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366)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366화(366/439)
366―――――
승리를 위한 1보 후퇴
누디아의 사라딘 국왕이 파천을 결정하기 전부터 이미 누디아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중앙을 거쳐 서부로 향하는 중이었다.
빛의 교리를 믿던 자들도 있었고, 그냥 그러려니 하던 이들도 섞여있었으며 아예 믿지 않던 자들까지 전부 섞여있는 피난민 무리.
빛의 뜻이니 과업이니 하는 것들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이대로 죽을 때까지 제 삶을 유지하는 게 그들의 소망이었기에 전쟁이라는 거대한 불길을 피해 도망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서부 정도면 안전할 것이라고 여겼다.
누디아가 비록 최근 들어 히스파냐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본토까지 밀리긴 했으나 그건 과거에도 간간이 있던 일이었고 이후 서로 평화 조약을 맺었기에 히스파냐가 공격할 일도 없을 테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들리는 건 누디아의 패배, 그리고 신성 프러센의 승리.
더해서 그 사이에 조금씩 섞여서 들려오는 빛의 교리를 따르지 않고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광신도들의 무시무시한 처단에 대한 소식들이었다.
“서부가 정말 안전할까요?”
“바수라 백작령은 이미 예전에 히스파냐와의 전쟁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다던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커녕 제 영지민들조차 챙기기도 힘겨운 곳이라는군요.”
“서부까지 가면 정말 안전할까?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벼랑으로 몰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야.”
“여기도 위험하대요.
왕성에서 살던 친척을 얼마 전에 만났는데 방어선이 계속 뚫리고 있다고 했어요.
국왕 전하도 왕궁을 버리고 여기로 온다고 한 것 같대요.”
“뭐야.
그러면 결국 서부로까지 적들이 몰려온다는 소리잖아!”
피난민들은 저마다 소식을 공유하며 점점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계속해서 서부로 몰려드는 새로운 이들이 전해주는 소식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으나 그 외에 다른 이유 하나가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서부도 곧 함락될 거다.
―히스파냐로 도망쳐야 한다.
―거기라면 안전하다, 거기라면 우리들도 안심할 수 있다.
―히스파냐는 스스로를 빛이라고 천명한 곳이니 우리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
이런 내용의 소문이 은밀히 퍼지면서 피난민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서부에 와보니 히스파냐 누디아 간의 접경지대라고 하여 믿을 수 있는, 아주 튼튼한 곳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약해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히스파냐와의 전쟁 여파를 직격으로 맞은 곳이고 채 치유가 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신성 프러센의 공격을 받았으니 당연한 부분이었다.
당장 적들이 몰려오면 지금의 방어선보다도 더 쉽게 뚫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이 피난민들 사이에 산불처럼 거세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길은, 누디아를 떠나 히스파냐로 가야만 살 수 있다는 그 소문을 장작 삼아 더더욱 미친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히스파냐로 가면 살 수 있다!”
“우리 누디아 군대마저 손쉽게 제압한, 새로이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다!”
“여기는 안전하지 않다.
히스파냐로 가자!
우리들은 살아야 한다!”
전쟁으로 인해 민심이 동요하던 와중에 그런 말들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누디아 서부에 몰렸던 이들은 눈치를 슬슬 보다가 깊은 밤, 또는 새벽을 틈타 누디아의 영토를 넘어 국경 근처까지 나아갔다.
히스파냐와 누디아가 평화를 약속했다는 조약을 믿고, 그리고 설사 히스파냐 병사들에게 걸린다고 해도 무기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피난민들인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떻습니까?”
“어리석게도 대부분이 조금의 고민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더군요.”
“우매한 것들의 한계이지요.
그저 빛을 따랐으면 평소와 다름없는 삶을 보내며 제 일상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피난민들에게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자들은 밤마다 은밀한 곳에 모여 밀담을 나누었다.
누디아의 서부에 얼마나 많은 피난민들이 몰리고 있는지, 그들이 어찌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이곳을 떠나 히스파냐로 밀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는 방안을 열심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빛의 군세들은 어디까지 왔다고 합니까?”
“정확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혹 피난민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면 안 되기에 일부러 그들과는 아예 소식을 끊고 있으니까요.”
“그들을 믿고 우리들은 그저 우리들의 과업만 완수하면 됩니다.
의심을 가지지 말고 그저 믿읍시다.
그들은 그들의 과업을 훌륭히 해낼 겁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더해서 우리들은 ‘그들’을 반드시 히스파냐 안으로, 아무런 의심을 사지 않고 들여보내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자리에 모여 있던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내비친다.
누디아와 히스파냐의 이단자들, 죄인들을 상대로 직접 전투를 하고 있는 빛의 군세들이 행하는 일은 분명 명예롭고 또 중요한 일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자신들이 할 일 역시 그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이 정면에서 죄인들을 직접 심판하는 과업을 행하는 중이라면, 자신들은 그 죄인들의 싸울 의지를 원천봉쇄하고 그들 스스로가 죄를 뉘우치며 빛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 스스로 단죄의 칼날과 창을 박아주는 그런 일들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이 국경을 통과하여 별 어려움 없이 히스파냐 안으로, 그리고 그 심장으로 파고든다면 감히 멋도 모르고 빛이니 정의니 지껄이며 우리들에게 반기를 든 건방진 히스파냐의 죄인들에게 비수를 꽂을 수 있을 겁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심장이고 머리고 전부 잃은 자들이 과연 언제까지 우리들의 성스러운 뜻에 저항할 수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마치 자신들이 벌써 이긴 것 마냥 웃으면서 떠드는 이들.
얼마 전 누디아의 땅에서 신성 프러센 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해도 아마 그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 자신들이 할 일은, 완벽하게 비어버린 적의 집을.
외부의 위협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정작 혈관 속에서 나돌아 다니는 날카로운 쇳조각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한 채 목숨을 잃는 것이었다.
“대장님, 저기 또 피난민들이!”
“하··· 이런 젠장, 진짜 미쳐버리겠군!”
한편, 클라우젠 소속의 정찰 기병들은 미치고 팔짝 뛰기 일보 직전까지 몰리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난민들이 슬슬 몰려들어서 신경이 곤두서는 와중에 밤이나 새벽을 틈타 자꾸만 국경 근처에 모여 히스파냐의 영토로 들어오는 이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있던 것이었다.
덕분에 밤에 정찰을 나가야 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밤에 출동하는 일은 낮에 나가는 일보다 기수에게도, 말에게도 몇 배는 더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앞으로 더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면 몰려들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정찰 기병들의 체력 문제가 벌써부터 생기고 있으니 정말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장님.
저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되돌려 보내거나 국경 근처에 붙잡아두는 건 어디까지나 미봉책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나라고 모르겠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들은 누디아의 사람들, 우리 히스파냐와 평화 조약을 체결한 곳이며 또한 볼코 레데넨 후작님과 우리 변경백령의 후계자이신 시온 클라우젠 공자님, 그 외에 많은 귀족 분들이 2만이 넘는 병사들을 이끌고 도우러 간 나라의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런 이들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고향에서 떠나 여기까지 몰린 피난민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저들은 누디아의 사람들이다.
히스파냐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들, 혹시나 무력을 쓰다가 이상한 소문이 나면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누디아 서부가 순식간에 흉흉한 기세로 돌변할 수 있음이었다.
‘그런 이유로 라이온 기사단장님과 리히텐 변경백 각하께서도 그들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엄명을 내리셨다.
그들이 우리 히스파냐 측에 먼저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위해를 가하지 말라고 하셨지.’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이든 조심해야 한다고 두 남자는 항상 강조했다.
특히나 아무런 죄 없는, 그저 불쌍한 피난민들 사이에 히스파냐와 누디아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틈을 벌리고 그 틈에 혼란의 기운을 끼얹으려는 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 괜한 꼬투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상 긴장을 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세상 그 무엇보다 무서운 건 민심, 그리고 사람들의 입과 혀에서 만들어지는 소문과 이야기.
힘없는 피난민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도적이 되기라도 하는 순간 누디아의 땅에서 싸우고 있는 히스파냐 군대에 대한 병참선은 물론이고 당장 누디아의 왕실이 위험해지는 결과까지 초래할 수 있었다.
“다들 멈추시오!
멈추시오!
여기서부터는 히스파냐의 영토요.
이 이상 들어갈 수 없소이다!”
클라우젠 소속의 정찰 기병들은 또 다시 국경을 넘으려고 하던 한 무리의 피난민들을 막아 세우고는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기병들을 만나자마자 달아나거나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기보다는 오히려 반갑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제발 살려주시오!
히스파냐가 안전하다고 들었소.
제발, 안 된다면 아이들이라도 좀 받아주면 안 되겠소이까!”
“우리들 좀 받아주세요.
제발요!
여, 영지민이 늘면 좋은 거 아닌가요?
안전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할게요.
신성 프러센의 군대를 피해서, 빛의 교리에 미친 자들을 피해서 남부에서 여기까지 쫓겨 왔어요.
제발요!
누디아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대요.
히스파냐로 가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이러면 안 됩니다!
아직 누디아 측에서 피난민들을 받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없고, 피난민들 사이에 적들의 간자가 섞여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오!
공식적인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국경을 통과할 수 없소이다!”
“우리들은 간자가 아니에요!
절대, 절대 아니에요!”
“의심스럽다면 아이들이라도 데려가주시오.
곧 찾으러 가겠소!
제발!”
피난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이미 수도 없이 들어왔다.
저게 정말인지, 아니면 그냥 꾸며낸 헛소리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저들 모두가 하나 같이 다급해보였고, 어떻게 해서든 히스파냐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건 동일했다.
안전하다고, 살 수 있다고, 아무 걱정 없이 이 전쟁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모두가 하나 같이 그렇게 말했다.
“후우.”
이번에도 피난민들을 결국 누디아 쪽으로 돌려보내는 정찰 기병들.
자신들의 일이고, 이게 클라우젠과 동부 영지들, 더해서 히스파냐 전부를 위한 최선의 길이었지만 사람으로서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었다.
“대장님.
혹 저러다가 정말 신성 프러센 군대가 순식간에 밀어닥쳐 저들을 살해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들은 누디아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은 히스파냐의 병사들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어디까지나 히스파냐이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왕국민들이다.
당장 저들을 받아주면 그 순간은 마음이 편할지 몰라도, 저들이 히스파냐 안에 들어가서 온갖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 때도 우리 마음이 편할 수 있겠나?”
“···.”
“어리석은 소리 마라.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도 하지 마라.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시온 공자님께서 직접 군사들과 함께 누디아로 건너가시지 않았더냐.”
침울하던 병사들이 시온의 이름이 언급되자 조금은 기운을 차린다.
가식이 아니라, 정말로 시온 클라우젠이 주는 신뢰가 엄청났던 것이다.
“그건 그렇군요.”
“하긴, 시온 공자님이라면 설사 빛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하지 못 할 겁니다.”
“당연하지.
어쩌면 그분이야말로 진정 신이 내린 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젊은 나이에, 그 많은 업적들을 이룩할 수 있었겠느냐.”
역시 지휘 경험이 많은 정찰 대장 다운 말솜씨였다.
몇 마디로 제 병사들을 다독이고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게 만들어준 그는 말고삐를 잡아당겨 방향을 바꾸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공자님께서는 그 분의 의무를 실행하고 계신다.
모든 위협에서 히스파냐와 클라우젠을 보호하고 왕국민들에게 진정한 빛, 진정한 선,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겠다는 그 의무를 말이다.
그에 맞춰 우리들도 우리들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만 한다.
우리들의 의무가 무엇이냐?”
“국경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들은 국경을 지키는 자들이다.
설사 상대가 무장도 하지 않은 누디아의 민간인들이라고 해도 어찌 되었든 공식적인 결정 없이는 누구도 국경을 함부로 넘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우리들의 의무에 충실하자.
망설임은 가질 수 있을지언정 의문은 가지지 마라.
그건 저 머나먼 누디아 땅에서 미친 듯이 싸우고 있을 히스파냐의 용사들, 그리고 시온 공자님께 대한 가장 큰 무례다.”
“예!”
우렁찬 대답 소리와 함께 기병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 많은 피난민들이 몰리겠지만 그만큼 자신들이 더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일도 다시금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
국경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거대한 성.
히스파냐 동부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자 국경을 책임지는 변경백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클라우젠 변경백령이었다.
이전처럼 누디아와 히스파냐 간의 전쟁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누디아를 지원하기 위한 히스파냐 원정군을 돕는 중간기점 역할을 하고 있는 곳.
전쟁의 여파가 아직 직접적으로 와 닿지는 않았지만 현재 리히텐 변경백과 라이온 기사단장, 그리고 영지에 남은 그리핀 기수들은 계속해서 정찰 보고를 하고 받으며 일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음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피난민들의 숫자가 가면 갈수록 불어가고 있다?”
“그렇습니다.
하루는 고사하고 단 몇 시간 만에 벌써 수 십 건의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 같이 국경을 넘어 히스파냐로 들어오려고 하는 누디아의 피난민들에 대한 것입니다.”
“···베스트.”
“디킨슨의 보고는 전부 사실입니다.
히스파냐의 국경을 조금씩 넘어서 살피는 중인데 당장 누디아 서부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게 훤히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 전부를 수용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니 결국 피난민들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핀 기수들의 보고에 리히텐 변경백은 한숨을 내뱉었다.
여태까지는 피난민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얼마 전부터 그 수가 말 그대로 ‘폭증’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 수가 늘었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국경을 넘어 히스파냐로 들어오려고 하는 자들을 제지하여 다시 누디아로 돌려보내는 일이 클라우젠 소속 정찰대들의 하루 일과가 된 후였다.
누군가는 전쟁의 참화를 피해서 도망친 이웃 국가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옳은 일이 아니겠냐고 묻겠지만, 그건 제 나라는 살피지도 않고 그저 그것만 바라보며 떠드는 멍청한 자들의 개소리라고 리히텐 변경백은 생각했다.
당장 저들이 히스파냐 안으로 들어가서 충실한 영지민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타국에서 넘어온 이들이니 원래 살고 있던 히스파냐의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건 뻔한 결과다.
그리고 그 마찰이 어느 방향으로든 결코 이로운 것으로 전개되지 않을 거라는 점도 확실하다.
‘공식적으로 평화적인 사이를 맺고 지원군까지 보냈다지만 아직 사람들 마음속에는 서로에 대한 적의, 경계 등이 진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 동부 사람들은 더더욱.
그런 상황에서 피난민들이 몰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지 않은가.’
히스파냐의 사람들과 누디아의 피난민들이 서로 좋지 않은 관계를 보이다가 결국 싸움이 벌어지면 그게 순식간에 감정 싸움으로 번질 확률이 농후하다.
심지어 그것만 문제이겠는가?
저들 전부가 피난민이라면 참 좋겠지만, 그 안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적들이 몇이나 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첩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히스파냐 내부에 남아있을 빛의 교도들에게 지령을 내리려는 자들이 섞여있을 수도 있고 아예 스스로 히스파냐에 공격을 가할 목적을 띤 적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나중에 국경이 개방되고 나면 그들을 가려내기 위해 아무리 엄청난 병사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결국 뚫리는 곳은 뚫리게 되어 있다.
빈틈을 찾아 막는 것보다 빈틈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몇 배는 쉬우니까.
“왕실에서 피난민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했었나, 기사단장?”
“예.
누디아 왕실이 파천을 하기 전 히스파냐 왕실에 연락을 취했다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피난민들 일부라도 받아줄 수 있겠냐고.
누디아 서부가 포화 상태가 되면 무척이나 위험하니 일단 적은 수만이라도 히스파냐 쪽으로 이동시키면 어떻겠냐고 말입니다.”
“···전하께서도 머리가 아프시겠군.
그들을 받아주자니 당장 히스파냐의 왕국민들과 이후 왕국의 정세가 걱정되고, 거절을 하자니 당장 누디아 왕실의 자존심 문제부터 시작하여 피난민들을 계속 막는다면 결국 그게 터져서 훨씬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
참으로 머리가 아프군, 리히텐 변경백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명령을 내렸다.
일단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국경을 강화하고 피난민들이 함부로 히스파냐 안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막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며칠 후, 히스파냐 왕실에서 명령문이 하달되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조금씩 피난민들을 히스파냐 영토 안으로 들이라는 내용.
단 철저하게 검문검색을 마치고 그들이 히스파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뿔뿔이 흩어지는 게 아니라 정해진 곳에서 딱 이동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이후 상황에 따라 더 내륙으로 이동시킬지 아니면 누디아로 돌려보낼지 결정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무척 위험한 결정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바네사 여왕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만약 저들을 계속 막다가 적들이 몰려올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 한다면 저들 전부가 적으로 돌아서서 히스파냐 영토로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올 경우를 생각한 것이었다.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적들에게 이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하는 거라고 했다.
바네사는 그 부분을 생각하여 비록 약간의 위험이 있다고는 하나 일단 누디아의 피난민들을 일부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작품 후기―――――――
추천은 항상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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