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7)
외전 1장
외전 2장
외전 3장
외전 4장
외전 1장
녹음이 우거진 정원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있으면 비가 올 것 같았다.
일과를 마친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후원으로 향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라벤더 꽃밭은 바람을 따라 물결치고 있었다.
카르한은 꽃밭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이 라벤더 꽃밭은 카르한이 직접 조성했다. 공작저에 일리아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하나하나 심은 것이다. 클리프가 모종을 구해주고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카르한의 손길이 담겨 있었다.
카르한은 혹시 모를 폭우를 대비해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다음 후원을 빠져나왔다. 날이 흐리니, 비가 오기 전에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마차 속도가 줄어들자, 빗방울이 천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물방울이 겹겹이 흘러내리는 창문을 응시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회색빛이었다. 우중충하게 젖은 건물, 웅덩이가 생긴 길바닥에는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파문이 일어났다.
평소보다 한산한 거리는 우산 든 행인들만 서둘러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비오는 풍경을 바라보던 카르한은 마침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잠깐. 마차를 세워라.”
카르한의 말에 마차가 멈춰 섰다. 테시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서.”
테시온은 더 묻지 않고, 우산을 챙겼다.
“혼자 갔다 올 테니 여기 있어라.”
“예? 하지만…….”
“둘 다 젖을 필요는 없으니까.”
테시온에게서 우산을 받은 카르한이 홀로 마차에서 내렸다. 어느새 빗방울은 조금씩 굵어지더니 빗줄기가 되었다. 카르한은 골목 안쪽에 위치한 작은 가게로 들어섰다. 얼마 전에 일리아에게 줄 선물을 주문해두었는데, 지금 가져갈 수 있는지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마침 오늘 오전에 들어왔습니다.”
가게 주인은 잘되었다며, 곧바로 물건을 포장해주었다. 주문해둔 물건을 품에 안게 된 카르한은 행복한 얼굴로 가게를 나섰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아까는 보지 못한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처마 밑에 놓여 있었으나 바람이 부는 탓에 상자는 반쯤 젖어 있었다. 카르한은 그대로 지나치려고 했다.
그때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멈춰 선 카르한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살짝 열린 상자 속에는 작고 하얀 강아지가 앉아 있었다.
카르한은 우산을 쥔 채 바짝 굳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그는 난감한 얼굴로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추운지 낑낑거리던 강아지는 카르한과 눈이 마주치자 그렁그렁한 시선을 보냈다. 카르한은 우산을 강아지 쪽으로 기울여준 채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고민하던 카르한은 뒤늦게 ‘주워주세요.’라고 적힌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을 보자 마음이 쓰라렸다.
“분명 너도 가족이 있었을 텐데.”
버려졌구나. 카르한은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켰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 해도 그 말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카르한은 강아지가 재채기하자, 저도 모르게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미 눈에 띈 이상 모른 체하기는 글렀다. 카르한은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골목을 빠져나왔다.
***
일리아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정원은 찻물을 끼얹은 것처럼 희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수채화처럼 흐릿한 빛깔만 남아서 화창한 날과는 대조되었다.
일리아는 비 내리는 풍경을 한참 동안 감상했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것도, 운치 있는 정원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조용히 사색을 즐기던 일리아는 시계를 힐끗 확인했다. 슬슬 카르한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일리아는 얇은 숄 한 장을 걸친 채 방을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막 현관 안으로 들어오는 카르한이 보였다. 일리아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갔다.
“카르한!”
이름이 불리자, 카르한이 그대로 멈추었다. 평소 같으면 웃으면서 일리아에게 다가왔을 텐데, 허리를 살짝 굽힌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이 수상쩍었다. 일리아는 가만히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그게.”
카르한이 변명하려는 그때, 그의 품 안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꼬물꼬물 튀어나왔다. 조그마한 새끼 강아지를 품에 안은 카르한이 야단맞기 직전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일리아……. 밖에서 비를 맞고 있길래 데리고 와버렸습니다.”
일리아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아니, 이렇게나 착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걱정과는 별개로 거대한 덩치와 비교될 정도로 작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 카르한은 무척 귀여웠다. 눈치 보던 카르한이 말을 덧붙였다.
“내일 제가 공작저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뭐 있어요. 여기서 키워요.”
일리아가 흔쾌히 승낙하자, 카르한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방에 들어온 일리아와 카르한은 비단 쿠션에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카르한의 품이 따끈따끈하고 좋았는지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금방 쿠션에 적응하고 넙죽 엎드렸다.
두 사람은 몸을 낮춘 채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작은 동물은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저 신기했다. 강아지가 하품하자, 작은 혓바닥이 보였다.
“귀여워…….”
일리아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겨우 시선을 뗀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데려온 거예요?”
“우연히 상자 속에 담겨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버려진 것 같았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뗀 일리아가 카르한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잘 데려왔어요. 우리가 강아지 한 마리쯤 못 먹여 살리겠어요?”
이전 주인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 돌봐주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한 일리아는 곧바로 수의사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블로든 가문의 전속 수의사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수의사는 강아지를 이리저리 살핀 후 진단을 내렸다.
“제가 보기엔 생후 8개월 이상 된 것 같습니다. 덩치가 작은 것은 못 먹어서 그런 모양이고……. 지쳐서 기운이 없는 거니, 잘 먹고 푹 쉬어주면 금방 뛰어다닐 겁니다.”
수의사는 주의할 사항을 전부 말해준 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가씨……. 사냥개들 간식을 좀 줄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다들 뚱뚱해서 이제 토끼도 못 잡겠습니다.”
블로든 가문은 사냥개를 몇 마리 들였지만, 정작 사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사냥개들은 호의호식하며 날이 갈수록 살이 쪘다. 블로든 가문의 복지는 사냥개에게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속으로 반성한 일리아는 수의사에게 앞으로 간식을 줄이도록 하겠다며 약속했다. 수의사가 물러나고, 뒤이어 고용인들이 꼬질꼬질한 강아지를 데려다 깨끗하게 씻겼다. 방으로 돌아와 먹이까지 먹은 강아지는 통통해진 배를 바닥에 붙인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 키우고 싶지만, 털에 예민한 고용인도 있을 테니…….”
일리아는 강아지에게서 눈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이내 결심했다는 얼굴로 카르한에게 말했다.
“정원에 강아지 집을 지어줘야겠어요.”
작은 개집을 생각한 카르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우면 무서울 테니까 천장에 샹들리에도 달아주고, 식당이랑 장난감을 모아둔 방도 만들고…….”
“예?”
카르한은 자신이 상상했던 개집과 거리가 무척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너무 크지 않을까요.”
카르한이 조심스레 의견을 말했다.
“산책로도 만들어주려고 했는데요?”
결국 카르한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리아 또한 블로든 가문의 일원이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다른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강아지를 돌보았다. 둘이서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든 강아지를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저녁 무렵,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돌아왔다.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는 강아지를 들였다는 일리아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정말이지, 둘이 똑같구나.”
비올레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 너는 사람도 데리고 오더니…….”
둘 다 정이 많아서 그렇다며 클리프가 허허 웃었다. 가족들은 강아지를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잘 키워보라며 응원해주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저녁을 먹은 후 또다시 함께 방에 틀어박혔다.
“이제 이름을 지어줘야죠.”
둘은 어떤 이름을 지어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온갖 이름이 나온 후에 결국 포포라고 짓기로 했다. 빗방울 소리를 뜻하는 고대어였다. 비 오는 날에 찾아왔으니 나름 의미도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포포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사방을 뛰어다녔다. 어찌나 기운이 넘치는지 혼자서 호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일리아는 수의사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최고급 간식과 장난감을 사들였다.
그 소식이 퍼지자, 온갖 강아지 용품이 블로든 가문으로 배달되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고작 며칠 사이, 포포는 길에 버려진 강아지가 아닌 제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강아지가 되어버렸다.
일리아와 카르한의 애정을 듬뿍 받은 포포는 두 사람을 가장 잘 따랐다. 카르한이 퇴근할 때가 되면 둘이서 함께 현관으로 마중 나가곤 했다.
“먹여주고 재워준 값 해야 한다?”
오전 업무를 끝낸 후, 잠깐 포포와 놀아주던 일리아가 농담 삼아 말했다. 포포는 그저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일리아는 오후 업무를 보기 위해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인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아가씨! 포포가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아주 쑥대밭이 되었다며 고용인이 울상을 지었다. 일리아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밭이라도 헤집었나 싶어서,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들어선 일리아는 구덩이가 여러 개 파인 정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기운도 넘치지.’
며칠 동안 잘 먹이고 잘 키운 것 같아서 흐뭇해졌다. 그래도 정원사가 고생하지 않게, 교육을 해둬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뭐지?”
일리아는 구덩이 속에 묻혀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표면이 매끄러웠다. 그때 포포가 달려와 다시 구덩이 속으로 쏙 들어갔다. 포포가 앞발로 흙을 좀 더 파자, 도자기의 표면이 드러났다.
궁금해진 일리아는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감수하고 흙을 털어냈다. 도자기를 꺼내든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처음 보는 도자기인데 묘하게 익숙했다.
샅샅이 살피던 일리아는 도자기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입을 벌렸다. 역사책에서 본 적이 있는 문양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준 값 해야 한다?
일리아는 자신의 말이 씨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블로든 저택 부지에 매장된 유물이 터진 것이다.
***
블로든 저택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 개도 아니고 다량의 유물이 한꺼번에 발굴된 것이다.
일리아는 과거에 카르한을 가르쳤던 아카데미 교수, 메즈라 제니어스를 불러들였다. 세기의 천재답게 그는 고고학과 대륙 역사에도 지식이 해박했다.
휴가까지 내고 단걸음에 달려온 메즈라는 방에 틀어박혀서 유물을 확인했다. 한참 지나서 방을 나온 메즈라가 흥분에 가득 찬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대박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저택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일리아가 놀라서 쳐다보자, 겨우 침착함을 되찾은 메즈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작년에 저는 아티카 고대 왕국의 터가 이슈타르 제국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아티카요? 멸망한 지 천 년도 넘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가설을 받쳐줄 만한 증거가 부족해서 논문 발표를 접었는데…….”
메즈라가 몸을 바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영애께서 보여주신 물건은 고서에 적힌 유물과 전부 일치합니다.”
메즈라는 아마도 블로든 저택 정원에 왕궁 터가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과거가 묻혀 있는 땅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일리아가 흔쾌히 말했다.
“논문 발표하실 때까지 유물을 빌려드릴게요.”
“……예?”
메즈라가 놀라서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는 유물이었지만, 일리아에게는 딱히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메즈라에게 받은 도움도 있고, 저보다 더 가치 있게 쓸 것 같았다. 그의 가설이 인정받는다면 제국 학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헉, 이 귀한 것을……!”
메즈라는 감동한 나머지, 나중에 꼭 보은하겠다고 약조한 후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그날 일리아는 포포에게 포상으로 간식을 듬뿍 주었다. 어쩌면 포포가 유물을 더 많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박물관이라도 하나 지어야겠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 커튼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눈부셔서,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늦잠 잤다.”
일리아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세수하고 옷만 갈아입은 후 곧장 카르한의 침실로 향했다.
“카르한, 준비 다 되었어요?”
“지금 막 다 했습니다.”
마지막 단추를 잠근 카르한이 대답했다.
“좀 더 자지 그랬습니까.”
“중요한 날이잖아요.”
오늘만큼은 배웅해주고 싶었다고 일리아가 속삭였다. 채비를 마친 두 사람은 정답게 침실을 나섰다.
현관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선 카르한은 잠시 벽에 걸린 초상화를 응시했다. 바네사가 그린 가족 초상화로,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카르한이 다정하게 담겨 있었다.
초상화가 완성되자마자 현관에서 가장 잘 보이는 이 자리에 걸어두었다. 저택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바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림 속의 카르한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어색함 하나 없이 환히 웃고 있었다. 카르한은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미소 지은 채 걸음을 옮겼다. 현관 밖으로 나오자, 먼저 도착해 있던 헤인리가 일리아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리아, 좋은 아침이구나.”
일리아는 헤인리와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절반은 나이 차이 많은 동생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그럼 둘이 이야기 나누렴.”
헤인리가 먼저 마차에 올라탄 채 카르한을 기다렸다. 가끔 두 사람이 함께 출근할 때가 있었는데, 바로 황궁에서 국무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일리아는 얌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카르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국무회의가 있을 때마다 카르한이 걱정되었다.
이제는 거절도 곧잘 한다지만, 그래도 착한 본성이 어딜 가는 건 아니었다. 중앙 귀족들이 일부러 막 정계에 입문한 귀족의 기를 꺾어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들어서 더욱 걱정이었다.
“혹시 누가 헛소리하면 한번 노려보고요.”
일리아가 흘겨보는 시늉을 해 보이자, 카르한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웃던 카르한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자, 일리아는 카르한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잘 다녀와요.”
“성공하고 오겠습니다.”
일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춘 카르한이 속삭였다. 마침내 카르한과 헤인리가 탄 마차가 출발했다. 손을 흔들어주던 일리아는 마차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천천히 팔을 내렸다. 새삼 날짜를 계산하던 일리아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시간 참 빠르네…….”
카르한이 청혼한 지 한 달도 훌쩍 지났다. 일리아는 그의 청혼을 받아주었지만, 아직 구체적인 결혼 날짜를 잡지 않았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일리아는 블로든 상단을 물려받기로 한 뒤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다. 블로든 가문의 일원으로서 사업을 이끄는 것이다.
그러나 이슈타르 제국은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의무였다. 카르한과 결혼하는 즉시 일리아 블로든이 아닌 에반테온 공작부인으로 불릴 터였다.
일리아는 그것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결혼은 일리아 개인의 문제였으나, 사업은 블로든과 관련된 문제였다. 에반테온의 성을 달고 블로든 상단의 대표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카르한은 일리아의 고민을 눈치채고 먼저 제안했다.
-결혼식은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때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제국에서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은 선례는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남편 쪽이 아내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올 때뿐이었다. 심지어 남편은 아내 쪽 가문의 작위를 물려받기 전까지 원래 성을 쓰는 경우가 빈번했다.
카르한은 자신이 법안을 고쳐보겠다고 말했고, 마침내 오늘 국무회의를 통해 결판을 보러 간 것이다.
오래된 관습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분명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분쟁과 다툼이 있을 테지만, 카르한은 일리아를 위해서 기꺼이 싸움에 참전했다.
‘성을 바꾸는 것이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되는 날이 온다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일리아는 현관까지 뛰어온 포포를 쓰다듬어준 후에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일리아도 외출 준비를 할 때였다.
***
간만에 국무회의가 열리는 날이라, 황궁은 여느 때보다 시끌벅적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후로 국무회의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황제의 눈치만 보며 설설 기던 과거와 달리, 발언권이 적었던 귀족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둥 좀 더 자유로워진 분위기였다.
“에반테온 공작님이…….”
국무회의가 시작되기 전, 회의장은 온통 카르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공작위를 계승한 지 몇 달이 지났으나, 귀족들의 관심사는 단연 카르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