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23)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23화(23/439)
<―>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냐.”
찻잔의 내용물이 다 식어가도록 그저 묵묵하게 시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히텐 변경백이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이 아비조차 믿지 못 했던 것이냐고, 하필이면 마족이냐고, 온갖 질문들이 그의 입에서 맴돌았지만 변경백은 다만 조그마한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 이유를 묻는다고 한들 의미도 없었고, 어찌 되었든 릴리트로 인해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 추궁하는 것도 썩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조사하고 있던 신전에 당신이 갇혀있던 거였군요.”
“그것도 강제로 붙잡혀 있었지.
그대로 영원히 소멸할 뻔 했고 말이야.”
루시아의 말에 릴리트는 투덜거리면서 호로록, 차를 마셨다.
그러다가 자신을 강렬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던 김유현과 딱 시선이 마주했다.
“···.”
“···눈 깔아라.
너 뒈진다, 진짜.”
“싫은데.”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온 김유현의 대답에 릴리트는 이마에 혈관 마크를 띄웠다.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있었던 결투에서 두들겨 맞은 자신이었는데, 그 상대가 자꾸 자신을 살살 자극하니 짜증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
진짜 으르렁 소리를 내는 릴리트와, 가소롭다는 표정의 김유현.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시온은 격세지감을 느꼈다.
원작에서는 김유현이 저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얼굴이 빨개져서는 눈길을 피하던 그 릴리트가, 지금에 와서는 무슨 개처럼 당장 물어버리겠다는 듯 으르렁거리고 있다.
“캬악!”
“워워, 릴리트님.
진짜로 물지는 마시고요.”
서큐버스라고는 해도 역시나 마족이라 그런지, 자신이 무시 받고 있다 생각이 되면 바로 공격적인 면모가 튀어나왔다.
겉보기에는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여인이 갑자기 진짜로 물어 버리겠다며 달려들려고 하니 리히텐 변경백은 당황한 모습을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말이다, 시온.”
“네, 아버지.”
“저 여인이 네 꿈에 찾아온 원인은 결국 네가 불러서다, 이런 말이지 않느냐?”
“맞습니다.”
“허면 너는 어쩌다가 서큐버스 퀸을 네 꿈에 부르게 된 거지?”
“그건···.”
대답을 하려다 말고 시온은 뚝,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히텐 변경백, 루시아, 김유현, 그리고 뒤에 얌전히 서있는 세바스찬.
시온 클라우젠, 어쩌면 미래의 변경백이 될 지도 모르는 이 남자가 사실은.
마나를 단 한 톨도 운용하지도, 그리고 체내에 보유할 수도 없는 마나 감응력 제로.
일명 마나 고자임을 저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말해야 하나?’
약점은 어느 누구에게도, 설사 가족이라고 해도 숨기는 편이 이롭다고 여겼다.
원래의 세상에서 살아갈 때 시온은, 이지훈은 남의 약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무기로 바꾸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 어떤 강한 자라고 해도 한 번 약한 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정말이지 지겹도록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진다.
어쩌면 그게 인간으로써 당연한 생존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마주보고 있을 때에는 믿음직한 표정을 짓다가도 등을 보이면 갑자기 통수를 후려갈긴다.
그렇게 해서 위에 있던 자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는 것.
무한 경쟁 시대에서, 그 단순한 이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고 여겼었다.
‘···어차피 평생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한 두 번 보고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를 시전 할 인물들이 아니다.
한 명은 아버지이고 한 명은 조력자이며 다른 한 명은···.
‘저 새끼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이 안 가네.’
소설로만 볼 때는 살짝 정신적 하자가 있기는 해도 먼치킨 주인공이었는데, 이렇게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캐릭터였다.
저 새끼가 흑막인지 아닌지 그나마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것마저 몰랐다면 릴리트에게 무릎 꿇고 빌어서 김유현을 죽여 달라고 했을 것이다.
“후우.”
마음의 결정을 내린 시온은 조금 더 심각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덕분에 리히텐 변경백이나 루시아는 물론이고 세바스찬, 심지어 김유현까지 관심 없는 척을 해도 은근히 시온의 다음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는 마나를 다루지 못 합니다.”
“···뭐라?”
“네?”
“···?”
다른 이는 몰라도 리히텐 변경백까지 놀라는 걸 보니 역시나 원래의 시온 클라우젠도 그 사실만큼은 꽁꽁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약점이 드러날까 기사들 앞에 모습을 아예 드러내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변경백 역시 점점 이상해지는 아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제대로 붙잡지 못 했고 말이다.
“시온, 그게 무슨 말이더냐.
그게···.”
“감응력이 다른 이들에 비해 떨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정말 말 그대로, 저는 아예 마나를 다루지 못 합니다.
감응력이 제로인 셈이죠.”
“아아···.”
그 말에 리히텐 변경백은 마치 ‘암 말기입니다.
길어봤자 3개월.’ 이라는 대사라도 들은 듯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탄식만 내뱉었다.
사실 그럴만한 것이, 마나를 다루지 못 한다는 건 이세계에서는 몸에 굉장한 하자가 있다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였다.
어떤 평범한 이도 최소한의 마나 감응력은 지니고 태어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세계의 모든 이들의 실력 평균이 높은 것이다.
헌데 그 마나를,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장자가 전혀 다루지 못 한단다.
이건 후일 후계를 논할 때 약점은 물론이고, 아예 생존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이것 좀 어떻게 해달라고 빌다보니 릴리트님이 떡!
하고 나타나셨습니다.
그게 끝입니다, 아버지.”
“그, 그런 것이었더냐.
그래, 그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아아···.”
억장이 무너지는 리히텐 변경백이었다.
이제야 왜 자신의 아들이 그토록 스스로를 숨겼는지 알 수 있었다.
저런 큰 약점을 지니고서 버텨야 했으니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비란 사람이, 부모라는 이가 자식의 그 큰 고민조차 알지 못 했었다고 생각하니 리히텐 변경백은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뭐,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로 시온이 말을 잇는다.
“마나를 다루지 못 한다고 해서 어디 몸에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능력있는 분들도 많이 있으니 말입니다.
당장 마법으로는 릴리트님도 있고 옆에 루시아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시온은 슬쩍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얼굴이 붉게 물드는 루시아였지만 딱히 손을 빼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법도 마법이지만, 루시아의 진짜 강한 부분은 따로 있지.
이제부터 그걸 개발해야 한다.’
소설에서는 이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놈 때문에 극심한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며 불안한 행보를 보였던 루시아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여인 문제에 대해서는 갈팡질팡이었던 김유현 대신 자신의 곁에 있으니까, 그녀의 진짜 재능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야!
왜 내 손은 안 잡아줘?
나도 손 잡아줘!
손, 손, 손!”
어서 손을 내놓으라는 듯 파닥거리는 릴리트.
그 모습이 마치 다른 애완동물을 쓰다듬자 얼른 달려와서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 같아 시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할 일이 너무 많아질 듯 해서 걱정이죠.”
제대로 난장판을 만들 생각이었다.
소설의 흐름을 따라 딱 그 부분에서만 건드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는데, 어찌 된 일인지 사방에서 내용이 꼬이고 있다.
그게 자신이 시온이 되어버린 것으로 인한 나비 효과라면, 날갯짓 한 번에 태풍이 되어서 돌아올 것이라면 차라리 태풍으로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는 게 시온의 생각이었다.
시온의 위로에도 침중한 모습을 감추지 못 하는 리히텐 변경백을 두고 시온은 방을 나섰다.
원래라면 바로 뒤에 릴리트와 루시아가 달라붙었을 테지만, 둘이 ‘마법’ 이란 것에 대해서 논해보라는 미끼를 던져두고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김유현.”
한동안 복도를 걷던 시온이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일정한 거리를 벌리고 기척을 죽인 채 뒤를 따르던 남자가 똑같이 멈춰 섰다.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
“난 분명 적의 기사단을 막으라고 했어.
그들이 본대의 뒤를 잡고 찔러 들어오면 반으로 갈라지고, 부서진 얼음처럼 녹아내릴 테니까.”
“···.”
“네가 상대한 여기사가 강했다는, 그래서 그녀를 붙잡는 게 더 중요했다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네 실력이라면 그 기사를 포함한 전원을 붙잡아두고 있을 수 있었잖아?”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마침내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시온은 가벼운 탄식을 내뱉고는 슬쩍 뒤로 몸을 돌렸다.
“릴리트님이 말해주셨어.
넌 상당히 강한 놈이라고.
좀 고생은 했어도 그 때 적의 기사단 전원을 상대할 수 있었다고 말이야.”
“그냥 강한 이와 싸워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전장에서 그런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착각마십쇼.
저는 당신의 부하도, 이곳의 병사나 기사도 아닌 그저 손님입니다.”
“착각하지 마라.
좋아.
그 말, 내가 지금 확실히 돌려주도록 하지.”
완전히 몸을 돌린 시온은 김유현과 마주 보고 섰다.
차갑게 굳어서 으스스한 빛을 내는 김유현의 시선에도,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라, 김유현.”
“···뭐라고 했습니까?”
“싸움 그 자체를 즐긴다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그리고 거칠고 난폭한 검로로 가릴 수 있다는 착각 말이야.
막상 너는 아무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잖아?”
순간 김유현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오른손이 슬쩍 움직이는 것이 한 마디만 더 하면 검을 뽑겠다고 협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망설이는 자신을 숨기다보니 너 스스로가 싸움을 즐기는 놈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김유현.
정말 죽이고 싶지 않다면 중요한 순간에 망설이지 말고 검을 휘두르는 편이 좋을 거야.
자꾸 망설이다가는 네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죽어나갈걸.”
항상 냉철한 모습을 보여 히로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철혈의 남자라고 불리던 김유현.
하지만 막상 속내는 매번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점점 옅어지는 김유현이라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때문에 누군가를 죽이기를 망설이다가 오히려 제 벗들이, 자신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어떤 독자는 그런 주인공을 보며 암 덩어리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애새끼라고 했지만 시온은 평범한 인간이 갑자기 이상한 세상에 떨어져 타의로 검을 잡게 되었다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미친 듯이 노력했다고 해도 저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마치 자신이 있다는 듯 말하는군요.”
김유현은 분노로 차갑게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죽음과 삶이 나뒹구는 곳을 수도 없이 전전했습니다.
여태 안전한 곳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한 번 그런 참상을 경험했다고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네 말대로 어쩌면 나도 너와 비슷한 사람일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어.”
“그게 뭡니까?”
“난 교훈이나 감동을 주어야 할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
난 좋은 놈이 아니다.
오히려 나쁜 놈에 가깝지.
그래서 망설일 필요가 없다.
난 살고 싶을 뿐이고, 살아서 내 사람들과 함께 내가 이룬 것을 즐기고 싶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라면, 이제부터 무슨 짓이든 다 할 생각이다.
“공자님!
공자님!”
복도 끝에서 라이온 기사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예상하던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나 여기 있습니다, 기사단장.무슨 일이죠?”
“큰일입니다.
방금 전 올라온 보고인데, 누디아 왕국의 병력이 방금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이미 또 다른 병력을 준비 중이었던 모양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막대한 타격을 받은 누디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저들은 바로 병력을 재편성하여 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마치 2차 공격대를 준비 중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좋지 않군요.
우리도 성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병사들도 절반이 상했는데.”
“지금 변경백께서···.”
“기사단장.”
“네, 공자님.”
“혹시 성 안에 현악기가 있습니까?”
“···예?”
라이온 기사단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데 갑자기 악기는 왜 찾는단 말인가!
“가서 하나 찾아와주세요.
그리고 아버지께는 제가 따로 찾아가 뵙죠.”
“공자님,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시온은 킥킥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정말 제대로 살아남겠다고 결심했으니 남은 건 실행에 옮기는 것 뿐.
‘딩가딩은 있다고 해도 부채가 없으니 폼이 나려나 모르겠구만!’
자신의 댓글에 영감을 받았던 작가는 이 이벤트를 나중에 한 번 써먹기는 했다.
누가 누가 쫄보인지 가리는 치킨 게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