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102)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102화(102/439)
102―――――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라
헬렌이 클라우젠 영지를 떠난 건 다음 날 새벽이었다.
아직 대부분의 성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리히텐 변경백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정기적으로 식량을 보낼 것이며 거기에 상단 행렬도 섞일 테니 잘 부탁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성을 나서는 와중에, 헬렌은 아까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한 시선의 주인공을 발견하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어제 일이 떠오르자 부끄럽기도 하고, 괜스레 과거의 악몽이 남들에게도 전해진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자님.”
“알면 다행이네.”
팔짱을 낀 채, 시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답했다.
무척이나 이른 시간이었지만 시온은 별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
헬렌의 앞으로 걸어 나온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좀 어때.”
“무슨 말씀이신지.”
“복수가 끝나고서 시간이 좀 지났잖아?
그리고 너를 이용해먹으려던 그 잘나신 요정들도 전부 떨어져 나갔고.”
“···.”
“더는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 느낌이 어떠냐고 묻고 있는 거야.”
시온의 질문에 헬렌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바보 같았지만, 정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텅 비어있었다.
복수의 끝이 허무하다거나, 마음이 불편하다거나 등의 신파극은 결코 아니었다.
그 가증스러운 카슈가르 백작가가 통째로 무너지고, 그 안에서 그동안 왕가 몰래 들이던 노예들이 발견되면서 카슈가르는 회복 불가 상태로 망가졌으니까.
통쾌했고, 후련했으며,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래, 분명 그 때 나는 즐거웠어.
그런데 그 이후로···.’
목표가 사라지니, 순식간에 길을 잃었다.
상단을 여전히 이끌고 있기는 한데, 뭔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없으니 흥미는 물론이고 상단을 유지해야 할 이유조차 흐릿해졌다.
만약 이번 상단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상단주를 내려놓았을 지도 모르겠다.
굳이 자신이 동행할 필요도 없었는데, 클라우젠으로 온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였다.
시온 클라우젠, 그 남자가 자신에게 답을 가르쳐주지는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런 내용의 이야기는 해보지도 못 했다.
어제 노예로 붙잡혀 큰일을 당할 뻔 했던 묘은족 여인을 봤을 때.
그러나 자신처럼 잔혹하게 대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남자 옆에 붙어있으며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기운을 내뿜는 그녀를 봤을 때 안도감이 들고, 슬프고, 부러워서.
그렇게 온갖 감정이 혼합되어 눈물로 쏟아지는 통에 말도 꺼내보지 못 한 것이었다.
“모르겠습니다.”
해서 헬렌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모르겠다?”
“네.
공자님을 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은···.”
“그러면 알아가야지.”
뭘 당연한 것을 말하고 있냐는 듯 시온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거래 대금으로 요구한 식량 외에, 왕성의 거대 상단으로써 왕국 곳곳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있잖아?
극히 평범한 것부터 민감한 부분까지 말이야.”
“···단순히 장사일로만 먹고 살기는 빠듯하니까요.”
“좋네.
그에 관련해서 내가 일을 좀 줄까 하는데.
넌 정보를 모으고, 나는 그걸 사는 거지.”
시온은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상단 입장에서는 꽤나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문제였다.
하이네스는 기본적으로 왕성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상단이다.
때문에 혹 이상한 소문이 돌까 일부러 다른 귀족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또한 정보 수집은 자칫 스파이 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는 무척이나 민감한 일이다.
헬렌 입장에서, 그리고 하이네스 상단 입장에서 클라우젠과 손을 잡는 것은 위험 부담이 꽤나 가는 문제들이라는 소리였다.
“클라우젠의 후계자님인 시온 공자님이 왜 왕국 전역의 정보를 모으시려 하십니까?”
“정확히는 전역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지역의 정보들이지.
그리고 그런 정보들을 모으는 이유들이야 당연하잖아.
왕국에 가해질 다른 위협을 사전에 찾아서 방지하자는 거 아니겠어?”
“···제가 보기에는 마족과 붙어 계시는 공자님이 더 위협적으로 보입니다.”
“내가 그 급진파 요정들과, 그리고 노예상인들과 동류라는 소리인가?”
마지막 말은 헬렌을 도발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말이었다.
시온의 예상대로,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시온을 쳐다보았다.
“잘 들어, 헬렌.
정말 릴리트님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마족이었다면.
내가 그 마족의 꾐에 넘어가 이상한 짓을 벌일 거였으면 왕궁에서 했고, 그 전에 이 클라우젠 영지에서 했으며 이종족 노예들을 구하기는커녕 한 아름 사들고는 아주 재미나게 가지고 놀았을 거야.”
“···.”
“상인이라면 동화나 신화를 믿기 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손익을 따지는 게 정상 아닌가?”
“그렇긴 하지요.”
“그러면 판단해봐.
나라는 인간은,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놈은 과연 너한테 이득을 가져다 줄 인간이지 아니면 손해를 끼칠 인간인지 말이야.”
그렇게 말한 시온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판단을 내리든 존중은 하겠지만, 그래도 이쪽의 거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는 말을 남겨둔 채.
“···그 묘은족 말입니다.”
헬렌이 입을 열고는 걸음을 옮기던 시온을 붙잡았다.
“아직 성체가 아니더군요.”
“아직은 이지.
조만간 다 크지 않을까 하는데.”
“···행복해 보이더군요.”
“좋은 남자를 만나서 말이야.”
스스로가 생각해도 상당히 닭살 돋는 말이었지만, 시온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렇게 답했다.
그에 헬렌은 잠시 시온을 바라보다가 제법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해보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저도 그런 구원을 받았으면 했습니다.
이제는 늦어버린 과거가 되었지만.”
“헬렌 하이네스.”
“그 여인을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보아하니 은인 그 이상의 대상인 것 같은데.
묘은족은 질투가 심하니 조심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확실히 그래 보이긴 했다.
헬렌은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숙이고는 작별 인사를 했다.
“상단 행렬이 주기적으로 클라우젠에 당도할 터이니, 제게 맡기실 일이나 부탁하실 일이 있다면 전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거래금은 받을 것이니 공짜는 꿈도 꾸지 마세요.”
“나 돈 많다.
걱정 말고 시키면 열심히 하기나 해.”
아무 이유 없는 공짜는 이쪽도 사절이었다.
옛 성현들의 말씀에 따르면, ‘공짜 점심’ 은 없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헬렌.”
“네, 공자님.”
“남쪽을 주시해.”
남쪽, 이라는 말에 헬렌은 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어느 곳을 주시하라는 말도 이상했지만, 그곳이 남쪽이기에 더 이상했다.
“해적들이 완전 소탕된 지 3년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바닷길이 번창하여 평화로운 무역 도시만이 가득한 남쪽을 주시하라는 말씀입니까?”
“입장을 돌려놓고 생각해봐.
너가 히스파냐를 혼란에 빠트릴 목적이라면, 왕성과 클라우젠 다음으로 과연 어디를 치는 것이 좋을까?”
시온의 말에 헬렌은 잠시 침음을 삼켰다.
확실히 남쪽은 3년 전 해적들을 소탕하고 나서 바다를 통한 무역 행렬이 안정적으로 진행되었고, 곧 히스파냐의 무역을 책임지는 지역이 되었다.
모든 위협을 제거하고 이제 완벽한 안전 지역이 되었다지만, 일단 한 번 피해를 입으면 왕국 전체에 타격이 갈 수도 있는 지역이었다.
“알아들었으면 정보 수집에 착수해.
걸리지 않게 은밀히.”
“···알겠습니다.”
시온은 이것으로 제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슬쩍 헬렌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고는 말했다.
“잘 가.
다음에 또 보자고.”
“네, 시온 공자님.
그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생했어.
여태 잘 버텨줘서.”
“···예?”
헬렌이 반문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시온이 이미 몸을 돌려서는 성 안으로 돌아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헬렌은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감사··· 합니다, 시온 공자님.”
―
지미 페이커는 자신의 몸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부상을 입었을 때만 해도 이대로 전장에서 죽겠구나, 싶었을 정도의 중상.
하지만 그 때 전혀 뜻하지 않은 인물이 나서서 자신을 구해주었고, 결국 그는 후방으로 옮겨져 필요한 치료를 받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꿈같네.’
지미는 뒷목을 긁적였다.
곁에서 지내던 부상병들도 진작 치료가 끝나서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갔고, 이제 남은 이들은 자신과 같은 중상 환자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던 이들 뿐이었다.
“오오, 너도 오늘 드디어 병동 탈출이냐?”
퇴원 검사를 맡고 병동으로 돌아온 한 중년 병사가 그렇게 말하자 지미는 씨익 미소를 짓고는 답했다.
“네, 아저씨.”
“축하한다.
집에 돌아가면 푹 쉬어라.”
“그동안 푹 쉬었는데요, 뭐.”
“자식이?
다 나은 것 같다고 몸 험하게 굴리다가 진짜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오히려 상처가 막 다 나았을 때가 더 중요하고 조심해야 하는 때야.
늙은이의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몸 관리 잘 해.
젊을 때 몸 아프면 죽을 때까지 고생이야.”
평소에는 무척이나 장난기 많은 중년의 남성이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 지미는 저도 모르게 미소만 지으면서 경청하게 되었다.
“저 아저씨 말이 맞다.
젊어서 아프면 개고생이야.
인생 선배의 말씀은 새겨들어야지.”
지미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병동 입구에서 들려왔다.
그러자 지미와 중년의 병사는 바로 정자세를 취하고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시온 클라우젠 공자님.”
“드디어 집으로 가는 모양이네.”
“네.
공자님의 하늘과 같은 은혜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알면 됐어.”
킥킥거리며 웃어대는 시온.
저렇게만 보면 지극히 철이 없고, 그저 아이 같은 모습의 청년이었지만, 지미도 그리고 중년의 병사도 저게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건 그저 클라우젠을 위해 힘껏 싸웠던 자신들에게만 허락하는 그의 부드러운 모습.
그들은 아직도 전쟁터에서 병사 하나를 구하기 위해 불길을 뛰어넘고 적이 지척에 있음에도 미친 듯이 내달리던 그 젊은 후계자의 모습을 잊지 못 했다.
‘너희들의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너희의 뒤에 또한 내가 있을 것이다.’
‘저 빌어먹을 전장에, 아무도 남기고 오지 않겠다.’
약간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이 가득한 연설이었지만, 병사들은 시온이 그저 말만 번지르르한 소문 속의 망나니 후계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세상 어느 귀족이 병사 하나 구하겠다고 사지로 뛰어들 수 있겠는가.
“가자.”
“예?”
“잊었어?
너 다 나으면 내가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했잖냐.”
“무,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정말로···.”
“그러면 내가 장난이나 좀 치겠다고 농담이라고 한 줄 알았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는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의 시온.
그에 지미는 식겁을 하며 도리질을 치고 손을 내저었다.
다른 이도 아니도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후계자가 한 말이었다.
“내가 살린 목숨이니 집까지 고이 배송해드려야지.
겸사겸사 영지민들도 좀 살피고 말이야.
듣자하니 네 집은 이곳 성 내부의 도시가 아니라 좀 떨어진 곳의 마을이라며.”
“거, 거기까지 알고 계시다니···.”
당연하지.
넌 모르겠지만 네 동생이 장차 이 나라를 불바다로 만드시는 흑염룡이 된단다.
시온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만약 지미 페이커를 늦게 발견했고, 그대로 그가 목숨을 잃었다면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장차 히스파냐를 시원하게 날려버릴 흑염룡이 태어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뻔 했었다.
“대신, 이런 서비스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지미 페이커.
다음부터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구원을 하는 녀석이 되기를 바라마.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 한 전우들을 네가 구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널 살리려고 애썼던 것이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아악!”
갓 전입한 이등병이 군단장의 어깨 두드리기에 화답하듯 아주 우렁하게 대답하는 지미였다.
시온은 어서 따라오라며 그를 안내했다.
덕분에 지미는 다시 한 번 식겁을 하고 말았는데, 으리으리한 마차가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고, 공자님!
이, 이건 대체!”
“전장에서 훌륭히 싸운 병사 바래다주는데 이 정도는 해야 내 자존심이 안 떨어져.”
“그, 그래도···.”
“안 타면 기절시켜서 짐칸에 구겨 넣는 수가 있다.
얼른 타.”
시온의 싸늘한 충고에 지미는 뻣뻣하게 굳어서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비스듬히 기대어서 앉아있었는데, 지미로써는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주인님.
출발 준비 다 되었습니다.”
호위를 맡은 리시키다가 공손한 기색으로 그렇게 알려왔다.
고개를 끄덕인 시온은 마차에 오르기 전에 지붕 위에 앉아서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는 리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정말 거기에 있을 거야?”
“냐앙.
안에서는 시온을 지키기가 좀 어려워.
그리고 그, 뭐랄까.
옆에 있으면···.”
갑자기 리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슬쩍 다리를 꼬며 가랑이를 꼭 모은 후에 부끄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시온만 보고 있으면 자, 자꾸 하고 싶어지는걸.”
“···그냥 계속 지붕에 있어라.”
분명 발정기도 끝났고 캣닢도 그 때 쓰고 말았는데, 자꾸 시온을 원하는 눈치였다.
단백질도 좀 적당히 뺏겨야 살맛이 나는 터라 시온은 리아의 유혹을 가볍게 뿌리친 채 이번에는 마부석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
마부석에 앉은 남자에게 그렇게 말한 시온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리시키다가 출발 신호를 보냈고, 앞서 있던 기사들이 말의 옆구리를 쳤다.
“···.”
오늘도 마부석에 앉은 김유현은 흐음, 하고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무림에서는 지존이라 불렸던, 비록 지금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상급 기사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강자인 바로 자신이.
“출발하시죠, 유현 경.”
“···알겠다.”
어째 마차를 탈 때마다 일일 마부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
―――――――작품 후기―――――――
마부가 너무 강하다 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