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329)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329화(329/439)
329―――――
역시 너희가 가장 추하다
대의를 저버리고 물러난 겁쟁이들.
그 말에 볼코 후작은 결국 분노를 참지 못 하고 테이블을 세차게 내리쳤다.
상대가 천족이니 빛의 후예이니, 그딴 건 이제 상관없었다.
지금 볼코 후작에게 중요한 건 자신과 병사들, 더 나아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바네사를 욕하는 저 가증스러운 종족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여기는 신성 프러센이 아닙니다, 천족.”
“···.”
“히스파냐의 왕궁 안에 들어온 이상 히스파냐의 법도를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을 생각이라면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손님 대접을 할 수 없다면요.
어떻게 하렵니까?
당신 인간들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 나를 죽이기라도 할 요량입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귀족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조금 전 볼코 후작에게 면박을 받았던 귀족과 절친하던 이였는데, 그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히스파냐에 빛의 교리가 신성 프러센만큼 널리 퍼지지는 않았어도 그대들이 빛의 후예임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당신들을 해하겠습니까?”
“분위기만 보면 꼭 불청객을 죽여 없애겠다는 것 같은데요.”
볼코 후작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바네사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여기서 더 언쟁을 나누어봤자 저 천족이 원하는 그림대로 끌려갈 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괜찮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던 회의는 그야말로 엉망이 되었다.
천족을 반기는 자, 왜 왔는지 모르겠다는 자, 그리고 천족을 경계하는 자.
등장만으로도 이렇게 사람들을 나누었는데 저 남자를 자극해서 더 심각한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바네사는 알고 있었다.
‘넘어가면 안 된다.
히스파냐의 어느 누구도 저 천족을 좋게 바라봐서는 안 돼.’
비록 히스파냐가 악으로 몰릴지언정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면 안 된다.
차라리 천족을 자극하여 히스파냐 전체를 욕하게 만들고 그를 이용해서 분노한 귀족들이 천족이니 빛의 뜻이니 할 바에 히스파냐를 외치며 단단히 뭉치게 해야 한다.
“천족 리치엘이여.”
“말하세요, 인간 여왕.”
“조금 전 죄를 지은 자들이 많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그 죄가 무엇인지, 그 죄를 지은 이가 누구인지 궁금하군요.”
바네사의 질문에 리치엘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십니까, 인간 왕국의 여왕이여?”
“궁금하지요.
이 히스파냐에서 과연 죄를 지은 이가 누구인지,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내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궁금하시다면 제가 아주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치엘이 미소를 짓자 바네사는 속으로 침음을 내뱉었다.
혹시 이런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가 기회가 찾아오자 바로 물고서는 이쪽을 향해 비수를 내던질 생각은 아닐까 걱정이 된 것이었다.
“신성 프러센의 사람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요정이라 하는 종족들이 히스파냐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고, 위해를 가했다고 말이죠.
그래서 요정들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그와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한 누디아를 향해 공격을 가하기도 했지요.”
“확실한 증거를 토대로 한 결론입니다.
이미 그들의 자백도 받았습니다.”
“혹 그게 다른 존재들이 원하던 그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가요?”
“무슨 말인지?”
“그렇게 자백을 해서, 그렇게 생각을 하게 만들고, 그렇게 갈등하게 만들어서 결국에는 그렇게 싸우게 만든다.
실제로 그리 되지 않았습니까?
히스파냐와, 누디아와 요정들 모두가.”
리치엘의 말에 바네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식으로 말하면 결국 모두가 피해자고 가해자라는 말이 된다.
히스파냐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가만히 있다가 요정들한테 쳐맞고 뒤를 이어서 마족 추종자이니 뭐니 하면서 누디아한테 맞았는데 저렇게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요정들은 분명···.”
“그 요정들은 분명 마족들에게 세뇌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파냐를 대놓고 공격하는 짓을 벌였고 적당하게 말을 꾸며내 누디아와 히스파냐가 피를 흘리며 싸우게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지도 않고, 누군가가 개입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일에만 집중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 여러분?”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던 귀족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그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리치엘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진정 선하고 정의로운 자들이었다면, 빛의 길을 걷는 분들이었다면 창칼을 들고 싸우기 전 의심을 했어야 합니다.
이 싸움으로 과연 이득을 얻는 자가 누구인가.
이 싸움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자들이 눈물과 피를 흘리며 괴로워할 것인가 말입니다.”
“그런 걸 고민하다가는 늦습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일이 그렇게 여러 차례 고민에 고민을 하며 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나도 좋겠군요, 천족이여.”
바네사의 날카로운 지적에 리치엘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식의 반응에 볼코 후작은 이를 악물었지만 여기서 자신이 더 강하게 나가면 역효과를 불어 일으켜 빛의 교리에 호의적인 귀족들의 반감을 살 수도 있었고 그리 되면 왕궁 한가운데에서 국론이 분열되는 최악의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물론 히스파냐의 잘못만 있다는 건 아닙니다.
함부로 빛의 뜻을 운운하며 혼란을 불러일으킨 누디아는 더 큰 죄인들의 왕국이지요.
해서, 우리 천족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 책임을 물기로 했습니다.”
“책임이라니?”
“빛을 운운하며 혼란을 일으켰는데 그 빛의 후예로서 옳은 곳을 비춰주지 않는다면 누디아의 수많은 이들이 길을 잃지 않겠습니까?
해서 반성하라는 기회를 주기 위해 나의 친우가 누디아를 찾아갔었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고개를 조아려 사과하고 반성하라고.
그리고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 들어올 빛의 군세를 받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순간 바네사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
심판이니 빛의 군세이니 하는 단어를 듣는 순간 바로 기세가 돌변한 것이었다.
“누디아의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빛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정작 죄를 지은 자들은 뻔뻔하게 그 죄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려는 모습을 보이더군요.”
“도대체 누가 죄인이며, 그들이 왜 죄인이라는 건가.
천족이여?”
바네사의 말이 어느 순간 존대를 떠나있었다.
그 목소리 안에 서린 불쾌감을 읽은 리치엘은 일이 제 뜻대로 풀리고 있음을 생각하며 그야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말했다.
“어리석게도 악한 무리들의 얕은 수에 넘어가 혼란을 야기했고 기껏 세력이 약해졌던 악한 자들을 다시금 강하게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대륙의 모든 선하고 빛나는 것들을 위한 길입니다.”
“···.”
“누디아의 이전 왕은 그래도 빛을 따르는 자였습니다.
허나 그 왕을 몰아내고 어리석게도 이 땅에 혼란만을 불러오는 자가 왕이 되었으며 그 왕을 세운 자들 또한 어리석어 또 악에게 이용당할 것이니 더는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디아와 조금도 연관이 없는 천족이, 신성 프러센이 나서겠다?”
“누디아에는 빛의 교리를 믿는 이들이 많으니 이해해줄 겁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궤변이었다.
바네사는 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당장 욕설을 내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빛의 후예이니 뭐니 할 거면 그 입 닥치고 힘들고 지친 이들이나 도우라고.
여기 와서 이상한 말들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말라고 말이다.
“천족이시여.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허면 우리 히스파냐에서 죄를 지은 이가 누구인 겁니까?”
이전부터 리치엘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던 귀족이 슬쩍 질문을 던진다.
누디아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히스파냐 역시 빛의 교리를 믿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당장 서쪽에서 온 귀족들은 반수 이상이 빛의 교리에 호의적인 이들이었으며 서쪽을 제외하고서라도 왕국 곳곳에 빛의 교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항상 있었다.
“글쎄요.
대답을 원한다면 해줄 수 있지만 과연 여기 있는 여러분이 그걸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나는 참으로 걱정입니다.”
“빛의 뜻은 히스파냐 왕국민들도 나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귀족들 중 다수도 그렇게 생각할 테고요.”
빛의 교리 덕분에 영지 내에 있는 왕국민들을 다루기가 더 쉬워지고, 그 뜻을 한 곳에 모으는 게 가능했으며 교도들 중 영향력이 있는 이들의 입을 이용하면 민심을 관리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빛의 교리 그 자체에, 또 어떤 이들은 빛의 교리를 믿음으로서 가지는 이점 때문에 호감을 표하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대답을 해야겠군요.
사실 히스파냐는 누디아보다 죄인이 적습니다.
대부분이 죄를 지은 자의 농간에 넘어가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렸으니까요.
내가 생각하는 죄인은 한 명입니다.
모든 것이 악의 계략인 줄도 모르고 제 잘난 맛에 취하여 함부로 행동하고 피를 흘리며 결국 온갖 혼란을 불러일으킨 자.”
순간 바네사의 눈동자에서 빛이 번뜩였다.
저 천족의 입에서, 설마 그 남자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겠지.
정말 그렇게 나오는 순간 자신은 반드시 저 가증스러운 종족을···.
“우리들은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남자를 만나서, 한 번 이야기를 나눌 생각입니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여태까지 그 많은 일들을 마주했고,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풀어냈는지.
마치 전부 다 알고 있었고, 모든 걸 미리 짜고 끼워 맞춘 것처럼 행동했는지 말입니다.”
“···.”
“더해서, 그렇게나 대단한 인물이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원하는 대로 피에는 피로 대응하여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는지도···.”
콰아앙!
어찌나 큰 소리가 났는지, 옆에 앉아있던 그 볼코 후작이 놀랄 정도였다.
역시나 옆에 앉아있던 호아킨 후작은 아, 하고 탄식을 내뱉더니 이렇게 흥분하면 천족이 원하는 대로 끌려갈 것임을 직감하고는 제 군주를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바네사의 머릿속에 있던 이성의 끈은, 천족 나부랭이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선을 넘는 순간 이미 끊어진지 오래였다.
“···그만하면 됐다.
그 입 닥쳐라.”
“호오?
지금 내게 입을 다물라고 한 겁니까.
인간 여왕이여?”
“그나마 참고 참아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은데, 그래도 여태 대륙을 위해서 힘썼다는 빛의 교도들이 귀히 여기는 천족이라 내가 참는 것이다.
이 말이다.”
“여왕이시여!
천족입니다.
빛의 후예로서 히스파냐를 찾아온 분께 너무 과한 말씀입니다!”
“그대들도 닥쳐라.
어리석게도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조차 구분치 못하는 것들.”
“적?
이상하군요.
인간 여왕이여?
어찌하여 나를, 우리 천족을 적이라고 단정 짓는 겁니까?”
“그대들이, 네놈들이 먼저 히스파냐를 적대시 하고 있지 않은가!”
“이상하군요.
나는 그저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했을 뿐입니다.
나머지 히스파냐의 어느 누구에게도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연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치엘.
그 몸짓이 어찌나 여유로워보였는지, 바네사는 입술을 깨물고는 제 실수를 실감했다.
상대는 바로 이런 상황을.
건드리고 건드려서, 도발하고 도발해서 결국 히스파냐 측이 먼저 폭발하게 만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천족은 여태까지 대륙의 존재들에게 선이자 빛으로 통하던 종족들.
그런 자들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며 날카로운 기세를 숨기지 않는 건 그야말로 치명적인 일이자 상대에게 먹음직스러운 명분을 남겨주는 꼴이었다.
“만약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자도 그저 악한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갔던, 지극히 평범한 자들 중 하나였다면 그냥 이해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왕이 이리도 흥분하는 것을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군요?
원래 인간이란 존재는 감정에 들어가면 눈이 흐려지고 귀가 어두워지며 머리가 굳는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무엄하다!
감히 어느 분께!”
“부끄러운 줄 아세요, 인간 귀족들이여.
당신들이 신하라면 주인이라는 자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는 않나, 잘못된 사람을 믿고 있지 않나 확인했어야 합니다.”
리치엘이 노리는 건 바네사도, 볼코 후작이나 호아킨 후작도 아니다.
여태까지 알게 모르게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존재를 버거워하던 이들.
너무 과하게 세를 불리는 건 아닐까 경계하고, 그의 재능과 공을 시기하던 자들.
바로 그런 귀족들에게 은근한 어조로 넌지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신의 사자라 부르는 이가, 빛의 후예라고 하는 자신들이 그 존재가 의심스럽다고.
한 번 알아봐야겠는데, 막아서지 말고 협조를 해줄 수 있냐고 말이다.
“···확실히 시온 클라우젠 공자가 갑자기 변한 것부터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습니다.”
“뭐랄까,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래야 인간답지.
리치엘은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이런 식이다.
인간이란 존재들은, 자신들이 그렇게나 결속력이 강하다고 해도 결국 물방울 몇 번 떨어트려주면 알아서 금이 가고 결국 쩍 하고 갈라지는 자들이었다.
누디아로 향했던 자신의 동료 역시 이런 식으로 그들을 자극했다.
민감한 부분을 물고 늘어지면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거기에 죽자 살자 매달리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약점이 드러나고 한 번 약점이 드러난 존재는 다시 우위를 점하지 못 한다.
약한 자는 물어뜯고, 강한 자에게는 응당 고개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는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이었으며 여태 천족들이 그 인간들을 이용하던 방식이었다.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많이 들었습니다.
히스파냐의 영웅이자 많은 일들을 해냈지요.
나도 그가 정말 큰 죄를 지은 자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언제든 회개가 가능한 인간이기를 바란다는 소리죠.
그가 악의 속삭임에 넘어가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사실은 스스로 벌이고 해결한 일이며 거기에 빛을 배신한 자들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참 좋겠습니다.”
“···.”
“그런데 만약, 그가 정말로 여왕이 생각하던 그런 좋은 인간이 아니라면.
그를 이렇게나 두둔하는 여왕의 입장이 아주 난처해질 것 같군요.
다른 귀족들은 여왕을 생각해서 이런 저런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그저 감정에 취해 눈도, 귀도 막은 군주라니.”
리치엘의 과한 언사에도 바네사는 입술을 깨물며 화를 참아야만 했다.
여기서 또 흥분하여 넘어가면 그 다음을 노린 공격이 또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계속해서 자신만 이용당하는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무엇보다 자리에 모인 귀족들 중 이미 일부가 천족의 농간에 넘어가서 빛의 후예에게 의문을 표하는 모험을 무릅쓰기보다는 그냥 만만한 시온 클라우젠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골랐으니 더는 합심하여 천족의 말에 명백한 반대 의사를 보이는 것도 힘들었다.
‘···실수했다.
내가, 내가 너무 쉽게 흔들렸어.’
바네사는 자신의 실수를 통감하며, 어쩌면 리치엘이라는 천족이 한 말 가운데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큼은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감정에 취하면 눈이 흐려지고 귀가 어두워지며 머리가 굳는다는 그 말.
아무리 생각해도 천족이 공격 목표를 시온 클라우젠으로 찍는 순간 이미 자신은 그 때 패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히스파냐의 여러분들은 현명한 결정을 내리길 바라죠.
누디아 측은 이미 악의 농락에 넘어갔는지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빛의 세력 전체와 맞서기로 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결국 가장 많은 빛을 받던 곳에서 선과 정의를 믿는 자들이 들고 일어났고, 곧 신성 프러센 측 빛의 군세가 그들과 함께 누디아로 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진실이 밝혀지고, 죄 또한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히스파냐는 그런 불행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
“진실이 드러나고, 죄가 드러나면 그 다음, 그 다음은?
왜 자꾸 중요한 부분을 빼먹으실까.”
문 너머에서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직후, 역시나 문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왕이시여.
시온 클라우젠 공자가 아까 전부터 당도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품 후기―――――――
누가 내 욕 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