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223)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223화(223/439)
223―――――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향기가 난다, 라는 리아의 대답.
그에 헬렌은 반사적으로 ‘냄새는 월랑족 특기가 아니었던가요?’ 라고 말하려고 했다가 재빠르게 자신의 입을 닫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 했네요.’
묘은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했다.
배를 쓰다듬는 것, 발바닥을 만지는 것, 그리고 월랑족과 비교하는 것.
헬렌 입장에서 그냥 단순한 의도로 월랑족 이야기를 꺼냈다고 해도 묘은족 입장에서는 ‘너는 월랑족도 아니면서 무슨 냄새 맡기를 논하는 것이냐.’ 라고 충분히 오해할 만 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월랑족도 아닌데 어떻게 냄새로 아는 거냐고 물어보려 했지?”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리아 씨.”
“냐앙.”
그래도 장사꾼 생활을 하며 표정 관리에는 나름 익숙한 헬렌이었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리 말하자 리아는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이렇다 할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인지 다만 헬렌을 유심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보다, 제게서 무슨 향이 난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시온 냄새가 나.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막 릴리트 언니나 루시아, 리시키다처럼 엄청 진한 냄새는 안 나지만 옅게나마 시온의 체취가 남아있어.
시온이 안아준 거야, 아니면 당신이 안긴 거야?”
“그건···.”
헬렌은 대답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았다.답을 내놓아야 하는데, 막상 그러려고 하니 스스로의 마음에 확신이 들지 않음이 그 이유였다.
‘시온 공자님께서 나를 안아주신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에게 매달린 걸까.’
분명 자신은 왕성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었다.
그러다가 그만 일어나라는 누군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잠이 깼고,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게 시온의 품에 안겨 있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온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자 그는 볼을 긁적이며 ‘미안, 네가 자꾸만 매달려서 일단 진정 좀 하라고 이렇게 안고 있었다.’ 라고 말했다.
그런 시온의 말을 들으며 헬렌은 그게 거짓말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눈앞의 이 남자가 여태까지 만난 다른 남자들과 같은 자들이었다면 이미 진작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자신을 발가벗긴 채 자신의 방으로 들였을 것이었다.
거래 관계고, 내 편이고 나발이고 그냥 그가 쌓은 공이면 귀족도 아닌 일개 상인 정도는 남 몰래 취해서 실컷 먹다가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온 공자님, 당신은 신기하게도 그러시지 않으셨죠.’
나이를 무슨 70살도 넘게 먹은 늙은 귀족도 아니고, 이제 성인이 된 귀족 청년.
몸이고 마음이고 불꽃 같이 활활 타오르며 한창 욕구에 움직일 때다.
그런데도 그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취할 수 있는 자신에게 그 어떤 불순한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
―지옥에서 나왔으니 진짜 삶을 살아봐.
뒤는 내가 봐줄 테니까.
대신 일 열심히 해주고.
―
오히려 그는 얼른 일에 집중하라며 자신의 등을 떠밀기까지 했었다.
진정 헬렌의 몸을 원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취하는 것이 최고의 그림이었을 텐데.
오죽 상황이 너무 완벽했으면 끔찍했던 기억을 가진 헬렌 자신마저도 차라리 이런 남자에게 안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잘 모르겠네요.”
“냐앙.
대답이 이상한데.
잘 모르겠다는 건 가장 바보 같은 답이라고 했어.”
“누가 그런 말씀을 하셨죠?”
“우리 아빠가.”
그렇게 말하며 리아는 루시아가 내민 찻잔을 홀짝이다가 ‘···써.’ 하고 투덜거리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설탕을 듬뿍 넣고서는 다시 차를 마셔본다.
이제야 조금 먹을 맛이 난다는 듯 미소를 지은 리아가 후르륵!
하며 차를 마시는 동안 이번에는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혹 무례한 의도로 질문을 하려던 건 아니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셨으면 해요.”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습니다, 루시아님.
다만 궁금해서 그러는 것인데···.”
“궁금해 하실 필요가 없을 텐데요?
애초에 저희는 헬렌 상단주님께 저희의 진심을 바로 말씀드렸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진심을 말했다고?
헬렌은 루시아의 말에 곰곰이 그녀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일까, 루시아가 어떤 이야기를···.
‘우리는 모두 동료라고 해야겠네요.
아니지, 선의의 경쟁자라고 해야 하려나?’
루시아는 분명 조금 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이후 리아라는 수인족 여인이 킁킁거리며 시온의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하거나, 시온을 좋아하냐고 묻는 등의 질문이 왔던 것으로 보아 그녀가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저, 혹 두 분 모두···.”
“둘 아니에요.
둘 더 있어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하나가 더 있는 것 같고, 오늘 보니까 한 분이 또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아닙니다.”
너무나 확신에 찬 대답에 루시아와 리아가 동시에 ‘으잉?’ 하고 헬렌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둘 모두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헬렌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온을 기다린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인이 갑자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니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졌던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압니다.
시온 공자님께서 확실히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분임을, 그래서 두 분께서 공자님께 연심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당연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칼로 자르는 듯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다급한 기색이 느껴지는 답이었다.
루시아는 본능적으로 헬렌에게서 말하지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걸 또 물어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순간 다 비워진 자신의 찻잔에 다시 차를 따르며 입을 열 뿐이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보다 더 미련하고 더 아픈 일은 없다고 했어요.
상단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던 저로서 충고할게요.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 하지 않아서 하는 후회가 더 크다는 걸.”
“···저는 아니에요.”
그래, 다른 여인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헬렌 자신은 그리 할 수 없다.
아무리 자신을 그 지옥에서 꺼내준 남자라고 해도, 자신을 위로해준 이라고 해도 감히 그에게 연심 따위는 품을 수 없었다.
‘···나 따위가, 더럽혀진 내가 어떻게 그런 분의 마음을 받겠다고.’
마음의 상처는 어찌 치유된다고 해도, 몸에 남은 흔적까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자신의 몸은 악마들에게 이리저리 범해지고 또 범해진, 더럽기 짝이 없는 몸뚱이였다.
헬렌도 알고 있다.
서로 연모하는 마음을 가진 남녀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증명하는지.
만약 그런 자리에 자신과 시온이 같이 있다고 상상했을 때, 헬렌은 그 자리가 마치 자신의 지옥 같았던 시간을 들추는 시간이 될 것 같았고, 마치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질까 무서웠다.
‘어떻게 이런 더러운 몸으로 다가갈 수 있겠어요.
그렇죠, 공자님?’
시온은 헬렌의 과거를 알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끔찍하고 처참했던 삶을 보냈는지 전부 다.
그러니 시온이 어떤 표정을 지어도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할 때면 헬렌 자신이 나서서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악마들에게 더럽혀진 자신을 당신 같은 사람이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고.
나는 그저 이렇게 먼 곳에서 바라만 보는 걸로도 행복하니 당신도 다만 그래왔던 것처럼 다만 나를 위해서 웃어주고, 다만 나를 위해서 조금은 마음을 써달라고.
딱 그 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헬렌이었다.
“루시아님, 저는 결코 그런 걸 원치 않으니까···.”
“헬렌은 그렇다지만 또 모르죠.
저 남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있을 지도.”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가 미소를 짓고는 살짝 고개로 그녀의 뒤를 가리킨다.
“이틀 만에 벌써 일거리라도 물어온 건가?”
휴우, 한숨을 내뱉으며 시온이 헬렌의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주 익숙한 손짓으로 리아 손에 들려있던 찻잔을 갑자기 낚아채더니 킁킁 냄새를 맡곤 인상을 확 찡그린다.
“리아.
너 도대체 설탕을 몇 개나 넣은 거냐?”
“저기 있는 거 반?”
저기 있는 거 반, 그 말에 시온은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설탕을 담아두는 병이 작은 것도 아닌데 저 안에 있는 것 중 반을 넣었으니 차에서 찻잎의 향이 아니라 단내만 풀풀 나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너 그러다가 큰일 난다.”
“단 거 좋아한다고 왜 큰일이 나는데?”
“지금보다 몸이 배는 더 커질걸?
좋은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
“우우.
하지만 어떻게 해!
쓴 건 맛없는데.”
“맛이 없으면 그냥 먹지를 마.
이게 차냐, 아니면 설탕물이냐.”
“루시아 정성을 봐서라도 먹어야지!
타주는데 무조건 먹어야 하는 거야!”
그에 루시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시온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다른 찻잔에 차를 따랐다.
시온이 그 찻잔을 쥐고서 홀짝이다가 옆에 앉은 헬렌이 멍한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곤 잔을 입에서 떼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헬렌.”
“···시온 공자님.”
헬렌은 저도 모르게 갑자기 울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참으로 행복했는데, 이 행복함으로 인해 이후 보다 배는 더 큰 슬픔이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너무나 우울해졌다.
“북부에서 소식이 전해졌어요.”
하지만 헬렌은 자신이 현재 어떤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상처 가득한 마음을 애써 숨긴 채 웃는 척하는 여인이 아니라, 자신의 뒤를 봐주는 이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러 온 협조자로서 왔다는 것을 말이다.
“북부?”
“네.
시온 공자님께서 보내신 식량을 받으면서 사정이 나아졌고 듣자하니 다시금 몬스터들의 출몰이 시작되어서 교역도 활기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이에 북부의 부족들이 왕국에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자 사람을 보냈다고 해요.”
“북부 야만 부족이 사람을 보냈다?
감사 인사를 하러?”
시온은 도통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북부 야만 부족이 왜 야만 부족이라고 불리겠는가.
워낙 자신들의 성향이 짙고 다른 뭔가를 흡수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엄청나게 꺼려야하는 자들이어서 그런 것이지 않는가.
지금도 그렇다.
감사 인사를 한다는 건 여태 한 번도 없던 일이고, 설사 한다고 해도 그냥 현재 북부를 맡고 있는 레포엠 자작 ( 남작 위에 있었으나 시온의 북부 귀족 청소 후 자작으로 올랐다.) 에게 대충 서신 몇 개 써서 왕성으로 보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자들이니 누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지,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어딘가로 간다는 것 자체를 생각지도 못 하는 이들이었다.
“···혹시 인원 편성에 대해 들은 거 있어?”
“알아봤는데 북부 전사 셋으로 이루어진 자들이라고 합니다.
셋 모두 남자였고요.”
“확실해?”
“일단 레포엠 자작 측에서 조사한 결과 남성 셋이라고 했고 저희 상단은 그 정보를 입수해서 이렇게 시온 공자님께 전해드리는 것입니다만.”
설마 미쳤다고 그쪽이 조사를 허투루 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시온이 걱정하던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불길한데.’
설마 아니겠지, 시온은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헬렌을 바라보았다.
혹시 더 할 말은 없냐는 뜻으로 말이다.
“···.”
“···.”
하지만 헬렌은 마치 그게 다라는 듯 시온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사실 이보다 더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이유다운 이유’를 대고 시온의 옆에 있고 싶었는데, 갑자기 그런 자신이 미치도록 미워지는 헬렌이었다.
지옥 속에서 빠져나오면 그 뿐인 줄 알았는데 그 지옥 속에서 발버둥치는 사이 지옥의 유황과 피가 묻어서 그 향과 색으로 온 몸이 물들었다.
원래라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주었을 시온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헬렌과 먼저 만나 잠깐 얼굴을 보고 일단 왕궁에서 왔다는 사람을 맞이하러 가야만 했다.
시온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헬렌이 슬쩍 그를 바라본다.
그에 시온은 헬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왕궁에서 사람이 왔다고 해서.
여기서 잠시 기다려.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그 때까지 내게 할 말 확실히 생각하고 정리해서 기다리고 있어.”
“아···.”
역시나 헬렌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
그녀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시온은 정원을 벗어나서는 응접실로 향했다.
선객은 헬렌이라고 해도 일단 왕궁에서 왔다는 이를 마냥 기다리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온 클라우젠 공자님.”
시온이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왕궁의 심부름꾼이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인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께서 입궁을 명하셨습니다.”
“···이렇게 따로 사람을 보내셨다면 다른 때와는 달리 조용하게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면 될 듯 합니다.”
갑자기 자신을 비밀리에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시온은 그 짧은 시간 안에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태까지 그냥 공식적으로 부르던 국왕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건 처음 있는 상황.
이번 일은 다른 귀족들이나 왕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이 녹아있는 것이었다.
‘왕국 내부의 일, 그게 아니라면 왕국 외부의 일.’
내부의 일은 워낙 많으니 예상이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외부의 일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먼저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원정군의 귀환.’
그러고 보니 슬슬 원정군이 히스파냐에 도착할 때가 되었다.
지금쯤이면 클라우젠 변경백령에 도달하여 잠시 재정비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혹시 그쪽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갑자기 요 근래 침묵하고 있던 비둘기들과 뾰족귀들이 생각난 시온이었다.
그 빛쟁이 놈들이 또 무슨 미친 지랄을 할까 걱정되던 와중에 갑자기 국왕이 자신을 찾으니 느낌이 쎄, 해지는 건 단순한 기우일까.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나도 좀 쉬고 살자, 시펄!’
시온은 속으로 그렇게 빌고 빌었지만 아마 그 말을 비둘기들이 들었으면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어림도 없지!
―――――――작품 후기―――――――
킹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