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26)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26화(26/439)
<―>
악몽을 꾸었다.
평생 따르며 죽을 때까지 모실 거라 믿었던 주인이 자신을 버렸다.
더러워진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고, 세상이 손가락질을 한다고.
국왕은 감히 자신을 망신 준 자신의 가문을 잊지 않겠다며 모욕감 운운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그가 자신에게 내린 명령은 ‘가서 죽으라.’ 였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살고, 당신을 위해서 죽였는데.
이제는 당신을 위해서 죽으라뇨.’
모든 것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울고 싶었는데, 우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눈물을 참는 방법만을, 이를 악물고 버티는 방법만을 몸에 익히느라.
그 잘난 주인을 위해 모든 걸 인내하는 걸 익숙하게 만드느라.
‘그래도 꿈이어서··· 다행이다, 다행이야···.’
눈을 뜨면 평소처럼 그렇게, 모든 것이 그대로 있으리라.
자신은 그를 향해 인사하고, 그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고.
그렇게 모든 것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돌아가리라.
“는 시발 꿈.”
이마를 꾹꾹 누르는 느낌에 리시키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여기는, 자신의 숙소가 아니었다.
훨씬 넓고, 훨씬 화려하고, 무엇보다 누디아 왕국의 양식이 아니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리시키다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꿈이··· 아니었구나.’
그래,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죽으라는 명령을 들은 것이, 그리고 적들에게 붙잡힌 모든 것이.
그리고 자신의 앞에 검을 내던지던 한 청년의 모습까지, 모두 꿈이 아니었다.
“헛짓거리 그만 하고 퍼떡 일어나.
너 때문에 나가지도 못 하고 이게 뭐냐.”
쌀쌀한 목소리에 리시키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는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앉아있는 한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네 몸에 털끝 하나 안 댔다.
아는 누님께 옮겨달라고 부탁해서 내 방까지 데리고 온 거지.
덕분에 그 누님한테 맞아서 진짜 이승 하직할 뻔 했으니 알아둬.
존나 아팠다, 시발···.”
농담이 아니라, 시온은 정말 릴리트한테 맞아 죽을 뻔 했다.
거의 자살에 가까운 짓을 하더니 갑자기 찾아와서 한다는 부탁이 기사들 옆에 달라붙어 부비부비 춤추기, 그 다음은 여기사를 자신의 방으로 옮겨 달라 하기.
‘응.
알겠어.
죽고 싶다고?
죽여줄게.
네가 서큐버스의 독점욕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미 그 루시아인지 불여시인지 하는 여자 때문에 스트레스 존나 받는 중이라고!
이 개새꺄아아악!’
덕분에 거의 한 시간을 두들겨 맞았다.
왜 아버지가 ‘결혼은 가능하면 늦게 해라.
연애는 언제 해도 좋지만 결혼은 언제 해도 좋지가 않은 거란다.’ 라고 중얼거리며 담배 한 대를 빼물었는지 알 것 같은 시온이었다.
물론 그 후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에 바로 바닥을 설설 기셨지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온 공자.
왜 저를 당신의 방에···.”
“갑자기 픽 하고 쓰러져서는 그대로 졸도하더라고.
치료에 일가견에 있는 어느 누가 보니 아까 이쪽과의 첫 전투가 끝나고 쉬지도 않고 바로 온 것 같다고 하던데.”
“···.”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한 것 같다고도 했고.”
민감한 부분을 일부러 찔렀음에도, 리시키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 딱히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시온은 리시키다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극한의 피로감에 쓰러진 너를 왜 내 방으로 데려왔냐.
그건 하루의 말미를 준 셈이라고 쳐두자.”
“하루의 말미···?”
“너 죽고 싶다며.
근데 막상 또 네 목을 긋지는 못 하고.
설마 기사라는 녀석이 검을 무서워하거나 피를 보기 두려워하는 건 아닐 거잖아?
그러면 답은 하나지.
내가 정말 죽어야 하는지, 죽고 싶어 하는 건지 확실히 모른다는 것.”
시온의 말에 리시키다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딱 자정까지.
그 전에 결심이 들면 말해.
그러면 바로 네 칼 내어줄게.
뭣하면 해자로 뛰어들던가.
아, 그건 우리 병사들이 네 시체 건지느라 피곤해서 안 되겠다.
그냥 내가 어디 장소 정해주면 가서 죽어.
그러면 바로 화장해서 깔끔하게 정리는 해줄 테니.
만약 자정 전에 결심을 내리지 못 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냥 내쫓을 생각이야.
나가서 뒈지라고.
클라우젠 가(家)는 살고 싶다는 놈 살려주기는 해도 죽여 달라는 놈 죽여주는 곳은 아니니까.”
차갑기 그지없는, 차갑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냉혹한 말이었다.
리시키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있다.
결심이 서도, 서지 않아도 자신은 죽을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다.
주인을 잃은 기사는, 세상에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면 난 좀 가볼 곳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시온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뭐해?”
“예?”
“안 따라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하루 말미를 줬으니 그 전까지는 예약 시체가 아니라 전쟁 포로지.
그리고 난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이고.
그러니까 넌 오늘 좋든 싫든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이해했나, 기사 양반?”
뭔가 이상한 논리 같았지만, 확실히 이런 곳에 포로를 두고 갈 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하루 말미, 즉 오늘 하루가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리시키다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기 하루 전날을 멍청하게 앉아서 보내다가는 고독과 슬픔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어디 다른 곳에 신경을 쏟으면 마음이 좀 비워질 듯 싶었다.
“그러면 가보실까.”
시온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호위 임무를 담당하던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걸어 나오는 리시키다를 봐도 그 어떤 말도 없었다.
이미 시온에게 언질을 단단히 받은 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무 말 없이 그저 걸음을 옮기는 시온.
리시키다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왜 자신이 먼저 말을 걸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전쟁 포로가 그런 건 왜 궁금해 하지?
아, 질문이 잘못 됐네.
곧 죽을 녀석이 그런 건 왜 궁금해 하는 거지?”
“그건···.”
리시키다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시온의 말대로, 어차피 자신은 자정이 되면 죽을 몸인데 갑자기 그런 질문을 왜 한 것일까.
“병동.”
“···예?”
“바로 어제 그 치열했던 전투는 휴지통 이동 했어?
당연히 몸상하고 마음 상한 병사들 확인하러 가는 거지.
그 수많은 목숨을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억지로 밀어붙여 죽고 다치게 만들었는데, 높은 자리 차지한 놈이 얼굴 한 번 안 비치면 그게 사람이냐.”
아무렇지 않게 말한 시온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둡게 보였다.
최소한 리시키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스펄, 넘모 아프다고요, 누님.’
서큐버스 퀸, 여신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여인이라고는 해도 마족은 마족이다.
그리고 마족은 원래부터 힘이 존나게 세다.
그 힘 센 마족한테 반 진심으로 두들겨 맞은 시온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무슨 PRI (사격술 예비 훈련) 한 124번 훈련병마냥 끙끙거렸다.
차라리 마나라도 있었으면 좀 덜 아프게 맞을 수도 있었을 텐데.
방어 마법은 고사하고 신체 강화조차 못 하니 그냥 살려만 주십쇼!
라고 외치며 쥐며느리 마냥 몸을 둥글게 마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시온이 마나를 다룰 줄 알았다면 릴리트가 그만큼 더 세게 때렸을 테지만.
“아, 시온 공자님!”
한창 부상자들을 돌보던 누군가가 시온을 알아보곤 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간호하던 이들은 물론이고 병상에 누워있던 환자들까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야!
괜히 일어났다가 상처 터져서 분수쇼 하지 말고 누워있어!
시바, 누워있으라고!”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어제 시온이 병실로 들어오니 한 병사가 급히 몸을 일으키다가 상처에서 피가 조금 튄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분수 쇼가 펼쳐지자 절로 소름이 돋은 시온은 급기야 정색을 하며 다친 놈은 다친 놈답게 누워있으라고 온갖 잔소리를 퍼부었었다.
“아, 옙!
죄, 죄송합니다.”
“어휴, 이 답답한 것들.
다쳤으면 다친 티 팍팍 내라, 이것들아!
다친 게 죄냐?
나라 지키다가 몸 아작 난 게 죄냐고!
죄인은 멀쩡한 나인데 왜 너희들이 지랄이야!”
그 말에 여기저기서 난감한 웃음, 그리고 에이!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사실 시온도 지미 페이커를 구하겠다고 온갖 생지랄을 떨다가 몸 여기저기에 가벼운 화상을 입기는 했다.
물론 저들 앞에 비하면 코딱지 수준도 되지 않았기에 입 닥치고 있었지만.
“어이, 지미 페이커.”
“고, 공자님.”
시온은 그 중 한 병사 앞에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시온의 명령에도 버둥거리면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려고 했다.
물론 시온에 의해 바로 제지되었고 말이다.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던 일입니다.”
“각오는 지랄.
살겠다고 각오를 다져야지, 죽겠다는 각오는 각오가 아니라 의미 없는 자살 기도에 불과하다.
알아둬.”
“며, 명심하겠습니다.”
시온은 그러다가 슬쩍 자신의 본 목적을 드러냈다.
당장 이 병사를 살리려고 그 병신 짓을 한 것도 이 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의 여동생.
나중에 거하게 흑화 한 사발 하시는 트리샤 페이커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 잊지 말고 나한테 들려.
같이 가서 네 마을 사람들한테 이 놈 내가 구한 놈이니 험하게 굴리지 말라고 말 좀 하려니까.”
“그,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 있다.
시바, 존나게 그래야 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네 동생이 흐콰한다!
외치고는 다 뒤엎는다고.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
알았냐, 지미 페이커?”
“네, 넵.
시온 공자님.”
시온은 지미 페이커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병동을 계속해서 둘러보았다.
그러는 동안 리시키다는 가만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라우젠 백작가는 명실상부 히스파냐 왕국의 명문가 중 하나다.
변경백이란 자리는 국경 하나를 책임지는 막중한 의무를 짊어짐과 동시에 후작에 준하는 권력과 사병을 지닐 수 있게 된다.
그걸 미쳤다고 왕실이 여느 멍멍이나 음메한테 맡길 리 만무하다.
즉 클라우젠 가문은 히스파냐 왕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온 클라우젠은 그 클라우젠 백작가의 장자다.
비록 이상한 소문이 좀 돌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소문에 불과했던 것 같아.’
리시키다 본인도 기사고, 한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다.
그녀 기준에서, 저런 거대한 가문의 후계자라는 위치에 있는 이가 스스럼없이 병사들에 다가가서 그들과 함께 이런저런 농담을 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시온 클라우젠은 귀족이 아니라, 일반 병사 같아보였다.
마치 그 자신이 저런 병사들이었던 것처럼, 전장의 소모품으로 여겨지던 것처럼.
“뭘 그리 넋 놓고 보고 있어.”
“···아.”
“따라와.
오늘 일정 많다.”
그렇게 리시키다는 시온을 따라 또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시온은 여러 이들과 만나, 여러 업무를 보았다.
사실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그저 누군가를 치하하고 또 누군가를 위로하고.
또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에 참여하여 진심으로 그들의 넋을 기렸다.
“···.”
그 모든 것이 새로웠다.
적어도 리시키다의 눈으로 보기에, 그건 전혀 귀족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저렇게 스스럼없이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유족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도.
자신이 보아왔던 귀족들은 결코 하지 않던 행동들이었다.
‘도대체 저 남자는···.’
알 수가 없었다.
소문으로는 권위에 찌들어 스스로를 좀먹고 있는 멍청한 남자, 귀족이라고 부르기조차 부끄러운 남자라고 했는데.
진짜로 마주한 그는, 그래.
정말로 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려웠다.
시온 클라우젠은 귀족이 아니었다.
그녀가 진정 꿈꾸던 ‘주인’ 에 가까운 남자였다.
“···셸.”
“···.”
“리시키다 암셸!”
자신을 부르는 시온의 외침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는 저도 모르게 ‘에, 예!
상급 기사 리시키다 암셸!’ 이라고 관등성명을 대고 자빠지고 말았다.
“···뭐하냐?”
“아.
죄, 죄송합니다.
공자.”
“되었고, 난 잠깐 아버지께 다녀올 테니 방에 들어가서 기다려.”
“네, 알겠습니다.”
“결정은 내렸고?”
“예?”
리시키다의 반문에 시온은 하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하루가 좀 바쁘게 지나가서 몰랐던 거냐, 아니면 모른 척이냐.
지금 벌써 저녁 시간도 지났거든?
슬슬 결정을 내려줬으면 하는데.”
그 말에 리시키다는 그가 주었던 하루의 시간이 벌써 다 끝나가고 있음을 자각했다.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남자의 새로운 모습을 지켜보느라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으니 시간 개념까지 흐려진 모양이었다.
“재촉하고 싶지는 않은데, 네가 너무 정신이 나가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넌 어찌 되었든 포로지 내 ‘부하’ 가 아니라고.”
내 부하가 아니라는 말에, 리시키다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고 말았다.
왜 자신이 놀랐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서운하고 또 외롭다는 감정이 고개를 드는지.
그녀는 대충 답을 얼버무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바보같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리시키다는 시온의 방으로 들어갔다.
감방보다는 그래도 이 방이 고민하기에 더 좋지 않겠냐, 라는 것이 시온의 논리였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의자 위에 몸을 앉혔다.
하루의 시간이라면 어제 자신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던 미련을 깔끔하게 지우는 데에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돌아보니 오히려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왜 자꾸 나는 그런 생각을.’
죽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죽으라고 주인이라는 자가 명령하지 않았던가.
‘넌 버림 받았어, 리시키다 암셸.
한 치의 의심할 것도 없이, 완벽하게 버림 받았다고.’
시온 클라우젠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넌 버림받았다는, 그러니까 너도 그 잘난 주인을 버리고 새 주인을 찾으라는.
어쩌면 그 주인은 가까운 곳에 있지 않겠냐는 그 말.
툭!
아무래도 몸을 돌리다가 뭔가를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든 그녀는 이내 그게 누군가의 수첩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짤막한 시가 쓰여 있다는 것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뭔데 자꾸 낄낄대?”
릴리트는 시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들렸다는 그는 뭔가 잔뜩 기대된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아, 함정 카드가 발동되어서요.”
[작품후기]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시인/윤동주
미안하다, 함정 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