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240)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240화(240/439)
240―――――
즉위식
“히스파냐의 이름을 짊어진 자여.
그대에게 묻겠노라.”
몸이 많이 노쇠하여 공식 석상에조차 나오는 것도 버거워하던 에드가 4세.
그러나 그도 오늘만큼은 그 어떤 때보다도 더욱 굳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앉던 왕좌가 아닌, 단 위에 서서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의 딸을.
그리고 장차 이 나라의 새로운 군주를 맞이하는 자리였다.
“그대는 어떤 풍파와 고난 속에서도 왕실과 국가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그리하겠나이다.
제 몸 속에 흐르는 이 히스파냐의 피와, 제게 걸린 이 이름을 걸고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나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를 돌보아야 한다.
가장 강하나, 가장 약한 이를 보호해야 한다.
가장 고귀하나, 가장 천한 것까지 사랑해야 한다.
그대는 정녕 그리할 수 있겠는가?
권좌에 취해 잘못된 길로 걸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는가?”
“그러겠습니다.
맹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보여라.
그대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얼마나 낮은 곳까지 가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하는지 스스로 직접 걸어라.”
에드가 4세의 말이 끝나자 바네사 왕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직후 옆에 서있던 시종장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시온은 몇 십 번이고 예행연습을 했던 대로 바네사 왕녀에게 다가가서는 조심스레 그녀의 신발을 벗겨냈다.
“왕녀님.”
시온이 속삭이자 바네사 왕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고 있던 화려한 겉옷을 벗은 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다른 이가 다가와서는 겉옷을 받고 대신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조금은 누추한 느낌까지 드는 겉옷을 내밀었다.
그걸 망설임 없이 받아서는 자신의 몸에 걸친 바네사 왕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그녀는 망설임 없이 왕성 대로에 맨발을 디뎠다.
“가지, 시온 클라우젠.”
“네, 왕녀님.”
바네사 왕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왕국민들이 고개를 숙이며 왕실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동시에 귀족들은 그 앞에 꽃을 뿌리며 그녀가 디뎌야 할 길목마다 자신들이 함께 하겠음을 온 몸으로 표시했다.
돌과 굵은 자갈로 포장되어 있는 대로를 지나, 바네사는 흙으로 된 조그마한 길에 들어섰다.
평소에는 조그마한 돌멩이나 작은 자갈 등이 깔려있었지만 이번에는 아주 고운 흙 외에는 바닥에 나뒹구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왕국민들이 참 고생이 많았겠구나.”
바네사 왕녀의 말대로, 즉위식 이전에 이 의식을 위해서 왕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왕성의 모든 길을 쓸고 닦으며 혹여 왕녀가 발을 다치지 않을까 신경을 써둔 후였다.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렇게 아주 조그마한 돌멩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을 썼다는 건 국왕이었던 에드가 4세, 그리고 곧 왕이 될 바네사 왕녀 모두가 왕국민들에게는 무척이나 좋은 사람들로 기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앞으로 왕녀님이 더욱 분발하셔야겠습니다.
다음의 왕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솔직히 아직은 부왕만큼 할 자신이 없어.”
“장담하건데 바네사 왕녀님은 훌륭한 왕이 되실 겁니다.”
“···.”
아마 의식을 진행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바네사 왕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따르던 시온을 쳐다봤을 것이다.
그런 말을 어찌도 그리 확신에 찬 어조로 하는 것이냐고.
당신은 나에 대해서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도 무슨 증거로 이리 자신을 믿는 것이냐고, 바네사 왕녀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난 그대가 무섭다.’
그래, 자신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사람이 무서웠다.
도대체 왜 자신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 것인지, 그런 마음을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은 과거의 편견에 사로잡혀 시온 클라우젠이란 인물을 함부로 평가했다.
그가 장차 화려한 날갯짓을 하며 아름답게 날아오를 나비인 줄도 모르고서.
다음 국왕의 날개가 되어 한 번도 닿지 못 한 곳까지 오르게 도와줄 사람인줄 모르고서.
헌데 저 남자는 단순히 오해나 과신이 아닌, ‘확신’ 들어찬 옳고 곧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뜻을 가져보라는 말을 했다.
마치 바네사만이 이 히스파냐를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왕의 재목이라고 알아본 듯이 말이다.
‘그 기대가 고맙기도 했지만 부담이 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이미 시온 클라우젠, 그대라는 이는 너무나 대단한 사람인데 그런 이가 나를 이리도 강력하게 지지하니 그 기대에 부응치 못 하는 군주가 될까.
난 그게 무척이나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그래, 이제는 상관하지 않는다.
신경 쓰지 않는다.
“그대가 항상 뒤에 있어주겠지?”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물으니 바로 답이 돌아온다.
바네사 왕녀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뒤에서 자신을 따르는 저 남자의 말대로.
시온 클라우젠은 뒤에서 항상 자신을 봐주며 언제든 자신이 나설 때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영웅이란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는 법이다.
그 영웅과 동시대에 살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영웅의 지지를 받는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제는 두려움이 아니라 안도감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시온 클라우젠 공자.
그대가 원하는 건 뭔가?”
“무슨 말씀이신지.”
“다들 원하는 것이 하나씩은 있지 않은가.
권력, 명예, 재물.
누구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도 하지만 그런 것에 욕심이 있어야 비로소 ‘삶’ 에 충실할 수 있는 법이지.
그래서 선조들이 그러하셨고, 부왕이 그러하셨고, 내가 그러하듯 귀족들과 줄 건 주고받는 건 받아내는 일종의 거래를 계속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그마한 골목길을 지나, 다시 대로로 나선다.
머지않은 거리에서 왕실 기사들이 호위를 하고 그 주변에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마법사들과 경호 인원들이 두 눈을 빛내고 있지만 이 둘의 대화만큼은 그들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내가 실수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야.
그러니 그대가 원하는 게 뭔지 알려주면 좋겠어.
그걸 안다면 나와 그대의 사이가 괜히 불편해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시온은 잘 모르겠지만, 이건 엄청나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무엇을 말하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배려해주겠다는 뜻.
명실상부 차기 국왕의 최측근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시온 클라우젠, 그는 과연 무슨 대답을 할까.
다른 귀족들처럼 재물이나 권력에는 크게 뜻이 없어보였으니 다른 것을 원할까?
더 큰 명예, 혹은 자신의 뜻을 부담 없이 펼칠 수 있는 새로운 무대?
“전 그냥 살고 싶습니다.”
“···뭐라?”
이번에는 정말 놀랐는지 바네사 왕녀의 발걸음이 살짝 멈추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길을 걸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살고 싶다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무슨 심오한 뜻이나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거나, 아니면 돌려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대로 살고 싶은 게 제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곁에는 엄청난 미녀들에, 왕국의 영웅이라는 호칭에, 주인공 놈을 꽉 잡은 것까지.
비둘기나 뾰족귀들의 지랄만 아니라면 시온도 그냥 그렇게 조용히 살고 싶었다.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리는 삶, 그걸 누가 거부하겠는가.
인간이란 동물이 원해 끝도 없이 욕심을 부리는 존재라고 하지만 시온은 그 욕심 부리다가 골로 가는 멍청한 놈들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심히 이상한 대답이구나.”
“이상할 거 없습니다.
그냥 현재 생활에 만족하기에, 더는 필요한 것이 없기에 드리는 답이니 왕녀님이 의문을 품으실 필요는 없지요.”
“그래도 본래 남자라 하면 여인 앞에서 일부러라도 좀 멋진 대답을 하는 게 정상이 아니더냐?
심지어 왕국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자가 이리도 소박한 이야기라니.”
소박한 이야기라, 아마 그게 얼마 후면 소박한 게 아니란 걸 알게 될 텐데.
시온은 아직 대륙에 불어 닥칠 비둘기 놈들의 미친 불바다를 모르는 바네사 왕녀를 바라보며 자신이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바네사 왕녀는 장장 몇 시간 동안이나 왕성의 모든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아무리 길을 치우고 꽃을 깐다고 해도 이렇게 걸으면 몸이 상당히 피로해지기 마련이다.
더해서 무슨 병사들이나 기사들마냥 전문적으로 몸을 단련시킨 이도 아니고 말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대 걱정이나 하거라.
난 멀쩡하다.”
사실 그 말이 맞기는 했다.
그래도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바네사 왕녀와는 달리 시온은 말 그대로 마나 고자였으니까.
하지만 바네사 왕녀는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온의 기본 체력과 그에 더해서 북부에서 얻은 힘 덕분에 마나 없이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산보나 하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거의 행군 수준이군.’
물론 그때처럼 군장까지 짊어지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의식이라고 해서 간단히 끝내고 왕위를 받고 끝인 줄 알았는데 정말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왕성 구석구석 모든 길을 도는 바네사 왕녀를 바라보며 시온은 상당히 능력 있지만, 또 은근히 피곤해질 것 같은 미래의 여왕님이라고 중얼거렸다.
마지막 길까지 전부 돌아본 후, 바네사 왕녀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처음 길을 시작했던 장소가 아닌, 왕궁으로 이동했다.
대관식이 치러지는 곳에 도달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바네사 왕녀의 복장을 차기 국왕에 걸맞은 차림으로 바꾸고, 시녀들이 발을 닦아내곤 다시금 신발을 신긴다.
조금 전까지 지극히 평범한 여인으로 보이던 바네사 왕녀는, 이제 한 나라의 고귀한 존재로 돌아와서는 총기와 위엄이 넘치는 얼굴로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 길었던 길을 같이 걸어줘서 고마웠다, 시온 클라우젠 공자.
이 다음부터는, 왕녀와 귀족이 아닌 주인과 신하로서 만나겠구나.”
대관식으로 향하기 전, 바네사 왕녀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왕녀’ 로서 하는 말이니 시온은 전보다도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함께 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여 영광일 것입니다.
‘여왕’ 이시여.”
바네사 왕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이제는 되었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는 전(前) 국왕이 될 에드가 4세의 앞으로, 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왕관과 홀의 곁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던 에드가 4세는 자신의 노쇠함마저 모두 잊은 채 어느 때보다도 더욱 굳건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보았느냐.
그게 네가 걸어야 할 길이다.
왕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강하며 높은 이가 걸어야 할 길은, 때로는 꽃이 깔린 대로이기도 하고 때로는 좁고 흙투성이인 길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를 위해, 가장 약한 자를 위해, 가장 천한 자를 위해.
그대가 한 맹세를 잊지 말거라.
바네사 링클레 히스파냐 왕녀.
아니, 히스파냐의 새로운 왕이시여.”
오후의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왕관이 바네사 왕녀의 머리 위로 향한다.
한 나라의 지존임을 알리는 증표이자,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더 무거운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경고가 담긴 그 물건을 에드가 4세는 마침내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있었다.
“히스파냐의 적법한 지배자이자 왕실의 새로운 수장이 지금 막 들어섰으니,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새로운 왕의 명을 기꺼이 따르라.”
모든 일을 마쳤다는 듯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에드가 4세가 물러난다.
이제 오롯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홀로 남게 된 왕녀.
아니, 히스파냐의 여왕은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히스파냐의 새로운 왕에게 찬란한 영광을!
따르는 이들에게 무한한 번영을!”
에드가 4세의 외침이 시작이 되어, 자리에 모여 있던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새로운 주인의 등장에 대한 경외와 그녀를 따를 모든 이들을 위해 축복을 빈다.
여왕은 마침내 새로운 길에 올라 가장 높은 곳에서 왕국의 모든 이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살핀다.
“레데넨 후작가의 가주, 볼코 레데넨이 여왕께 경배를 표하나이다!”
“호아킨 구첸 후작이 새로운 왕께 영원한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오네르 후작 가문의 에스티아가 감히 여왕께 인사를 올리나이다.”
히스파냐의 3후작 가문 전원이 납작 엎드리며 새로운 주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뒤를 이어 나머지 백작 가문들이, 그리고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새로이 일어선 여왕에게 충성을 다 하겠다 다짐한다.
“그대들의 내일이 어제와 같은 광명으로 가득하리라.”
바네사는 지극히 짧고 담백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으로 감사를 표한다.
그에 귀족들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금 소리친다.
“히스파냐의 새로운 왕에게 찬란한 영광을!
따르는 이들에게 무한한 번영을!”
마침내, 바네사 왕녀가 에드가 4세의 뒤를 이어 히스파냐의 왕이 되었다.
시온이 그렇게나 이루려고 노력했던 일들 중 하나가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게 자식들 다 키워서 결혼식 보내는 느낌이려나?’
아쉽게도 시온 자신은 자식은커녕 여자도 없던 몸이라 알 수가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밤새서 읽던 소설의 주인공이 마침내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을 때, 가벼운 한숨을 내뱉으며 길고 길었던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는 느낌이랄까.
‘진짜 이야기, 진짜 고생은 이제 겨우 시작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오늘 하루 정도는 이 분위기에 휩쓸려 웃고 떠들어도 되지 않을까.
시온은 그리 생각하며 바네사를 위해 진심으로 기원했다.
Long live, The Queen.
―
“새로운 왕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새로운 왕이 들어섰다, 라.”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불이 붙어 한창 타고 있던 뭔가를 가볍게 튕겨냈다.
“그러면 어디 한 번 떨어트려볼까?”
―――――――작품 후기―――――――
몸 상태는···.
아직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시 힘내서 연재토록 하겠습니다!
추천 주시면 더 힘이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