 도움이 되는 실무서적이나…….”
비올레와 클리프는 헤인리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던 일리아는 미리 생각해둔 의견을 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일리아는 선물을 고른 이유까지 곁들어서 그들을 설득했다. 일리아의 말이 끝났을 때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좋은 생각이구나.”
“저 재미없는 놈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은데.”
클리프의 타박에도 헤인리는 전혀 타격 받지 않은 얼굴로 일리아에게 속삭였다.
“네 의견이 제일 괜찮은 것 같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모두의 동의를 얻은 일리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윽고 주제는 생일날 어떤 케이크를 올릴지, 어디서 파티를 열 것인지로 바뀌었다. 깜짝 파티지만 아주 화려하고 크게 열어줄 계획이었다.
한참 후, 회의가 끝나고 클리프와 헤인리가 먼저 자리를 떴다.
“어머니.”
일리아는 막 나가려는 비올레를 붙잡았다. 계속 고민했지만, 역시 같은 여자인 어머니께 물어보는 게 좋을 듯했다.
“역시 제가 따로 선물을 챙겨주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비올레가 무척 간단하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생일이 끝날 때까지 곁에 있어주렴.”
눈만 깜빡이는 일리아를 보며 비올레가 미소 지었다.
“그게 최고의 선물 아니겠니.”
***
어느덧 겨울 끝자락이 왔다. 여명이 점점 밝아오더니, 하루의 가장 이른 햇살이 커다란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햇살이 눈꺼풀 위를 덮어오자, 카르한은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깨워주지 않아도 이 시간쯤이면 절로 눈이 뜨였다.
카르한은 겨울잠을 자고 일어나는 짐승처럼 서서히 몸을 폈다. 거대한 몸이 쭉쭉 뻗어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한은 잠시 창문 앞에 섰다. 방 안은 따뜻했지만 창문 틈으로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창밖을 내다보니 정원의 메마른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미약한 싹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곧 있으면 봄이 올 듯싶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났을 즈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용인은 세숫물과 신문, 따뜻한 수프 한 접시를 내려놓은 후 물러났다. 카르한은 간단하게 세수를 한 후에 신문을 집어 들었다.
신문을 펴기도 전에, 그의 몸이 멈칫했다. 카르한은 혹시 꿈을 꾸나 싶은 얼굴로 눈가를 비볐다.
[축! 에반테온 공작 탄신일]신문 1면이 온통 카르한의 생일을 축하하는 문구로 도배되어 있었다.
카르한은 너무 놀란 나머지 신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잠깐 굳어져 있던 카르한은 상단에 적힌 날짜를 확인했다. 왠지 낯익은 날짜가 박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제 생일이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생일을 챙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카르한은 심각한 얼굴로 신문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신문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그것도 가장 중요한 소식을 싣는다는 1면을…….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들어왔다.
“카르한! 생일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쏟아지는 인사에 카르한은 잠시 정신이 없었다. 느릿하게 눈만 깜빡이자, 일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옷 갈아입고 생일 파티 하러 가요.”
일리아의 손에 붙잡힌 카르한은 곧바로 거울 앞에 앉혀졌다. 순식간에 옷이 입혀지고 머리 손질까지 끝났다.
거울 속에 비친 카르한은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였다. 누가 봐도 힘을 잔뜩 준 모양새라, 카르한은 어색한 듯 뒷목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일리아가 손뼉을 쳤다.
“자, 나가요.”
어어, 하는 사이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함께 현관으로 나왔다. 현관에는 천장이 없는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대기해 있던 테시온이 히죽히죽 웃었다. 테시온은 이 일을 전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르한 님. 드디어 둘이서 축하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군요.”
매년 카르한의 생일 때마다 속상해하던 테시온은 소원이라도 이룬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카르한은 보석과 꽃으로 장식한 마차에 올랐다. 일리아가 그 옆에 앉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다른 마차를 이용했다. 카르한은 설렘과 불안함을 담아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대관해둔 연회장이 있어요. 저택에서 하자니 뭔가 아쉬워서요.”
단단히 작정한 것 같은데, 지금까지 몰랐다니. 지금껏 행사가 있을 때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벌이는 규모를 옆에서 봐 왔던 카르한은 긴장하고 말았다.
마차는 어느덧 저택을 빠져나와, 번화가로 향했다. 그러자 흰 제복을 입고 붉은색 모자를 쓴 관악대가 나타났다. 관악대는 마차 앞에서 걸음을 일정하게 맞춰 행진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규모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번화가로 나오니, 거리에 사람이 가득했다. 그들은 마차가 지나가는 길마다 꽃가루를 뿌리며 환영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쏟아지는 함성에 카르한은 정신이 없었다. 공휴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나 의아해하는데, 일리아가 대답해주었다.
“블로든 상단 직원들은 오늘 휴무예요.”
“예……?”
“어머니께서 당신 생일이라고 전 직원에게 휴가를 주셨거든요.”
카르한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행사도 여러 개 열어뒀어요. 거의 축제 규모니까 다들 구경하러 나온 거죠.”
카르한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마차는 아주 천천히 번화가를 달렸다. 인파는 점점 늘어났고, 환호성도 더욱 커져갔다. 생일 파티가 아니라 승전식이라도 치르는 모양새였다.
정작 공작 계승식은 간소하게 치렀는데, 생일은 황제의 탄신일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정말로 일리아의 계획처럼 모두가 카르한의 생일을 알게 될 것 같았다.
하늘을 찌르는 카르한의 인기에 일리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요즘 들어 카르한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를 둘러싼 나쁜 소문이 걷히며,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식량 부족으로 굶고 있던 제국민을 구휼한 것. 혈혈단신으로 야만족과 평화 협정을 이루어낸 것. 그리고 방탕하고 도덕적이지 못한 장남을 밀어내고 공작이 된 카르한은 권선징악을 좋아하는 제국민들에게 딱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한참 번화가를 가로지를 때였다. 펄럭, 하고 종이 한 장이 마차 안으로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종이를 잡은 카르한은 그림을 확인하고 멈칫했다. 고고하게 턱을 치켜든 자신의 얼굴이 아주 멋들어지게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는…….
[겨울 끝자락에 태어난 카르한 에반테온, 생일 축하합니다.]유려한 필체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판화 장인에게 맡겼어요. 직접 그린 것 같죠?”
잘 나오지 않았냐며 일리아가 슬쩍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멀리 보이는 벽에도 똑같은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신문 안 보는 사람도 많잖아요.”
“…….”
“나중에 수거할 거니 쓰레기는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자, 일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부담스러워요?”
카르한은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축하 받는 게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렇습니다.”
제게는 과분할 정도였다. 가족들이 축하해주기는커녕, 주변 사람들 모두 카르한의 생일을 몰랐다. 그나마 테시온이 생일을 챙겨주긴 했지만, 둘이서 파티를 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간질거리는 손끝만 매만지던 카르한은 일리아를 마주한 채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제 생애 최고의 생일인 것 같습니다.”
“그건 곤란한데요. 내년에는 더 최고로 해줄 거거든요.”
일리아의 대답에 카르한은 마주 웃고 말았다. 마차는 어느덧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사교장으로 쓰였으나, 오늘만큼은 카르한을 위한 생일 파티가 열릴 것이다.
“각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또다시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평생 들을 축하를 전부 듣는 것 같았다. 카르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많았다. 카르한이 도움을 주었던 이부터 그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카르한은 하나하나 인사를 받아주다가 일리아의 손에 끌려 나왔다.
“케이크 잘라야죠.”
이윽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케이크가 등장했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만들었는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카르한의 손에는 케이크용 칼이 아닌, 연습용 목검 크기의 칼이 들렸다.
“실력을 보여줘요.”
비올레의 말에 카르한은 머뭇거리다가 한 치의 오차 없이 반듯하게 케이크를 잘랐다.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숨만 쉬어도 칭찬 받는 것 같아서, 카르한의 귓불이 붉어졌다.
그러고 나서 가벼운 연회가 열렸다. 말만 가벼운 연회지, 황궁 연회보다 더 화려하고 볼거리가 넘쳐났다. 가장 먼저 비올레의 지도하에 블로든 가문 기사들이 절도 있는 검술을 선보였다.
클리프는 이국에서 자라는 수목을 곳곳에 비치해두었다. 간단한 사회를 맡은 헤인리는 연회가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진행을 보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생일 파티가 끝나고, 카르한과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은 산처럼 쌓인 상자를 보고 기겁했다.
“당신 앞으로 온 선물인가 봐요.”
일리아가 정원을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마차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아직도 오고 있네요.”
마차가 줄줄이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상자가 끝없이 증식하는데, 유독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카르한에게 다가왔다. 사내가 카르한에게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카르한이 얼떨결에 상자를 받자, 그가 말을 이었다.
“폐하의 전언입니다. 공작, 생일 파티에 참석 못 해서 미안합니다. 다음번에는 꼭 참석하겠습니다.”
황제 또한 카르한의 생일 파티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황제가 보낸 대리인이 떠나고, 카르한은 산처럼 쌓인 선물을 바라보았다. 상자로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많아서 다 못 쓸 것 같습니다.”
“그럼 기부해요. 감사 인사를 보내면서 더 좋은 곳에 쓰겠다고 양해를 구하면 될 것 같아요.”
어차피 보내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 거라고, 일리아가 조언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도 선물이 있어요.”
“선물이요?”
생일 파티도 엄청났는데 또 무엇을 준비했단 말인가. 작년에 일리아가 받은 생일 선물을 떠올린 카르한은 어깨를 떨었다.
카르한은 새로 옷을 갈아입은 후 일리아를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그러자 미리 도착해 있던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보였다. 말쑥한 차림새를 한 채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카르한은 뒤늦게 장의자를 발견했다.
“?”
후원에 웬 장의자란 말인가.
“지금 바로 시작할 거예요.”
비올레의 말에 카르한은 아직도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 여기로 와요.”
점점 미궁에 빠져드는 사이, 비올레와 클리프가 신속하게 장의자에 앉았다. 그들의 왼편에 헤인리가 섰고, 일리아는 카르한과 팔짱을 낀 채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 배치가 끝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네사가 등장했다.
“완성까지 한 달은 걸릴 것 같아요. 그럼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네사가 꾸벅 인사를 건네 왔다. 카르한은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닫고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옅은 미소를 띤 일리아가 속삭였다.
“가족 초상화를 그릴 거예요.”
“…….”
“본관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려고요.”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잘게 떨었다. 이전에 일리아가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 가족들이 그려진 초상화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공작부부와 블레어드가 그려진 초상화 속에는 카르한만 존재하지 않았다. 버려진 존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달랐다. 그걸 일리아에게 보여준 것이 서럽고 부끄러웠다.
카르한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손등으로 가볍게 눌렀다. 정말로 카르한에게는 큰 의미였고, 최고의 선물이었다.
“앞을 봐주세요.”
바네사의 요구에 모두가 정면을 응시했다. 어색하게 서 있던 카르한의 몸이 일리아 쪽으로 살짝 허물어졌다.
“좋아요. 그럼 이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어주세요.”
카르한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석양이 지기 시작하자 정원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겨울 끝자락이긴 해도 밤은 쌀쌀했기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이만하기로 했다.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두세 시간씩 초상화 작업을 진행하기로 매듭지었다. 실물을 옮겨 그리는 것 정도는 금방 끝낼 수 있다며, 바네사는 자신만만해 했다.
카르한과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저택으로 들어왔다. 이제부터 블로든 저택에서 뒤풀이 파티를 할 시간이었다.
규모는 낮보다 작아졌지만, 그 이상으로 즐거웠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한 차림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카르한 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술에 취한 테시온은 했던 말을 다섯 번째 반복 중이었다. 처음 카르한을 만났던 것으로 시작해서 마침내 에반테온 공작이 되기까지, 그 역사를 되풀이했다.
테시온은 자신이 몇 년 동안 곁을 지켜온 카르한이 공작위에 올랐다는 것이 무척 감격스러운 듯했다. 열심히 떠들던 테시온이 잔을 쥔 채 울먹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축하해주는 사람도 많고…… 저는 이제 죽어도 좋습니다.”
“죽다니!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똑같이 술에 취한 프란체가 소리쳤다.
“두 분이 결혼하시는 걸 봐야죠!”
“……!”
테시온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입을 벌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말렉은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 바람 쐬러 나갑시다.”
산책하면서 술 좀 깨고 들어오자며, 말렉이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그들을 웃으면서 지켜보던 일리아는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멈칫했다.
이제 원하던 목표를 이루었으니, 슬슬 결혼을 생각해볼 때였다. 하지만 일리아와 카르한은 각자 바쁘게 지내느라, 둘이서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다.
‘청혼도 내가 해야 하나.’
어떻게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를 꺼내볼지 고민하던 일리아는 클리프와 대화 중인 카르한에게 시선을 보냈다. 클리프가 뭐라 말하고, 카르한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슬그머니 그쪽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