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W novel - Chapter (387)
383. 민서 (完)
마지막 엔딩은 평소 보았던 것과 달랐다.
링딩링 딩딩링딩링.
─ 8비트, 단조롭지만 차분한 오르골 음이 흐르고, 배경이 새하얗게 밝았다. 민서는 내심 먹먹한 심정을 달래며 엔딩 크레딧을 차분히 읽어 나갔다.
[ 레라 아이나르 ] [ 최종직업 : 덱스터 백작 부인, 아스란 왕국의 수호자 ] [ 결혼 상대 : 레이 덱스터 ] [ 레이 덱스터 ] [ 최종직업 : 백작, 아스란 왕국의 수호자 ] [ 결혼 상대 : 레라 아이나르 ] [ 약혼관계 엔딩 : The Knight ] [ 진엔딩 ]– 에이브릴 성에서 태어난 레라 아이나르는 행복한 유년기를… (중략) …벨리타 왕국으로 무사 수행을 다녀온 그녀는 마우닌-레티이 대회에 참가해 자신의 실력을 만천하에 뽐냈다. 대륙에 둘뿐인 소드마스터. 단숨에 아스란 왕국의 상징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레라 아이나르 경은 갑작스러운 등장과는 달리 다소 잔잔한 삶을 살았다. 기사가 된 직후 결혼했으며, 아이를 셋 낳아서 한동안은 육아에 전념했다. 그녀가 검을 들고 활약한 건 그로부터 5년 뒤에 발발한 오른-콘라드 정벌전에 객장(客將)으로 참전했을 때가 유일했다. 레라는 그 전쟁에서 ‘섬멸의 기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이후 본국으로 돌아온 레라 아이나르 경은 아스란 왕국의 수호자로 추대되었으나, 백작령에 틀어박혀 더 이상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인 덱스터 백작,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조용하고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다. –
– 수도 바르나울에서 태어난 레이 덱스터는 행복한 유년기를… (중략) …벨리타 왕국으로 무사 수행을 다녀온 그는 자신의 실력을 만천하에 뽐냈다. 대륙의 둘뿐인 소드마스터. 단숨에 아스란 왕국의 상징으로 급부상했다. 그런데 레이 덱스터 경은 부인인 레라 아이나르 경과는 다른 행보를 밟았다. 그는 정계 활동에 관심을 보이며 아내의 고향인 에이브릴 성 인근에 있는 브리나 자작령에 드나들었다. 그곳의 영주 디에고 브리나 자작이 타국 귀족들과 짜고 밀수를 한다는 걸 밝혀내어 공론화했고, 작위는 없지만 성(姓)을 가진 자로서 브리나 자작가에 영지전을 선포해 무너뜨렸다. 해당 자작령을 자신의 영지로 선언한 레오 덱스터 경, 아리스타 드 클라우스 왕은 브리나 자작의 범법 행위를 밝혀낸 덱스터 경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자작위를 내려주었다. 레오 덱스터 경은 그 이후로도 제1 기사단 단장으로 취임하는 둥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오른-콘라드 정벌전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아내를 따라 전장을 순회했다고는 한다. 몇 년 후, 아내와 마찬가지로 아스란 왕국의 수호자로 추대된 그는 자신의 작위를 백작위까지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정계 활동을 그만두었다. 덱스터 백작령에서 그의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평온한 여생을 보냈으며, 간간이 제롬 신성 왕국의 수도 루테티아로 여행을 다녔다고 전해진다. –
[ 소꿉친구 시나리오 엔딩이 변경되었습니다. ] [ 레아 ] [ 최종직업 : 성녀 ] [ 결혼 상대 : 레브 ] [ 레브 ] [ 최종직업 : 성전사 ] [ 결혼 상대 : 레아 ] [ 소꿉친구 엔딩 : The Bishop ] [ 진엔딩 ]– 데모스 마을에서 태어난 레아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비록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따뜻한 관심을… (중략)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 하늘이 열리며 레아는 성녀가 되었다. 성녀 레아는 남달랐다. 신을 섬기기에 바빠 바깥출입조차 자제하던 역대 성녀들과 달리 교회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고, 베로니안이라는 젊은 수도사를 추기경으로 전격 등용하여 경직된 교회 체제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 이후의 행보는 더욱 충격적이다. 성녀 레아는 순례를 자주 나갔으며, 성년이 됐을 무렵에는 그녀의 호위를 맡아온 성전사, 레브 경과의 혼인을 선언했다. 유례가 없는 성녀의 결정에 십자교회는 발칵 뒤집혔으나 레아는 기어이 결혼을 강행하였다. 성녀 레아. 그녀가 남긴 기행과 업적은 수없이 많았다. 제롬 신성 왕국에서만 금지돼오던 노예제를 다른 왕국들도 금지하게끔 종용했으며, 이에 크게 반발한 오른 왕국의 로그넘 왕가를 파문했다1). 서자를 차별하는 관습을 비판하였고2), 마법사와 기사, 사제가 사라지리라는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마지막 성녀였던 그녀는 여러모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았다. 혹자는 이 시대를 사람들의 사고가 비(非)이성으로부터 이성으로 전환된 시기로 규정하며, 성녀 레아의 전격적인 행동들을 교회가 세속의 가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녀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였는지는 아직도 논의가 진행 중이나, 성녀 레아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두 명의 아이를 출산하였고, 매우 장수했으며, 남편인 레브 경과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
– 데모스 마을에서 태어난 레브는 행복한 유년기를… (중략) …소꿉친구인 레아가 성녀가 되어 수도교회로 떠나버리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무작정 제롬 신성 왕국으로 향했고, 수도교회의 교육시설에 입학했다. 이렇다 할만한 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탁월한 검술 실력을 뽐내며 성전사로 등용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레브 경은 종잡을 수 없는 성녀, 레아의 총애를 받았고 끝내 그녀와 결혼했다. 레브 경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의외로 인맥이 넓어서 북부의 두 소드마스터, 레이 덱스터 경과 레라 아이나르 경, 그리고 남부를 장악한 왕족 남매, 레리아나 드 예리엘 왕과 레안 드 예리엘 대공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해마다 만났다고 전해진다. 레브 경은 슬하에 ‘소야와 노야’라는 아들딸을 두었고, 매우 장수했으며, 아내와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
[ 거지남매 시나리오 엔딩이 변경되었습니다. ] [ 레리아나 드 예리엘 ] [ 최종직업 : 왕 ] [ 결혼 상대 : 산티안 예리엘 ] [ 레안 드 예리엘 ] [ 최종직업 : 대공(大公) ] [ 결혼 상태 : 크세니아 예리엘 ] [ 거지남매 엔딩 : The Queen ] [ 진엔딩 ]– 루티나 왕성에서 태어난 레리아나 드 예리엘은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녀를 끔찍이 아껴주는 왕, 왕비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정계에 입문하였고, 레안 드 예리엘 왕자와 함께 제왕학을 수학하였다. 귀족들로부터 수많은 청혼을 받았으나 하나같이 거절하던 그녀는… (중략) …온실 속 화초로 자라던 레리아나 드 예리엘 공주가 주체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건 벨리타 왕국의 왕, 크메안 드 타탈리아가 주최한 6국 왕족 만남의 장 이후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녀는 타국 왕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외교 업무에 뛰어들었고, 에릭 드 예리엘 왕자를 아이셀 왕국으로 보내버린 뒤, 테르탄 공작가를 자신의 배후 세력으로 삼았다. 많은 이들이 그녀가 레안 드 예리엘 왕자와 왕위 계승권을 두고 다툴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레리아나 드 예리엘은 레안 드 예리엘 왕자의 양보를 받아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콘라드 왕국 교회를 장악한 추기경, 베르크를 설득하여 최초의 대학(大學)을 세웠으며, 마을마다 세워져 있는 교회 시스템을 활용해 공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벨리타 왕국의 대귀족, 베나르 타티안 후작과 합작하여 육상 교역망을 건설하였고 새 항구를 신설해 항해 기법에 투자함으로써 사후 백 년 뒤에 찾아온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알린 왕으로 평가받았다. 레리아나 드 예리엘 왕은 역사상 보기 드문 전제군주였다. 귀족들을 왕권 아래 복속시켰으며, 그들의 영지를 국토로 흡수해 봉건제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그녀는 레안 드 예리엘 왕자가 정벌한 오른 왕국의 통치까지 겸함으로써 사실상 남부의 유일무이한 통치자로서 온 대륙을 호령하였다. 레리아나 드 예리엘 왕은 개인적으로도 꽤 행복한 삶을 살았다. 산티안 라우노라는 평민과 3년의 연애 끝에 결혼하였고, 두 명의 총명한 아들을 얻었다. 그녀는 매우 장수했으며, 고이 잠든 채로 붕어하였다. –
– 루티나 왕성에서 태어난 레안 드 예리엘은 행복한 유년기를.. (중략) …역사는 그를 천재적인 전략가로 기록한다. 그는 약 8년의 세월을 들여 오른 왕국 정벌을 준비했다. 가이단, 드라진 후작가와 같은 오른 왕국의 대귀족들을 물밑에서 포섭했으며, 성녀로 하여금 노예제 폐지 선언을 하게 하여, 광산 채굴이 주 산업인 오른 왕국을 곤경에 빠뜨림과 동시에 로그넘 왕가를 파문당하게 하여 국제 외교에서 고립시켰다. 인접국인 제롬 신성 왕국과 벨리타 왕국의 묵인하에, 레안 드 예리엘 왕자는 고작 이천의 병력을 이끌고 오른 왕국 정벌에 착수했다. 로그넘 산맥에 숨어들어 핍박받던 토착민 부족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였고, 게릴라전을 펼침과 동시에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충동질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중앙 권력 기구를 무력화하는 가장 훌륭한 전술 사례로 남아 그 이후에 탄생한 세계적인 명장들에게 기발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로그넘 왕가의 애톤, 앨제어 드 로그넘 왕자들 또한 자신들 특유의 재능을 발휘하며 분전했으나 끝내 궁지에 몰렸으며, 레안 드 예리엘 왕자가 영입해 온 소드마스터, 레라 아이나르 경에 의해 멸국의 수모를 당했다. 이후 오른 왕국을 정벌한 레안 드 예리엘 왕자는 스스로를 ‘대공’이라 칭하며 수년간 점령지를 안정화하는 데 힘썼다. 그는 오른 왕국의 지방 자치를 독려하였고, 점령지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여동생인 레리아나 드 예리엘 왕에게 통치를 위임하였다3). 젊은 시절을 폭풍 같은 전장의 소용돌이에서 보낸 그는 그 이후로는 벨리타 왕국의 수도, 오르빌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크세니아 페테르 영애와 결혼하지 않고 무려 11년 동안 연애함으로써 계산적인 귀족 사회에 자유연애 풍조를 정착시켰다. 크세니아 영애와 각국 수도를 돌아다니며 고급스러운 문화생활을 즐긴 것으로도 유명해, 귀족 및 부유층의 국외 여행 붐을 일으키고, 왕국 간 문화 교류를 촉발했다. 레안 드 예리엘 대공이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동생과 아내인 크세니아 페테르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
딩 딩링 링딩딩링딩.
오르골 음악은 약간씩의 변주가 이뤄지면서 반복되었다.
그 음색은 감미로우면서도 조금은 슬프기도 했다.
life is just. 인생이란 그냥 이렇다.
민서는 감격하기도, 울적해 하기도 하면서 그에게 너무나도 소중해진 여섯 사람의 삶을 확인했다.
마지막 마침표를 읽고서 적막한 감정에 휩싸이려 할 때였다.
오르골 음이 한 칸 높아지며 그래도 잘했다는 듯이, 모두 당신 덕분이라는 듯이 세 장의 사진을 띄워 보여주었다.
마차를 타고 순례를 다니는 성녀, 레아와 그녀를 도와 곤궁에 빠진 이들을 돕는 성전사, 레브.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행복해 보였다.
음… 레브가 조금은 잡혀 사는 것 같기도? 녀석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뒤이어서 떠오른 레라 아이나르와 레이 덱스터의 사진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부부 싸움 중이었는데, 두 사람이 일으킨 오러블레이드로 인해 저택이 쪼개지려 하고 있었다.
집사는 사색이 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아이들은 포기했다는 듯 잔디밭에 누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하. 애들 표정을 보아하니 진지하게 싸우는 건 아닌가 보다.
어쩌면 대련할 구실이 필요해서 한쪽이 시비를 걸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레라가 살짝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민서는 어찌나 빠른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보며 웃음 짓다가 마지막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엔 대륙 전도(全圖)가 그려져 있었다. 오른 왕국과 콘라드 왕국을 밟고 선 여왕, 레리아나가 거대하게 그려져서 대륙을 굽어보고, 레안은 크세니아와 함께 마차를 타고선 각 지역을 여행하고 있었다.
레리아나가 약간 심통이 나 보이는 이유는 뭘까. 오빠가 자기한테 일을 죄다 떠넘기고 놀러 다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민서는 그 사진도 유쾌하게 보았다. 레리아나가 조그맣게 그려진 레안의 마차를 여차하면 콱 밟아 버릴 것만 같아서다.
저 두 남매가 이후로 어떻게 지냈는지 알 것 같다.
단조로운 멜로디를 들으며 민서는 여운에 잠겼다. 이날이 오면, 이렇게 마지막 엔딩을 보는 날이 오면, 무작정 기쁠 줄 알았다. 후련하거나.
하지만 착잡함이 더 컸다.
너무 정들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미련 때문일까. 내가 최선의 결말을 안겨다 준 것은 맞을까.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때, 사진들이 사라진 공간으로 다른 문자들이 떠올랐다. 민서는 곧 의외의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 소꿉친구 – 진엔딩 ] [ 약혼관계 – 진엔딩 ] [ 거지남매 – 진엔딩 ] [ 축하합니다! 레나 키우기를 완벽 클리어하셨습니다. 완벽 클리어 보상으로 확장팩 버전이 해금됩니다! 플레이어께서는 랜덤한 인물을 선택해 레나 키우기 확장팩 버전을 플레이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성취하신 업적은 초기화됩니다. 더 플레이하시겠습니까? Yes / No ] [ 선택 가능한 인물과 DLC 목록 ] [ 토들러 아키우넨, 문명의 시작 ] [ 아스타로트, 불타는 야망 ] [ 아즈라 성인, 무한 회귀 ] [ 마우닌 왕, 제국으로 역습! ] [ 마지막 황제, 뒤집힌 던전 ] [ 코르니우스, 마나 로드 ] [ 성인 우데안, 교회 정화 ] [ 타티안 후작, 금화의 주인 ] [ 앨제어 드 로그넘, 망나니 왕자 ] [ 바르바토스, 꼬물거리는 신력 ]…
…또 뭘 시키려고. 민서는 고민할 것도 없이 No를 선택했다. 의외의 메시지가 나온 건 그다음이었다.
…뭐?
잡다한 DLC 목록과 메시지들이 지워지고, 보상을 선택하란 글자만 남았다. 민서는 살짝 넋을 잃었다. 소꿉친구 진엔딩 보상이라면…
– ‘레나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 레나 키우기 ]의 진엔딩 조건이 레나를 공주로 만드는 게 아닌 꿈을 이뤄주는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황망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중얼거린 것이었다. 시스템은 이걸 시나리오 보상을 선택한 거로 보지 않았었나 보다.하지만 이걸 왜 지금? 혹시…?
[ 보상을 선택하세요. ]민서의 심정이 아까보다도 더 심란해졌다.
이게 어떻게 나온 보상인데. 레브를 갈아 넣은 대가를 내가 받아도 괜찮은 걸까. 아니지, 솔직히 그 개고생을 했는데 이것 하나쯤은 받아 갈 자격이 있지 않을까. 다른 애들이면 몰라도 레브는 이해해주겠지. 하지만 뭘 받아 가지? 돈? 와. 내가 한 생각이지만 진짜 쓰레기 같다.
1,000억. 100억. 아니, 꼴랑 오천만 원이라도 손에 들어오면 살 만할 것 같았다. 채하에게 사과하고, 전셋집을 구해서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딩링 링딩 딩링링딩. 잔잔한 음향이 흐르는 가운데, 민서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는 보상이라는 단어 앞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았다.
처음 이 게임을 시작했을 때, 난 레아의 꿈을 짓밟고 데모스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려 했었다.
기사가 되고파 하는 레라 아이나르를 만났고, 축축한 골목길 바닥, 오갈 데 없는 거지가 되어 하나뿐인 동생을 지키려 분투했었다.
인제 와서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렇게 멍청했나 싶다.
레나들을 공주로 만들려 악을 썼었고,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도, 다른 사람의 진심을 몰라주기도 했다. 끝없는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었고, 자신들은 괜찮으니 레나를 행복하게 해달라는 레오들의 전언에 감탄하면서도, 괴로워했다.
보상.
그랬던 나에게 보상이라.
내가 교훈을 얻어가는 것이라면 몰라도.
민서는 스스로를 바보라 생각하며 마음을 굳혔다.
어디 들어갔다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이렇게까지 해가며 얻은 교훈을 잊고 싶지 않았다.
‘채하. 채하와 함께 꿈을 이뤄갈 용기를 주세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고 싶어요.’
보상을 선택하라는 메시지는 민서를 그때처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게 정말로 네 소원이냐? 되묻는 것처럼.
이내 대답이 떠올랐다.
[ 플레이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소원입니다. 다른 보상으로 대체해 드립니다. ] [ 감사합니다. ]새하얀 배경과 8비트 음향이 픽- 꺼졌다. 초점이 까맣게 한 점으로 모이고, 민서는 그로 인해 침침해진 눈을 비볐다.
눈을 떴을 때, 그는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파랗게 빛나는 윈도우 로고 앞에.
돌아왔다.
민서는 손을 떨구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로고를 멍하니 바라보며 앞으로 어찌 살아갈지를 되새김질했다.
채하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아직까지도. 나는 극작가가 돼서 그녀에게 무대를 선사하겠노라 다짐했었다.
그것이 우리의 치기 어린 꿈이자, 젊은 날의 약속이었다.
…그래.
늦었지만 다시 시작하는 거다.
나로 인해 꿈을 접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을 채하에게 가서 말하자.
우리 다시 해보자고. 안 될 것이 무엇이겠냐고. 나 제정신이고, 정신 차렸노라고, 가서 말하자.
민서는 각오를 다졌다. 책상을 짚으며 일어나 새롭게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어?”
눈에 낯선 것이 들어왔다.
현대 사회가 오랜만이라 낯설기야 전부 낯설지만, 이것들은 지금 여기 있어야 할 게 아니었다.
경영학원론.
경제학원론.
경영통계.
진작에 내다 버린 대학교 1학년 과목 교재들이다. 내 공무원 수험서들은 어디 가고? 당황한 그때,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노트북이 새 거다.
아니, 옛날 거다.
대학교에 입학할 적에 아버지가 “인서울이라니, 애썼다!” 기꺼워하시며 사주신 구형 노트북이었다.
졸업하면서 버렸었는데. 잠깐. 지, 지금이 언제야.
그의 손에 고등학생 때 사용했던 핸드폰이 잡혔다. 뽈칵, 열어보니 날짜가…
그가 대학교에 입학한 해 7월이었다. 1학기 종강일이고, 오늘은 그가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오늘 나는 채하에게 고백했었다.
아니, 이제 동아리방으로 고백하러 가야 한다. 한 시간 뒤면 채하가 자신의 1학기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동아리방에 올 것이었다.
“와 씨! 늦었잖아!”
민서의 몸이 스프링처럼 튕겨 나갔다. 그는 아직 자기 몸이 젊어졌다는 것까진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고백했었지? 꽃이… 아, 가는 길에 샀었구나. 옷은? 휴. 다행히 입고 있네. 머리는… 아이고, 이게 뭐야 촌스럽게.
민서는 손바닥만 한 화장실에 달려 들어가 폭풍 드라이기질을 했다. 젠장, 양말이 젖었네. 침대에 헐레벌떡 걸터앉아 양말을 갈아 신던 중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양말 한쪽을 손에 든 채 웃음을 터뜨렸다.
젊어졌구나. 여자 친구 생각만으로 심장이 이렇게 뛰는 걸 보니.
이건 마치 레오의 몸에 들어갔을 때와 같았다. 녀석들과 동화되어서 좋았던 걸 딱 하나만 꼽자면 이것이었다.
레나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는 거. 불타는 젊은 열기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거.
그에게 다시금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민서는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서랍장에서 납작한 스니커즈를 꺼내 콩콩, 신었다.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는 그에게 햇살이 반짝! 앞날이 너무나도 밝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
채하의 아버지가 8년쯤 뒤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시지. 뇌졸중 방지에 좋다는 거 많이 사드려야겠다.
우리 부모님은 내후년쯤에 이혼하시던가. 내가 분가한 이후로 사이가 소원해지신 것 같으니 자주 찾아봬야겠다.
민서는 그렇게 앞날을 다짐하며 달려 나갔다. 한데 힘차게 달려가던 그가 흠칫, 멈춰 섰다. 생각해 보니 신발장에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신발장에 크게 들여놓고 있어야 할 쓸데없는 무언가가.
“…이런 개색… 아니다, 어쩔 수 없나.”
민서는 낮게 투덜거리곤 다시금 달려 나갔다. 그가 다녔던 대학교를 향해. 함께 꿈을 이뤄나갈 그녀를 찾아서.
이듬해, 민서는 군대엘 갔다.
Fin.
1) 성녀 레아의 업적이 좋게만 해석되지는 않는다. 그녀가 노예제 폐지를 주창한 까닭이 오른 왕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콘라드 왕국의 왕자, 레안 드 예리엘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라는 설도 있다.
2) 콘라드 왕국 교회를 장악하고, 수도교회와 대립각을 세우던 베르크 추기경을 회유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3) 레안 드 예리엘 대공이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현재로서는 정론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