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38)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38화(38/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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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손님이 지금 막 왕성 문을 지났다는구나.”
히스파냐의 국왕, 에드가 4세는 찻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리히텐 클라우젠 변경백의 슬하에는 아들이 둘 있다고 했다.
그 중 하나는 늘그막에 얻은 막둥이고, 어미를 잃은 첫 자식과는 15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했었다.
‘둘의 사이가 어떠냐에 따라 든든한 아군이 될 수도, 혹은 원수가 될 수도 있지.’
권력과 정치판의 한가운데에서 혈연은 그저 약간 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때로는 그 어떤 관계보다도 더 냉혹하게 거칠게 끊어내야만 하는 것이 핏줄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에드가 4세는 옆에 앉아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던 제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바네사 링클레 히스파냐, 왕국 제 1왕녀.
1왕자인 에라더 라곤 히스파냐와는 딱 1살 터울의 연년생.
분명 같은 아비, 같은 어미를 두고 태어났음에도 정말이지 극과 극인 남매였다.
그나마 바네사가 동생이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왕가의 혼란이 극도로 심해졌을 거라고 에드가 4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딱히 큰 결점이 없으니 에라더의 왕위 계승은 기정사실이라지만···.
그래도 이 아이의 재능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구나.’
씁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연신 차를 마시던 에드가 4세는 문득 옆에 앉아있던 딸아이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있음을 알아차렸다.
평소 감정 표현이 극히 적은 아이가 시온 클라우젠이 왕성을 넘었다는 소식에 조금이나마 불쾌하다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녀석, 아직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나 보군.’
아직 소년, 소녀일 때의 일이니 이제는 마음에서 지워도 될 터인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에드가 4세는 슬쩍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클라우젠 변경백령이 누디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구나.
보름도 안 되는 시기에 결정적인 승리 한 번, 그리고 성공적인 방어까지.
대단한 공훈이지.”
“저도 들었습니다, 부왕이시여.”
“그 부분에 대한 보고와 사후 처리에 관한 것들을 논의하기 위해 손님이 왔고 말이다.”
“···.”
바네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뭔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잔뜩 굳은 표정만 짓고 있을 뿐.
결국 보다 못한 에드가 4세가 찻잔을 티스푼으로 가볍게 두 어 번 치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리는 왕녀였다.
“송구합니다, 부왕이시여.
제가 딴 생각을 하느라···.”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그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다름 아닌 시온 클라우젠이라고 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리히텐 변경백이 직접 언급한 부분이지.”
“···.”
“몇 년 전 네게 약간은 과한 실수를 저질렀던 철없던 소년이 그 사이에 철이 들어서는 단박에 성장한 모양이다.”
바네사는 에드가 4세의 말에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 했다.
자신은 단순히 소문만으로 그를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직접 겪어보기까지 했다.
몇 년 전 있었던 왕실 주최 파티에서 감히 자신을 묘한 눈길로 훑어보던 시온이 아니었던가.
절로 구역질이 나는 시선에 분노한 자신이 일갈을 터트렸고, 결국 리히텐 변경백이 나서서 대신 사죄하기까지 했다.
정작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놈은 결코 나서지 않고 오히려 아비 뒤에 숨어있었다.
‘저런 자가 장차 클라우젠 변경백이 되어 이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니!
이 상황이 그저 통탄스럽고 슬프기 짝이 없구나!’
아직은 정정한 리히텐 변경백이지만, 시간의 흐름 앞에서 장사가 없다고 했다.
언젠가는 그도 노쇠하여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 형편없는 남자가 변경백령으로 자리할 터인데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것이 바네사의 속마음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믿을 수 없는 보고가 올라왔다.
누디아의 전쟁에서 클라우젠 변경백령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후 이어진 방어전에서는 교전 한 번 없이 적들이 스스로 물러가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이 단 며칠 만에 벌어진 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인물.
‘그 보고를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시온 클라우젠.
그 남자였다.
여인들에게 치근덕거리고, 약자에게는 강한 모습을 강자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던 그가.
갑자기 돌변해서는 연설 몇 마디로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전장의 선두에서 싸웠으며 방어전에서 지략을 발휘해 적들이 스스로 물러가게 하고, 누디아가 자랑하던 상급 기사 하나를 제 밑으로 들이기까지 했단다.
‘말도 안 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본성이 왜 본성이겠는가.
변하지 않는, 변하기 힘든,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색깔이니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시온 클라우젠은 마치 그런 자신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변했다.
그것도 너무 많이 변해서 감조차 잡히지 않게 말이다.
“부왕이시여.”
“음?”
“···혹 과장된 보고가 아닐지···.”
왕녀는 그렇게 말해놓고 스스로가 웃기고 기가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리히텐 변경백이 그런 일을 묵인할 사람인가?
아니, 애초에 그런 허위 보고를 올려놓고 그 당사자인 시온 클라우젠이 직접 올라온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일인가.
거짓 보고임이 드러나면 왕실 모독죄를 포함한 온갖 죄목으로 중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데.
“글쎄다.
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냐.”
“···.”
“에라더는 ‘혹시 좋아하는 이가 생겨서 노력한 건 아니겠습니까?’ 라는, 지극히 이상하면서도 또 지극히 남자다운 대답을 하더구나.”
“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보고와 소문으로만 판단키에는···.”
“그러하냐.
다행이구나.
마침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 잠시 나와 상의할 부분이 있다며 왕궁에 도착한 모양이니 말이다.”
파티가 시작되기도 전에 왕궁에 ‘상의’ 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네사도 잘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더 이득이 되는 부분을 찾자, 한 쪽은 파티의 주인공으로.
또 다른 한 쪽은 그 파티를 주최한 입장에서.
“전하, 시온 클라우젠 공자가 당도했습니다.”
“안으로 들이도록.”
시종장이 고하자 에드가 4세가 그리 답했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훤칠한 미청년이 무척이나 당당한 걸음걸이로 막힘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단 한 치의 망설임이나 우려, 두려움, 심지어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시온 클라우젠.
히스파냐의 적법한 지배자이자 왕가의 수장이신 에드가 아스타리우스 히스파냐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변경에 있는 귀족일수록 중앙의 예법을 어려워하고 낯설어하기 마련.
때문에 가끔 있는 실수도 국왕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저 미청년은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예법에 맞는 정확한 인사로 제 첫 등장을 알렸다.
“고개를 들어라.
공적인 자리도 아니니 경직된 분위기는 썩 유쾌하지 않구나.”
에드가 4세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드는 시온 클라우젠.
그 순간 바네사와 시온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마주하고 말았다.
“···?”
순간 시온은 시온대로, 그리고 왕녀는 왕녀대로 놀라고 말았다.
‘시밤, 뭐여?
왜 왕녀가 이 자리에?
왕자 아니었어?’
큰 재능은 없지만, 큰 문제도 없기에 거의 유력한 차기 국왕이 에라더 왕자였다.
당연히 그가 에드가 4세와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시온은 ‘아차.’ 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바네사 링클레 히스파냐 1왕녀 저하를 뵙습니다.”
“···.”
여전히 왕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죽하면 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에드가 4세가 다시금 찻잔을 쳐서 주의를 줄 정도였다.
팅팅―.
“아, 미안해요.
시온 공자.
왕궁에 온 걸 환영해요.”
“감사합니다, 왕녀님.”
그렇게 답한 시온은 에드가 4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에게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묘하게 서운함이 드는 왕녀였다.
‘몇 년 전에는 정 반대였는데···?’
첫 만남부터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시온 클라우젠.
그 눈동자 속에 절로 사람 속을 뒤집히게 만드는 욕망의 빛이 서려있던 걸 아직도 기억한다.
심지어 이후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자신을 흘끗거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몇 년이 지나고, 이제는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온 그 청년은.
정말로, 정말로 많이 변해 있었다.
눈동자는 총기로 반짝였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
나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예, 국왕 전하.
그 전에 이번 전쟁의 진행 과정과 사후 협상에 대한 부분에 대해 보고드리려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그대의 아비가 보낸 것으로 상세히 알고 있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앉게.
영웅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귀로 직접 들어야 제 맛이지.”
국왕이 이렇게 자리를 권하는 것, 그리고 그 옆에 앉는 것은 엄청난 포상이었다.
때문에 웬만한 귀족들도 어려워하며 난색을 표하곤 했는데, 시온은 그런 거 전혀 없었다.
그저 왕의 명령이니 이행하겠다는 듯 거침없이, 하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게 국왕의 옆.
그러니까 바네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전포고는 누디아의 시작으로 하여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그에 따라 저희 클라우젠은···.”
보고서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말들이 시온 클라우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만, 그의 말에는 간간이 그가 느끼고 또 결정하여 행동했던 부분들도 섞여있었다.
에드가 4세는 잠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듣자하니 그대가 전쟁에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리히텐 변경백은 그런 그대가 전장의 선두에 섰다고 하더군.
후방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적진 바로 코앞까지 뛰어가서 병사를 구해왔다고.”
어?
그게 무슨 소리지?
왕녀는 살짝 당황해서는 에드가 4세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던 부분이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병사를 구하기 위해 적진 코앞까지 뛰어갔다니?
“리히텐 변경백이 올린 보고에는 ‘연설을 했다.’ 라는 내용만 있지, 어떤 내용의 연설이었는지는 쓰여 있지 않아서 말이야.
그게 자네가 병사들에게 했다는 약속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아무래도 변경백이 그 부분을 누락한 건 크게 필요치 않은 부분이라 생각하여···.”
“자네 아비를 탓할 생각은 없어.
그저 궁금해서 그런 것이지.”
에드가 4세는 살짝 몸을 기울여서는 시온을 바라보았다.
“알려줄 수 있나?
그대가 했다는 출전 연설.
그리고 병사들에게 했다는 그 약속.”
시온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음?”
“···?”
“승리도, 신의 가호도, 하다못해 무사귀환도 약속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대신, 다른 것을 약속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 내가 가장 앞에 설 것이며, 뒤로 물러설 때에는 가장 끝에 제가 있겠다고.
그리고 저 참혹한 전장에 아무도 남기고 오지 않겠다고.
승리하든, 패하든.
죽었든, 다쳤든, 살았든 모두가 함께 집을 돌아가자고 말입니다.
그렇게 약속했기에 선두에 서서 싸웠고, 가장 뒤에 섰으며 뒤쳐진 병사를 두고 올 수 없었습니다.”
시온의 말이 끝났지만 에드가 4세도, 바네사 왕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시온 클라우젠은 단순한 병사나 기사가 아니다.
변경백이라는, 거의 후작가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닌 가문의 장자다.
굳이 저런 말도, 행동도, 약속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저 잘 싸우고 오라고, 뒤에서 지켜보다가 먼저 빠지면 그 뿐이다.
“···그랬던 것이냐.
그래, 다음 이야기들도 해보거라.”
이후 이어진 전쟁 과정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원군과 함께 클라우젠 성에 들이닥친 누디아 군세.
그 상황에서 시온은 성문을 걸어 잠그기는커녕 활짝 열어버렸다.
자신 있으면 들어와 보라, 는 무언의 일갈에 누디아는 스스로 물러갔다고 한다.
아무리 함정이라고 해도, 일단 성 안으로만 들어가면 공성전은 끝인 상황에서 말이다.
‘이, 이게 도대체 가능하다는 말인가?’
몇 년 전의 그 나사 빠진, 빌어먹을 귀족 놈이 맞기는 한 것인가.
영애들에게 꼬리를 치고, 유력한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피하고 지방 귀족들에게는 으스대던.
잘난 것이라곤 그 반반한 얼굴 외에는 하나 없던 그 ‘시온 클라우젠’ 이 정말 맞는 것인지.
바네사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 왕실 주최 파티가 열리면 상당수 귀족들의 관심이 제게로 모여들 것입니다.”
“그렇겠지.
전쟁 영웅이니 환영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하여 그들의 애국심을,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들끓게 해볼까 합니다.”
“뭐라?”
또 예상치 못한 말에 에드가 4세도 표정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말에 국왕은 그게 무슨 말이냐, 가 아닌 그게 가능하겠냐 라는 진심을 숨기지 못 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간단합니다, 국왕 전하.”
그래,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지.
사람들을 고양시키는 법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냥 감정선 좀 건드려주면 그만이니까.
‘클라우젠의 한량아가, 그 소문 무성한 망나니가 자신들이 다 보는 앞에서 애국심 한 사발 하시는데 자칭 명예로운 귀족들이라는 놈들이 거하게 한 사발 안하실 수가 없는 법이지.’
아아아, 정말 기대가 되는 왕실 파티로구나!
시온은 속으로 클클클!
웃어댔다.
[작품후기]4연참을 이틀이나 했더니···.
어우···.
죽겠습니다 ···.
그래도 추천이 많다면 또 연참을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