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20)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20화(20/439)
<―>
‘저 녀석이 갑자기 왜?’
‘공자님이 왜 저러시지?’
‘쟤, 쟤 갑자기 왜 저래!’
‘시온 공자님?’
‘흐음?’
순서대로 리히텐 변경백, 라이온 기사단장, 릴리트, 루시아, 그리고 김유현의 속마음이었다.
온갖 미사어구로 기사들과 병사들의 전의를 북돋아도 모자를 판국에 저렇게 기운 빠지게 하는 말을 하고 있다니!
“벼, 변경백님.
아무래도 공자님을 말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의외로 릴리트였다.
혹 병사들이 사나운 기세로 말대꾸라던가 더 심한 뭔가를 할 것 같아 초조해 하는 눈치였다.
라이온 기사단장은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근심 가득한 눈길로 시온과 리히텐 변경백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리히텐 변경백은 입술을 깨물고는 자신이 나서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조금 더 지켜보시죠.”
의외로 평온한 목소리.
루시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제가 아는 시온 공자님은 아무런 생각 없이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모두가 믿고 기다려보세요.
그 분을 진짜로 믿는다면 말이죠.”
“···.”
“유현.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죠?
우리들이 걱정해야 할 분인가요?”
루시아의 질문에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김유현은 단상 위의 시온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강합니다, 저 남자.”
“그렇다는군요.
그러니 다들 마음 놓으시고 지켜보세요.
공자님께서 과연 어떻게 저들의 마음 속에 불길을 지피는지 말이에요.”
루시아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리히텐 변경백도 믿어보자는 듯 입을 다물었다.
최종결정권자가 결심을 내리니 라이온 역시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고, 그렇게 시온의 다음 말을 기다리게 되었다.
“···.”
시온은 말을 잠시 멈추고, 일부러 기다렸다.
저들이 충분히 혼란스러워 할 수 있도록, 충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쓸데없는 희망은 고문에 불과하고, 불가능한 약속은 신뢰를 떨어트린다.’
이건 전쟁이다.
어느 누가 승패를 장담할 수 있고 신의 가호를 확신할 수 있으며,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시온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서 산송장으로 만든 다음, 그냥 한 대 더 때려서 아예 죽여 버릴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저들에게 딱 하나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건 있다.
이건 승패를 가늠해야 하는 일도, 신의 의중을 물어야 하는 일도, 기적을 바라는 일도 아니다.
“이것 하나는 약속하겠다.
승리하여 앞으로 진격할 때 그대들의 앞에 항상 내가 있을 것이고, 운이 닿지 않아 패하여 눈물을 머금고 물러서야 할 때 그대들의 뒤에 항상 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사들과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시온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빌어먹을 전장에, 아무도 남기고 오지 않겠다.”
“···.”
“비록 모두가 몸 성히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죽어서든 살아서든,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들의 고향으로, 그리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간다.”
“···.”
“이게 내가 너희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다.”
그 말을 끝으로 시온은 망설임 없이 단상 위에서 내려왔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는 와중에 그 어떤 함성이나, 박수갈채나, 다른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자리를 가득 메운 기사들의, 그리고 병사들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올 뿐이었다.
“시온.”
“공자님!”
시온이 자리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건 리히텐 변경백과 라이온 기사단장이었다.
고생했다는 듯 미소를 짓는 두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시온은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루시아가 슬쩍 옆으로 다가와서는 조용히 그의 손을 맞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옆에 서있던 노스 경, 그러니까 릴리트가 기함을 토하며 루시아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다행히도 시온의 제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시아?”
“대단하신 분이네요, 시온 공자님은.”
“그냥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을 좀 했을 뿐인데요, 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 은 아니죠.”
“···.”
“이미 공자님은 그 약속을 깨트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구요.”
루시아의 말대로였다.
방금 전 시온이 한 연설은 그저 기사들과 병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시온 스스로가 약간의 위험을 부담해야만 하는 포석을 깔아둔 것이었다.
‘릴리트가 활약할 곳이 필요해.
주로 난전이 펼쳐질 곳 말이야.’
언제까지 노스 경으로 위장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언제까지 마족은 해롭다고 인식하게 할 수 없다.
1년이라는 시간은 길면서도 또한 짧다.
지금도 진짜 적들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고, 곧 온 대륙이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공식적으로 릴리트의 등장을 알리게 될 무대가 되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전장 바로 근처에 있어야만 했다.
노스 경으로 위장한 릴리트는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호위 기사이니 만약 시온이 후방에 머무른다면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시온은 일부러 그 연설을 선택했고, 이제 기사단장이나 리히텐 변경백도 시온이 스스로 내뱉은 약속을 깨트리는 장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를 말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지.
딱 그 영화의 그 대사가 생각나서 말이야.
땡큐, 깁슨 형님!’
시온은 깁슨 형님께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영화 속 그 한 장면이 아니었다면, 이런 계획은 실행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조금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드네요.”
“뭐가요?”
“제가 공자님에 대해 품은 생각들이요.
그리고··· 후훗.”
볼에 옅은 홍조를 띠며 말꼬리를 일부러 흐리는 루시아였다.
청순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가 은은한 미소까지 지으니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시온이었다.
물론 바로 직후, 노스 경의 불편한 기운이 가득 담긴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말이다.
“시온 공자.”
팔꿈치로 마구 자신의 옆구리를 가격하며 다른 여자가 꼬리치는 것이 그리도 좋았냐는 둥,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왜 자원했냐는 둥 릴리트의 폭풍 잔소리를 감내하고 있던 찰나, 갑작스레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지, 김유현?”
“정말 약속대로 하실 겁니까?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전장에서 당신 같은 인물이 가장 선봉을, 그리고 가장 후위를 맡는다는 그 약속 말입니다.”
김유현의 질문에 시온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새끼야, 너 때문에라도 지켜야 할 판이니 걱정 마.
거짓말하는 놈, 말만 번지르르한 놈, 그리고 우두머리라고 해놓고 정작 중요한 때에 뒤로 물러나 있는 놈.
전부 네가 경멸하고 증오하는 놈들이잖아!
새끼가 형님을 시험하려 드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은근히 뒤끝도 있고 첫인상에 대한 편견을 좀처럼 쉽게 버리지 않는 놈이 바로 김유현, 이 소설의 주인공 되시겠다.
저 무시무시한 놈과 딱히 친해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대륙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필승 카드였으니 괜한 짓으로 호감도를 깎는 멍청한 짓은 무조건 지양해야 했다.
“그거야, 네가 보면 알지 않을까.”
내가 그저 말만 번지르르한 놈인지, 아닌지 말이다.
―
클라우젠 변경백령을 벗어난 공격대는 빠르게 진군했다.
새벽에 출발한 그들은 오전 만에 국경을 넘어 누디아 왕국까지 넘어가는데 성공했다.
어차피 공식적으로 선전포고까지 한 건 누디아이니 외교적으로 문제될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지만 처음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불안감을 애써 지우지 못 했는데, 그건 바로 선봉을 맡은 시온 때문이었다.
선봉은 항상 가장 앞에 서서 본대를 이끌며 적의 정찰병을 사전에 파악해 처리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역할이다.
때문에 항상 경험 많은 지휘관이 선봉을 맡았었는데, 오늘은 그 역할을 새파란 애송이인 시온 클라우젠이 맡게 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들은 단 한 차례의 공격도 받지 않고 누디아의 영토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도중에 누디아의 정찰병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김유현이 알아서 정리해주니 정찰 보고가 적들에게 넘어갈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릴리트는 알게 모르게 주변을 모조리 훑으며 정찰병들의 위치나 경로를 시온에게 알려주니 덕분에 시온은 귀신 같이 정찰병들의 위치를 알리거나 이동 경로를 예측할 수 있었다.
‘시온 공자님이 저런 분이었다니?’
‘이럴 수가.
적들의 정찰병이 전부 분쇄되고 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정병들이나 기사들마저 감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일부러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숨기다가 한 번에 터트리는 것와 비슷한 수준.
“유현.
시온 공자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 같아요.”
“···.”
루시아가 홍조를 띤 채 그렇게 말하자 김유현은 끙, 하고 침음을 내뱉었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척척 일을 해내는 시온의 모습에 아까 보였던 자신의 모습이 괜한 기우였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대로 빠르게 누디아의 군영이 있는 곳까지 진격한다.’
적들도 오늘 내로 진군을 끝내고 공성전을 펼칠 수 있게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성 근처에서 야영을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 깊숙한 곳까지 들이닥친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군세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뭐, 뭐야!
왜 적들이 우리 땅에?”
“정찰병들은!
정찰병들은 도대체 뭘 한 거야!”
전쟁으로 향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길고 복잡하지만,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그 진행은 보는 사람의 김이 다 빠질 정도로 단순하고 또 짧다.
적들과 부딪치고 전열이 무너져 후퇴하는 쪽은 무조건 패배한다.
애초에 두 세력이 맞붙을 때보다 한 쪽이 후퇴할 때 생기는 사상자가 더 많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공격!”
“쉴 틈 없이 몰아붙여라!
적들의 예봉만 꺾으면 지금의 전투는 물론이고 전쟁 자체를 끝내버릴 수도 있다!
계속 몰아붙여!”
“으아아아아!”
수 백의 병사들이 맞물려 거대한 방패가 되고, 그 거대한 방패들이 부딪친다.
기사들은 상대편의 기사들과 싸우며 어떻게든 그 방패의 뒤를 노리기 위해 노력한다.
전투는 어떻게 보면 그저 힘겨루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힘겨루기에서 한 번 밀린 쪽은 모든 것을 내놓아야만 한다.
기세도, 승리도, 그리고 목숨도 전부 다.
두두두두!
바로 그 때, 누디아 왕국군의 뒤에서 천지를 진동시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클라우젠 변경백군은 약간의 혼란에 빠져들고, 역으로 누디아의 군사들은 용기백배하여 더욱 강하게 저항했다.
“기사단이 왔다!”
“하얀 표범 기사단이다!
이길 수 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누디아 병사들의 고함 소리.
시온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등장이 조금 빠른데?
원래는 여기의 병사들이 와해되고 클라우젠 변경백군이 막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참에 들이닥쳤었는데 말이야.’
큰 흐름은 맞아떨어졌지만, 작은 흐름들이 계속 엇나가고 있다.
쯧, 하고 혀를 찬 시온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유현에게 소리쳤다.
“김유현!
저기 기사단부터 먼저 처리해!
우리 군의 진형에 다가오면 이쪽이 그대로 와해되니 다 쓸어버려!”
“···그러도록 하지.”
스르릉―.
드디어 김유현이 진검을 빼들었다.
검 한 자루만으로 모든 것을 베어 넘기던 소설 속 주인공.
사기적인 능력치와 검술로 후반부에 가서는 그야말로 파워 밸런스 붕괴를 일으키는 주범이 되는 그가 나선 것이었다.
‘우하하하!
시발놈들!
너희 이제 다 뒈졌어!
느이 나라에는 저런 애 없지?
우리 유현이가 시발, 얼마나 센데!’
수 십 기의 기사들과 단 한 명의 싸움.
누가 봐도 그 한 명의 자살 돌격에 가까웠지만 시온은 자신만만했다.
그 한명이 누구도 아닌 김유현이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시온이 하나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김유현이 대륙 최강자가 되는 건 후반부에야 되는 일이고, 초장에는 아직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여럿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세바스찬, 라이도, 그리고 그 외에도 김유현급의 여러 강자들이 히스파냐 왕국에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치로, 그런 강자들을 누디아 왕국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작품후기]’귀관들을 무사히 데리고 오겠다는 약속은 해줄 수 없다.그러나 내가 제일 먼저 전투지역에 발을 딛을 것이고, 제일 나중에 발을 뗄 것이다.
내 뒤에 아무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위 워 솔저스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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