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19)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19화(19/439)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뛰어난 적이 아니라 멍청한 아군이다.
역사에 기록된 여러 전쟁들을 살펴보면, 분명 이길 수밖에 없는 전투에서 패한 경우가 많다.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역시나 아군 트롤 새끼들의 삽질로 인한 것.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당장 게임에서조차 한 명이 던지기 시작하면 아무리 다른 한 놈이 잘 하려고 해도 걷잡을 수 없이 승기가 기울지 않는가.
전쟁과 게임의 공통점을 꼽자면, 누가 더 뛰어난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병신인지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이번 전쟁에서 내 존재는 지뢰야.
예비 트롤러라고!’
남자라면 전쟁사 이야기 할 때 그래도 낄 수는 있어야지!
라는 생각으로 전쟁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신을 전략가로 만들어줄 리는 없다.
조그마한 상황 변화에도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어그러지는 곳이 바로 전쟁터다.
잘 싸우고 있다가 선봉장이 죽었다는 거짓 보고에 그대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고,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산 위에 아군 지휘관의 깃발이 올랐다고 대열을 정비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항전해서 결국 승리를 거둔다.
.
‘안 그래도 영지 내의 시온 클라우젠에 대한 인식은 개 좆 만한 수준인데 정말 전쟁터에까지 가면 그 때는 할 수 있는게 그냥 인간 조무사 밖에 없다니까?’
한숨을 쉬며 다시 한 번 복장을 점검하는 시온.
가장 안쪽에 질긴 천 옷을 입은 후 어디 만화나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사슬 갑옷을 걸쳤다.
그 후에 다시 두꺼운 가죽으로 덧댄 상의를 입고 그 위에 군복으로 마무리.
“너무 약하게 입은 거 아니야?
기사들은 가죽 대신 아예 플레이트 메일을 입잖아.
무게가 장난 아니게 무겁기는 해도 엄청 튼튼해 보이던데.”
“저야 선봉에서 싸우는 이가 아니니 딱 눈 먼 화살이나 갑자기 파고드는 창칼에 대비만 하면 되니까요.
오히려 너무 무거운 걸 입혀두면 체력이 금방 소진되어서 짐만 됩니다.”
무조건 많이, 그리고 튼튼하게 입는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다.
많이 입는다는 것, 그리고 튼튼하게 입는다는 것은 결국 몸 위에 걸친 것이 많아진다는 소리이고 그렇게 되면 스스로 움직이는 건 고사하고 그 사람을 태우고 있는 말까지 금방 지친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생존력을 높여주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전력 손실이 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최악의 상황.
“그보다 릴리트님.
몸은 괜찮으세요?”
“응?
아아, 걱정 마.
아프기는 했어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거든.”
“다행이네요.”
“아아―시온만 아니었으면 그 재수 없는 새끼 면상을 갈아버렸을 텐데.
너도 봤어?
그 싸가지 없는 눈빛으로 나랑 너를 막 노려보던 거?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냥 앞뒤 잴 것도 없이 아가리를 후려칠 뻔 했다니까!”
그 남자한테 영혼까지 털리고 도망치듯 물러난 게 바로 릴리트님이었는데 말이죠.
속으로 중얼거린 시온은 슬쩍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것 뿐이었나요?”
“응?
무슨 소리야?”
“그 김유현이라는 녀석을 보고 나서 말이에요.
다른 감정은 안 들었어요?”
“당연히 들었지.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 뽑아내고 싶다는 살심?”
아무래도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을 모양인가보다.
소설에서는 김유현에게 푹 빠져 그 뒤를 졸졸졸 쫓아다녔던 릴리트다.
물론 그의 마음을 얻지 못 해 마음고생을 하다가 결국 ‘가지지 못 하면 부숴버리겠어!’ 라고 각성하여 김유현을 꽤나 거세게 몰아붙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딱히 김유현에 대해서 호감을 품지 않은 듯 했다.
오히려 적대감만 뭉클거리는 듯 으르렁, 하고 이까지 갈고 있다.
그렇다는 건 이제 릴리트는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넘어왔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예속의 계약을 맺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릴리트의 말에 따르면 예속의 계약을 하게 되면 서큐버스는 그 어떤 이와 관계를 가져도 더는 마나나 정기를 탈취할 수도, 심지어 성적 쾌락을 느낄 수도 없게 된다.
오직 계약자만이 그녀에게 쾌감을 선사할 수 있고, 만족감을 줄 수 있으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마나와 정기를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완벽한 카드를 쥐게 되었지만 시온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릴리트는 강했지만, 나중에 상대해야 할 적들은 그 릴리트마저 살해한 놈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데.’
후, 한숨을 내뱉으며 시온은 방문을 열었다.
그 곳에는 라이온 기사단장이 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립 중이었다.
“준비가 다 끝나셨습니까?”
“네.
가시죠, 기사단장.노스 경도 따라오고.”
라이온 기사단장이 앞장서고 뒤에는 노스 경이, 그러니까 릴리트가 뒤따른다.
이번 전쟁까지는 노스 경으로 위장할 테지만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더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시온은 예상 중이었다.
그 어떤 무서운 악마라고 해도 힘들 때 자신을 도와주면 은인이 되고.
그 어떤 착한 천사라도 해도 힘들 때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면 원수가 된다.
시온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데려왔습니다.”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앞을 바라보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완전 무장을 한 채 서있는 리히텐 변경백이 보였다.
그 옆에는 수심이 가득 담긴 얼굴의 레오나 백작 부인과 졸린 기운이 역력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억지로 정신을 붙잡아두려는 아덴이 서있었다.
“준비는 다 마친 게냐?”
“예, 아버지.”
“전장은 위험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결코 방심하지 말거라.”
그런 전장에 이제 겨우 청소년 딱지를 뗀 애새끼를 데려간다는 겁니까!
아버지, 이건 정말 너무 하십니다아아악!
“저도 이제 성인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어릴 적부터 할아버님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부디 자식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단다.”
전쟁은 결코 멋지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수많은 목숨이 부딪쳐 피와 살점을 남기고 덧없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
그게 바로 지금 시온이 마주해야 할 것, ‘전쟁’ 이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몸 성히 다녀오리다.”
레오나 백작 부인은 근심이 가득 담긴 어조로 그렇게 말했고 리히텐 변경백은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아덴을 안아들곤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갑자기 제 배다른 형을 바라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막상 또 하자니 부끄럽기도 하고, 여태 시온이 보여 왔던 사납고 냉혹했던 반응들 때문에 함부로 말을 하지 못 하는 듯 했다.
“집 잘 지키고 있어라, 아덴.”
그래서 이번에도, 시온은 먼저 나서서 제 동생과의 거리를 좁혔다.
“어머니가 무서워하시면 별 일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된단다.
알겠지?”
“···네.
형.”
“아버지는 이 형이 지켜드릴 테니 너무 걱정 말고.
돌아오면 또 공놀이··· 말고 다른 놀이를 같이 찾아보자꾸나.”
이런 대사를 다른 캐릭터가 하면 1000퍼센트 사망 플래그를 꽂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야말로 생존 욕구의 화신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인 시온이 그 주체였다.
“그만 가자, 시온.”
“네, 아버지.”
이별은 빠를수록 좋다고, 리히텐 변경백은 어차피 곧 돌아올 것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라이온 기사단장과 몇몇 호위 기사들, 시온과 릴리트가 뒤따랐다.
잠시 후에는 김유현이 루시아를 데리고 뒤에 붙었는데, 치료 마법으로 병사들을 지원을 하겠다며 루시아가 따라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려 일어난 일이었다.
“그보다 준비는 잘 했느냐?”
한창 걸음을 옮기던 리히텐 변경백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뒤에서 걸어오던 시온이 난감하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출정식에서의 연설은 아버지가 하시는 편이 나았습니다.
여태 한 번도 나선 적이 없었던 제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기시다니요.”
“언젠가는 해야 할 일 아니더냐.
기회가 왔을 때 경험해봐야지.
그리고 기사들이나 병사들 역시 네 모습을 궁금해 할 것이다.”
궁금해 하기는 할 것이다.
그게 좋은 쪽이 아니라 좋지 않은 쪽으로 궁금해 해서 문제일 뿐이지.
성 밖으로 나서니 오와 열을 맞춘 채 대기 중이던 변경백령의 병사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에 굳건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왕국 내에서 강병이라고 알려져 있는 클라우젠 백작가의 사병들 중에서도 정예들로 추린 모양이었다.
기사만 마흔 명, 병사들은 7백 명에 달하는 꽤나 큰 규모의 공격대였다.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총 병사가 2천 정도이니 거의 반을 투입하는 대규모 작전이다.’
원래 소설에서는 이들이 반 넘게 전사하며 밴경백령에 큰 구멍이 생긴다.
미처 누디아 측의 기사단을 발견치 못 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김유현이 아예 옆에 붙어서 같이 종군한다.
소설처럼 나중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 초장부터 내보낼 수가 있다는 소리다.
원래대로의 내용처럼 김유현을 왕성으로 올려 보내면서, 동시에 변경백령까지 안전할 수 있는 최고의 그림이 이대로라면 완벽하게 그려질 것이었다.
“시온.”
리히텐 변경백이 임시로 설치된 단상을 고갯짓으로 가리킨다.
원래는 총사령관 격인 변경백이 나서야 할 자리를 제 아들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큰 영광이라면 영광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부담까지 껴안아야 한다.
전쟁터로 나아가는 병사들 앞에서 하는 연설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기에, 전투 능력에, 그리고 충성심에 영향을 미치니 경험이 많은 이가 그 자리에 올라서 병사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그걸 도대체 왜 나한테 맡기냐고요!’
웅변에 나가본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하다.
사실 웅변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 그냥 초등학교 때 전교 회장으로 뽑아달라고 목소리 좀 낸 것 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 때는 그저 적당한 좋은 말 좀 해주면서 화려한 공약도 좀 걸고, 이왕 할 거 체육대회에서 치킨과 햄버거, 피자를 돌리겠다고 하면 환호성이 튀어나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상황이다.
이건 회장 선거를 위한 유세도 아니고, 웅변대회는 더더욱 아니다.
제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 싸우기 전, 어쩌면 살아서 마지막으로 들을 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격려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
‘돌겠네, 돌겠네, 돌겠네.’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는 거의 공기나 다름없던 것이 바로 시온 클라우젠.
변경백의 장자임에도 그 어떤 대외 활동도 없었던 새파란 애송이가 백전노장인 리히텐 변경백을 대신 하여 연단으로 오르는 것이다.
말 한 번 잘못 했다가는 개망신은 당연하고 전투 능력을 시작부터 갉아먹는 희대의 씹트롤러가 될 수도 있음이었다.
턱―턱―턱―.
단상 위로 올라가는 시온에게 수백의 시선이 집중된다.
곧 죽음과 삶이 나뉘는 전장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강렬한 눈빛을 보내니 시온은 절로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시, 시발··· 지리겠네.’
발가벗겨져 사나운 맹수들 우리에 던져진 느낌이 바로 이럴까?
그저 단순한 구경거리가 되었다면 이 정도로 긴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막중한 책임감, 그리고 엄청난 부담감에서 오는 원초적인 감각, 바로 두려움이었으니까.
“···.”
시온이 단상 위에 서고 나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설마 이런 중요한 자리에 와서 할 말을 잊어먹은 건 아닌가?
아니면 겁을 먹어서 잔뜩 굳어있기라도 한 건가?
그도 아니면 정말 철없는 애송이라는 소문답게 대충 싸지르고 내려가려는 것일까?
“···제군들.”
마침내 시온의 입이 열렸을 때, 기사들과 병사들은 물론이고.
리히텐 변경백과 라이온 기사단장, 노스로 위장한 릴리트.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시온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아.
그리고 김유현까지도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과연, 시온 클라우젠이란 남자는 이 중요한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할 것인가.
“나는 그대들에게 아무 것도 약속할 수가 없다.”
“···?”
순간 자리에 모여있던 전원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시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명예롭게 싸우라는, 나라와 영지를 위해 나아가라는, 단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적들을 향해 돌격하여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라는.
그런 상투적인 말이 아니었다.
“승리로 이끌어주겠다는, 신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거라는 그런 약속들.
하다못해 그대들을 무사히 집으로 되돌려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나는 할 수 없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병사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느껴졌다.
전쟁터로 나아가는 자신들에게 승리도, 신의 가호도, 하다못해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다고 말하는 이가 도대체 왜 저 곳에 섰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