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211)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211화(211/439)
211―――――
죄송합니다.
집에 우환이 생겨서 이만!
하루가 지나고, 전날에 있었던 언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회의가 열렸다.
신성 프러센은 어떻게든 히스파냐의 원정군을 유지시켜 성전을 개시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강했고 히스파냐는 저들의 이해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쯤 되면 누디아의 답이 중요한 법인데, 어찌 된 것이 누디아 측은 의견을 확실히 내놓을 생각이 없는 듯 말을 아끼고 있었다.
히스파냐는 당연히 누디아가 신성 프러센의 편을 들어 성전에 계속 있으라는 의견으로 압박할 줄 알았는데 답을 망설이니 오히려 수상하게 여기는 눈치.
그리고 신성 프러센은 당연히 자신들의 편을 들어 성전을 주장할 것 같은 누디아가 침묵하니 답답함을 숨기지 못 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아이브라는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히스파냐 측의 인물들과, 신성 프러센의 인물들이 유일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히스파냐 측의 바네사 왕녀님께 마지막으로 요청하겠습니다.
아니,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성전에서 히스파냐의 군을 이탈시키지 말아주십쇼.
히스파냐가 이탈하면 누디아 내부에서 자칫 히스나퍄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 터져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누디아도 결국 이탈을 고려.
신성 프러센 혼자만이 남는데 우리로서는 혼자서 저 마족들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대륙 위의 우리 세 국가가 항상 갈등 속에서 유지된 관계라고는 하지만 이런 어려운 때에는 서로 합심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카롤루스 왕자의 절절한 연설에 신성 프러센의 인물들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심지어 그 중에는 성호를 그으며 빛의 교리를 다시금 인식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덕분에 히스파냐 측의 인물들 중 몇몇이 움찔거리며 눈길을 피하기도 했는데,
히스파냐에서도 빛의 교리를 믿는 이들이 꽤 있으니, 같은 교도들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마음에 찔리지 않을 수가 없던 모양이었다.
“···카롤루스 왕자님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히스파냐 역시 이 대륙에 평화와 빛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곳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쪽은 국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야 하는 신하들입니다.
외부로 군을 돌린 이 때에 그 분의 명을 듣지 않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군주의 명령으로 군을 이끌고 나선 이가, 군주의 명령에 따라 군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건 십중팔구, 아니 십중십십으로 역심을 품고 있다는 소리가 될 수 있는 법이었다.
“전장에서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우선한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전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쪽이 판단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죠.”
“이럴 거면 도대체 왜 온 겁니까?
마치 대륙에 알리기라도 하듯 화려하게 성전의 원정군이라고 하며 찾아오고는 전투 한 번 없이 다시 돌아간다니요.”
“세상 어떤 사람이 제 집이 불타고 있는데 밖에서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답니까?”
조금의 양보도 없는 언쟁이 계속 이어졌다.
바네사 왕녀와 카롤루스 왕자는 저마다 서로의 논리를 들이대며 싸우고 있었고, 그 주변 인물들은 맞장구를 치고 추임새를 넣으며 이쪽의 의견이 더 타당하다는 듯 표현하고 있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디아 측의 아이브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 중이었다.
“이래서는 계속 제자리에서 돌고 있는 셈이겠군요.
아무 의미 없이, 시간만 낭비하면서 말이에요.
답답하기 그지없군요.”
바네사 왕녀는 마침내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행동에 신성 프러센 측 역시 몸을 일으키는데, 정말 이렇게 성전에서 이탈하겠다는 것이냐고 표정과 몸짓으로 묻기 시작했다.
신성 프러센 측의 행동에 히스파냐의 여러 무장들이 표정을 굳히고는 그들을 노려본다.
속국도 아니고, 지극히 자유로운 의지로 왔다가 다시 돌아간다는 것뿐인데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날카롭게 반응하는 저들이 상당히 거슬린다는 눈치였다.
“···이러다가 원정군들에게 성전이 아닌 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듣겠어요.
다들 분위기가 너무 험하군요.”
아이브가 입을 열자 바네사 왕녀와 카롤루스 왕자가 각각 자신들의 사람들을 진정시킨다.
그들 모두 여기서 두 국가가 창칼을 겨누고 싸우는 장면은 볼 생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바네사 왕녀.”
“네, 카롤루스 왕자.”
“이번 성전에 우리 신성 프러센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잘 아실 거라 생각됩니다.
또한 누디아도 많은 준비를 했죠.
히스파냐 역시 그만한 원정군을 꾸리고 여기까지 오는데 소비한 군량이나 마초만 해도 꽤 많을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왜 국가들이 대규모로 군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시는지 아십니까?
한 번 움직여서 무언가를 취하지 못 한다면 그건 극심한 손해, 그 이상이 되어 국가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카롤루스 왕자의 말에 바네사 왕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이해한다는 듯 답했다.
“때로 너무 과하게 날을 세워둔 칼은 그 칼을 든 사람의 손을 베기도 하는 법이죠.”
“귀국의 사정 때문에 귀환을 한다, 납득은 할 수 있지만 전부를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필멸의 땅으로 한 번 들어가서 패퇴라도 했다면 모르겠는데, 시작도 전에 돌아간다고 하니 이런 것이지 않겠습니까?
혹, 다른 이유 때문에 이리 귀환을 서두르시는 건 아닐런지요.”
그 말에 이번에는 회의에 참가했던 김유현과 리시키다의 두 눈이 반짝였다.
카롤루스 왕자가 말한 ‘다른 이유’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서 였다.
그리고 그 부분은 바네사 왕녀도 눈치를 채고서 있는 부분이었다.
‘저들은 오라비의 신변에 무슨 큰 이상이 생긴 것까지는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부왕의 명령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급히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질문하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다른 부분에서 뭔가를 알고 있어.’
그렇게 생각한 바네사 왕녀는 뒤쪽을 향해 슬쩍 손짓을 해보였다.
왕녀의 손짓에, 뒤에서 얌전히 서있던 리시키다가 뭔가로 둘둘 쌓인 물건을 가져왔다.
리시키다가 그 물건을 원탁 위에 올려두자 카롤루스 왕자가 잠시 그걸 들여다보곤 말했다.
“이게 뭡니까?”
“히스파냐가 성전에서 이탈하려는 이유입니다.”
반짝!
그 순간, 김유현은 카롤루스 왕자의 옆에 있던 누군가의 눈에 반짝이는 이채가 스치는 걸 놓치지 않고 확인해냈다.
마치 드디어 원하고 또 원하던 순간이 찾아왔다는 듯,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상대편이 함정에 멋모르고 발을 들이기를 기다리던 사냥꾼처럼 말이다.
‘···그래, 마치 저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 자신은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다음 벌어질 일들이 너무나도 기대가 되어서 미치겠다는 놈처럼 말이야.’
그렇게 잠시 동안 눈을 반짝이던 남자는 혹여 누가 자신을 봤을까 바로 입술을 꾹 깨물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카롤루스 왕자와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딴에는 완벽한 연기라도 펼친 줄 알 텐데, 이미 김유현에게 전부 파악 당한 후였다.
‘확실히 뭔가 있군.’
만에 하나 저 남자가 어제 바네사 왕녀가 걱정하던 것처럼 미리 함정을 파두고, 그 소식을 미리 알고 있던 상대였다면 아마 잠시 후에 상당히 골치가 아픈 일에 빠졌을 지도 모르겠다.
김유현은 그리 생각하며 카롤루스 왕자가 천천히 천을 벗겨내는 장면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도대체 이게 뭐이기에···.”
자신과 리시키다가 가져오고, 바네사 왕녀가 이 자리에서 당당히 내놓으며 히스파냐가 신성 프러센과 누디아를 마주하자마자 이탈하려는 진짜 이유.
그걸 설명해줄 결정적인 물건은 바로···.
“이건?”
마침내 천을 다 풀어내고,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한 카롤루스 왕자.
그는 잠시 두 눈을 깜빡이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흠칫, 몸을 떨며 바네사 왕녀를 바라본다.
히스파냐 측의 다른 인물들, 그리고 누디아 쪽 사람들이 도대체 그게 뭐냐는 듯 궁금한 표정으로 왕자를 바라본다.
그에 바네사 왕녀는 다른 이들도 전부 볼 수 있도록 꺼내보라는 듯 살짝 손을 들어보였다.
스륵―.
카롤루스 왕자가 꺼낸 것은 바로.
“···부채?”
그랬다.
그가 꺼낸 것은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한 자루의 부채였다.
귀족 부인들이 쓰는 것처럼 너무 과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뭔가 특유의 멋과 고귀함이 물씬 드러나는 것이 분명 보통 물건은 아닌 듯 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부채의 손잡이 부분에 달려있는 순백의 깃털이었다.
“···저게 뭐지?”
“갑자기 웬 부채라니···.”
히스파냐나 누디아의 여러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와중에 오직 카롤루스 왕자와 몇몇 신성 프러센의 인물들만이 입을 꾹 다문 채 뚫어져라 부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바네사 왕녀는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하얀색 깃털이 달린 부채를 충분히 볼 시간을 준 다음에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히스파냐 남부에 해적들이 다시금 출몰했다는 건 여기 계신 몇몇 분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녀의 말에 카롤루스 왕자와 아이브, 그리고 두 국가의 세력 있는 귀족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일은 대충 알고 있다는 듯 뜻을 밝혀왔다.
교역으로 이득을 보는 이들이 히스파냐만이 아니라 신성 프러센, 그리고 기착점으로도 사용되는 누디아에도 많이 있었기에 히스파냐의 해상 교역로가 흔들리는 것은 곧 그들의 돈줄 중 하나가 위태로워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우리 히스파냐의 성전 원정군이 결성되기 전에 진작 내 오라비, 에라더 라곤 히스파냐 왕자가 지휘관으로 파견되어 전투를 치렀었죠.
그리고 해적선을 몇 척 나포했었는데 그 중 한 선장에게서 이걸 압수했다고 하며 왕성을 통해 내게로까지 이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신성 프러센과 교역을 하던 이들 중 극소수의 인원들이 이게 신성 프러센 측의 물건이라고 하던데요.
아주 귀한 선물이라는 말도 덧붙였고 말이죠.”
“···.”
“이게 왜 해적들의 손에 가있는지 의문이라고 하면서, 신성 프러센 쪽에 한 번 이유를 물어봐달라고 했습니다.”
카롤루스 왕자는 바네사 왕녀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부채를 살짝 들어서는 살마다 조금씩 쓰여 있을 글귀를 찾았다.
바네사 왕녀나 이것을 보냈다는 히스파냐의 인물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 하고 그저 이게 신성 프로이센에서도 귀한 선물 정도라고 취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실은 비밀리에 어떤 말을 전할 때 쓰이던 방식으로 왕실의 직계와 그 수하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게 그런 문장들은 짧고 간결했으며, 덕분에 살마다 일정한 패턴을 두고 쓰여 있는 것이 신성 프로센 측의 방식이었다.
―사르데나의 영주에게―
그 글귀를 보는 순간, 카롤루스 왕자는 그야말로 머리가 띵, 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분명 신성 프로센의 왕실에서 비밀리에 쓰이는 방식이다.
극비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라 히스파냐의 어느 누구라도 해도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이 부채가 진짜 신성 프로센의 물건이라는 점이었고, 무엇보다 손잡이 부분에 달린 이 깃털은 분명 왕실에서도 아주 귀하게 여긴다는 천족들의 유산임이 분명했다.
더해서, 더 큰 문제는 부채에 적혀있는 글귀였다.
‘사르데나의 영주에게, 라니?’
사르데나는 정확히 보면 항구 도시이지, 영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신성 프로센 측에서 히스파냐의 어느 귀족에게 이걸 보냈을 리도 없다.
오히려 해적 선장에게 이게 있었다고 했으니, 결국 그를 사르데나 항구의 새로운 주인으로 인정하고 대우하겠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멀쩡히 히스파냐의 영토로 있는 사르데나 항구를 말이다.
이 상황에서 조금 과장해서 해석을 하면, 신성 프로센 측이 해적들을 준동시켜 히스파냐를 공격하게 하고 사르데나 항구를 점령토록 하는 것을 부추겼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이게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이 부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그에 바네사 왕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한 모습을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히스파냐는 이게 신성 프로센에서 귀한 손님에게 내어주는 일종의 선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게 다른 이도 아니고 해적들의 수중에서 나왔으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게 단순히 해적들이 아닌, 더 큰 세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말씀이 지나치군요!
빛의 교리를 따르는 우리들을 의심하는 겁니까?”
신성 프러센 측에서 당연히 반발을 해온다.
대놓고 자신들을 의심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쉽게도 카롤루스 왕자가 입을 다문 상황에서 이미 분위기는 완벽하게 바네사 왕녀의 것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 할 때는 상황을 보고 예측하는 법입니다.
신성 왕국의 요청대로 성전을 받아들이니 해적들이 일어났고, 원정군 중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여 본국에서 멀어진 쪽은 우리 히스파냐입니다.
애초에 본국에서 머무르는 누디아와, 히스파냐와는 달리 짧은 거리를 이동한 신성 프러센과는 다르게 말이죠.”
“그건!”
“그리고, 해적들이라고 해서 빛의 교기를 믿지 않는 건 아니랍니다.
빛의 교리를 믿으면서도 사람을 해치는 사람 또한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성전을 핑계로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
히스파냐의 주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해적들을 움직여 무슨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아니냐는 노골적인 의심이었던 것이다.
“물론 해적들이 이 부채를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들고 있다가 히스파냐의 해군들에게 붙잡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 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정말 신성 프러센의 누군가가 선물 용도로 해적에게 이걸 주었다면.
그 해적들에게 공격 받고 있는 우리 히스파냐는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합니까?”
신성 프러센 측의 인원들은 바네사 왕녀의 의심에 하나 같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들의 왕자를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카롤루스 왕자가 분노를 하며 나서야 했을 테지만, 이상하게 그는 바네사 왕녀가 내민 부채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분명 우리 신성 프러센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왕실 사람이나 대주교 급들이 아니라면 절대 알지 못 할 것들이지.
그런데 그 방식을 이용해서 해적들에게 부채를 주었다는 건 더 나아가서 지원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않은가!’
신성 프러센마저 천족들의 진짜 속셈을 모르니 해적들을 이용해 히스파냐에 혼란을 가하려는 부분을 왕자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카롤루스 왕자의 입장에서 현 상황을 보자면, 히스파냐는 나름 이유가 있기에 성전에서 이탈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신성 프러센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고 말이다.
“이상이 우리 히스파냐가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빠지는 우리가 잘못인 게 아니라, 뭔가 수상한 일을 벌이려고 한 너희가 잘못이다.
설사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으니 죄가 조금도 없다.
이건 모두 너희의 잘못, 너희의 탓, 너희가 원흉인 거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군.’
김유현은 조금 전에 두 눈을 반짝이던 남자가 순식간에 썩어버린 얼굴로 돌변한 것을 이번에도 놓치지 않고 확인하고 말았다.
일이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에 무척이나 당황한 모습.
아무래도 바네사 왕녀가 가져온 게 천족의 날개가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 했던 물건이라서 그런 모양이리라.
‘그보다, 도대체 그 남자는 이걸 어떻게 알고 미리 준비해서 리시키다에게 준 것이지?’
바로 어젯밤, 리시키다가 연 주머니에서 나온 건 한 장의 쪽지였다.
그 안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읽어본 세 남녀는, 혹시 이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남자가 현자는 아닐까 싶은 생각을 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집 가는 길을 막는다면 리시, 네게 준 물건을 사용하도록.
열지 말라고 한 거 취소해줄 테니 상자 열어서 써.
너희가 잡은 ‘비둘기’ 깃털 하나 붙이면 효과 상승.
―히스파냐로 돌아가는 이유를 히스파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놈들의 문제와 그 탓으로 돌리는 데에 주력하면 어느 누구도 못 잡을 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성전을 망친 건 히스파냐가 아니라, 신성 프러센이라는 것을, 너희 탓이라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강조하길 강력히 바람―
왕성으로 돌아온 후, 시온은 클라우젠 측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원정군을 기다렸다.
지금쯤이면 슬슬 귀환으로 들어갔을 터인데, 라고 중얼거리며 시온은 두 눈을 감았다.
‘주머니는 열어 봤으려나?
신성 프러센 놈들이 아주 별 지랄을 하면서 원정군을 돌아가지 못 하게 하려고 할 텐데.
다 같이 가서 다 같이 망해야 하니까.
갑자기 한 놈이 빠지면 단체 생활의 불변 법칙으로 줄줄이 다 무너지게 되는 법이거든.
너 팀 버려?
너 팀 버려?’
응, 그러면 당연히 버려야지.
그 팀 새끼들이 다 트롤들인데 왜 같이 지옥 다이빙을 해줘.
보통의 사람들은 그저 선물이라고만 알고 있는 그 부채도, 시온은 이미 진작부터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게 신성 프러센의 대가리들 앞에 놓이면, 과연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도 전부 예상이 가능했다.
‘천족들과 그 비둘기들을 따라서 세상 정화 작업 하겠다는 놈들과 신성 프러센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거든.
같은 말을 쓰는데도 팀플이 안 되는 거지.’
해적들을 이용하여 히스파냐를 흔들려는 건 신성 프러센이 아니라, 천족들과 그 종자들이라는 요정들, 그리고 몇몇 광신교도들의 계략이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신성 프러센으로서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것이다.
그들은 천족이 다만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을 뿐이지, 불태우겠다는 목적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 부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신성 프러센의 고위층만이 알고 있는 방식을 어느 누군가가 이용하고 적용해서 이런 짓을 벌였느냐는 것이다.
덕분에 신성 프러센은 더는 히스파냐를 막아봤자 자신들에게 향하는 의심만 짙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을 테고 말이다.
‘집에 우환이 생겨서 이만.
그런데 그 우환을, 어째 너희들이 준 것 같다.
그러니까 괜한 의심 받고 싶지 않다면 다 꺼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이거지.’
그렇다면 그 부채가 가짜라는 게 드러나면 어쩔 거냐고?
그에 시온은 어차피 상관없다는 대답을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 때가 되면, 하늘을 뒤덮은 비둘기들한테 똥 폭탄 세례를 받고 있을 테니까.
―――――――작품 후기―――――――
추천은 항상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