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349)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349화(349/439)
349―――――
좋지 않다
잠시간의 여유를 즐기기는 했지만, 결국 시간은 흘러간다.
아침이 밝고 클라우젠에서의 마지막 휴식 날, 시온은 오전부터 회의실에 눌러앉아 계속해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규합하여 확인하는 중이었다.
―신성 프러센군 계속 진격 중―누디아 군대 연전연패, 신성 프러센 측 기사단의 활약, 전해지는 보고에 의하면 요정들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측―소모전으로 버티는 중이나 누디아 내부에 빛의 교도가 많아 힘에 부친 듯―무엇보다 신성 프러센 군대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이야기가 다수 발생―
‘···확실히 이상하지.
신성 프러센이 히스파냐나 누디아에 꿀리지 않는 강국이기는 해도 누디아 군을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밀어붙일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되면 시온이 생각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누디아가 너무 약화되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신성 프러센이 힘을 숨겼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신성 프러센이 부족한 힘을 누군가에게 받았다는 것.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칠익 중 하나가 굉장히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다른 여섯의 날개가 전투에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중 한 명은 전투력이 낮은 건 아니지만 직접적인 전투에보다는 그걸 보조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천족들은 그걸 ‘천상의 기도’ 라고 불렀었는데 주변 이들의 전투 능력을 조금 더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중요한 것을 시온이 왜 여태 마크하지 않았냐고 한다면, 사실 말이 천상의 기도이지 그냥 힘 좀 내라고 응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않아서였다.
무슨 게임도 아니고, 기도 한다고 버프가 들어갔다면 이미 신성 프러센이 정복 승리를 거두고 빛의 교리로 대륙을 통일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걸 용기 갱이라고 불렀지.’
딱히 어시스트를 챙기는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지만 아군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단어, 용기 갱.
칠익이 쓰는 천상의 기도는 딱 그 수준에 지나지 않았기에 시온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누디아 군과 직접 부딪쳐 단순히 기사단 싸움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들의 싸움, 대군과 대군이 맞붙은 회전에서도 패배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다.
‘물론 은밀하게 천족들과 요정들이 도왔음에도 그걸 일부러 숨기고 있을 수도 있고 누디아 측의 과장된 정보일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염두에 두어야겠네.’
용기 갱도 아무튼 갱이라고 하니까, 일단 이건 이거대로 체크해두는 시온이었다.
그렇게 혼자 앉아서 계속 서류들을 팔락거리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덜컥!
하고 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당연히 릴리트라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들고 누구인지를 확인한 시온은 ‘음?’ 하고 의문 섞인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머리 위에 뾰족하게 솟은 두 갈래의 뿔, 팔뚝 위로 언뜻언뜻 보이는 파충류의 비늘과 가장 돋보이는, 엉덩이에 달린 커다란 꼬리까지.
여태 폐관수련이라도 하듯 한 번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에카테리나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혹시 저 싸움에 말 그대로 미친 여자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려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시온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뭐야.
김유현 올 때까지 얌전히 있겠다고 한 거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
원래 저 여자는 무조건 김유현을 따라가겠다고 제 뜻을 밝혔었다.
하지만 그녀가 김유현을 따라가면 자연스레 그는 제 임무에 집중을 단 1도 할 수 없고, 설사 그 일을 끝낸다고 해도 분명 그녀가 싸우자고 들덤벼서 시간을 소모할 것이 확실했으며 그렇게 또 나자빠진 여인을 챙기느라 또 시간을 허비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빠르게 남부의 일을 정리하고 위험이 될 수 있는 모든 걸 정리한 후 바로 이쪽으로 합류하는 것이 김유현에게 주어진 임무인데 그걸 웬 이상한 도마뱀 때문에 망칠 수는 없는 노릇.
때문에 시온은 김유현과 입을 맞춰서 에카테리나를 강제로 여기에 고정되도록 만들었다.
사실 이건 네게 인내심 증가를 위한 시험이라느니 뭐라느니 따위의 개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뭔 헛소리야?
무슨 인내심을 시험한다고?
―멍청한 년.
네가 그러니 날 이길 수 없는 거다.
―뭐라고?
―진정한 사냥꾼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뭔지 아나?
기다릴 줄 아는 거다.
기다리면서 자신의 송곳니를 숨기고 발톱을 갈면서 때를 보는 거란 말이다.
넌 그게 없어.
단 한 번도 준비 기간 없이 그냥 부딪치기만 하니 나를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다.
―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두서없는 완벽한 개소리였다.
애당초 에카테리나의 능력은 사기적인 회복 능력과 전투에 대한 마르지 않는 갈망.
기다림은 그녀에게 있어 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에 가까울 것이었다.
하지만 김유현 옆에 에카테리나가 붙으면 시온도, 그리고 김유현 본인도 아주 피곤해질 것이 확실했기에 두 남자는 입을 맞춰 어떻게든 그녀를 떼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 끝에 결국 용인은 알겠어!
라고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시온의 논리인 것 같은 헛소리와, 김유현의 협박 같은 충고에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그 덕에 김유현은 걱정 없이 남쪽으로 향할 수 있었고, 시온은 아주 꽁꽁 봉인해둔 폭탄을 되도록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숨긴 채로 클라우젠까지 안전히 이송할 수 있었다.
‘혹시나 그 폭탄이 결국 버티지를 못 하고 터지려는 게 아닐까 걱정을 좀 하기는 했는데.’
설마 그 폭탄 터지는 날이 오늘인가 싶었다.
일부러 김유현이 여기로 합류하는 시간을 조금 벌어주기 위해 클라우젠에서의 휴식 날짜도 이틀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쓴 것이었는데 사실 계산을 해보자면 이들이 클라우젠에 도착한 것과 비슷하게 김유현도 남부에 다다랐을 것이다.
적들이 바로 움직여준다고 해도, 그래서 김유현이 아무리 일을 빨리 처리한다고 해도 그건 이들이 최소한 누디아 국경을 넘어서 중앙 지역에 다다랐을 때쯤이나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벌써부터 폭발 조짐이 보이는 이 여인은 결코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걱정 마, 인간.
김유현, 그 괴물 남자와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야.”
“···정말로?”
“나보고 미친년이라고들 하지만 최소한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은 지켜.
물론 그게 너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면 그냥 집어치우겠지만 아직은 버틸 만 해.”
“그러면 왜 날 찾아온 거지?”
“언제쯤 싸우나 해서.
김유현을 대신해서 그 천족들과 말이야.”
그러고 보니 에카테니라를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천족과의 싸움이 있다고 속삭인 부분도 분명 있었다.
김유현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천족 역시 마족과 함께 가장 강한 종족을 언급할 때 항상 일컬어지는 자들이니까 말이다.
용인들은 애당초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멸종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니 넘어가고 말이다.
“때 되면 어련히 싸우게 해줄까.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올 테니 걱정 마.”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늦장을 부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늦장?”
“그래.
여태 이동하던 것처럼 그냥 누디아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걸 왜 굳이 여기서 멈춰서 이틀씩이나 시간을 허비하는 거지?
혹시 이것도 다 내 시험의 일환이라도 되나?”
“···.”
시험은 무슨, 그냥 당연한 일을 네가 이해 못 하는 게 아닐까.
이 미친 용녀야.
라고 당당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 하겠고, 시온은 그저 가볍게 한숨만 쉬며 속으로 에카테리나를 향해 욕을 박아줄 뿐이었다.
“어이, 용녀.”
“에카테리나.”
“그래, 에카테리나.
김유현이 네게 뭘 강조했었지?”
“기다린다, 기다려라.
그래야 더 강해진다.
그리고 더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 그렇게 말했지.
거기에 내가 하나 더 보태주고 싶은데.”
“네가 뭔데 그 의견에 뭘 보탠다, 만다 하는 거지?”
조금은 논리적인 반박에 시온은 제법이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묵묵히 듣고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녀 입장에서 시온 클라우젠이란 그냥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벌레와 비슷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시온이 약한 건 사실이지만, 용인들 기준에서 그런 약자는 정말 벌레만도 못 한 것이 사실이지만 에카테리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세계관 최강자라는 김유현도, 결국에는 시온의 말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 말이다.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내가 더 웃기네.
나는 그 김유현한테도 조언을 해주는 인간인데, 그 김유현한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 한 놈이 내 조언을 무시하겠다는 건가?”
“···.”
한 마디로 존나 센 내 친구는 이런 내 말을 잘 듣는데 너처럼 허접한 년이 내 의견을 무시하는 게 맞느냐는, 상당히 이상한 소리였다.
다만 이게 김유현을 반드시 넘어서고 싶은 에카테리나에게는 꽤나 크게 작용할 테지만 말이다.
“네가 그렇게 오만하니 별 짓을 다 해도 그 남자를 못 이기는 거야.
김유현은 오만하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지.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중요한 것을 깨달아서 그걸 승리의 발판으로 삼는 진정한 괴물이거든.”
“···흥.”
고개를 돌리며 불만감을 내비치는 에카테리나.
하지만 그 몸짓에서 이미 시온을 무시하는 기운이 많이 약해졌다는 걸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별 거 없어.
내가 조언할 건 이거야.
싸울 때는 싸우고, 쉴 때는 쉰다.”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야.
쉴 땐 쉬라고.
아무리 회복 능력이 강해도, 아무리 전투에 대한 갈망이 많다고 해도 결국 알게 모르게 피로도가 쌓이기 마련이니까.
너 김유현이랑 싸울 때 평소보다 오히려 많이 못 버틴 적이 있었지?”
“···!”
시온의 말에 에카테리나가 은근히 놀라는 기색을 보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듯이, 자신과 김유현의 싸움을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는 네가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냐는 듯이 말이다.
‘당연하지.
김유현이 말해줬으니까.
때로는 일부러 평소보다 더 강하게, 때로는 더 약하게 맞붙어주면서 너를 조련하고 있다고 말이야.’
다만 그 부분을 아직 모르는 모양의 에카테리나.
시온은 바로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마치 자신이 현자라도 되는 것 마냥 다 알고 있다는 모습으로 하여 그녀에게 조금 더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미끼를 내던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게 증거야.
확실히 몸의 상처는 회복되지만, 그 안에 쌓인 피로감은 회복이 되지 않는 거지.
그럼으로 인해 김유현과의 전투에서 버티는 게 나날이 늘어나야 하는데 자꾸 들쑥날쑥하는 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싸움에 대해서는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인데.”
“싸움에 있어서 두 가지 부류가 있지.
잘 싸우는 놈, 그리고 잘 보는 놈.”
“잘 보는 놈이라고?”
“인간들은 그런 걸 ‘훈수’ 라고 하는데, 완전 헛발을 치는 놈도 있지만 간혹 싸움질에는 소질이 없어도 그걸 눈으로 보고 조언을 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인간들이 있어.”
“그게 너란 거야?”
에카테리나의 질문에 시온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그런 시온을 수상하게 여기며 헛소리 말라고 차갑게 대답하는 것이 에카테리나의 반응이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저 인간 남자, 확실히 전투 능력은 구역질 날 정도로 떨어지지만 김유현, 그 남자가 은근히 따르고 또 중요시 여기고 있어.
정말 저 인간의 말대로 보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가?
거기에서 도움을 얻어서 그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따르는 거고?’
김유현은 강자다.
그것도 용인인 자신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진정한 강자.
그런 김유현이 은근히 그를 따르고 있다면 응당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에카테리나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물론 시온은 남의 싸움을 잘 보는 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머리를 지닌 것이었지만 말이다.
“···계속 말해 봐.”
결국 에카테리나는 팔짱을 끼고는 경청하겠다는 듯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후 자신과 김유현의 싸움에서 정말 시온이라는 저 인간 남자의 말이 도움이 된다면 자신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조금 더 집중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미안한데, 에카테리나.”
하지만, 시온이 어디 그렇게 쉬운 남자이겠는가?
심지어 조금 전에는 약하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무시까지 했으니 결코 곱게 넘어가줄 남자가 결단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좀 꺼져줄래?”
“···어?”
순간 에카테리나는 두 눈을 껌뻑이면서 시온을 바라보았다.
여태 자신에게 저런 험한 말을 할 수 있는 이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하는,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분명한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나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김유현이라던가, 아니면 아무리 못 해도 릴리트 정도는 되는 이들 말이다.
그런데 눈앞의 인간 남자, 시온 클라우젠은 아무리 좋게 봐도 그냥 딱 평범한 수준이다.
강하다는 말은커녕 오히려 약하다는 말을 들어야 딱 어울리는 부류라는 소리였다.
그 시온이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꺼지라고 말하고 있으니 에카테리나가 황당해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지금 뭐, 뭐라고?”
“잠시 후에 이쪽의 중요한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거든.
방해되니까 꺼지라고.”
“···.”
순간 에카테리나의 두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았다.
아무리 자신이 인간한테 무참하게 깨졌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김유현한테만 해당되는 일.
지금처럼 마나도 못 다루는 인간 따위가 저렇게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건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 했던 일이었다.
‘죽여 버릴까?’
살의가 마구 치솟는다.
아무리 잘 쳐줘도 그냥 인간,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벌레나 다를 바 없는 남자다.
힘을 크게 쓸 것도 없이 그냥 주먹 좀 날리거나 꼬리만 휘둘러도 아주 으스러져서 그대로 죽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에카테리나는 눈동자에서 불꽃만 활활 태울 뿐 몸을 움직이지는 못 했다.
괴물이 자리를 떠나면서 자신에게 했던 경고가 음산하게 머릿속에 재생되었기 때문이었다.
―나 없는 동안 사고치지 마라.
특히 시온 공자님께 무례를 저질렀다는 소리가 들린다면, 네년의 사지를 뽑아서 발정 난 몬스터들한테 던져줄 거다.
그리고 재생이 될 때쯤에 다시 목만 남겨두고 쑥쑥 뽑아서 또 던져줄 거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싸움 대신, 몬스터들에게 씨받이 신세로 전락하여 죽지도 못 한 채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그것도 좋잖아?
끝내 이성을 잃고 미쳐버릴까, 아니면 끝까지 버틸까.
저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거야.
―
김유현의 말을 듣는 순간, 에카테리나는 용인족의 뛰어난 감으로 알아차렸다.
지금 하는 저 말이 결코 단순한 위협이 아님을, 저 괴물은 정말로 그런 짓을 아무런 감정 없이 해낼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점을 말이다.
싸움을 좋아하는 것만큼 자신이 용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존심도 분명 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에게 살해당하는 미래를 원하지 않았던가.
그런 에카테리나에게 김유현이 말하는 미래는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절로 나고 그러면서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이었다.
“안 들리나?
좀 꺼지라고.”
“···.”
해서 에카테리나는 시온의 말에 딱히 화를 내지도 못 하고 그냥 바라만 봐야 했다.
그녀는 시온을 잠시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뱉고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꺼져줄 테니 다 끝나고 말해줘.
이 정도면 되었나?”
“그 정도면 나도 수긍할 만하지.
걱정 마.
나도 약속은 지키니까.”
에카테리나의 속은 적당히 긁는 게 좋다.
아무리 김유현이 있다지만 어찌 되었든 저 여자는 용인족이고, 용인족들도 다른 종족들처럼 자존심이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태세를 전환하여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듯 미소를 짓는 통에 에카테리나는 불만감을 내비치는 것조차 난감해지고 말았다.
결국 얌전히 문을 열고 회의실을 나서는 용인을 바라보며,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친구를 잘 사귀어 둬야지.
지연이 최고고, 인맥이 진리고, 빽이 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