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8)
카르한은 막 정계에 입문한 젊은 공작이지만, 유능했으며 수완이 뛰어났다. 그 증거로 카르한이 내거는 안건은 대부분 반대 없이 통과되었다.
카르한은 공식적으로 현 황제를 지지했지만,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게 황실과 귀족 간의 중립을 적절히 지켰다.
거기다 다른 고위 귀족들처럼 거들먹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 덕분에 귀족들 사이에서 카르한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
“저번 회의에서 어찌나 박력이 넘치시는지. 계속 꼬투리 잡던 백작이 조용해지던 거 다들 보셨지요?”
“예, 각하께서 슥 쳐다만 보니, 바로 꼬리를 말더군요.”
카르한을 흠모하는 귀족들은 이전 회의를 언급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저번 회의에서 카르한의 말에 자꾸 헛소리하던 백작이 있었는데, 카르한이 가만히 바라만 보자 결국 입을 다물었다.
고작 눈빛 한 번으로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하는 카르한의 존재감에, 지켜보던 귀족들은 탄복했다. 특히 몇몇은 아주 감명 깊었는지 남몰래 카르한을 추종했다.
“그나저나 슬슬 블로든 영애와 결혼하시겠지요?”
“각하께서 블로든 저택에서 출퇴근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저는 무엇보다 헤인리 경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헤인리가 언급되자, 다른 귀족들은 저번 회의를 떠올렸다. 회의에서 카르한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세울 때, 뒤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던 헤인리를 못 본 사람이 없었다. 누가 보면 참관 수업이라도 들어온 보호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카르한과 눈이 마주치거나 말을 섞을 때는 철저히 공적으로 대했기에, 귀족들은 궁금해졌다. 도대체 헤인리 블로든과 카르한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때 굳게 닫혀 있던 회의장 문이 열렸다. 귀족들은 잠시 떠들던 것을 멈추고 문을 응시했다.
열린 문으로 카르한이 들어왔다. 각 잡힌 제복 아래에 드러난 떡 벌어진 어깨,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체구. 일정한 보폭을 유지한 채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에 귀족들은 감탄했다.
카르한이 자리에 앉자, 마지막으로 황제와 헤인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상석에 앉은 황제는 귀족들을 한 번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카르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눈빛에 신뢰가 담겨 있었다.
한쪽의 세력이 갑자기 늘어나면 견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둘은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었다. 전부 두 사람이 추구하는 방향이 같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카르한은 권력에 욕심내거나 자신의 공을 과신하기보다는 자연스레 황제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 황제에게 모든 결정을 위임하는 식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황제의 비서관이 된 헤인리가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미리 올라온 안건을 중심으로 헤인리가 주제를 꺼내면 귀족들이 의견을 나누었다. 너도 나도 카르한과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서 의욕이 넘쳤다.
한창 회의에 불이 붙었을 때였다. 안경을 추어올린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안건은 결혼 시에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을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헤인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장이 술렁였다. 보수파 귀족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안건은 누가 낸 겁니까.”
술렁이던 회의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침묵 속에서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접니다.”
회의장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말도 안 되는 안건이라 운운했던 귀족은 카르한의 얼굴을 보고 안색이 희게 질렸다. 조용히 바라보는 카르한의 눈빛이 매서워서, 그는 숨도 쉬지 못했다.
회의장에 앉은 귀족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르한이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카르한은 무척 차분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다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릴 때,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왜 말도 안 되는 안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르한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안건을 반대했던 보수파 귀족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겨우 숨을 내뱉은 남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내는 남편 성을 따르며, 그 자식들도 남편의 성을 물려받는다. 제국이 건국된 이래로 꾸준히 지켜오던 법이었다.
평민은 성이 없어서 논외였고, 다수의 귀족들은 부인이 성을 바꿈으로써 본적을 지워내고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시대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마땅히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카르한이 반론하자,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와 같은 의견을 가진 보수파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카르한의 기세에 수그러들었던 보수파 귀족들이 슬금슬금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각하.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는데, 굳이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그 법안을 아예 폐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부인에게 선택권을 주자고 말하는 겁니다.”
남편 성을 따르길 원하는 사람은 지금의 법을 따르면 될 터였다. 그러나 원치 않는 사람은 원래 성을 가질 수 있도록 또 다른 선택지를 주자는 말이었다.
“가주의 권위와 위신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노귀족 하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성이 다르면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겁니다. 호칭 문제도 생기겠지요.”
“맞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여파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피해자가 속출할 거라며 보수파 귀족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가만히 듣던 카르한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누가 피해를 본다는 말씀입니까?”
카르한의 물음에 방금까지 떠들어대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반대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엄청난 피해가 있을 것처럼 부풀렸지만, 정작 실질적인 피해자는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기분과 위신만 상할 뿐. 카르한은 그것을 꼬집고 있었다.
“호칭 문제는 차차 바꾸어 가면 됩니다. 지금의 규정도 자연스럽게 고착된 것이 아닙니까. 시간이 지나면 다들 적응할 겁니다.”
보수파 귀족들이 카르한을 낯선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카르한을 이해하지 못하듯, 카르한 또한 보수파 귀족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귀족들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본적을 전부 두고 오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태어나서 결혼 전까지 소속해온 가문을 말이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저와 같은 성으로 불리는 것도 좋았지만, 한편으로 제게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했다. 일리아의 동반자가 되고 싶은 거지, 보호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비록 성이 다르더라도, 일리아와 자신은 가족일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몇백 년 동안 유지해온 법안을 하루아침에 바꾸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카르한의 주장에도 보수파 귀족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제국에 큰 문제가 생긴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지나친 억측 아니십니까?”
이윽고 카르한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맞불을 놓으며 순식간에 회의장이 시끄러워졌다. 양측 진영끼리 대화가 통하질 않자, 조용히 지켜보던 황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의 편을 들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보수적인 노귀족들은 황위가 바뀐 지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황제의 세력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 새로운 세력인 카르한을 중심으로, 평생 따라왔던 규율을 뿌리 뽑자고 말하니 거부감이 생긴 것이다.
가주로서 권위를 우선시하는 노귀족들이었기에 충분히 심기가 불편할 만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카르한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황제가 바뀌었듯 제국도 바뀔 필요가 있었다.
황제는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미간만 좁혔다. 점점 감정싸움으로 치닫게 되자, 황제가 팔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헤인리가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만하십시오. 지나치게 과열된 것 같습니다.”
냉정할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에 흥분해서 싸우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헤인리가 중재하자 황제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 결론 내릴 만한 사항이 아니니, 다음 국무회의 때까지 생각을 정리한 후에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귀족들은 결국 마지못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회의가 얼추 마무리되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꽉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어차피 바로 받아들여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더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법안을 바꾸어 놓지 않는다면 일리아는 평생 에반테온이라 불리게 될 테니 말이다.
카르한이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블로든 덕분이었다. 그러니 일리아가 끝까지 블로든을 지켰으면 했다.
막 회의장을 나가려는 헤인리와 눈이 마주쳤다. 회의 내내 차가운 얼굴로 서 있던 헤인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제야 카르한은 표정을 풀고, 마주 눈을 깜빡였다. 이곳에서 카르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일리아는 카르한과 헤인리를 배웅한 뒤, 외출할 준비를 끝냈다. 점심 전에 사업장을 돌고 난 후에 신상품 출시에 관해 회의를 할 예정이었다. 비올레는 사업차 지방으로 출장을 가 있었기에, 평소보다 일리아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일정표를 확인한 일리아는 화장대 앞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말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극단주가 찾아왔습니다.”
“극단주? 웬일이지?”
뜻밖의 손님에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에 일리아는 리하트에게서 장난감 사업을 매입한 후에 인형극 극단주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를 통해 블로든 가문에서 디자인한 인형을 연극에 올렸고, 그대로 대박을 쳤다.
일리아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명한 극작가를 고용하여 세계관을 넓혀갔다. 속편이 나올 때마다 인기가 늘어서, 덩달아 일리아의 장난감 사업 또한 쑥쑥 커졌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정도면 뭔가 일이 터진 것 같은데.’
일리아는 곧장 극단주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극단주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하소연해왔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저희 극단 인형을 베낀 상품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자세히 말해주세요.”
그제야 극단주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설명을 시작했다.
일리아와 극단주가 합작한 인형극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후로, 극에 출연한 인형과 흡사한 상품이 시중에 많이 쏟아졌다. 인기에 편승하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지만, 정품과 차이가 뚜렷했고 소송을 걸 수도 없어서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품과 거의 똑같은 인형이 시중에 풀렸다는 것이다. 눈동자 색깔과 귀 끄트머리만 달라서, 가품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심지어 가품을 생산한 업체 측은 몰래몰래 상품을 팔아오다가, 이제는 대범하게 대형 잡화점까지 진출했다. 정품보다 가격이 저렴한 데다가 품질이나 모양까지 비슷하니, 블로든 측 인형의 판매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극단주의 설명이 끝나자, 일리아의 옆에 서 있던 말렉이 분노했다.
“아니, 그렇게 뻔뻔한 놈들이 있단 말입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말렉이 호응해주자 극단주도 다시 흥분해서 펄펄 날뛰었다. 만약 이 자리에 다혈질인 프란체가 있었으면 벌써 뛰쳐나가고도 남았을 듯했다. 길길이 날뛰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이런 문제가 터질 줄은 예상했지만…….’
제국은 유행이 하나 생기면 너도나도 따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세업자가 대박을 터뜨렸다가 다른 경쟁 업체가 교묘하게 따라 해서 망하는 일도 다분했다. 그런데도 원조라고 호소할 수 없는 이유는 전부 법이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완벽하게 똑같이 베끼지 않는 이상은 승소하기 어려웠고, 재판 과정 또한 무척 길었다. 그나마 다들 블로든이라는 이름이 무서워서 자중하는 편이었으나…….
“블로든이 무섭지 않은 모양이야.”
일리아의 혼잣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그쪽은 물 들어왔으니 열심히 노 젓는 중이겠지.”
“예,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진열대에 저희 물건보다 가품이 더 많이 놓인 상점도 있습니다.”
지금도 뻔뻔하게 생산 중일 거라며 극단주가 중얼거렸다.
“아가씨, 신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놈들은 고소장을 받아야 합니다.”
일리아는 괘씸해하는 말렉을 차분히 응시하다가 극단주에게 물었다.
“인형극 속편을 제작 중이라고 했죠?”
“……아, 각본이 절반 정도 나왔습니다.”
“그건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어요.”
“예에?”
극단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리아는 남들이 보기에 무척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새로운 이야기가 생각났거든요.”
그러나 그 미소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는 말렉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욕했던 상대가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
“이제 떼돈을 벌겠군.”
값비싼 펜으로 서명을 적어 넣은 남자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금고에 돈 쌓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남자는 아랫사람을 시켜 계약서를 전달하도록 한 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로 단장한 집무실을 보니 마음이 절로 푸근해졌다. 영지도 없는 한미한 귀족 자식으로 태어나,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뎠던가.
“이렇게 돈 벌기 쉬운데 말이야.”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뒤돌아섰다. 그는 얼마 되지 않은 유산으로 사업을 하나 차렸다. 커다란 상단 밑에서 하청 일을 했는데, 저보다 더 작은 사업체를 짓밟으면서 목돈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어떤 사업을 할지 고민하던 그때, 인형을 팔아서 떼돈 벌었다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남자는 무턱대고 장난감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상품과 비교해 장점 하나 없는 조잡한 인형이 잘 팔릴 리 없었다. 조급해진 남자는 인기 있는 상품을 베끼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판매량이 급격하게 늘었다.
돈 맛을 본 남자는 점점 과감해졌다. 그러다 그는 블로든 상단에서 만든 인형과 거의 똑같은 상품을 출시했다.
처음에는 보복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법이 허술한 만큼 블로든과 극단 측은 별다른 대응을 해오지 않았다. 덕분에 남자의 사업은 원작 인형극의 인기에 편승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계약서도 보냈으니…….”
그는 지금껏 벌어들인 돈에다 은행에서 빌린 돈을 합쳐, 사업에 투자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 했으니, 생산량을 대폭 늘릴 생각이었다.
바짝 벌어뒀다가 블로든이나 극단 측에서 고소해오면 외국으로 도망갈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어차피 판결이 나오려면 최소 1년은 걸릴 테니 문제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남자의 밑에서 일하는 관리인이었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뭔데 소란을 피우는 거냐.”
“지금 환불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환불? 제품에 하자라도 생긴 건가?”
그제야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관리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며칠 전에 인형극 속편이 나왔는데…….”
관리인이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남자가 베낀 인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형극의 속편이 공연을 시작했다. 속편 내용은 주인공인 검은 토끼가 거울 나라에 들어가, 자신과 닮은 악당과 싸운다는 내용이었다.
악당 역으로 무대에 오른 인형은 남자가 판매하는 인형과 똑같았다. 원래 인형에서 눈동자 색깔과 귀 끝만 다른 것이다.
무대에서 대놓고 가품을 악당이라고 선언하니, 가품을 산 아이들은 자기 인형이 악당이라며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것이다.
“그리고…….”
관리인이 신문을 넘겨주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남자가 신문을 받아 읽었다. 상단에 인형 광고가 실려 있었다. 아예 지면 하나를 전부 사용한 광고였다.
[최고의 인기 상품! 블로든 상단에서 나온 인형을 만나보세요.] [세탁 시에 물이 빠진다고요? 솜이 금방 꺼진다고요? 전부 가품입니다. 외양은 따라할 수 있어도 품질까지는 따라할 수 없습니다.] [정품은 우리 아이의 안전을 위해 좋은 원단, 좋은 솜을 사용했습니다. 구입 시에 상품에 붙은 상표를 확인하세요.]광고는 가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정품 구별법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으니, 뒤늦게 가품이라는 걸 알게 된 부모들이 뿔이 난 것이다. 남자는 신문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젠장. 단순 변심으로 인한 반품은 안 된다고 공문 띄워!”
“항의가 들어올 텐데요.”
“무시하면 되잖아!”
“그럼 생산장은 어떻게 할까요?”
환불 문의가 쏟아지는 지금도 생산장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재고만 남아돌 것이다. 남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전 재산을 투자했는데…….”
그는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와 생산장으로 향했다. 생산장 옆 창고에는 아직 판매하지 못한 상품이 가득 쌓여 있었다.
“당장 중지해!”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직원들이 일을 멈추었다. 그는 창고에 산처럼 쌓인 상자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격을 대폭 인하하면 재고를 어느 정도 털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당장 손해를 메우고…….
다시 마차에 올라탄 남자는 계약을 체결했던 상점으로 향했다. 상점 측에도 항의가 들어와서 달래주러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도착하자마자 가게 주인은 길길이 날뛰었다.
“지금 당장 물건 다 빼세요!! 우리 가게 평판이 얼마나 떨어진 줄 아십니까!”
“아니……, 갑자기 다 빼라니요.”
“환불 문의를 받느라, 장사를 못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어떡하라고요. 물건을 안 받아주시면 오늘부터 길거리에 나앉아야 합니다.”
남자가 하소연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당신 사정은 알 바 아니니, 전부 가져가세요!”
가게 주인은 직원들을 시켜 상자를 가게 밖으로 내놓게 했다. 직원에게 떠밀린 남자는 가게 앞에 서서, 넋 놓고 상자를 바라보았다. 탑처럼 그득하게 쌓인 상자에는 인형이 꽉꽉 차 있었다. 심지어 창고에도 재고품이 가득하니,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남자가 다시 가게 주인을 찾아 호소하려는 그때, 가게 앞에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환한 금발을 가진 여인과 호위 기사로 보이는 장정 둘이었다. 그들은 남자를 힐끗 본 후에 가게 입구로 향했다.
“아이고, 블로든 님.”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방금 남자를 매몰차게 내쫓아낸 가게 주인이 달려 나왔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실거리는 가게 주인의 태도에 남자는 잠시 멍해졌다. 블로든이라니…….
“저희가 가품을 일부러 팔려고 한 건 아니고…….”
열심히 변명을 내뱉던 가게 주인이 남자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진품이랑 너무 비슷해서 헷갈렸지 뭡니까! 저 남자가 저희 가게에 가품을 넣은 자인데…….”
금발의 여인과 호위 기사 둘이 동시에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이윽고 호위 기사 중 하나가 옆구리에 찬 칼집을 만지작거렸다.
달그락,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에 남자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금발의 여인이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계약은 해지하겠어요.”
가게 주인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인형뿐만 아니라, 블로든 상단에서 출하하는 모든 상품을 빼겠다는 말이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신나게 가품을 팔아서 돈을 벌다가, 더 큰 물고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금발의 여인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가게 주인을 뒤로한 채 남자를 향해 다가왔다. 대강 상황을 눈치 챈 남자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저는 일리아 블로든이에요.”
그녀가 이름을 밝히자, 가슴이 철렁해졌다. 일리아 블로든이라면 블로든 가문이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이자, 새로운 에반테온 공작의 연인이었다. 그런 엄청난 상대가 눈앞에 서 있으니, 이마와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