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265)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265화(265/439)
265―――――
Requiem
휘오오오―.
황량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사라진 대지 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한 여인이 무척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위를 걷고 있었다.
키륵!
카르륵!
마물들이 가끔 가다가 모습을 드러내곤 했지만, 그들은 곧 여인의 핏물이 찰랑거리는 듯 한 붉은 눈을 바라보곤 바로 이빨을 감추고 꼬리를 내리며 뒤로 물러섰다.
혹시나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하면, 죽을 때까지 몸이고 정신이고 전부 망가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꽤나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인데.
역시나 똑같아.
인간들 말을 빌리자면 뭣 같다고 해야 하나?
너는 어떻게 생각해, 바하무트?”
분명 혼자서 대지를 거닐고 있는데, 마치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 여인.
언뜻 보면 그저 아름답다 못 해 색욕을 일게 하는 이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체는 천족들조차 한 번 빠지면 어지간해서는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최고위 마족, 릴리트였다.
“이제는 말도 안 하는 거야?
날개 좀 잘렸다고 아예 고개까지 처박고 살기로 한 거냐고.”
“···.”
“그런 모습 보자고 과거의 전쟁에서 다른 녀석들이 죽어 나간 게 아닐 텐데.”
“닥쳐.
함정에 빠져서 봉인되었다가 겨우 탈출한 주제에.”
목소리가 들린 곳은 릴리트가 바라보고 있던 곳과 정 반대에 위치한 곳.
거기에는 잔뜩 토라진 얼굴을 하고 있는 조그마한 소녀가 낡아버린 인형 하나를 들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땅꼬마.”
“집에 왔네.
이 빌어먹을 창녀.”
인사인지, 아니면 싸우자는 도전장인지 모를 대화가 오고 간다.
두 여자의 눈에서 뿜어지는 안광에 그나마 눈치를 보고 있던 몇몇 마물들까지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는 듯 이리저리 도망치기에 바쁘다.
조금이라도 늦게 자리를 이탈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봉인에서 풀려났다더니 때깔 좋은 것 봐.
그 사이에 남자 하나 물어서 아주 쪽쪽 빨아먹었나보네?
부러워라.
누구는 날개를 뜯겨서 힘도 제대로 못 쓰는데, 누구는 봉인에서 풀려나자마자 아주 활개를 치면서 다니고 말이야.”
“흐음.
쪽쪽 빨아먹었다니.
말이 조금 심하네.
그리고 이번에는 그렇게 쉽지가 않았어.”
“헛소리.”
진짜인데, 라는 말이 입에서 맴도는 릴리트였다.
봉인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런 와중에 힘이 완전히 소진되어 자칫 잘못했으면 천족들이 원하던 대로 본능만 남은 마물이 될 뻔 했다.
그 와중에 시온의 꿈으로 향해서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서큐버스 퀸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과 예속의 계약을 맺게 되었고 말이다.
‘그 사실까지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서로가 서로의 창과 방패 노릇을 해주던 천족들과는 달리.
자신들과 같은 최고위 마족들은 그냥 개인주의에 입각한 싸움을 고집했다.
그 결과는 일곱이던 최고위 마족 중 넷의 죽음.
물론 최상위 천족들에게도 엄청난 타격을 주었지만 결국 죽이는 데에는 실패했으니 결과적으로 마족들의 대패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벨은?”
“몰라.
그 게으른 년은 또 어디서 퍼질러져서 잠이나 자고 있겠지.
천족들이 제 목을 따러 오기 전까지는 뭘 할 년이 아닌데.”
바하무트는 그러면서 퉤!
하고 릴리트 앞으로 침을 뱉었다.
이 정도면 릴리트 입장에서는 충분히 모욕을 느꼈다고 판단하고 바로 그녀의 목을 조를 수도 있었지만 웬일인지 릴리트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년 왜 이래, 갑자기?
남자 정기 좀 빨아먹고 오니 포만감에 머리가 돌았나?’
바하무트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더 강하게 도발을 해보려던 순간.
릴리트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바하무트.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할래?”
“···뭐?”
“일 하나 같이 하지 않겠냐고.”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다른 이도 아니고 릴리트가 저런 말을 하니 더더욱 이상하다.
바하무트는 두 눈 가득 의심의 빛을 품고는 제 앞에 서있는 이를 노려보았다.
“개 같은 소리 따위가 아니야.
바하무트.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건데?”
“뭐라고?”
“언제까지 천족 나부랭이들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땅에 처박혀서 살 거냐고.
다시금 예전처럼 날개를 펴고 불을 내뿜으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어?”
“너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이렇게는 못 산다고.
나가서 그 빌어먹을 비둘기들, 전부 조져버리자고.”
그러자 바하무트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
항상 듣고 싶었던 말, 그리고 행하고 싶었던 일을 가장 싫어하는 여인에게서 들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년이.
봉인에서 운 좋게 풀려났더니 걔네가 예전처럼 만만해보여?
우리가 여기 갇혀서 끙끙거리는 동안 그 놈들은 대륙의 모든 것들을 우리의 적으로 돌려놨어.
우리가 예전처럼 다시 여기를 벗어난다면 그 때는 천족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할 걸?
자신 있어?
지금보다 더 지독한 치욕을 당할 텐데?”
“걱정 마.
우리가 상대해야 할 건 오직 천족들과 그 새끼들을 따르는 광신도들 뿐일 테니까.”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바하무트.
혹시 예속의 계약이라고 알아?”
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릴리트.
그에 바하무트는 무슨 짓이냐고 물으려다가 릴리트의 표정에 장난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에 여전히 사나운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답을 내주었다.
“대충은.
그런데 그건 왜.”
“내가 그 계약을 맺었어.
그것도 한 인간 남자와.”
“···뭐?”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지?
싶은 기운이 가득했다.
릴리트가 어떤 존재인지, 잔혹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아주 제대로 미친년인지 잘 알고 있는 바하무트로서는 그녀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예속의 계약으로 묶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저급한 말장난으로 치부하지 마.
난 진심이니까.
그보다 궁금하지 않아?
나 같은 미친년이 왜 인간 남자에게 묶였는지.
그런데 정작 나타나서는 좋다고 여유만만인 이 모든 게 말이야.”
“···.”
“그 남자가 말하더라고.
같이 천족의 날개를 잡아뜯고, 땅바닥에 처박아버리지 않겠냐고.”
“뭐라고?”
잘못 들었나?
그래, 분명 잘못 들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요정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마족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매번 성전을 외치는 인간인데, 그 중에서 갑자기 천족을 잡아 족치자는 말을 하는 인간이 있다니?
바하무트는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뜻을 확실히 밝혔다.
천족보다도 더 음흉하고 요정보다도 더 지랄 맞은 종족이 바로 인간이라고 했다.
그런 종족이 말하는 걸 도대체 뭘 믿고 자신 앞에서 이야기한단 말인가.
당장 마족이라고 하면 이를 갈면서 ‘빛이 당신을 태울 것입니다!’ 하고 득달 같이 달려드는 것들이 바로 인간인데 말이다!
“그동안 봉인에서 풀려난 뒤로 그 인간 남자와 같이 지냈어.
그러면서 알게 되었어.
가식적으로 빛의 뒤에 숨어있을 바에 당당히 그림자에 서있는 이도 있다는 걸 말이야.”
“미쳤구나.
아주 단단히 미쳤어.”
“너는 안 미쳤어?
천족들 따위에게 날개를 잃고, 땅으로 추락해서 바닥을 기고 있는 너 자신때문에 미치지는 않았니?”
“···닥쳐.”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우리 마족은 시한부야.
대륙 상황을 봐.
우리가 이렇게 숨 죽여 지낸다고 해서 다른 종족들이 우리들을 좋게 봐주니?
오히려 천족 똘마니들이 사고를 쳐놓고 마족들의 짓이라고 하면 다들 아하, 그렇구나!
라고 외치며 우리 욕만 하고 이는데?”
“···.”
“이왕 뒈질 거면 우리 식대로 뒈져야 하지 않겠어?
언제부터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며 이렇게 움츠려있었다고 그래.
먼저 죽은 애들이 이 꼴을 보고 있으면 아마 웃다가 배가 터져서 죽었을 거야.
어울리지도 않게 별 지랄을 한다고 말이야.”
그 말에 바하무트는 거기까지 하라는 듯 릴리트를 노려보았다.
지금은 단 셋이 남아있지만 과거에는 일곱이나 되었던, 그래도 나름 동료라고 부를 정도는 되었던 미친 녀석들이 있었다.
천족들과의 전투에서 넷이 죽고, 셋만이 살아남았으며 그 중 하나는 결국 봉인.
하나는 날개를 뜯기고 땅바닥에 추락했으며 하나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치욕이자 과거를 릴리트가 들추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
“말했잖아.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고.
내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아직도 감이 안 잡혀?
저 재수 없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흰둥이들한테 시원하게 먹여주자고.
이렇게 얌전히 고개를 처박고 있다가 나중에 모든 대륙의 것들이 사이좋게 손잡고 쳐들어오면 그때는 날개 하나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목을 내놓아야 할 거야.”
“릴리트.
너도 알잖아, 이 미친년아.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천족들에게 부딪쳐봤자 우리만 깨져.
아주 산산조각, 와장창!
하고 다 깨진다고.”
아예 죽어버린 이들이 많은 마족과는 달리, 천족들은 꽤나 많은 수가 살아남았다.
비록 성소인지 성지인지 하는 곳에서 장기간 회복에 들어가야 했지만 어찌 되었든 저들은 전력을 보존하는데 성공했고 자신들은 실패했다.
힘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숫자에서도 현저하게 밀린다.
이건 그냥 사이좋게 손잡고 죽으러 가자는 말 밖에 되지 않았기에 바하무트가 이리도 화를 내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
바로 네 말대로 하자는 거야.”
“···?”
하지만 릴리트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채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가서 부딪쳐주고, 왕창 깨져주자고.
그래서 놈들이 더는 우리 마족들을 가장 강한 적으로 인식하지 않게 하고, 그렇게 해서 놈들이 조금 더 흥분하게 만들자고.
그리고 결국에는, 놈들이 방심해서 스스로 제 본모습을 세상에 내비치게 만들자, 이 소리야.”
“너, 도대체 무슨 소리를···.”
“마족이고 천족이고, 인간이고 이종족이고 다 똑같다고 했어.
일이 잘 풀리면 흥분하고, 흥분하면 꽁꽁 감쳐두고 있던 뭔가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다고.
그게 아주 오랫동안 꾹꾹 눌러담고 있던 것이라면, 역으로 더더욱 내비치기 쉽다고 말이야.”
릴리트는 그렇게 말하며 시온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족들을 설득해서 신성 프러센을 치세요.’
‘뭐라고?’
‘단, 공격 일시는 누디아가 히스파냐를 공격하는 것보다 한 발 앞서야 합니다.
그래야 놈들에게 적당한 역할을 내어줄 수 있거든요.’
‘자, 잠깐만.
잠깐만, 시온!
무슨 소리야.
신성 프러센을 치라는 건 결국 천족을 상대로 마족이 먼저 공격을 하라는 거잖아.
그걸 어떻게 이겨!’
‘이기지 마세요.’
‘엥?’
‘져요.
아주 대패하세요.
그렇게 해서, 천족들이 더는 마족들이란 존재에게 경계심을 가지지 않게 하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 가면을 벗고 날뛰게 만들면 된다, 이겁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릴리트는 알 수가 없다.
이길 생각도 없는 전쟁을 왜 하라는 건지, 그리고 천족들이 왜 스스로 가면을 벗게 하라는 것인지, 그녀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을 빛의 충실한 교도라고 하는 자들이 그들의 뜻이라며 히스파냐를 친다.
그런데 그 직전에 갑자기 마족들이 신성 프러센을 친다.
누가 봐도 아무런 연관이 없죠.
그렇게 보여요.
그런데, 그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것이 때로는 ‘혹시?’ 라는 것으로 변형이 된답니다.
악의 무리가 성지를 치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누디아가 히스파냐를 친다.
분명 히스파냐에도 빛의 교도들이 있는데, 신성 프러센은 가만히 있는데 누디아가 갑자기?’
‘어···.’
‘누디아는 제가 맡습니다.
릴리트님은 적당히 난리를 치시다가 빠지세요.
천족들에게 더는 마족이 위협이 될 수 없다는 분위기와 함께.
그렇게 해서 천족들이 더는 이쪽을 좌시할 수 없게 만들고 스스로 그 뿔나팔인지 뭔지를 부르게 하는 겁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어느 게 빛이고 어느 게 그림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빛이라고 믿었던 존재들이 대륙을 활활 불태워준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네요.’
여전히 릴리트는 시온이 원하는 그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부부는 통하는 게 있다고, 최소한 그가 누디아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성전을 치르는 성스러운 이들’에서 ‘마족과 함께 대륙을 혼란에 빠트리는 그들의 추종자들’ 로 바꾸려고 한다는 것은 바로 눈치 챘다.
“바하무트.
언제까지 그렇게 초라하게 살 거야.
그냥 우리 화끈하게 저지르자니까?
천족들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한 대 세게 치고 도망가자고.
어차피 저놈들이 우리를 다 없애려고 든다면 우리도 한 번은 반항 좀 해줘야지.
저들이 원하는 대로 가만히 있다가 결국 인간인지, 요정인지 하는 쓰레기들한테 조각이 나서 죽을 생각은 아니겠지?”
천족에 의해 바하무트가 얼마나 큰 치욕을 당했는지는 누구보다 릴리트가 잘 안다.
그 치욕을 아주 마음껏 후벼 파며, 릴리트는 바하무트가 제 분노를 이기지 못 하고 앞장서서 일을 저지르기를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시발!
좆같은 삶, 더 좆같게 만드네.
이 개년이!”
―
히스파냐에 마족을 추종하는 자들이 있다, 따위의 소문이 나돈 지 얼마 후.
그 따위 소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흉악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마치 누군가에 의해 일부러 퍼지기라도 하듯 마구잡이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필멸의 땅에 웅크리고 있던 마족들이 신성 프러센을 공격했다.
빛의 후예들이 수호하는 땅에, 빛의 교리가 퍼지지 않은 곳이 없는 땅에, 오직 빛만이 정의라고 하는 바로 그 땅에 말이다.
그리고 마치 그들과 내통이라도 한 듯 누디아가 히스파냐를 공격한다.
그 안에 마족 추종자들이 있는 것 같다, 라는 식의 말은 이미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 간다.
오히려 그보다는 누디아가 마치 마족들의 공격에 히스파냐를 공격해서 빛을 지우려는 듯 한 모습만이 선명해진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항상 보다 더 자극적이고 더 흥미로운 소문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니까.
막장 중에서도 최고의 막장 스토리에 더더욱 환호하기 마련이니까!
‘성전을 주장하며 빛의 편인 것마냥 떠들던 자들이 알고 보니 악의 추종자들이었다!
이게 바로 뿌슝빠슝이다, 이것들아!’
지금쯤 갑자기 성전을 위한 영예로운 원정군에서 악의 군세가 되었을 누디아의 공격을 생각하며 시온은 사악하게 키득거렸다.
―――――――작품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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