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176)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176화(176/439)
176―――――
마지막 선물이란다
시간을 돌려서, 에라더 왕자가 출항을 하고 난 바로 직후.
시온은 사르데나 항구와 관련된 일을 잠시 헤먼에게 맡기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원래라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망각하고 자꾸 어딘가로 돌아다닌다고 말이라도 나왔을 테지만 이건 웃기게도 에라더 왕자가 만들어준 부분이었다.
시온에게 쏠려있던 관심을 그가 챙겼기에 오히려 시온은 전보다 훨씬 적어진 눈길 덕분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에 더해서 조금씩이지만 시온의 자리를 깎아내리며 동시에 헤먼 이시크의 자리를 올려주었기에 그에게 사르데나 방어를 잠시 맡긴다고 해도 문제될 것도 없는 부분이었다.
달칵―.
별 다른 노크도 없이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온.
그 안에는 한창 뭔가로 골머리를 싸매고 끙끙대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끄으으응···.”
“저 왔습니다, 라이도님.”
“···.”
“아, 장인어른이라고 부를까요?”
“이익!
시끄럽다.
장인 될 사람한테 이런 무식한 것을 내던져주는 사위가 어디 있다고!”
시온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바로 화를 내는 라이도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정말 몸을 쓸 것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현 상황이 너무 답답하여 미치겠다는 것뿐.
“도대체 이딴 게 왜 필요하냔 말이다!
마법사가 귀한 것도 아니고 맨날 처먹고 잠자고 연구실에서 뒹구는 놈들이 몇인데!
그런 놈들 불러다가 그냥 마법 좀 쓰게 만들면 되는 것을···.”
“압니다.”
“들어가는 시간과 인적 자원 소모가 워낙 극심해서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졌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거냐?”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한데 도대체 왜 마법 스크롤에 목숨을 거느냔 말이다.
그것도 그냥 마법사 놈들 시키면 될 정도의 단순한 플레임 스트라이크 마법을!”
현재 라이도가 불려 와서는 ‘너무나 소중한 사위의 부탁’ 이라며 하고 있는 일은 바로 스크롤에 마법 수식을 새기는 것으로 마법사의 땀내 가득한 온갖 고생이 들어가야 하는 작업이었다.
원리는 간단하다.
스크롤에 마법 수식을 새겨서 그것을 찢었을 때 마법이 발동되는 것.
하지만 원리만 간단하지, 그 마법 스크롤을 제작해야 하는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토악질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극악한 물품이었다.
“마법 수식을 새기다가 개미만한 실수라도 하면 바로 망한다.
심지어 마법 발현에 필요한 마나를 항상 일정하게 불어넣어야 하기 때문에 마법사가 아니면 할 수 조차 없는 작업이다.”
“동시에 아무리 마법 수식을 다 새겨 넣었다고 해도 중간에 실수한 과정이 있으면 찢어볼 때까지는 제대로 마법이 발현되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다죠.”
“그래.
그래서 불량 확률이 높아도 너무 높았지.
확인을 하자니 스크롤을 찢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결국 다시 작업해야 하니까.
그런데 다시 작업할 때 티끌만한 실수를 했다?
그러면 이건 또 불량인 거지.
작업하는 마법사도 이게 불량품인지, 아니면 성공인지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래도 라이도님과 같이 실력 있는 마법사분들은 불량 확률이 낮지 않겠습니까?”
시온의 말이 맞기는 하다.
숙련된 마법사들은 마법 스크롤 제작에 보통의 마법사들보다는 확실히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보자면 그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들이 굳이 마법 스크롤 제작에 목을 맬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말은 잘 하는 구나.
하지만 반대로 보자면, 그만큼 실력 있는 마법사 놈들이 미쳤다고 마법 스크롤 제작을 부탁한다고 해줄 것 같느냐?
맨날 시간 부족하다고 징징대고, 자신들이 얼마나 귀한 몸인지 주장하며 모가지에 힘주고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놈들이?”
“그렇긴 하죠.”
“그리고 말이다.
마법 스크롤이 상용화 되는 일은 결코 없다.
이유는 너도 잘 알 텐데?”
라이도의 질문에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간단한 문제다.
실력 없는 초짜 마법사도, 실력이 뛰어난 숙련 마법사도.
마법 스크롤이 널리 퍼져서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일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유?
당연한 거 아냐?
그게 상용화 되면 누가 마법사를 우대해줘?’
당장 돈이 된다고 해서 마법 스크롤을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순간, 마법사는 그대로 멸종이다.
마법사들이 왜 우대를 받느냐?
바로 ‘마법’ 이란 고도의 기술을 다루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나를 잘 다루는 상급 기사라고 해도 마나를 다루는 것과 마법을 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만큼 마법사라는 직종은 그 특수성과 희소성을 인정받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마법 스크롤은 바로 그 마법사의 위치를 위협하는 물품이다.
그 위험천만한 물건을 어느 마법사가 좋다고 대량으로 찍어내겠는가.
물론 대량으로 찍어낼 수도 없고, 일일이 손으로 제작해야 하는 1차적 문제가 있고, 거기에서 발생할 상당량의 불량품이 2차적 문제겠지만, 그걸 다 떠나서 자신의 특권을 스스로 갉아먹는 미친 짓을 벌일 놈들은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마법 발현은, 마법사들의 특권이니까요.”
“그래.
그런 이유로 이미 10년도 지난 훨씬 전에 잠깐 유행을 탔던 물건이다.
요즘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귀족들도 잘 안 찾는 물건이야.
가짜도 워낙 많고, 불량품은 더 많으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죠.”
“그런데 도대체 왜 이걸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거냐.
혹시 왕성 습격을···.”
“농담 적당히 하세요.
애초에 마법 스크롤에는 마법 발현을 위한 마나가 깃들어 있기에 당연히 마법사들의 탐지에 걸린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바로 정색을 하며 시온이 싸하게 얼굴을 굳혀보이자 라이도는 ‘에잉, 재미없는 사위 새끼.’ 라고 투덜거리며 다시 마법 스크롤 제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온은 그런 라이도의 노력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루시아는 뭐하고 있답니까?”
“···.”
“라이도님?”
“아, 좀.
시끄럽다.
네놈 때문에 이 나이에 이리 집중해서 작업을 하는 중인데 왜 자꾸 말을 거는 거야.
나 망하라고 아예 물 떠놓고 기도라도 올리지 그러냐.”
“그 때 만나서 인사 한 번 한 이후로 안 보여서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서라.
요즘 거의 방법을 찾았다고 하여 나조차도 쫓겨났을 정도다.
괜히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둬라.
원래 깨달음 직전이 항상 힘든 법이니까.”
라이도의 말에 시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문을 닫고 나갔다.
쾅!
소리와 함께 시온의 기척이 사라지자 계속해서 작업을 하던 라이도는 문득 생각하니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니, 근데.
이놈은 정말 가란다고 가네.
이런 빌어먹을, 딸내미한테 또 바가지 긁히겠구만.”
이러면 작전 실패인데.
라이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러다가 삐끗하여 마법 스크롤의 수식 부분에 흠집이 생기자 바로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이런 빌어처먹을!
개썅!
에라이, 시발!”
한편, 시온은 여러 생각에 잠긴 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일단 이번 일에서 릴리트는 최대한 뒤로 빠져 있어야 한다.
성전까지 벌어진 상황이라면 천족의 끄나풀들이나 요정 놈들이 어디서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때에 릴리트를 노출시켜서 자신에게 좋을 것이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마법 스크롤로 어떻게 해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라이도라고 해도 마법 스크롤을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정신을 깎아내야 하는 일.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한정적인 ‘수작업’ 이다 보니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돈을 아무리 줘도 싫다고 할 정도였다.
그나마 라이도도 플레임 스트라이크라는 중급 마법을 새기고 있기에 욕을 하면서도 일단 해주는 것이지, 만약 더 어려운 상급 마법을 해달라고 했다면 아마 바로 시온의 뚝배기를 깨부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마법사를 사용하는 게 훨씬 이득이긴 해.
스크롤은 진짜 쓸 게 못 되니까.
딱 1회용, 거기에 휴대가 가능하다는 것이 이점의 전부.
그 외에는 손해 왕창,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물건이다.’
그럼에도 시온이 굳이 마법 스크롤을 제작하는 건 해상에서는 마법사들이 활약할 여지가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아직 대포가 나오기 전인 상태라 해상 전투는 갑판 위에 올라 적의 배를 점령하는 백병전으로 치러진다.
즉 적들을 제압하고 적의 배를 점령하여 자신의 전력으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그러니 배 자체에는 되도록 파손이 가지 않게 노력했고, 설사 피해를 주더라도 돛에 불을 붙이거나 활대에 피해를 주어 부러지거나 제 역할을 못 하게 만드는 수준에 그쳤다.
‘거기에 애초 그렇게나 흔들리는 배 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수식을 그리며 마나를 제어하고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면 배를 오히려 더더욱 안타지.
항해 자체는 어찌 되었든 고역이니까.
그 김유현조차 견디지 못 했던 뱃멀미라고.’
딱히 마법사를 환영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활약할 수 있는 적절한 전장 환경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해상 전투는 지상전과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거의 순수한 힘 싸움, 백병전을 치르며 누가 먼저 갑판을 점령하고 배를 운용 불가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제어에 넣느냐 그 싸움이었다.
‘···하지만 내게 해적선은 필요 없다.
그러니까, 전부 불태워도 상관 할 것도 없지.’
마법을 빼면 결국 불화살을 쏘거나 직접 불을 붙이는 것이 전부다.
아마 대부분의 이들이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시온에게는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 한 ‘인간 라이터’ 가 바로 옆에 있었다.
“매번 채찍만 때렸으니 이제 슬슬 당근을 주어야 할 때인데.
문제는···.”
그 당근 한 번에 바로 눈깔이 돌아가서 정말 날뛰는 건 아닐까, 하는 것.
요즘 들어서 어느 정도 ‘자기 제어’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는 하지만 시온이 기억하는 ‘칠익’, 트리샤 페이커는 아하하!
의 웃음소리와 함께 제 사지와 목이 잘려나가면서도 왕국을 불태우던 미친년이었다.
혹시나 그녀를 믿고 조금 풀어주니 바로 본 성깔이 드러나서 ‘당신은 오직 내 것이니 다른 것들은 필요 없어!’ 라고 흑염룡스러운 대사를 내뱉을까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할까, 그냥 이번에도 패스하고 지나갈까.
아니면 이번만큼은 한 번 믿어보고 일을 맡겨보는 것이 나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시온은 결국 본능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 그는 이내 한 방 앞에 멈춰 서고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가볍게 노크를 하려는 찰나였다.
달칵―.
“어?”
“···뭐하시는 거예요?”
이미 진작 시온의 기척을 다 확인하고 있었다는 듯 문틈 사이로 트리샤가 수상하다는 기운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온다.
여태 시온이 트리샤를 이렇게 개인적으로 먼저 찾은 적이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
크흠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은 시온은 바로 표정 및 목소리 관리에 들어갔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멍하니 누워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서요.”
발소리만으로 방문 밖의 상대가 시온임을 알아차렸다는 소리였다.
이건 조금 무서운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시온은 정말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감탄사에 추임새까지 넣어보였다.
“와··· 대단한데?
리시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이제는 정말 어엿한 호위 기사가 될 수도 있겠는데, 트리샤?”
“농담하지 마세요.
제 안에서 타오르는 이 불꽃만 아니라면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시온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절로 뿌듯해지는 트리샤였다.
씰룩이는 입술을 숨기려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해보이며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뭔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도 하고··· 은데.
너무··· 서 간질··· 는데.”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시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이야기도 있고, 슬슬 넘어야 할 산도 있었기에 시온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될까, 트리샤?”
“···네.”
모기만한 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트리샤였다.
그 직후, 그녀의 방으로 들어선 시온은 저도 모르게 ‘이런 염병?’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려야만 했다.
‘이게 뭔데, 시발?’
스토커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으레 나오던 장면이 있다.
그렇게나 원하는 대상의 사진을 전부 구해서, 혹은 아예 자신이 몰래 뒤쫓아 다니면서 찍어서 벽에 전부 걸어둔 그런 장면 말이다.
이세계에는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사진기는 없다.
하지만 사진을 대신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는 얼마든지 있었다.
“···흥.”
벽 곳곳에 걸려 있는 시온을 그린 그림들.
마차 안에 타서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그림을 그린 주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
웃는 모습도 아주 가지각색의 방향에서 그려두었고 심지어 마차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는 것까지 그린 그림도 보였다.
“이걸 전부··· 네가 그린 건···.”
“이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죠?
제가 보기에 이 정도는 상당히 건전한 생활 같은데.”
“···.”
누가 보면 무슨 사건 용의자 쫓는 줄 알겠다, 이 여자야.
시온은 끄응, 침음을 내뱉고는 어찌 할까 고민했다.
트리샤가 하는 꼴을 보아하니 정말 중증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 같은데 여기서 슬슬 당근을 던져주지 않으면 그냥 말 그대로 폭주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버릴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 칠익의 반도 제거하기는커녕 찾지도 못 했다.
김유현이 있고, 릴리트가 있고, 저 멀리 쟌이 있으며 리시키다나 리아, 루시아도 성장하고 있지만 애초에 칠익 자체가 작가가 급히 설정하기는 했어도 대(對) 김유현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놈들이니 거들어줄 인원이 더 필요했다.
칠익 뿐만이 아니라 요정들, 그리고 천족들까지 전부 상대해야 하니 예비 전력이 필요함은 두 말하면 잔소리라는 소리였다.
‘칠익 중 다른 놈들을 더 쥘 수 있을까도 불확실한 상태야.
지금 상황에서 더는 내가 가져갈 수 있는 네임드도 없고, 있다고 해도 단 1년 만에 급격히 성장할 가능성이 너무 낮아.
아니, 이제는 1년도 안 되는 시간이지.’
적들이 이 몸 등장!을 외치며 나타날 때 ‘응, 어서 와.
지옥은 처음이지?’ 라고 말하며 그들을 맞이할 수 있는, 확실하고 증명되어 있는 전력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성흔을 지닌 트리샤는 일단 보유한 화력 하나만큼은 보장이 된 캐릭터였다.
솔직히 트리샤를 단순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끌고 오려고 자신이 투자한 시간이나 비용도 있으니, 그걸 위해서라도 일단 제대로 된 몸값은 뽑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트리샤.”
“듣고 있으니 말하세요, 시온님”
“조만간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하라고 일러두려고 왔어.”
“···제 도움이요?”
“그래.”
시온의 말에 트리샤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할 줄 아는 거라곤.”
탁!
화르르륵―
“이런 것 밖에 없는데.”
트리샤가 손을 튕기자 순수한 불꽃이 공기 중에서 타오르며 불똥을 내뱉다가 사라진다.
마나를 이용한 것이 아닌, 정말 자체적으로 발화한 자연 상태 그대로의 불.
즉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하면 어지간해서는 끄기가 힘들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걸 원해서 이렇게 온 거야.”
“···알겠어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게 전부야?”
“···무슨 말이죠?”
“내게 더 할 말 없냐고.”
그러자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듯 트리샤가 인상을 찌푸린다.
하지만 시온은 여전히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 앞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여태 이랬잖아요?
시온님은 내게 뭔가를 요구하고, 저는 그걸 따른다.
그렇지 않는다면 내보내겠다, 뭐 항상 그런 식으로.”
“그랬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네?
···으읏?”
시온이 갑자기 몸을 숙여서는 서로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트리샤가 뒷걸음질을 치며 벽으로 물러선다.
“시, 시온님?”
“흔하게 오는 기회가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느꼈을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눈 감아.”
“에?”
“눈 감으라고.
두 번 말 안 한다.”
갑자기 눈을 왜 감으라는 것인지.
트리샤는 왜인지 모르게 그 말을 따르고 싶지가 않았다.
화르르륵!―
하지만 그녀 안의 불꽃이 ‘너 참 눈치도 없구나.
어서 눈 좀 감아!’ 라며 미친 듯이 타오르자 결국 두 눈을 감는 트리샤였다.
그리고 바로 직후.
‘어···?’
뭔가 무척이나 따스하면서도, 말캉한 뭔가가 자신의 입술에 강렬하게 와 닿았다.
―――――――작품 후기―――――――
호고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