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375)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375화(375/439)
375―――――
역습
“미안하다, 시온.”
새로운 방어선에 마지막으로 들어선 이는 신성 프러센과 천족, 요정들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며 시간을 끌던 쟌과 휘하 전사들이었다.
먼저 방어선을 떠난 병사들이, 그리고 그 후 간신히 전선을 탈출한 생존자들이 에오스와 합류하여 무사히 위험 지역을 벗어날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희생으로 그들 대부분이 안전하게 방어선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피해는 있을 수밖에 없었고, 쟌은 수백의 전사들을 잃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쟌 본인은 무사했으나 너무 많은 이들을 잃고 만 것이다.
“···고생했어.”
아끼던 부하들을 잃은 지휘관, 그러면서도 자신을 위해서 끝까지 사지에 남는 걸 자원하여 버티고 또 버텼던 여인이다.
시온은 이번만큼은 뭔가를 얻어내기 위함이 아닌, 진심을 다해서 쟌을 안고서 위로해주었다.
“···.”
원래라면 부끄럽다며 애써 그 품에서 탈출했을 쟌이었으나 그녀에게도 이번 싸움은 참 힘들고 또 고통스러웠는지 그저 조용히 시온의 품에 안겨 그 어깨에 이마만 기댈 뿐이었다.
“동생은, 돌아왔나?”
“응.
이틀 전에.”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심하지는 않아.
허벅지에 화살을 맞은 건데 다행히 깊이 박히지는 않았어.
약간의 치료만 받으면 바로 전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다행이군, 다행이야.”
이후 쟌은 이제 그만 되었다는 듯 슬그머니 시온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시온.
볼코 레데넨 후작 일은···.”
“오히려 뒤에서 그 분과 휘하 군사들을 구하기 위해서 혈전을 벌였던 네가 할 말이 아니야.
사과해야 할 건 잠깐의 방심으로 인해 일을 망친 나지.”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건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들이 빠르게 움직일 가능성, 야간에 기습을 할 가능성, 전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타이밍에 하필 안개가 낄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 했다.
누디아의 어느 사람도 안개를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렇다는 건 하필 그날 모두가 재수가 없어서 안개가 꼈다거나, 아니면 적들이 어떤 모종의 수로 안개를 만들어 공격을 한 것이라는 소리다.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지만 결국 책임은 져야지.
위에 앉아있는 사람은 바로 이런 때를 위해서 위에 앉아있는 거니까.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놈이니까.”
“···실은, 우리 쪽으로 합류한 병사들 중에 하나가 이걸 전달했다.
내가 대신 그대에게 내미는 이유는, 그 병사도 혼전의 와중에 전사해서이고.”
쟌이 내민 건 볼코 후작의 허리춤에 매여져 있던 칼집.
아마도 최후의 최후까지 검을 휘둘렀을 볼코 후작이니 그 병사가 멀쩡히 수습할 수 있었던 건 그게 전부이지 않았나 싶다.
“···.”
왕국에 단 셋 밖에 없는 후작가의 가주.
군공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이가 이 칼집의 주인이었으나 정작 그 칼집은 보통의 기사들 것 이상으로 소박했다.
그 흔한 장식도 거의 없었고, 다만 겉에 새겨진 레데넨 후작가의 문장이 이 물건이 가지는 의미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본 왕국의 전사들 중 그는 가장 위대한 남자였다.
아마 떠나는 순간까지 전사로서 한 점 후회 없이 싸우다가 갔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들의 상황은 어떻지?”
시온이 애써 말을 돌리자 쟌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추격대를 간신히 따돌리기는 했지만 놈들이 쉴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 이대로 계속 밀어붙여서 늦어도 며칠 이내로 방어선 근처에 도달할 생각이겠지.
당장 누디아의 왕성을 통째로 불태운 것에서부터 놈들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나?”
여태 신성 프러센은 누디아의 여러 지역들을 점령하면서도 반발을 사지 않도록 나름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들은 빛의 후예들을 신봉하는 자들이고, 이 전쟁은 빛인 자신들이 악이자 죄인인 자들을 심판하는 일종의 ‘성전’ 이었으니 당연히 자신들의 치하에 들어온 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피해야 하는 일.
하지만 이번 방어선에서의 전투 이후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뒤가 없는 자들처럼, 이제부터 자신들에게 대항하면 설사 그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자들이라고 해도 용서 따위 하지 않겠다는 듯 잔혹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최고점으로, 그들은 방어선을 돌파해 누디아의 왕성에 다다르자마자 그 안에는 들어가지고 않고 곧장 불을 질러버렸다.
이미 누디아의 국왕인 사라딘과 왕실 중요 인사들, 그리고 대부분의 왕국민들은 서쪽으로 향했다지만 아직도 그 안에는 왕국민들이 남아있었는데 그런 것 따위 이제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대화재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이제는 외부에서의 배신을 종용하기보다는 내부의 결속에 충실하겠다는 건가?’
그 한 번의 공격, 그리고 그 한 번의 방화로 빛의 교리에 대해서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던 자들은 모두 그에 반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제 남은 건 정말 그들을 유일한 선이자 빛이라고 믿으며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일이 정의라고 외치는 자들 뿐.
아마도 천족들은 그렇게 자신들에게 확실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이용하여 이 전쟁을 단숨에 끝내고 과업을 완수하려는 모양이었다.
“놈들이 아무래도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것 같다.
당장 저항하면 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성 프러센 측으로 항복하러 가는 누디아의 사람들이나 귀족을 몇몇 봤었다.”
“그걸 노리고 있을 수도 있겠네.
잔혹함은 적을 결집시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분열시킬 수도 있으니까.
우리 쪽을 배신하고 자신들 쪽으로 돌아설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건가.”
뭐가 되었든 지금 상황은 누디아의 동부와 남부가 넘어간 이후 최악이라고 부를 만 했다.
방어선을 옮기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왕성을 포기하는 것도 계산에 들어가 있던 것이지만 적들이 단 한 번의 기습으로 남아있던 병력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힌 것이나 히스파냐와 누디아의 지휘관들 중 반수 이상이 전사하는 피해는 미처 예상치 못 했던 것이다.
“일단 돌아온 전사들과 함께 좀 쉬도록 해.
괜히 움직여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 못 움직이면 상당히 난처하니까 말이야.”
평소라면 그럴 일 절대 없을 거라고 외쳐야 했던 쟌.
그런 그녀도 이번에 있었던 전투가 워낙 힘겨웠는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막사로 지정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걸로 히스파냐 측 가용 병력은 만 명이 조금 넘는 상황.
누디아는 히스파냐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아.
가용 병력은 많다지만 히스파냐처럼 가리고 가려서 뽑은 정예가 아니라 그저 그런 일반 병사들 숫자가 너무 많다.
더해서 왕실이 머무르고 있는 바수라 백작령과 그 일대를 지켜야 하니 당연히 병력들이 분산될 수밖에 없고.’
누디아 중앙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지나쳐야 하는 관문이, 이제는 반대로 누디아 서부와 그 너머 히스파냐로 가기 위해 반드시 돌파해야 하는 길목이 되었다.
원래라면 이 방어선에서 못 해도 한 달 이상은 버틸 자신이 있었지만, 이제는 한 달은 고사하고 일주일도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시온이었다.
‘아군의 사기가 너무 바닥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신성 프러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히스파냐와 누디아 연합군을 말 그대로 도륙하던 최상위 천족, 그들이 지금도 계속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한 번 제대로 칼을 뽑아 들었으니 이제 그걸 순순히 회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심지어 생존자들이 돌아오면서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군의 분위기에 그들이 몰고 온 두려움이 퍼지면서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부사령관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상당히 초췌해진 모습의 루드비히가 안으로 들어선다.
시온은 자신의 부친과 더불어서 안면식이 있던 거의 대부분을 잃은 젊은 기사, 그리고 레데넨 후작가의 새로운 가주가 될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에 들려있던 칼집을 내밀었다.
“볼코 레데넨 후작께서는 적들을 밀어낼 때까지 어느 누구도 검을 회수하지 말라고 하셨지.”
“시온···.”
“이제 그 말을, 네가 그 분의 뜻을 실행하고 마무리 할 때다.
루드비히 레데넨.”
“···.”
루드비히는 잠시 말없이 그걸 쳐다보며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곧 그 칼집을 잡고서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해보였다.
“사령관님의 명령, 그리고 부사령관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승리하는 그 순간까지 이 칼집에 검이 들어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루드비히는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볼코 후작의 소식을 들은 이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해보이려고 하고 있지만, 그게 쉽게 된다면 세상 어느 누구도 슬픔에 몸부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며칠 안으로 오려나.”
또 다시 저물어 가는 하루를 바라보며, 시온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적들을 밀어내지 못 하면 히스파냐, 그리고 클라우젠까지는 말 그대로 ‘고속도로’ 다.
방어선에서 벌어진 참사가 클라우젠에서 반복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볼코 후작을 잃은 건, 그리고 훌륭한 병사들을 수도 없이 잃은 건 물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클라우젠에 적이 들이닥쳐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나는 건 아예 다른 일이었다.
불길이 더 밀려오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그 사나운 기세를 완전히 꺾어두어야만 했다.
―
그로부터 정확히 이틀 후.
방어선 앞으로 번쩍이는 빛을 내뿜으며 신성 프러센의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도열했다.
이전에 있었던 패배는 그 후 있었던 대승으로 완전히 지워 없앴다는 듯,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들이 승리해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기운이 가득했다.
반대로, 히스파냐와 누디아의 병사들은 영 상태가 좋지 못 했다.
특히 비교적 전투 경험이 적은 이들이 숙련된 이들보다 더 그랬는데, 전장에서 하나가 흔들리면 그 주변 전체가 흔들리게 되니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시온 클라우젠님.
혹시나 해서 여쭤볼게요.
혹시 뭐 좋은 수라도 있나요?”
방어선에서의 비극을 접한 후, 아이브는 몇 없는 정예병들을 전부 이끌고 돌아왔다.
여기서 방어선이 또 무너진다면 누디아 전체가 그대로 빛의 광신도들에게 넘어가는 꼴이니 차라리 여기에서 싸우다가 죽는 게 낫겠다는 반응.
아이브의 그런 질문에 시온은 잠시 적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게도, 지금의 적은 무슨 수가 통할 수준이 아니라서요.
그 어떤 계책을 써도 그냥 힘으로 밀어붙일 겁니다.
그리 되면 혼란만 더 가중되겠죠.”
“힘의 차이도 메울 수 있는 게 시온 클라우젠의 전략이라고 들었는데.”
“그 차이가 적당히 나야 메울 수 있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버티면서 병사들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일이 전부에요.”
시온의 말에 아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별 수가 없다는 게 더더욱 안타까웠고 한심했다.
간신히 돌아온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새로이 등장한 적은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히스파냐에 소속되어 있던 용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무시무시하다고 했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쓰러지기는커녕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자비 없이 아군을 학살했다.
등 뒤에 있는 여러 쌍의, 순백의 날개가 펼쳐질 때마다 그 압도적인 위용에 몸이 얼어붙었고, 마치 맹수 앞에 선 연약한 초식동물처럼 벌벌 떨면서, 심판자 앞에 선 죄인처럼 목숨을 구걸하다가 결국 전부 목숨을 잃었단다.
심지어 그곳에는 누디아의 상급 기사들도 있었고, 히스파냐 측의 상급 기사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 전원이 그 존재에게 승리를 거두지도 못 했고, 상처도 내지 못 했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병사라도 흔들리게 된다.
버티고 버텨서 뭐 하느냐.
어차피 그 괴물이 또 들어오면 뚫릴 텐데.
세상 그 어떤 죽음보다도 더 비참하고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텐데.
“···의 뜻대로···!
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리라!”
그와는 반대로 한껏 사기가 오른 신성 프러센은 아예 기사 몇을 히스파냐와 누디아의 군 가까이로 보내서 이상한 소리까지 외치게 만들었다.
당장 화살을 맞아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결국 그런 짓을 하지는 못 했고 그러는 사이 신성 프러센은 공격 준비를 마쳤다.
‘시온 클라우젠은···.’
볼코 후작이 전사한 마당에 그라도 나서서 사기를 좀 올려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그냥 자리에 서서 가만히 적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브는 혹시 이 남자가 이제 와서 포기한 건 아닐까,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도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떠올리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여태껏 시온의 옆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한 기사가 병사들에게로 다가갔다.
‘저 남자는?’
듣기로는 레데넨 후작가의 후계자라고 했다.
루드비히 레데넨, 이번에 전사한 볼코 레데넨 후작의 하나뿐인 아들.
가문의 힘은 대단하지만 정작 루드비히 자신은 딱히 이룬 명성이나 세운 공이 없어 제대로 된 평가가 없던 마당에 그가 나서니 아이브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 그 곳에 있던 너희들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
“두렵고, 무서웠겠지.
어떻게 싸워도, 어떤 짓을 해도 결국 결말은 똑같다는 걸 알았을 때 느껴지는 무력감이 무엇인지 아주 절절히 느끼며 외롭게 싸우다가 죽었을 것이다.”
“···.”
“그래서, 그들이 뒤로 물러섰나?
등을 돌리고 도망쳤나?
아니잖아.
결국 모두가 끝까지 자리를 사수하고 싸우고 또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못 생긴 동료를 위해서, 내 뒤에 있는 젊은 놈을 위해서.
그리고 먼저 물러나 이동 중이었을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였어.”
루드비히는 딱히 큰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절절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독백하듯이,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아주 편안한 목소리로 말을 할 뿐이었다.
“우리 모두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자.
히스파냐의 영웅들, 그리고 누디아의 영웅들아.
이렇게 도망치지 않고 싸우겠다고 나선 것 자체로 이미 우리들은 다 영웅이니, 그 호칭에 걸맞게 당당히 싸우자.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스스로에게 떳떳하도록.”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저 멀리서 함성이 들려온다.
마침내 신성 프러센이 공격을 개시했고, 사기가 잔뜩 오른 자들이 병장기에서 나오는 빛을 번쩍이며 점점 방어선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반대로, 히스파냐나 누디아의 병사들은 함성은 내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겁을 먹고 위축되지도, 몸을 떨지도 않았다.
독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정면을 주시하며 곧 들이닥칠 적들을 노려본다.
얼마 전 아버지를 잃은 한 귀족 공자의 말대로, 동료들의 목숨을 값으로 치렀다면 이제 그걸 자신들이 받아갈 차례였다.
“···.”
아이브는 잠시 고개를 돌려 시온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나서서 없던 사기를 억지로라도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루드비히를 대신 내세워서 강제로 사기를 올리는 대신 분노와 독기를 가득 품게 만들었다.
‘무서운 남자.’
이 위급한 순간에도 이렇게 머리를 굴리다니.
정말이지, 참으로 적으로는 결코 두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돌격!”
“우와아아아!”
“방패!
방패!”
그러는 사이, 앞에서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방패와 방패가 부딪치고 그 사이로 창이 날아들며 어떻게 해서든 빈틈을 찾아내어 그곳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려는 자와 그런 적들을 떨쳐내려는 이들의 싸움이 이어진다.
고함 소리, 악 쓰는 소리, 비명 소리, 쇠와 쇠, 날과 날이 부딪치는 소리, 온갖 소음이 한데 묶여 천지를 진동시킨다.
어느 한쪽이 크게 유리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전투는 바로 판가름 나지 않고 점점 길어졌으며, 그걸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릴은 한숨을 내뱉었다.
“저번 전투에서 너무나 많은 원죄를 쌓아서 이번에는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이지.”
나서지 말라던 방식이 바뀐 이후로 가장 신난 릴이었다.
감히 자신들의 앞을 막아서는 개미떼들을 밟아 죽이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하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이전 전투에서 수백의 히스파냐 병사들을 아주 곤죽으로 만들었던 두 자루의 철퇴를 들고 전장으로 향했다.
여러 쌍의 날개가 펼쳐지고, 순백의 빛이 사방으로 퍼지자 신성 프러센의 병사들이 엄청난 환호성을 지르며 이제 이 전투도 자신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들을 위해서 친히 전장에 나서는, 그리 하여 제 손에 피를 묻혀가면서, 원죄를 쌓아가면서까지 빛을 위하는 그 모습에 전력을 다 하여 몰아치고 또 몰아쳤다.
“우아악!”
“꺼억!”
최상위 천족이 휘하 상위 천족, 그리고 중위 천족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타나자 그래도 여태 잘 버티던 방어선이 그들의 등장 한 방에 우르르 무너지며 급속도로 진형이 붕괴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천족들이 한창 히스파냐와 누디아의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던 찰나, 어디선가 날아든 검격에 중위 천족 하나가 붉은 피를 쏟으며 허물어진다.
그 모습에 릴은 제법이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새로운 이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럭저럭 괜찮네.
하지만 아쉬워.
빛의 교도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릴의 말에 개소리 하지 말라는 듯 쟌은 퉤, 하고 침을 뱉었고 리시키다는 표정을 더욱 싸늘하게 굳혔다.
그녀들의 반응에 릴은 자신 곁에 있던 천족들에게 빠르게 정리하고 합류하라는 말을 남겨두고선 자신은 전선을 완전히 와해시키기 위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거기 멈추세요!”
리시키다가 릴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지만 곧 중위 천족들의 공격에 바로 막혀버렸다.
쟌은 일찌감치 자신을 노리고 있던 상위 천족과 막 전투에 들어갔고, 진형이 깨어진 곳에서 여인들은 천족들과 난전을 펼치며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력이 비슷하니 결국 유리한 건 숫자에서 밀어붙이는 쪽이었고,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에서 수적 열세에 있는 건 리시키다와 쟌이었다.
“밀어붙여라!
죄인들을 참살하라!”
“빛은 빛으로!
그림자는 그림자 속으로!”
“죄를 지은 자들에게 마땅한 고통을!”
사방에서 광신적인 외침을 부르짖으며 신성 프러센 군이 점점 우위를 점해간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전투에서 릴과 함께 등장한 천족들이 전선을 완전히 망가트리니 진형이 무너지는 건 그야말로 삽시간에 벌어진 일.
히스파냐의 병사들이 사방에 들려오는 광신도들의 외침에 싸울 의지를 잃어가며 최후의 최후를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우우웅―.
시작은 아주 짧은 공명음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전달된 소리.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전투에만 집중했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다.
리시키다, 쟌, 그녀들과 싸우고 있던 천족들, 그리고···.
“···뭐야.”
한창 철퇴를 휘두르고 있던 릴까지.
그녀는 철퇴를 거두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방금 전에 매우 이질적인 뭔가가 뒤를 완전히 양분하고 지나갔다.
약한 자들은 느낄 수 없지만, 강한 자들은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확실히 느낀 이것, 이 기운은···.
콰과과과과과과!―
폭음과 함께 한 줄기 기다란 섬광이 그려지고, 전선 한 가운데에 경계선이 새겨진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존재가 한 줄기 손톱으로 훑고 지나간 듯, 그 선 위에 있던 신성 프러센의 병사들을 완전히 자르고 토막 내면서.
“뭐, 뭐야?”
“우아아악!”
거대한 푸른 불꽃이 일고, 일대의 마나가 요동치면서 천지를 완전히 찢어발긴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릴은 곧, 그 뒤를 이어 날아드는 뭔가를 보고 탄식을 내뱉었다.
“검?”
검이란 게 무엇인가.
누군가의 손에 들려서 휘둘러지는 것.
바로 그걸 검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 저 검처럼, 살아있는 생물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며 이곳을 향해 미친 듯이 날아들고 있는 걸 세상 어느 누구도 검이라고 부를 수 없으리라.
퍼억!
퍽!
퍽!
“꺽!”
“크헉?”
“끄아아악!”
신성 프러센의 병사들, 요정들, 그리고 천족들까지.
쟌과 리시키다를 한창 압도하고 있던 상위 천족도, 중위 천족들도 그 검의 일격에 그대로 절명하거나 치명상을 입은 채 물러서야만 했다.
공평하게 모든 것들을 꿰뚫으며 검은 그렇게 한참을 매섭게 날뛰다가 별안간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 뒤에서, 시커먼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무시무시하고, 더 진득한 살기를 내뿜으면서.
검은 잠시 그 시커먼 남자를 기다리다가 그 뒤를 따르며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내달린다.
“···아하하!
너네 이제 다 죽었어!”
가장 먼저 그 정체를 알아차린 쟌이 소리를 내지르고, 뒤따라 리시키다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시온은, 한숨을 내뱉으며 그 괴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전장의 마나는 더욱 더 날뛰며 규격 외의 존재가 등장했음에 바들바들 떨고, 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던 푸른 불꽃은 자신의 주인을 반기듯 너풀거린다.
“···가장 강한 놈 데려와.”
진정한 역습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작품 후기―――――――
느, 늦었습니다···.!
지각했으니 3편 들고 왔어요!
추천 많이 해주시면 3편이 또 올 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