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31)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31화(31/439)
<―>
“···.”
리히텐 변경백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자신의 아들인 시온 클라우젠을 협상 테이블로 보낼 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미 제 자식이 보여준 모습들은 충분히 훌륭하고도 남았으니까.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이게 뭐냐, 아들아?
지금 이 아비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이냐?”
“아뇨.
아주 확실하게 잘 보고 계십니다만?”
―조건 1.
바수라 백작령은 클라우젠 변경백령에 누디아 기준으로 400만 디르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
눈을 비비고 또 비비는 리히텐 변경백이었다.
자신이 얼추 예상한 금액은 적다면 30만, 많다면 60만 디르가 한계였다.
‘그런데 400만?
40만이 아니도 400만?’
0 하나를 잘못 쓴 건가 싶다가도, 그 중요한 협상 자리에서 어느 멍청한 놈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할까 싶었다.
그렇다면 나오는 답은 하나, 시온이 배상금으로 400만 디르를 불렀고 그걸 누디아 측이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도 읽어보시죠.”
“다, 다음도 있는 것이냐?”
―조건 2.
클라우젠 변경백령은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이들에 대해 통상 측정되던 몸값의 10배에 해당하는 값을 받는 조건으로 그들을 전원 석방한다.
단, 투항한 누디아 측 상급 기사, 리시키다 암셸은 논외로 한다.
―
사실 이번 전쟁은 기간도 짧았고 클라우젠의 기습으로 시작이 된 터라 포로가 많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사 몇과 병사들 수십, 그리고 누디아의 상급 기사, 리시키다 암셸이 포로로 붙잡히기는 했다.
비록 그녀는 마음을 바꿔 이곳 클라우젠 변경백령에, 정확히는 시온의 곁에 남겠다고 했지만 다른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상황이 다르다.
가족들과 재산이 오롯이 누디아에 남아있으니 돌아가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타당한 몸값을 지불해야만 한다.
“10배?
아들아.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 거냐?
10배를 받고 포로를 석방한다니.
정말 이 조건으로 바수라 백작령이 휴전 협상을 했다는 말이냐?”
“아직 하나 더 남았습니다.”
―조건 3.
이후 누디아의 바수라 백작령은 어떤 무력 충돌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며 만일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갈 시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모든 종류’ 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
여기서 언급되는 ‘모든 종류’ 의 노력이란 것이 단순히 노력이 아니라 ‘금전적인’ 것이 되리라는 건 어느 누가 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리히텐 변경백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건 휴전 협상이 아니라 거의 항복 조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당장 배상금부터가 말도 안 되게 심각한 수준이다.
통상 배상금으로 측정되는 금액의 10배.
2배도 아니고 5배도 아니고 자그마치 10배다.
400만 디르면 바수라 백작령의 1년 조세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
물론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면 많은 부분을 조세를 대신하여 메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반 년 어치에 해당하는 금액이 될 것이었다.
이건 휴전하자는 쪽에서 사과의 의미로 치르는 것이 아니라 항복하는 쪽에서 납작 엎드려서는 주머니에 있는 현금 10원 하나까지 탈탈 털어서 주는 수준이었다.
‘포로 석방도 이상하다!’
역시나 통상적으로 오고 가던 석방 금액의 10배에 해당하는 값을 치르겠다고 한다.
말이 안 된다, 이건 전례가 없던 경우였다.
여태 클라우젠과 바수라는 여러 번 전쟁을 겪었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한 쪽이 많이 불리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때에도 이렇게 저자세로 협상 조건을 내놓지는 않았다.
딱 상대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아군 측도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조건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시발.
이건 진짜 뭔가 좀 이상했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조건!
이건 듣도 보도 못 한 조항이다!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조건 어디를 찾아봐도 클라우젠 변경백령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르고 누락했을 리가 없다.
이런 문서에서는 글자 하나로도 꼬투리를 잡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일부러 클라우젠 변경백령에 대한 언급을 뺀 것이었다.
분명 ‘휴전’ 협상을 하는 중인데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는 형식의 바수라 백작령.
“···시온 클라우젠.”
“네, 아버지.”
“혹시··· 혹시 이상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아니···.
혹시 바수라의 백작이 네게 해코지를 하려다가 제압당하고는 약점이나 꼬투리를 잡혔다던가, 아니면 비슷한 뭔가가 말이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지극히 평화로운 협상 테이블이었으니 그런 걱정 마세요.”
지극히 평화롭기는 했다.
어디까지나 시온 입장에서는 말이지.
“아무튼 그렇게 협상 끝났습니다.
디셰 바수라 백작도 협상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상태였으니 말을 바꾸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아직도 나는 꿈을 꾸는 것 같구나.
허참, 누디아와 이런 내용의 협상을 할 줄이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시온이 미소를 짓자 리히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리시키다가 누디아의 기사인 부분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저렇게 충심을 다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진심으로 투항한 것 같았고, 협상 자리에서도 그 부분을 인정해서 그녀의 석방을 논의하지 않겠다고 못 박으니 말이다.
‘잘 마무리 되었네.’
리히텐 변경백의 걱정과 상관없이, 협상은 정말 그 어떤 무력 충돌도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물론 리시키다가 디셰 백작의 주둥아리를 후려갈기긴 했지만 그건 맞을 짓을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넘어가고.
‘내가 알고 있던 바수라 백작령의 각종 문제와 약점, 그리고 리시키다가 알고 있던 최근 디셰 백작의 행태들까지.
그대로 누디아에서 아예 매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약점들이었지.’
바수라 백작령을 견제하는 누디아의 귀족들이 없을 리가 없다.
그 귀족들을 어떻게 하면 움직일 수 있는지 시온은 디셰 백박 앞에서 아주 상세히 말해주었다.
거기에 리시키다가 협상 테이블로 오면서 알려주었던 전 주인이었던 놈의 각종 뻘짓거리들까지 그대로 알려주었기에 잡을 수 있는 약점 천지였다.
“고생했어, 리시.”
“네, 감사합··· 에?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리시키다라는 이름도 충분히 좋은데 뭐랄까, 조금 길어서.
리시라고 부를까 하는데 혹시 안 되겠어?
별로라면 바로···.”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좋습니다!
괴, 굉장히 좋습니다!”
리시키다의 우렁찬 대답에 시온은 으어어, 하고 탄식을 토해내며 진정하라는 뜻으로 손을 저어보였다.
“저, 저는 무조건 좋습니다!
주인님이, 그러니까 공자님이 어떻게 불러주셔도 좋습니다!”
“알겠으니까 진정해.
왜 그리 하이텐션이야, 갑자기.”
“아, 그게···.”
갑자기 잔뜩 풀이 죽어서는 어깨까지 축 늘어뜨리는 리시키다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주인이라고 부르며 따랐던 이의 본모습을 직접 보니, 기운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여태 제가 뭘 위해 그런 남자를 따랐던 것인지 모르겠더군요.”
“좋게 생각해.
내 기사로 오기 위한 고생길이었다고 생각해.
그러면 좋겠구만.”
“···그렇게 생각하니 확실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구해주셔서.”
“난 손을 내밀었을 뿐이고 그 손을 잡은 건 너야.
널 구한 건 네 자신이니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말고.”
“비행기 태우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있어.
그렇지 않아도 요즘 진지하게 고민 중인 부분이라고 할까.”
극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같다고 하지만.
이 세상은 그냥 마법이 발달한 세상이다.
과학의 빈 자리를, 마법으로 채울 수 있다는 소리였다.
“공자님.”
고개를 돌려보니 세바스찬이 고개를 숙인 채 시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집사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약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손님이 왔습니다.
‘상당히 껄끄러운’ 손님이라고 할까요.”
···시발, 올 게 왔네.
세바스찬이 저렇게 대놓고 상당히 껄끄럽다고 할 인물은 딱 하나다.
라이도, 릴리트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 신전 뺑이를 치며 고생했을 전 궁정 마법사.
동시에 딸 뺏겨서 씩씩대고 있는데 알고 보니 그 사위란 놈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인어른이었고 말이다.
“리시.
같이 가자.”
“예?
하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에 제가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가 아니라 저승길로 직행하는 자리일 수도 있어서 그러지.
물론 루시아가 같이 동석하고 있으니 그럴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을 테지만.
세바스찬의 안내로 성의 안쪽 가장 은밀한 곳으로 향하는 시온과 리시키다였다.
대게 가문 내부의 일로 회의를 할 때만 들어가게 되는 방 앞에 다다르자, 안쪽에서 한 여성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죽고 싶니?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봉인되어 있었다고.
갇혀서 시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는데 무슨 정보를 토해내라고 지랄이야, 지랄은?”
아무래도 릴리트가 먼저 와서 라이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바스찬은 그 소리를 듣자 ‘휴우.’ 하고 한숨을 내뱉다가 바로 뒤에 시온이 있다는 걸 자각하곤 급히 고개를 숙여 사죄의 뜻을 밝혔다.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은 시온은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음?
호오, 드디어 오셨구만.
잘난 우리 예비 사··· 큼큼.
어서 와라, 시온 클라우젠.”
“뭐 하다가 이제 온 거야!
빨리 와서 이 늙은 인간 이해 좀 시켜줘.
이러다가 오늘 처음으로 젊은 남자가 아닌 다 늙어빠진 남자를 죽이게 생겼으니까!”
“크크크.
말이 심한데, 서큐버스 퀸.
늙었다고 해도 남자는 영원히 남자인 법이다!”
“지랄.
아침에 서기는 하니?
내가 조루에 좋은 약초 좀 알고 있는데 알려줘?”
서큐버스 퀸이나 실력 있는 마법사나 둘이 유치하기는 매 한 가지네, 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시온은 릴리트의 옆에 앉으려고 하다가 루시아와 딱 시선이 마주치곤 슬쩍 엉덩이 위치를 재 조준해서 중앙에 놓여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 뒤에 리시키다가 자리하고, 세바스찬은 차를 준비하겠다며 사라졌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서큐버스 퀸과 계약을 맺었다고.”
“네, 라이도님 아시다시피···.”
“마나가 단 한 톨도 없는 네 꿈에 들어갔으니 죽어도 나올 수가 없었겠지.
때문에 부득이 너와 계약하고 네게서 빠져나왔을 테고 말이다.”
“정확합니다.”
“그 계약이 정확히 무슨 내용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몽마와 계약을 했다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라이도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대책이 없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여전히 인간들이 가장 혐오하는 마족과 덜컥 계약을 맺어버린 대귀족 가문의 자제라니.
심지어 저 녀석을 자신의 딸이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미칠 지경인 라이도였다.
“돌아버리겠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인다는 거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여자, 그러니까 서큐버스 퀸이 봉인되어 있었다던 그 신전 말이다.
봉인이 풀리고 나서 안쪽을 조사를 해보니···.”
“거대한 마법진이 발견이라도 된 모양이죠?
그것도 천족의 마법진이.”
순간 라이도의 두 눈에 섬광이 번뜩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뜻이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시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별 것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최고위 마족, 반신이라 불릴 정도의 마족을 가둔 이가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동급의 천족이겠죠.
그게 아니면 경우의 수를 찾기도 힘들군요.”
“···그렇긴 하지.
아직 그 용도를 조사 중이긴 하다만 그건 분명 천족들의 마법이었다.”
딱히 용도라 할 건 없다.
릴리트의 봉인을 위해서 설치해둔 일종의 보강제였으니까.
다만 그 수식이 워낙 복잡하고 난해해서 라이도조차 거기까지는 밝혀내지 못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거 뚫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만약 시온의 간절한 부름이 없었다면 뚫는 도중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을걸?”
그걸 또 자랑이라는 듯 당당하게 말하는 릴리트였다.
라이도는 영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시온의 등 뒤에 서있는 리시키다를 응시하곤 얼굴을 부여잡았다.
“하, 새끼··· 갑자기 부럽네.”
“예?”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다.”
대충 둘러댄 라이도는 대충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릴리트가 봉인에서 탈출하며 신전에 대한 조사도 속도를 내서 거의 막바지이고, 최근 들어 일이 좀 생겨서 클라우젠 영지를 잠시 떠나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루시아는···.”
“데리고 가려고 했다만, 그냥 여기에 남아있는 편이 더 좋겠어.
억지로 데려갔다가는 그 날로 딸년한테 맞아 죽는 아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버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라이도를 노려보는 루시아.
덕분에 그 연쇄 살천마라 불릴 라이도는 깨갱, 하고 몸을 움츠리며 지독한 팔불출의 모습을 또 내보이고 말았다.
“그보다 왕성으로 간다고?”
“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거기에는 약한 놈만 보이면 물어뜯으려고 지랄을 하는 승냥이들이 워낙 넘쳐나서 말이다.
나야 매타작으로 입을 닥치게 만들었지만···.”
“제가 마나를 다루지 못 한다는 부분이 드러나면 약점이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면 강점이라도 된다는 거냐?”
“뭐,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약점이 되지만 잘 써먹으면 오히려 강점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또 요상한 헛소리를 늘어놓는구만.”
글쎄요.
과연 그럴까!
시온은 속으로 낄낄대며 앞으로 왕성에서 벌일 일들을 생각했다.
마나를 다루지 못 한다는 건 분명한 약점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마력으로 인한 모든 사건 사고의 용의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알리바이를 지니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