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380)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380화(380/439)
380―――――
역습
커드란 남작은 에라더가 아직 왕자이던 시절 왕궁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덕분에 우연히도 왕좌에 앉은 에드가 4세를 본 적도 있었는데, 그를 보는 순간 확실히 왕이란 존재는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을 했었다.
몸짓이나 표정, 눈빛에서 나오는 느낌이 보통의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가벼운 농담을 하면서도 몸에 밴 그 위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정말 하늘의 선택이라도 받은 것인지 그저 대단하게만 보이던 히스파냐의 군주.
그 군주가 지금 바로 제 앞에 앉아있다.
자신이 알던 그 화려한 왕좌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의자에 앉아있음에도 그 위엄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말이다.
“여, 여왕 전하.”
“이상하군.
왜 갑자기 말이 바뀌는 건가?
조금 전에는 왕이라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나를 몰아내고, 원래 이 자리의 주인공을 전하라고 부르겠다던 자네인데.
갑자기 왜 나를 여왕이라고 부르는지 참으로 의문이구나.”
그리 말하는 바네사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고,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누가 보면 그저 이 야밤에 숨겨둔 연인을 만나러 나온 여왕이라고도 오해할 정도랄까.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커드란 남작은 잔뜩 겁에 질리고 말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식은땀을 흘리며 커드란 남작이 뒷걸음질을 친다.
창밖 너머에서 비치는 시뻘건 불길,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하얀 월광을 받으며 우아하게 앉아있는 저 여인의 모습이 그에게는 그 어떤 사신의 모습보다도 더 두려웠다.
“으으···.”
도망가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음을 알면서도, 본능은 자꾸만 그의 몸을 이 방 바깥으로 나가라고 외쳐대고 있는 중이었다.
제발 여기서 벗어나자고, 어떻게 해서든 여기만이라도 벗어나보자고.
본능이 속삭이는 대로 커드란 남작은 떨리는 몸을 간신히 제어하며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제 등을 뭔가로 쿡, 하고 찌르는 걸 느꼈다.
고개를 돌린 커드란 남작은 그만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는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허튼 짓을 하면 바로 목을 쳐버리겠다고 무언의 뜻을 전달 중인 슈마허 왕실 기사단장이 서있는 중이었다.
원래는 부단장 자리에 머물고 있었으나 선왕인 에드가 4세의 죽음 이후 전 단장이 물러나고 새로이 그 자리에 앉은 그는 바네사 여왕의 검으로서 충실히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 중이다.
왕실 기사단장이 이렇게 뒤에 서있다는 건 커드란 남작이 눈치도 못 챈 순간에 이미 이 일대에 왕실 기사들로 도배가 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아.’
그걸 깨달은 순간 커드란 남작은 도망칠 곳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기사로 출발하여 공을 세우고 귀족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장에서 어느 정도 괜찮은 활약을 한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왕실 기사단에 속한 자들은 모두가 중급 기사들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에 있다.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인사를 책임지는 집단이니 그 무력이 한 나라의 최고임은 당연한 일.
그들이 사방에 퍼져있는데 자신 따위가 도망갈 수 있는 확률은 애초에 없었다.
“이보게, 기사단장.커드란 남작이 이 밤에 이 먼 곳까지 걸음 하느라 힘이 좀 드는 모양이야.
남작에게 앉을 것이라고 좀 권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예, 전하.”
방금 전만 해도 커드란 남작을 찢어죽이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슈마허 단장은 바네사의 말에 바로 표정을 바꾸고는 뒤의 기사들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잠시 후, 누군가가 전해준 의자를 받아든 슈마허 단장이 직접 그걸 가져와 방바닥에 내려놓고는 멍하니 자리에 서있는 커드란 남작에게 자리를 권한다.
“앉으시죠, 커드란 남작.”
여전히 표정은 좋지 못 했지만, 목소리에는 예를 갖추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났다.
자신이 따르는 군주가 아직까지 예의를 보이고 있으니 그 신하인 자신도 당연히 바네사의 의견에 따른다는 것처럼 말이다.
“앉게, 커드란 남작.
그대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좀 많아서 말이야.
아무래도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 하군.”
“···.”
“앉게.
두 번 말하지는 않겠네.
자꾸 서있으면, 손님의 피곤함을 우려하는 기사단장이 그대를 강제로 앉힐 수밖에 없어.”
상당히 예의 바른 협박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일까.
커드란 남작은 식은땀으로 푹 젖은 등을 느끼며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슈마허 단장이 가져다 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가 앉는 모습을 확인한 바네사는 슬쩍 몸을 돌려 점차 잡히고 있는 불길, 그리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뚝 하고 멎은 굉음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그대가 내 오라비를 끝까지 지지하던 사람이라고 하여 함부로 대한 적은 없다.
경계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건 국왕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경계는 하되 무조건적으로 적대시 하지 않는 것.
난 선왕께 그렇게 배웠다.”
“···.”
“그러니 말해주겠는가?
왜 나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이미 스스로 계승권을 포기한 내 불쌍한 오라비를 왕좌에 앉히려고 했는지 말이다.”
이미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커드란 남작은 이제는 살 길이 없다고 여기니 비록 두렵다는 마음은 들지언정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뜻을 더 당당히 내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네사 여왕이시여.
당신이 옳지 못 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놈이 감히!”
“기사단장, 흥분하지 말게.
이건 내가 듣고자 하는 자리다.”
슈마허 기사단장은 그 말에 반쯤 뽑혀져 나왔던 검을 회수하고는 다만 두 눈에 불꽃을 이글거리며 커드란 남작을 노려볼 뿐이었다.
“미안하군.
기사단장이 워낙 제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라 말이야.
왕실과 국가에 해가 되는 자라고 판단되면 바로 검부터 뽑는 기사라서.”
“···어찌하여 빛의 교리를, 어찌하여 빛의 후예들을 적으로 돌리신 겁니까?”
“그들이 옳지 못 하니까.”
“그들은 옳습니다.
그래서 빛 입니다!
그들이 옳지 않았다면 왜 마족들과 싸우고, 빛의 교리라는 것을 만들어 수 백 년 동안 대륙을 위해서 봉사했겠습니까!”
“다들 원하는 것이 있기에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들이라고 다르지 않아.”
“여왕이시여!
이건 결국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신성 프러센도, 누디아도, 그리고 히스파냐의 사람들도 빛을 옳다 여기고 어둠을 그릇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제아무리 훌륭한 언변이라고 해도 그냥 악의 속삭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명분이 조금이라도 흐릿해지면 바로 등을 돌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커드란 남작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말대로, 천족들을 향해 창칼을 돌린 이 상황에서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명분에서 밀릴 경우 히스파냐는 여태까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던, 그리고 지금도 마음속에서 여전히 멀리 하고 있는 마족 추종자들.
즉 어둠을 따르는 무리들로 내몰릴 수 있었다.
지금이야 시온 클라우젠이 나서서, 그리고 모든 상황이 히스파냐에 완벽하게 이로운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왕국민들도 열광하며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하고 히스파냐가 신성 프러센의 거센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 그런 부분도 순식간에 깨어지고 여태까지의 확신은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의심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확실히,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군.”
“여왕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있다면, 왜 틀린 길을 고집하신 건지···.”
“다만 일리만 있을 뿐, 너무 편향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군.”
“예?”
“어찌하여 그대는 우리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당연한 의심 한 번을 하지 않는 것인가?
그대는 이 히스파냐의 사람이자 기사이고 귀족이 아니던가?
어찌하여 신성 프러센을, 빛의 후예들을 그것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들은···.”
“그 당연하다는 말을 너무나도 ‘당연히’ 하는 것.
그게 바로 문제라는 거다.”
바네사의 말에 커드란 남작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빛을 빛이라고 하고, 그들을 빛이라고 믿던 이들이 아직도 세상에 한 가득인데 왜 그들을 적으로 돌리고 싸우려고 하는가.
결국 그 미련한 짓이 마음 속 깊은 어느 곳에 의심을 품은 채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의 숨겨진 비수로 작용할 텐데.
지금이야 상황이 모호하니 간을 재고 있을 뿐, 언제든 여기가 불리해지면 바로 빛을 외치며 히스파냐를 악을 추종하는 무리들로 몰아갈 이들이 가득할 텐데!
“무엇을 걱정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나?
그대만 이 나라를 생각하는 게 아니야.
이 나라는, 이 히스파냐는 내가 다스리고 내가 책임져야 할 신성한 땅이다.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래서 어떻게 이 나라를 더 잘 굴러가게 만들 수 있을지는 신하인 그대가 생각하는 게 아니다.
히스파냐의 주인이자, 적법한 지배자이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왕실의 수장인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 괜한 헛짓으로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자.
그게 커드란 남작에 대한 바네사의 평이었다.
자기 자신은 무슨 좋은 뜻, 대단한 의지라도 지닌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건 한 나라의 심장인 수도 왕성에 외세를 끌어들여 혼란을 야기하고 그 틈에 속에서 약간의 갈등을 가지고 있던 자들을 흔들어 내부 분열을 조장하려는 것이었다.
커드란 남작은 그것으로 나라와 제 주인에 대한 충성으로 보이고, 그게 진정 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좋은 예시가 아주 차고 넘친다.
“어리석은 자여.
그렇게 해서 도대체 뭘 얻을 수 있다는 거냐.
아무 것도 모른 채 빛만 따르겠다는 건가?
그 빛이 비춰주는 길이 낭떠러지로 가는 길이라고 해도 따르겠다는 거냐?
이성을 가진 자로서 의심 한 번 가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는 게 옳은 것이냐?
딱한 자로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자라니, 참으로 딱한 자야.”
그리 말한 바네사 왕녀는 가볍게 손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얌전히 옆에 서있던 슈마허 기사단장이 재빠르게 여왕의 곁으로 다가온다.
직후 제 품에서 서신 하나를 내민 그는 그걸 공손하게 바네사에게 바쳤다.
“커드란 남작.
그대가 말했지.
옳지 않은 길을 왜 따르냐고.
그러면 역으로 내가 하나 묻지.
지금 이 길이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
그걸 결정하는 게 뭔가.”
“그야 당연히 빛···.”
“틀렸다.
여전히 그 편향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 하는구나.
이쪽 길이 밝고, 저쪽 길이 어둡다고 해서 갈라지는 게 아니다.
세상이 옳다고 하는 길이 옳은 것이다.
세상이 옳지 못 하다고 하는 길이 옳지 못 한 것이다.
제아무리 빛이 찬란하게 비춘다고 해도 세상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고, 어두컴컴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이라고 해도 세상이 그게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다.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툭―.
바네사는 슈마허 기사단장이 내어준 서신을 잠깐 흔들어 보이다가 그걸 커드란 남작이 있는 곳으로 가볍게 던져주었다.
서신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이내 커드란 남작의 앞에 툭, 하고 멈춰 선다.
“···?”
이게 무엇이냐고 묻는 듯 한 표정의 커드란 남작.
바네사는 주워서 어서 읽어보라는 듯 고갯짓을 해보였고, 그에 커드란은 잠시 그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앞으로 이동한 후 땅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서신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그 서신을 펼쳐서 안의 내용들을 읽기 시작했다.
“···?”
잠시 후, 그는 화들짝 놀라서는 이게 정말이냐는 듯 바네사를 쳐다본다.
그 눈에 놀람, 당황, 당혹감 등 온갖 감정이 뒤섞여있음을 알아차린 바네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결국 이건 우리 히스파냐의 외로운 싸움 아니냐고.
결국 우리들만 싸우다가 패하는 전쟁 아니냐고.
우리가 빛이든 저들이 빛이든 그런 건 상관없이, 그 끝에 살아남아서 대지 위에 서있는 자가 빛이고 정의며 선 아니냐고 말이다.”
불안해하는 자들, 의심하는 자들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 가장 우려하는 건 히스파냐가 오롯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신성 프러센이 얼마나 강한데, 비록 소수라고는 하나 전장에서 요정들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위력적인데, 그리고 천족들이 세상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그들과 힘으로 직접 부딪쳐 자신이 옳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이 땅에서 그들과 직접 싸우러 나아간 건 히스파냐의 병사들이 전부였다.
아직까지는 말이지.
그래, 아직까지는 말이다.”
바네사의 말을 들으며 커드란 남작은 몸을 떨며 서신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이게 정말이라면, 걱정이든 의심이든 뭔가를 가지고 있던 자들도 ‘설마.’ 가 ‘혹시?’ 로 바뀔 것이다.
그저 우리만 옳다고 외치는 줄 알았는데, 우리만 외롭게 싸우다가 전부 패하여 죽고 영원히 우매하고 멍청한 자들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 모든 것들이 빛의 후예가 빛의 후예임을 부정한다면, 어찌 되려나.”
바네사 여왕은 그렇게 속삭이며 이제 그만 되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서신을 쥔 채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커드란 남작에게 말했다.
“바른 일을 하고자 하는 자들은 응당 제 목숨까지 바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지.”
“···.”
“그대 역시 그런 준비가 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하마.”
여왕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직후 슈마허 기사단장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그녀를 호위하고, 잠시 뒤에 들어선 왕실 기사들이 커드란 남작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그는 별 다른 저항 없이 그들의 손에 이끌려 왕성으로 압송 당했다.
―
“릴!
샤!”
혼은 비명에 가까운 고성을 지르며 그들에게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껏 처리한 적들을 다른 적이 회수하도록 놔둘 김유현이 아니었다.
곧 혼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싸늘한 기운에 식겁을 하며 다급히 날개를 움직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날개는 물론이고 팔까지 잘려나갈 뻔한 상황.
도대체 이런 인간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왜 여태 자신들이 이런 강자에 대해서 조금도 모르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젠장!’
이를 악물며 당장이라도 저 가증스러운 죄인을 처단하고 싶었지만, 전투 면에서 자신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릴을 저렇게 몰아붙인 자라면 혼자서는 힘들다고 혼은 생각했다.
이곳 전선에 투입된 최상위 천족은 자신까지 더해서 셋.
그 정도면 어떤 실력자가 오든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머지 다섯 갈래의 빛은 남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에 주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전장에서 벌써 두 갈래의 빛이 바스러졌다.
더해서 자신까지 이 자리에서 스러진다면 다섯 갈래 밖에 남지 않게 된다.
전력 하나, 하나가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에 잠깐의 복수심에 휘말려 남은 아군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흠?”
김유현은 탄식에 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과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듯 거대한 마법 공격을 가한 천족이 그 틈을 이용하여 바람 같이 공중으로 치솟아 그대로 사라진 것이었다.
아군을 버리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저게 전력 보존에서는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김유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두 천족 여인이 추락한 곳, 하나는 분명히 죽었을 테고 다른 하나는 아직 살아있을 것 같으니 한 번 가볼까 생각한 김유현은 곧 인상을 찡그려야만 했다.
“으와아아!”
“죽여, 죽여!”
주변의 신성 프러센 병사들이 이제는 거의 실성한 것처럼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그저 한 줌 먼지에 불과한 자들, 검 한 번 휘두르면 전부 두 동강이 나서 스러질 자들이었지만 자신이 살인에 미친놈도 아니고 이 자리에 있는 수천 명, 아니 만 명이 넘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기에는 아주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사실이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김유현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곧 저 멀리서 한 번의 피바람이 불며 그대로 신성 프러센의 병사들이 완전히 휩쓸려나간다.
처참한 비명, 끔찍한 몰골, 그리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피 칠갑의 여인.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어?
나 엄청 기다린 거 알고 있지?”
“···.”
에카테리나가 너무나도 기뻐서 미치겠다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네가 왜 이 살육의 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싶었다, 라고 속으로 말하며 김유현은 슬쩍 주변을 가리켜보였다.
“참으라고 안 한다.”
“오오?”
“날뛰어.”
김유현의 허락 아닌 허락이 떨어지자, 에카테리나의 입이 흉악하게 찢어진다.
그 괴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백사병이 본격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작품 후기―――――――
주말 잘들 보내시고 계신가요!
전 김장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