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143)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143화(143/439)
143―――――
홀로 서있기 싫다면
“···그런 이유로 일단 혼인 동맹을 맺는 것으로 최종 합의를 봤습니다.”
일주일간의 혹한기 훈련, 정정.
칼타 행을 마친 시온이 제 일행들이 모인 천막 안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의 보고를 끝마치자 다들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
특히 아까부터 말없이 시온을 바라보고 있는 릴리트의 표정이 심히 압권이었다.
화가 난 표정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도 아닌, 그냥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얼굴.
덕분에 시온은 속으로 마른 침을 128번은 삼키며 다른 이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시온 클라우젠 공자님.”
“네, 슈마허 부단장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북부 야만 부족의 전사와 갑자기 혼인 동맹이라니···.”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서로가 서로의 사정이 있으니 바로 진행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지금 오고 간 이 약속은 왕국과 북부와의 긴장 상태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함이죠.”
혼인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이쪽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국왕의 대리자 자격으로 올라온 인물.
바로 결혼하고!
신혼여행 가고!
북부에 살림 차리고 딱!
하고 살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칼타의 여러 부족장들과 전사들도 바로 그 점을 빌어 둘의 혼인 동맹이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직후 이어진 쟌의 한 손으로 모가지 비틀기 쇼에 의해 제압당했지만 말이다.
“슈마허 부단장님은 북부 출신이라고 하셨으니 여기 사는 부족들에게 있어 혼인 동맹이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아실 겁니다.”
“···그렇지요.
일단 맺어지면 어지간해서는 깨트리지 않는 협약과도 같으니까.
혼인이 유지되는 이상 먼저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치욕 중의 치욕으로 여겨지니 말입니다.”
“별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북부의 여러 부족들을 달래기 위한 물품이 아직 출발도 하지 못 한 상황에서 모두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 이었으니까요.”
최선, 이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넣는 시온이었다.
당연히 상황 모르고 있던 릴리트와 트리샤에게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니 상황 설명을 따로 해줄 시간을 좀 달라.’ 라는 뜻이었다.
일단 그 둘은 그렇다 치고, 슈마허 부단장의 얼굴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원래라면 왕국의 유력한 귀족 가문과 혼약을 맺어도 모자람이 없을 귀족 중의 귀족이 제 나라를 위해 올가미 안에 스스로 들어간 꼴이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결국 그 태생은 북부 야만 부족.
아무리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귀족들의 세계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님은 슈마허 부단장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이 천한 여인과 연을 맺고, 왕국의 고귀한 피와 야만족의 피가 섞인 아이를 낳을 거라며 낄낄거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벌써부터 분노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슈마허 부단장이었다.
시온 클라우젠, 저 한창 때의 젊은이가 제 모든 것을 희생해서 이 나라를 안정케 하고자 함은 전혀 모르는 채 저들끼리 신나서 떠든다고 하니, 없던 살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분노를 애써 가라앉혔다.
자신도 아는 이 미래의 일을 시온 클라우젠, 저 대단한 귀족이 모를리 없다.
분명 모든 것을 훤히 내다보면서도 제 나라를 위해 스스로가 희생했을 뿐이겠지.
“···국왕 전하께서 무척 안타까워하시겠군요.
바네사 왕녀님도 그렇고.”
슈마허 부단장의 중얼거림에 시온이 ‘에?’ 하고 반문하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자신은 이만 나가보겠다고 말하곤 천막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안에 남은 인물은 시온을 제외하고 모두 넷.
릴리트, 트리샤, 리시키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기둥에 기대어 서있는 김유현이었다.
“흠흠, 저기··· 릴리트님.”
트리샤도 문제였지만, 역시나 이 상황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쪽은 릴리트.
시온이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물끄러미 시온을 응시하던 서큐버스 퀸은.
“나도 간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미처 시온이 붙잡기도 전에 천막 밖으로 나가버렸다.
‘좆됬다.
슈퍼 좆됬다.’
시온은 당장이라도 머리를 싸매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 시대의 진정한 대현자이신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기를, ‘여자가 삐쳤다면 일단 남자는 좆 된 거다.
이유고 자시고 무조건 좆 된 거다.’ 라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그 삐친 이유가 명백한 자신 때문이었으니 더더욱 속이 타들어갔다.
“···그 년.
역시 죽여야 했어.
어디 있어요.
어디야, 그 태워죽일 년.”
그리고 잔뜩 토라진 릴리트와는 반대로,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번뜩이며 시온의 앞으로 다가오는 여인은, 역시나 트리샤였다.
참고로 말하는데, 단순히 이글거린다는 것이 눈동자만을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성흔의 기운으로 인해 그녀 주변의 마나가 가열되며 공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대폭발이라도 일어날까, 시온은 노심초사하며 가장 먼저 심지에 불이 붙은 폭탄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진정해, 트리샤.
어쩔 수 없는 문제였어.
이건 왕국을 위해서 결정한 일이라고.”
“다 필요 없어요.
내게는 시온님 외에는 의미가 없다고요.
그 왕국인지, 여기 있는 야만족들이 문제라면 내가 다 태워줄게요.
얼마가 걸리든, 설사 내가 죽어 없어지더라도 가능한 모든 것을 불태워줄게요.
말만 해요.
시온님.”
“···.”
다 불태워 주겠다는 그 말이 어째 소설에서 보던 그 미친년과 정확히 매칭되는 것 같아 움찔, 하고 몸이 떨릴 정도였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날 것 같은데,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트리샤는 도통 진정할 줄을 몰랐다.
오죽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껴졌으면 리시키다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김유현이 ‘제압할까요.’ 라고 슬쩍 소매를 걷어 올릴 정도였다.
하지만 시온은 주변에 서있던 두 남녀 검사를 손짓으로 말렸다.
여기서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이 나서는 건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장작을 집어넣는 꼴, 기름을 끼얹는 수준이었다.
‘아이가 말 안 들을 때에는 보호자가 세게 나가줘야 하는 법이지.’
그렇게 생각한 시온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트리샤의 입술을 잡아챘다.
“으븝?”
“트리샤, 내가 분명 경고했어.
내 뜻에 따를 생각이 없다면, 내 사람을 해칠 생각이라면 나도 너를 더는 안고 갈 수 없다고 말이야.”
“으읍!
으브븝!”
“나한테는 이번 일이 아주 중요해.
그런데 그걸 네가 망치려고 드는 거야.
네가 날 망치려고 하고 있다고.
네가 놓은 불길에 나까지 같이 불타기를 바라는 건가?”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 서늘하게 굳은 눈동자.
시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냉혹한 모습을 내보였다.
그러자 트리샤의 몸이 움찔, 하고 크게 떨리더니 주변을 뜨겁게 달구던 기세도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트리샤가 어느 정도 진정한 것을 확인한 시온은 붙잡고 있던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더니 조금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프잖아요.”
“난 더 아파.
네가 날 믿지 못 하고 대책도 없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시온님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알아.
다 안다고.
그래서 더더욱 걱정 되는 거야.
날 위한다고 하며 네가 일을 벌이다가, 혹여나 그걸 막겠다고 내 사람들한테 네가 다칠까봐.
그러면 난 어느 누구도 원망할 자신이 없거든.
차라리 나 스스로를 책망하고 말지.”
“그, 그건!
그건 아니에요!
절대 저로 인해 시온님이 아픈 일은 없을 거예요!”
“네가 그렇게 다 불태우겠다고 할 때 나는 이미 충분히 아팠는데?”
“끄으으으··· 그럴 수가···.”
왕국이고 평화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이, 트리샤라는 이는 오직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 제 옆에 있으면 만사 OK 인 여인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은, 그러면서 그 상대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애정이라고 해야 할지 집착이라고 해야 할지 모호할 정도로 불꽃같은 캐릭터다.
‘그 불꽃을 남이 통제하게 하면 오히려 그 크기만 더 키울 뿐이다.
스스로 줄이고, 또 줄이고, 종국에는 아예 스스로 그 불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제어가 가능해야 한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라도,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다룰 수 없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주변 사람과 자신 모두가 다치기 딱 좋은, 그 뿐인 것에 불과하다.
트리샤를 곁에 두기는 했지만, 아직 완벽히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그녀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단 하나, 바로 자신이 그 이유가 되는 것이다.
“네 마음은 나도 잘 알아, 트리샤.”
조금은 세게 붙잡았던 여인의 입술을, 이번에는 부드러이 쓸어준다.
보드랍고 따스한 촉감에 저도 모르게 몇 번 더 만지고 있으니 금방 트리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서는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초조하고, 답답하겠지만 기다려줘.
내가 마음 놓고 네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을 때까지.”
그윽한 시선은 보너스로 넣어준다.
시온의 완벽한 작업에 트리샤는 ‘끼이잉!’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시온의 뒤에 서있던 리시키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영 좋지 못함을 깨닫자 하늘을 붕 떠오르는 것 같은 승리감과 함께, 약간의 부끄러움까지 함께 일렁였다.
“저, 저도 가볼게요.”
쟌에 대한 분노는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시온에게서 용서를 받음과 동시에 이해까지 받고,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확신.
트리샤는 릴리트가 그런 것처럼 후다닥!
하고 재빠르게 천막을 나가버렸다.
아마 이대로 돌아가서는 침낭 안으로 들어가서 행복함에 ‘아으으!’ 하고 뒹굴 거릴 테고 말이다.
“하아.”
한숨을 내뱉은 시온은 뒤에서 알게 모르게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리시키다를 불렀다.
트리샤를 달랬으니 이제 이 귀여운 강아지 같은 여인을 보듬어줄 차례였다.
“고생했어, 리시.”
“아닙니다.
주인님이 저보다도 훨씬 더···.”
“이런 때에는 그냥 조용히 하고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시온은 리시키다의 반짝이는 금발을 쓸어내렸다.
치장하는데 시간을 다 쓰는 귀족 영애가 아닌, 매 시간마다 검을 휘두르고 제 몸 단련하기에 바쁜 여인이지만 오히려 그런 귀족 영애들보다도 머릿결이 훨씬 고왔다.
아마 기사가 아니라 평범한 여인으로 지냈다면, 분명 많은 남자들의 속을 뒤흔들 미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가서 좀 쉬어.
아예 한숨 푹 자.
너 칼타로 간 동안에 제대로 잔 꼴을 못 본 것 같다.”
“···주인님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그게 피곤한 일이었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결코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
오, 오히려··· 자는 시간조차 너무 아까웠습니다.
주인님의 품에서 그렇게 안겨있을 수 있는데요.”
워우, 그 말 릴리트님이 들었으면 안 그래도 심각한 상황 더 심각해질 뻔 했네.
시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리시키다에게 조용히 ‘그 이야기는 되도록 둘이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하자.
알겠지, 리시?’ 하고 답을 이끌어냈다.
리시키다가 순순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온은 고맙다는 뜻으로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고, 그녀 역시 앞서 두 여인이 그러했듯 재빠르게 천막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이고.’
정말 미래가 걱정된다, 걱정 돼.
시온.
스스로에게 그리 질타를 하며 시온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아까부터 ‘나는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 했음.’ 이라고 온 몸으로 말하듯 팔짱을 낀 채 애써 벽을 바라보고 있던 김유현이 자리해 있었다.
“모른 척 해줘서 고맙다, 김유현.”
“원래 남녀간의 일에는 죽어도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당연한 겁니다.”
새끼, 그런 부분은 또 잘 배웠네.
라고 중얼거린 시온은 김유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냥 도중에 나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굳이 끝까지 자리에 남아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에게 뭔가 볼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온 공자.
실은 당신에게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김유현이 전해준 그 이야기는, 시온에게 있어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
“릴리트님.”
릴리트가 머무르고 있다는 천막에 다다른 시온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만에 하나 뭔가 날아올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설마 릴리트가 자신을 죽이겠나 싶은 마음, 거기에 ‘네가 생각하기에 확실히 잘못한 거 있으면 여자가 얼마나 화를 내던 일단 빌어라.’ 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수행하기 위해 시온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온은 곧 침낭 안에서 움찔거리는 뭔가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그 곁으로 다가갔다.
“···릴리트님.”
슥슥―.
침낭 안에서 새하얗고 고운 팔 하나가 쑥, 하고 튀어나와서는 손을 흔든다.
이리로 조금 더 다가오라는 뜻에 시온이 그 곁으로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쑤욱, 홱!
“게엑!”
쥐면 부러질 것 같이 곱고 여린 손 어디에서 그런 무시무시한 악력이 튀어나왔는지.
시온은 그대로 멱살을 잡힌 채 침낭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버둥거리며 일어서보려고 하는데, 릴리트의 양 손과 가슴이 자신을 누르고 있어서 그럴 수조차 없었다.
“너, 내가 해준 경고는 귓등으로도 안 들은 거니?”
으스스한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자 시온이 몸을 움찔 떨었다.
차라리 무슨 표정, 어떤 눈동자를 하고 있는지 알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건 전혀 관찰하지 못 한 채 이렇게 여인 품에 안겨서 서늘한 목소리만 듣고 있자니 더더욱 죽을 맛이었다.
“누, 누님.
일단 제 말 좀 들어보시고···.”
갑자기 시온의 턱이 홱!
하고 위로 들어 올려졌다.
그의 턱을 붙잡은 릴리트는 잠시 제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시온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때보다도 격렬하고 화끈한 키스에 시온은 순간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화가 났거든.”
입술을 떼어낸 직후, 릴리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꽤나 무서운 말이었다.번쩍이는 붉은 눈동자에서 당장이라고 불길이 쏟아질 것 같아서 시온이 꿀꺽, 하고 침을 삼키자 그녀는 킥킥 웃더니 제 검지를 혀로 할짝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네가 거짓말은 안 했구나 싶네.
그래서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어.”
“예?”
“누님 스타일 좋아한다며.
솔직히 리아부터 시작해서 트리샤, 그 녀석까지 보면 네 취향이 수상하기는 했는데.
그 인간한테 바로 넘어간 걸 보니 역시나 누님 취향이 맞구나 싶었지.”
“···.”
그걸 또 그렇게 생각해주신 누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시온이었다.
릴리트가 바보라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번 일을 이해해 줄 수 있다며 시온에게 핑계, 혹은 도피처를 만들어 준 셈이다.
“···죄송해요, 릴리트님.”
“이해해.
너희 인간들이 생각보다 훨씬 피곤하게 사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 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귀족 인간과 이어질 수도 있는 법이지.
걱정 안 해도 된단다.
난 트리샤, 그 버릇 없는 꼬맹이처럼 다 태우겠다고 되도 않는 소리는 안 할 거니까.
대신.”
릴리트의 두 눈동자가 더욱 심하게 반짝인다.
그 안에 담긴 감정, 독점욕, 질투, 욕망 등이 이글거리고 있음은 어느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시온 역시 눈치가 느린 편이 아니라 잔뜩 긴장한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배고픔을 더 앞당기는 일이 될 수도 있어.
네 옆에 있는 이 누님이 서큐버스 퀸 인건 인지하고 있는 거지?
자꾸 경쟁자가 생기면 나라고 해도 언제까지 마음씨 넓은 본처 행세를 할 수가 없단다.
설마 시온, 너는 내가 그 무한 경쟁의 장으로 뛰어들기를 원하는 거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첫 번째는 누가 뭐래도 누님이죠!
암, 그렇고말고요!”
허우적거리며 마치 간신배마냥 그렇게 답하니 릴리트가 ‘그래, 당연히 그렇지.
난 영원히 네 거고, 넌 영원히 내 거니까.’ 라고 말하며 연신 할짝거리던 제 검지를 시온의 콧등에 콕, 하고 들이댔다.
“내 거야.
내가 침 발라둔 거야.
혼자만 독식할 수는 없다고 해서 참고 있는데, 내가 나눠먹을 게 부족해지면 나도 그 때는 깡패가 되는 거라고.
알겠니.
시온?”
아유, 암요!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시온이 싹싹 빌며 그렇게 말하니 릴리트도 조금은 마음이 풀어졌다는 듯 침낭에서 슬며시 기어나와서는 시온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설명.”
“예?”
“어쭈?
이 누님을 바보로 보니?
네가 뭐 여자에만 홀딱 넘어가서 그걸 덜컥 수락했을까봐?
분명 너한테 이득이 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그랬겠지.
아니야?”
이야, 역시 릴리트님이시네.
라고 중얼거리며 시온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쟌의 혼인 동맹을 수락한 이유는 왕국과 야만 부족 간의 부분도 있지만, 거기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이유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릴리트님.”
“응, 시온.”
“제가 조금은, 아주 ‘쬐끔’ 은 강해질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후기―――――――
응 ,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