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37)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37화(37/439)
<취한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왕성에 저마다 가문의 별장을 하나씩은 두고 있다.
왕궁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해서 그들 전원이 대낮부터 궁 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왕궁도 그들 전원의 숙식을 해결할 공간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설사 왕궁이 그런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 왕국의 주인 되는 곳이 신하들을 제 집 안에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
때문에 왕성 안에 도착한 귀족들은 자신들 가문의 별장으로 가서 기다리다가 시간에 맞춰서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의 관례였다.
물론 왕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왕궁으로 직행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국왕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거나, 아니면 공식적인 행사로 ‘입’을 맞춰야 할 때가 그 예였다.
“어서 오십쇼, 시온 클라우젠 공자.
왕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왕궁의 시종장은 이번 왕궁 주최 파티의 주인공을 맞이하러 나왔다.
떠도는 소문대로라면 한량아, 아니 망나니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형편없는 귀족 자제.
하지만 누디아와의 전쟁에서 병사들을 독려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방어전에서 적들이 스스로 물러가게 만들었으며 협상에서는 거의 항복 조인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둔 청년.
달라도 너무 판이하게 다른 평가에 시종장은 머리가 팽팽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이라는 건데, 이런 경우에서 보자면 대부분 그 거짓은 후자인 경우.
즉 공이라고 하던 건 누군가의 것을 가로채어 자신의 것을 위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국왕 전하도 그렇고, 왕자 저하도 의심하시긴 했지.’
시종장의, 국왕의 그리고 왕자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한 번 생각해보고, 두 번 생각해보도, 또 생각해봐도 이건 에바 에바 삼진 에바였다.
“시종장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몇 년 되었군요.
그보다 성인이 되시더니 훨씬 더 멋지게 변하셨습니다.
귀족 영애 분들이 보시면 까무러치겠군요.”
“하하하.”
시온은 시종장의 외모 칭찬에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설정 상으로 시온 클라우젠이란 놈은 그래도 외모 하나는 ‘최상’ 에 위치하고 있으니까.
자신이 원래 듣곤 하던 ‘남자답다.’ 내지는 ‘씩씩하게 생겼다.’ 혹은 ‘음, 생겼다.’ 가 아니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보다 옆의 분들은···.”
“여성분은 전 궁정 마법사 라이도님의 따님이신 루시아 양입니다.
그리고 그 옆의 분은 루시아 양을 호위하는 이라고 해두죠.”
“아아, 루시아 양이었습니까?
이거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루시아 양의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다보니···.”
“아니에요, 시종장님.
아버지가 워낙 이상하신 분이라 왕궁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하셨으니까 말이에요.
옆의 남자 분은 유현.
아버지의 제자 분이에요.”
“예?
라이도 님께서 제자를?”
“참고로 마법 말고 다른 거요, 다른 거.”
그 말에 시종장은 탄성을 내뱉으며 김유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마법은 물론이고 무투술도 어느 누구에게 전수하지 않던 그가 이렇게 제자를 받아들이다니.
확실히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니 험한 부분이 많이 사그러든 모양이었다.
참고로, 릴리트와 리시키다는 클라우젠 백작가의 별장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리시키다는 비록 투항했다고는 하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누디아의 기사였기에 왕궁에까지 데리고 들어가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 릴리트는 괜히 마법사와 상급 기사들이 득실대는 왕궁에 들어갔다가 혹 자신을 알아보는 놈들이 있을까 피곤하다며 자리를 피한 것이다.
“그보다, 왕궁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직 파티는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말이죠.
국왕 전하께서는 현재 업무로 바쁘신 상태입니다.”
알고서 묻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
‘당연이 알고 그러는 거지, 시종장 이 양반.
입술에 침 하나 안 바르고 구라를 치시려 하네.’
이미 시온 클라우젠이 왕성으로 들어섰다는 보고가 궁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왕궁으로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장이 나와서 맞이했다.
이건 국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였다.
“리히텐 클라우젠 변경백을 대신하여 전황 진행 및 사후 처리에 관한 보고를 하려고 왔습니다.
아울러 오늘 왕실 주최 파티에 관련하여 국왕 전하와 독대를 청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어디 시골 영지의 자제도 아니고, 자그마치 변경백령의 장자가 독대를 청한다.
정치판의 끝이라는 왕궁에서 십 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시종장을 지낸 남자는 눈앞의 이 젊은 청년이 어떤 목적으로 국왕과 만나고자 하는지 단박에 눈치 챘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왕실에 조금이라도 더 이득이 되는 부분이 생긴다, 이 소리군.’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자가 이렇게까지 정치적 감각이 있는 자였나?
소문은 다 무시한다고 해도 시종장은 과거 시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기억으로는, 얼굴만 반반하고 하는 짓은 영 상대를 실망스럽게 만들던 딱 기대 이하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달라도 뭔가 너무 많이 달랐다.
수많은 귀족들과 외국의 사신들을 직접 만나고 상대했던 자신이다.
그렇기에 최소한 상대가 어떤 자인지,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는 첫인상만 보고도 대충이라도 파악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소문이 간혹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달라지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 내지는 이제부터 달라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널리고 널렸으며 그 중 반 수 이상.
아니, 거의 대부분이 본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를 유지하고 만다.
전쟁터에서 도망친 겁쟁이는 끝까지 죽음을 겁내고, 여인을 겁탈하던 놈은 끝끝내 성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불만을 잔뜩 품은 자는 결국 모든 걸 뒤엎으려 한다.
하지만 저 청년은, 시온 클라우젠은 분명 달라졌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는 번뜩이는 총기가 가득했고, 일그러져 있던 표정은 자신만만하게 웃는 상으로 변해있었으며 무엇보다 언행에 있어 막힘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자신의 뜻대로 굴리며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변경백이 드디어 살 맛 나시겠군.’
어쩌면 전쟁에서 정말 큰 공을 세운 게 맞을 지도 모르겠다.
다른 귀족가의 자제들처럼 온갖 미사어구로 연설 한 번 하고, 최후방에서 싸우는 장면 좀 지켜보다가 안전하게 돌아온 것이 아니고 말이다.
“···따라오시죠.
루시아 양과 그 호위 분은 따로 방을 내어드릴 테니 잠시 거기서 기다려주시면 되겠습니다.”
시종장은 앞서 왕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온은 그 뒤를 따라 ‘시온 클라우젠’ 으로는 두 번째로, 그리고 자신으로는 난생처음으로 히스파냐 왕실이 머물고 있는 왕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어떤 이도 무장하고 들어갈 수 없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무장이 허락되는 왕가 기사들이 주변에 경계를 서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왕가 비밀 수호 기사단이 눈을 번뜩이고 있을 것이다.
실력 있는 마법사들도 여럿이 배치되어서 그 어떤 공격에도 방비가 되어 있는 곳이 바로 왕궁이었다.
‘그런 이곳이 탈탈 털린다는 건데.’
어딘가 약한 곳이 있다던가, 아니면···.
‘배신자가 있다는 거지.’
유감스럽게도 배신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이건 소설 속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시온이 왕궁에서 벌어질 사건을 이용하느냐, 막느냐를 두고 고민한 것이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이틀은 있으니까.’
왕궁에서 벌어질 전대미문의 사건은 왕실 주최 파티가 시작되고 나서 이틀 후에 터진다.
적어도 오늘과 내일은 세이브 존이라는 것.
원래부터 숙제는 놀 거 다 놀고 할 거 다 하고 전날 밤에 하는 것이 꿀맛이라고 했던가.
시온은 오늘 하루는 일단 파티를 즐기면서 김유현와 왕녀의 문제에 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겸사겸사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후계자 임명과, 나중에 자신을 지지해줄 아군 세력을 확보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잠시 기다려주시길.”
시종장은 화려한 장식으로 도배되어 있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곤 마치 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전하.
시온 클라우젠 공자가 당도했습니다.”
“···안으로 들이도록.”
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시종장은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이곤 또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방문을 열고서는 시온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개인 집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보면 최소한 안에 누구 하나가 더 있다는 소리지.
왕자일 확률이 거의 90퍼센트다.
이참에 왕자에게 파티의 주최도 맡길 수도 있겠어.’
당장 김유현이 왕실 주최 파티에 왔을 때도 왕자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맡기고 국왕 자신은 뒤로 물러나서 사태를 지켜봤었다.
시온은 잠시 어떻게 보이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다.
히스파냐의 현 국왕, 에드가 4세는 분명 군주로서의 재목은 우수한 남자였다.
정치적 감각도 좋았고 외교적 센스도 나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을 이용하는데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다만 문제는, 건강이 왕자 시절부터 그리 좋지 않다는 것.
한 국가에게 있어 군주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서 살아간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그에 비해 에라더 왕자는···.’
다행히도 아비의 약한 몸은 물려받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좋은 능력도 물려받지 못 했다.
멍청하거나 심성이 뒤틀렸다는 건 아니다.
평범한 사람 기준에서 봤을 때 에라더 왕자는 확실히 능력도 좋고 마음도 착한 남자였다.
문제는 그게 ‘평범한 사람’ 의 기준에서 평가했을 때고, 그 기준이 한 나라를 이끌 미래의 국왕으로 올라가게 되면 형편없이 추락한다는 것이었다.
‘마음씨 착한 건 쓸모없는 놈들 쳐내지 못 하는 약점이 되고, 귀가 얇은 건 더 진화해서는 갈팡질팡에 능력이 좋다는 것도 막상 주변에 더 뛰어난 귀족들이 생기니 라이벌 의식까지 불태우며 그들을 적대시 하고 결국 그들도 왕자에게 등을 돌리게 했지.’
만약 1년 후 왕녀의 빈틈을 이용한 적들에 의해 왕가 전체가 몰살되지 않았다면, 에라더 왕자는 왕이 되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다면 히스파냐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외부에서는 적이, 내부에서는 서로를 견제하는 대환장 파티가 벌어졌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결정을 해야 했다.
국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당당하고 능력 있는 귀족가 자제의 모습을 보이느냐.
아니면 차후 국왕이 될 확률이 높은 에라더 왕자의 반발감을 잠재우기 위해 조금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승부하느냐.
이건 마치 갓 전입한 이등병이 실세이긴 하지만 곧 분대장을 떼는 병장과 아직은 일병 말이긴 하지만 곧 분대장을 잡고 실세가 되는 선임 앞에서 ‘누가 더 잘 생겼냐.’ 라는 질문을 받는 상황이었다.
‘하, 시발··· 엄마 아빠 질문은 패드립 치지 말라고 하면 되고, 부먹이냐 찍먹이냐는 그냥 쳐먹이라고 하면 되고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는 짬짜면이라고 하면 된다지만···.
똥 같은 군대식 양자택일 질문에 또 답을 해야 할 줄은 몰랐다.
시부럴!’
자!
선택해라.
그대의 선택은?
현재의 실세와 미래의 실세 중에 네놈이 선택할 남자는 그 누구이냐!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자빠졌네.’
당연히 현재의 실세다.
아, 그러면 미래의 실세한테 군 생활, 그러니까 인생 조지는 거 아니냐고?
‘그 미래의 실세를 바꾸면 되는 거지.
괜히 여기가 정치질과 통수가 흐르는 약속의 땅이겠어?’
에이스라고 불리던 병사도 폐급 짓 한 방에 차기 분대장 뺏기고 영창 가는 거 순식간이다.
군 생활 할 때 그런 동기 놈을 바로 옆에서 봤었다.
심지어 그 놈이 군 생활을 못 한 게 아니라, 맞맞후임의 ‘절대 마편’ 에 의해 단 한 방, 한 방 컷이 나버린 것이었다.
왕궁이라고 다를 것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쉽고 더 만만한 곳이다.
최소한 귀족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실세와 차기 실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속속들이 전부 알고 있는 시온이었으니까 말이다.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시온 클라우젠.
히스파냐의 적법한 지배자이자 왕가의 수장이신 에드가 아스타리우스 히스파냐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어느 정도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적당히’ 예법을 지키는 귀족들과는 달리, 극상의 예를 취해야 하는 곳이 바로 이 왕궁이며, 또한 왕가일원들의 앞이었다.
비록 변경백이라는 대귀족 가문의 장자이긴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후계자가 된 건 아닌지라 꿀리는 부분이 많았던 시온은 허리까지 가볍게 숙인 채 국왕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왕궁에 온 걸 환영한다,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시온 공자.”
그리고 그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마치 아랫집 아저씨를 보고서 인사 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 같다고 할까.
“고개를 들어라.
공적인 자리도 아니니 경직된 분위기는 썩 유쾌하지 않구나.”
그 말에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밤.
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