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29)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29화(29/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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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파냐 왕국의 클라우젠 변경백령과 누디아 왕국의 바수라 백작령 간에 휴전 협상이 곧 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협상 천막이 마련되는 장소는 딱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만일을 대비해서 각 영지의 군대가 따라붙는 대신 그 병사들은 천막과 일정 거리를 둔 지점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전쟁과 휴전을 밥 먹듯이 반복하던 두 영지였지만, 이렇게 단기간 내에 휴전 협상이 시작된 적은 수 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디아의 바수라 백작 측은 ‘서로’ 얻을 것이 없다며 먼저 휴전을 제의했고 클라우젠 변경백령 역시 큰 고민을 하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누디아의 병사들도, 그리고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병사들도 알고 있었다.
누가 전쟁에서 패해서 휴전을 하자고 하는 것인지, 누가 ‘갑’ 이고 누가 ‘을’ 인지 말이다.
“후.”
시온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놈들이 간악한 흉계를 꾸미는 것은 아닐까 잔뜩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리히텐 변경백이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을 했지만, 시온은 그걸 완벽하게 믿을 수 없었다.
현(現) 바수라 백작인 디셰는 리히텐 변경백이 기억하던 전대 백작과는 달리 분리수거는 고사하고 소각하는 것조차 실례인 극악의 쓰레기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공자님.”
그 디셰 백작에 의해 이 자리에 오게 된 리시키다는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었다.
기껏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주인을 얻어 다시금 그의 신뢰와 애정을 받게 되려는 찰나.
되먹지 못한 전주인이 구질구질하게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분명 말했다.
왕이라도 내 사람 터치하면 바로 반역이라고.
적국의 백작 따위가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 안 할 테니 걱정 마, 리시키다.”
“···공자님만, 주인님만 믿겠습니다.”
호칭이 공자와 주인님에서 왔다 갔다 하는 리시키다였다.
아무래도 충성을 바치는 것과 동시에 애정 어린 시선을 받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는 모양인데, 그게 소설에서는 전혀 설명이 되지 않았다보니 시온도 이제야 알게 된 상황이었다.
‘이게 막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데, 살짝 묘한 감이 없잖아 있네.’
릴리트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루시아마저 리시키다의 주인님 소리에 펄쩍 뛰었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가문의 시녀들조차 ‘공자님’ 이라고 부르지, 주인님이라는 이상한 호칭을 쓰지는 않는다.
이러다가 잘못 하면 대악마 급의 예비 장인이 주먹을 번뜩이며 날아오는 건 아닐까 심히 걱정되는 시온이었다.
‘진짜 라이도가 찾아온다면··· 도망은 갈 수 있으려나.’
그렇지 않아도 바로 어제 라이도에게 서신이 갔다.
신전에서 흘러나온 존재가 다름 아닌 서큐버스 퀸 릴리트이고, 그 몽마가 현재 나와 계약한 상태라는 리히텐 변경백의 자필 서신이었다.
더는 숨길 수도 없고, 숨겨서도 안 되는 사항인지라 리히텐 변경백이 최대한 완곡한 어조로 쓰기는 했지만 라이도의 성격이 워낙 지랄 맞은지라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아니, 공자님.
저기.”
리시키다의 말에 시온은 시선을 돌렸다.
누이아의 영토 측에서 누군가가 말에 탄 채로 천막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 새끼는 말에다가 뭔 짓을 한 거냐?”
“이, 일종의 장식입니다.”
“장식은 시발, 모친 돌아가신 수준이다.
말에다가 보석 옷을 입히고 자빠졌니, 시발?”
철그덕거리는 마갑(馬甲)이라면 또 이해하겠다.
협상이라고는 해도 어찌 되었든 공식적으로 전쟁 중이니까.
그런데 저 새끼는, 마갑 대신 말에게 보석 드레스를 입혀놓은 꼬라지였다.
말에 매달린 보석들이 어찌나 번쩍이는지, 클럽의 사이키 조명을 보는 느낌이었다.
‘지랄 옘병을 해라, 옘병을.
니미럴, 똥구녕에 죽창을 쑤셔버리고 싶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억누른 채 시온은 상대를 기다릴 것도 없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협상만을 위한 곳, 거기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무기가 될 만 한 건 아무 것도 없어야 하는 지라 천막 안은 긴 테이블과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저벅, 저벅―.
“공자님.”
천막 밖에서 상대 측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리시키다가 또 초조해하며 시온을 부른다.
시온은 그런 제 기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훤칠한 미청년의 미소, 거기에 자신만만하기까지 하자 리시키다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호위 기사 하나를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섰다.
“아아, 죄송합니다.
시간을 맞춘다고 했는데 설마 시온 클라우젠 공자님이 더 부지런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
어째 ‘난 일부러 늦었는데, 넌 쫄아서 일찍 온 거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 시온은 심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가 보면 이쪽이 먼저 협상 하자고 바짓가랑이라도 잡은 줄 알겠다.
정작 협상을 제안한 건 누디아 측인데 말이다.
“각설하고.”
턱!
시온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두 다리를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건 무례고 뭐고 떠나서 ‘협상 좆까고 전쟁이나 하자.’ 라는 뜻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누디아 측은 갑이 아니라 을의 입장이었다.
“조건부터 듣자고, 조건.”
상대는 비록 적국의 귀족이긴 하지만 백작이다.
그리고 시온은 아직 변경백의 후계자에 불과하다.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인데 저렇게 막 나가는 모습에 리시키다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소문대로 거친 분이군요.”
그나마 시온 클라우젠의 병신력은 이웃 영지에서도 알고 있던 터라 그냥 나잇살 제대로 못 처먹은 놈의 지랄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하지만 보고를 듣자하니 병사 하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들었습니다.
여태 보였던 모습은 전부 거짓이었다고 생각하니, 역시나 클라우젠 백작가 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설마하니 후계자에 대한 이상한 소문으로 적들의 방심을 이끌어낼 줄이야.”
뭐래, 미친놈이.
소설을 쓰고 자빠졌네.
“해서 병사들을 아끼는 분께 휴전 협상을 하고자 직접 찾아왔습니다.
이 디셰 바수라가 직접 말이죠.”
“응.”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반응이었다.
순간 디셰 백작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지만 곧 원위치로 돌아갔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누디아는 을이지 결코 갑이 아니었다.
“누디아의 휴전 조건입니다.
이대로 국경은 유지, 다만 전쟁을 먼저 일으킨 건 저희 측이니 전쟁 배상금으로 40만 디르 (누디아의 화폐 중 가장 큰 단위)를 내놓겠습니다.
아울러 유감을 표하는 저희 국왕 전하의 서신을 직접 히스파냐 왕실로 보낼 계획입니다.”
40만 디르면 딱 적당한 수준의 배상금이다.
손실된 물자를 보충하고 죽거나 다친 이들에게 위로금을 주고 나서도 꽤나 많이 남는 돈.
확실히 누디아는 휴전을 원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휴전을 제의해서 놀랐는데.”
“무의미한 전쟁은 서로에게 좋지 않으니 말입니다.”
“글쎄, 우리는 이대로 더 싸워도 괜찮았는데.
그렇지 않아, 리시키다?”
슬쩍 리시키다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시온이었다.
그러자 디셰 백작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대신 클라우젠 변경백령 측도 휴전을 위한 적절한 행동을 보였으면 합니다.”
“적절한 행동?”
“포로들의 송환 말입니다.
물론 무조건으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몸값을 드릴 것이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가 잡은 누디아 측 포로는 몇 안 되는데?
해봤자 기사 일곱에 부상병 약간이 다지.”
“그리고 상급 기사가 하나 있고 말입니다.”
그래, 그게 본 목적이었구나, 이 발레린 삼아.
시온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했지만, 디셰 백작은 리시키다를 바라보느라 미처 상대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 한 모양이었다.
“리시키다 암셸 경은 저희 바수라 백작령의 자랑과도 같은 기사였습니다.
그녀가 불운하게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르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참으로 다행이군요.
어디 상한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놓입니다.”
“···.”
엎을까.
진심으로 고민이 되는 시온이었다.
“리시키다 경에 대한 몸값은 섭섭지 않게 준비하겠습니다.
아울러 공자에 대한 개인적인 선물도 준비되어 있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부디 리시키다 경을 그리운 고국, 보고 싶은 고향 영지로 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운 고국?
보고 싶은 고향 영지?
혹시 저 새끼 난시인가?
아니면 다른 차원의 나와 리시키다랑 떠들고 있나?
혼자 정신만 차원 이동물을 찍고 있는 건가?
그도 아니면 자아 분열?
시온은 혹시 리시키다가 변심한 건가 싶어서 옆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리시키다는 다만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리며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저런 개소리를 더 들어야 한다는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모습이었다.
“혹 전부를 풀어주시기 힘들다면 리시키다 경만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게는 정말 소중한 기사이자 친우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아, 네.
그러세요?
너는 친구한테 나가 뒈지라고 말하는 놈을 친구라고 부르고 싶겠구나.
왜?
부모님 안부도 좀 묻고 그러지 그랬냐.
“이 정도면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위신을 세우고도 남는 협상 조건일 겁니다.”
“···어떠십니까?
제 제안에 대해서.
혹 더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말해보시길.”
말해보라.
그 말에 시온은 테이블에서 두 다리를 내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멍.”
“···?”
“멍멍멍.
멍멍.
컹컹컹.
컹컹.
왈왈, 왈왈왈.”
순간 디셰 백작은 자신이 헛것을 보고 들은 건가 싶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휴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저런 짓을 할 수가 있다고?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던 그는 터져 나오려는 괴성을 억눌렀다.
“시, 시온 클라우젠 공자.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어, 뭐야.
너 이 새끼 사람 말 할 줄 아는구나!
그러면서 왜 여태까지 개소리를 했어!
난 또 개새끼인 줄 알고 마음씨 좋은 내가 특별히 개님들 언어로 해준 건데 말이야.”
“지, 지금 도대체 그게 무슨 무례···.”
“혹시 화장실 어디인지 아시는 분?
시발, 하도 똥소리를 들어먹었더니 온 몸에 똥이 가득 찬 느낌이야.
가서 질펀하게 좀 싸고 와야겠는데.”
디셰 백작은 물론이고 그 옆에 서있던 기사마저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변했다.
허리춤에 검이 없어서 망정이지, 만약 무장을 했다면 당장 달려들었을 것이었다.
“고, 공자님.”
리시키다조차 시온의 언행에 놀라고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모든 일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유유자적이었다.
“협상 안 할 거야?”
“이익!
당신의 행동을 보고 그런 말을 하시오!
비록 나와 그대는 적이라지만 같은 귀족이며 나는 백작의 위에 있는 사람이외다!
예의를 지키란 말이오, 예의를!”
“그래서, 협상 안 할 거냐고.”
“당신이라면 말이 좀 통할 줄 알았는데 정말 실망이오!
협상 테이블에서 이런 막말이라니!
클라우젠 변경백령은···.”
“야.”
순식간에 천막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잔뜩 내려앉은 시온 클라우젠의 목소리는,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두고서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협.
상.
안 할 거냐고.
개새끼.”
그제야 디셰 백작은 자신이 이 협상 테이블에서 결코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제 영지의 병사들은 이미 전멸 수준으로 타격을 입었고, 중앙에서 보내준 병사들도 이미 예기를 잃어 제대로 된 전투를 수행하기에는 글러먹은 수준이었다.
거기에 상급 기사인 리시키다 암셸은 붙잡혀 있다.
어느 부분으로 봐도 자신에게 유리한 구석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협상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요.
우리 모두를 위해서···.”
“니미 잡소리 때려치우고 곱게 쳐앉아라.
협상을 해주는 건 이쪽이고, 너는 그냥 협상 당하면 되는 거야.”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자가 저런 남자였나?
소문에 의하면 망나니, 이후 보고에 의하면 꽤나 괜찮은 청년이라고 했었다.
전후를 비교해봐도 저런 싸늘한 모습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첫 번째.
배상금은 40만에서 400만으로 올린다.”
“···에?
아니,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400만.
40만에서 10배 올린 숫자.
혹시 숫자 개념도 없나?”
“마, 말도 안 돼!
40만 디르면 충분한 값이야!”
당황한 디셰 백작의 입에서 말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하지만 시온은 그런 부분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4백만.”
“불가, 절대 불가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백만.”
“지금 나랑 농담이라도 하자는 거요, 시온 클라우젠 공자?
400만 디르면 우리 바수라 영지의 1년 조세와 맞먹는 규모요!”
“그러면 엎던가.”
“예?”
시온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테이블 엎고, 전쟁 해.
누구 하나 뒈질 때까지 찐하게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