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25)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25화(25/439)
<네가 버린 여기사가 한정판이더라>
결과부터 말하자면, 누디아의 군세는 힘없이 물러났다.
공성전을 할 수도 있었지만 가져온 공성 장비도 많지 않았고 보급선을 확실히 할 수도 없다.
거기에 더하여, 결정적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곤두박질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공명의 함정이 먹힌 이후로.
아니, 전장에서 단 하나의 병사를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뛰어들었던 그 일 후로 시온을 대하는 기사들이나 병사들의 자세가 180도 바뀌었다.
전쟁 영웅, 혹은 성인 군자를 보는 듯 한 그 눈빛에 시온은 절로 속이 느글거릴 정도였다.
“고생하네.”
“아닙니다!”
슬쩍 안쪽을 바라본 시온은 흐음, 하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보여주기 형식으로 만들어서 매달아둔 통발에 생각지도 않게 월척이 걸려들었다.
심지어 한 번 잡아보고 싶었던 놈이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역시 제갈공명 클라스.
오지고 지렸고 렛잇고.’
걸음을 옮긴 시온은 쇠창살 앞에 섰다.
딱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안쪽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는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리시키다 암셸, 맞지?”
“···.”
대답은 역시나 들려오지 않았다.
만약 옆에 변경백령의 기사들이 같이 서있었다면 무엄하다며 큰소리를 냈을 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시온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별 말없이 그 앞에 주저앉았다.
차디 찬 감방 앞에 변경백령의 2인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행동을 취하자 안에 있던 여기사가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 하나 물을게.
왜 성 안으로 들어온 거지?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설마 이게 함정이 아닐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을 테고, 정찰 목적이라기에는 당신이 너무 고급 인력인데.”
“···.”
“대답을 안 하시겠다?”
“···.”
“리시키다 암셸.
혹시 죽을 생각이었나?”
그게 정곡이었다.
화들짝 놀라서는 자신 쪽을 바라보는 걸 느낀 시온은 자신의 예상이 맞다고 확신했다.
‘리시키다 암셸.
작가가 마치 차후 김유현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처럼 밀어주고, 설정도 잡아주고, 히스파냐 내부에서도 은근히 띄워주도록 한 등장인물.’
그런데 정작 그 최후는 딱 한 줄.
반란에 가담했다는 죄로 숙청!
이 다였다.
이건 뭐 갑분숙도 아니고, 왠 뜬금없이 숙청이란 말인가.
황당하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작가는 누디아 왕국은 원래 내부에 문제가 많았다, 라는 작가 후기로 불만 세력을 숙청해버렸다.
사실 히로인도 아니었고, 김유현과 검을 나눈 적도 없이 그냥 빌드업만 하다가 사라졌으니 작가한테 계속해서 이건 좀 아니지 않냐고 불만을 넣기도 애매했다.
그렇게 리시키다 암셸이라는 등장인물은 순식간에 소설에서 사라졌다.
작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 한 채로.
‘그런데 저 여자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왔다가 붙잡힌 기사들을 조져보니 답이 나왔단 말이지.’
조졌다고는 하지만, 딱히 고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릴리트가 옆에 다가가서 부비부비 두어 번 해주면 매혹에 걸려서는 몇 년을 모아둔 비상금 위치에, 똥 싸다가 주저앉은 이야기까지 술술 내뱉을 정도로 정신줄을 놓았으니 말이다.
리시키다 암셸은 국경을 지키는 누디아의 귀족 가문의 기사였다.
실력이면 실력, 인품이면 인품, 심지어 외모까지 출중하여 가문의 주인까지 그녀를 차후 제 부인으로 맞이하려고 할 정도로 리시키다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그런데 일련의 사건 하나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게 되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잠시 왕궁에 들렸다가 그만 누디아 국왕의 눈에 들고 만 것이다.
이미 수많은 여인들을 제 후실로 들일 정도로 여색이 눈이 멀었던 군주.
그는 기어코 거부하는 리시키다를 제 침실로 들이고 말았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원래라면 왕의 침실에 들어갔으니 바로 후실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리시키다는 여전히 기사의 복장 기사의 신분으로 왕궁을 나섰다.
가문으로 돌아간 그녀는 말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그저 국왕의 곁에 있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만만하게 흘러가겠는가?
세상은 항상 비슷하다고, 이세계라고 해서 다를 거 없었다.
남녀가 밤중에 같은 방만 써도 온갖 이상한 말이 나오는 판국에 자그마치 왕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나왔다.
당장 리시키다는 온갖 소문에 시달렸고, 그녀가 속해있던 가문 역시 그 저급한 말들에서 피해가지 못 했다.
‘리시키다의 주인이라는 자는 분노했다지.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더 큰 권력을 좇아 왕에게 꼬리를 치고 스스로 옷을 벗어 몸을 팔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차라리 왕궁에서 그녀를 부른다면 또 모를까, 누디아의 국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 정확히는 말을 전하긴 했단다.
리시키다가 아닌 그녀가 속한 가문에게, ‘너희 기사가 내게 모욕감을 줬어.’ 라고.
순식간에 국경의 유력한 가문에서 왕에게 찍힌 끈 떨어진 귀족이 되어버린 리시키다의 주인은 그 이후로 그냥 죽어 버리라며 리시키다를 저주했다.
왕이 불렀으면 차라리 얌전히 받아들이고 후실이 되던가, 아니면 그냥 목숨을 끊던가.
왜 살아서 자신에게 이런 피해를 주냐고 괴성을 지르면서 말이다.
‘···확실한 건 그 주인이라는 새끼, 뇌에 하자있어.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주인이라는 놈이 제 사람을 보호하지는 못 할망정 나가서 뒈지란다.
한 때는 마음에 품었었던 여자를 향해 다른 남자을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자결을 하던가, 라는 말을 지껄였단다.
‘갑자기 그 주인이란 새끼 면상이 좀 보고 싶네.’
관상은 야필패에 준하는 과학 중의 과학이라고, 분명 어디 바람을 타고 날아온 쓰레기 봉지가 그렇게 징징거렸을 것이 뻔했다.
기사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만 있어도 좆도 말도 안 되는 자격지심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가.
“리시키다.”
“···.”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나?”
시온의 질문에 여기사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전장에서 한 번, 그리고 붙잡혀서 바닥에 쳐박혀 있을 때 한 번 들었다.
무엇보다 방금 전 지하 감옥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공자님!’ 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던가.
“여전히 대답을 안 하는군.”
“···.”
“좋아, 뭐.
마지막으로 대화 좀 나누고 싶었는데 이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리에서 일어선 시온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 소리를 잠시 듣고 있던 리시키다는 다시금 찾아올 침묵에 대비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데리고 나와.”
“예?”
“저 여기사, 데리고 나오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쫓으려고.”
변경백령의 기사는 물론이고 갇혀있던 리시키다조차 당황하게 만드는 명령.
지금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었던 그녀였지만, 곧 리시키다는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뭔가 후다닥 지나간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기사들에 둘러싸인 채로 정말 감옥을 벗어나서 성 바깥으로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상황 인지를 하는 사이 움직임을 제한하던 포박도 전부 사라지고, 클라우젠 영지 바깥으로 향하는 성문 앞에 서있는 자신이었다.
쓰던 검과, 아까 타고 있던 말까지 전부 돌려받은 채로.
“나가.”
“예?”
“뭐야, 쫓겨나니까 이제야 입을 여는 건가?
이러면 멋진 모습 좀 깨는데.”
“지금,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가라고.
나는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 죽여주는 것도, 붙잡아서 먹고 재우는 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시간도 돈도 아깝고 칼로리조차 아까워서.”
어안이 벙벙한 리시키다였다.
자신은 분명 전쟁포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몸값을 받을 수 있다는 기사.
심지어 누디아에서 무척이나 귀중하게 여겨지는 상급 기사이다.
붙잡아두고만 있어도 몸무게만큼의 금화를 받아낼 수도 있는 인질을, 이렇게 놓아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저를 풀어주는 겁니까?”
그래도 만의 하나로, 아무런 조건 없이 포로를 해방해주는 경우도 있어 리시키다는 입을 열어 그 부분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냉소가 가득 담긴 청년의 표정과, 시리도록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다.
“풀어줘?
이봐.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당신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 내쫓는 거야.
말했잖아?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 죽여주는 서비스는 제공 안 한다고.
죽고 싶으면 이용료를 내세요, 고갱님.
그러면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에프터 서비스와 함께 고통 없이 한 큐에 보내드릴 테니.”
약간 이상한 말들이 껴있기는 했지만, 정리하자면 죽겠다고 달려든 자신을 클라우젠 변경백령 측에서 죽일 마음은 없으니 그냥 꺼지라는 것이었다.
“뭐 하고 있어요?
어서 나가라니까.”
시온의 말에 리시키다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떼며 말안장을 잡았다.
그리고 그 옆에 매달려있던 검을 보는 순간,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서는 안 된다.
여태 주인이라 불렀고, 따랐고, 믿었던 자가 내린 마지막 명령.
가서, 죽어라.
죽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공자.”
“왜.”
“나는··· 나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수 없다?”
“네, 그러니 저를 풀어줄 거라면 차라리···.”
“분명 말했을 텐데?
리시키다 암셸.
여기는 죽고 싶어서 찾아오면 ‘고통 없이 한 방에 쓱싹’ 해주는 곳이 아니라고.
애초에 죽고 싶었으면 끝까지 싸우다가 죽을 것이지, 왜 붙잡혀서 일을 피곤하게 만들어?”
“그건···.”
리시키다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시온은 행동으로 그녀의 말을 막아 세웠다.
안장 옆에 매여져 있던 그녀의 검을 쑥, 하고 잡아 뽑더니 그걸 리시키다의 발 앞에 내던진 것이었다.
“스스로 해.”
“···에?”
“죽고 싶다며.
그러면 당신 스스로 하라고.
좋잖아?
그쪽은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있고, 이쪽은 힘 하나 안 들이고 대충 시체만 불에 던지면 그만이니까.”
“···.”
“죽고 싶으면 죽어.
남한테 빌지 말고, 당신 스스로.”
그렇게 말한 시온은 팔짱을 끼곤 기다려주겠다는 듯 리시키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잠시 발 앞에 내동댕이쳐져 있던 검을 바라보던 리시키다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그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내뻗었다.
스르르릉―.
서늘한 소리와 함께 빛을 튕겨내는 은빛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나 날이 잘 세워져 있는지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예기가 절로 느껴졌다.
잠시 검을 들여다보던 리시키다는 검을 붙잡은 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곧이어 목 언저리에 차가운 쇠의 감촉이 전해지고, 힘을 조금 더 주자 화끈한 느낌이 들며 액체가 목을 타고 쇄골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동맥이 잘리고 과다출혈로 죽을 거야.
그래도 큰 고통 없이 그저 흐릿해지는 모든 것을 느껴가며 죽는 방법이니 나쁘지는 않겠군.
아, 엄청 추울 지도.”
죽자.
죽어야 한다.
그래야 이 힘든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끝을 내야 한다, 끝을···.
‘나는···.’
나는, 정말 죽고 싶은 걸까?
정말 죽어야만 하는 걸까?
미련 한 줌 없이, 행복하게.
나는 그렇게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아아···.”
리시키다의 입에서 탄식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흐릿한 뭔가가 흘러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이런 삶은 조금도 생각지 않았는데.
나는 그저, 다른 기사들처럼 자신을 위해주던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고 싶었을 뿐인데.
“나였다면 말이야.”
갑자기 들려오는 시온의 목소리에 리시키다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같았으면 내 손으로 직접 죽였어.
네가 내 부하였다면 말이지.
그 어떤 주인 놈도 제 부하한테 나가서 알아서 뒈지라고는 안 해.
차라리 제 손으로 죽이고 말지, 남 좋은 꼴은 절대 못 보니까.”
“그게, 무슨···.”
“제 부하 하나 제대로 감싸지도 못 할 거면서, 제 부하 하나 제대로 벌하지도 못 하면서 무슨 주인을 운운하고 앉아있냐.
그건 그저 겁쟁이 변태 새끼에 지나지 않지.
주인님, 주인님 소리나 듣고 싶어 하는 병신 새끼들.”
시온은 바들거리고 있는 리시키다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도와주겠다는 듯 검을 쥐게 해서는 다시금 그녀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죽고 싶다면 도와는 드릴게.
하지만 이건 알아둬라.
네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서 그 주인이란 놈은 신경 하나도 안 써.
···아, 생각해보니 주인도 아니잖아?
너를 버렸는데, 이제 너는 더 내 부하가 아니라고 했는데 당연히 주인과 부하의 관계 성립이 될 리가 없지.”
“그런···.”
“넌 버림 받았어, 리시키다 암셸.
한 치의 의심할 것도 없이, 완벽하게 버림 받았다고.”
그 말에 리시키다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시온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시온은 슬쩍 고개를 숙이곤, 마치 악마가 속삭이듯 아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도 버려.
네 주인을, 그 좆같은 놈을 쓰레기 내던지듯 버리라고.
그리고, 그리고 영원히 너를 버리지 않을 새 주인을 찾아 봐.
혹시 알아?
그 주인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지도.”
[작품후기]삐빅―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