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4)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4화(4/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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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으으···.”
엄청난 통증이 머리에서 느껴진다.
트레이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 자리에 주저앉아 왜 자신이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눈앞에서 싫다며 비명을 질러대던 미인, 그런 여인의 옷을 벗기던 자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무표정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어이.”
“공자님?”
쪼그려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온 때문에 화들짝 놀란 트레이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가 여전히 시온이 자리에 앉아있는 걸 확인하곤 그는 차마 제 작은 주인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한다, 실시.”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대답은 예, 아니오로만.
불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차가워 보이는 눈동자가 번뜩이며 빛을 발하자 트레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가 알던 시온과는 묘하게 다른 모습, 날카롭지만 그 예리함 끝에 냉정함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 도통 익숙하지가 않은 트레이였다.
“내가 이런 짓들을 몇 번이나 했지?”
“예?”
“여자를 데려와서 몹쓸 짓 하는 걸 몇 번이나 했냐고.”
“고, 공자님.
저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자꾸 반문하지 마라.
또 못 알아듣는 척 했다가는 바로 주둥이를 후려칠 테니까.”
평소와 비슷한 대사, 하지만 평소와 다른 분위기.
트레이는 마치 시온의 탈을 뒤집어쓴 또 다른 이가 자신의 앞에 서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 절대 해서는 안 될 불경한 생각이라며 스스로를 타박했다.
그게 그저 상상이 아니라 사실임을 모른 채 말이다.
“오, 오늘 일을 제외한다면 두 번, 아니 세 번으로 기억합니다.”
시부럴, 세 번이나?
트레이의 자백에 시온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한 번만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알려지면 귀족 세계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약점인데 두 번도 아니도 세 번씩이나 일을 저질렀다고?
‘니미럴 시부럴 팅팅부럴 새끼!’
이러니 동생과 나이 차가 많이 남에도 리히텐 클라우젠 변경백이 과연 시온에게 클라우젠의 이름을 맡겨도 될까 고민했겠지.
그러다가 시온의 협박에 못 이긴 동생이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고 도망치듯 영지를 떠나고서야 공식 후계자로 임명되었고 말이다.
“무, 물론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문제가 없었다?”
“예.
제가 손수 확인시켜드리니 몇 번 살펴보시고는 취향이 아니시라며 당장 꺼지라고 하셨습니다만···.”
슬슬 눈치를 보면서 말끝을 흐리는 트레이였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그를 타박하려던 시온은 자신의 그러니까 소설 속 시온의 변태 같은 취향이 정확히 떠올랐다.
또라이 기질이 심했던 시온은 여성 취향도 아주 확고했는데 키는 무조건 자신보다 작거나 비슷해야했고 피부는 희고 고와야했으며 다리가 늘씬해야 했고 손과 발이 작아야 하는 등··· 정말 너무나도 확고해서 그 모든 것을 다 확인하고서야 여인을 안을 정도였다.
즉, 트레이의 말은 여인들 몇을 몰래 잡아왔는데 그걸 심사해본 시온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며 대충 간만 보고 돌려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리지는 않았다는 건가?
하긴, 이놈의 변태적인 성벽이 제대로 터지기 시작한 건 김유현이 중앙으로 진출해서 귀족들과 왕궁의 온갖 관심을 받고 나서였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지만 이제 시온은 그저 소설 속 악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조그마한 실수 하나로 어떤 일이 얼마나 크게 번질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로 인해 사신 김유현과 다시 마주해서 그의 칼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시온 클라우젠이란 인물이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온 놈이 아니기에 적들도 알게 모르게 많을 확률이 높았고, 약점을 잡히는 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그의 목적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자.”
“네, 공자님.”
밤이 늦었다.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는 시온 클라우젠이라고 해도 늦은 시간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이 성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분명 변경백이 사병들을 풀어 제 아들을 찾을 것이 확실했다.
반파, 아니 완파가 난 지하실에서 막 벗어나려던 시온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더니 뒤를 돌아보곤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트레이에게 꽤나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트레이 경.
알죠?”
“예?”
“오늘 일도 원래 그러했듯 비밀입니다.
혹여 입을 놀리시면 그 때는 아주 재미있을 거예요.”
기억하기로 이 당시 시온의 지랄맞은 성격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그를 바로 곁에서 수행하던 트레이라고 알고 있다.
물론 그 트레이는 김유현에 의해 바로 초반부에서 퇴장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 그는 목숨을 잃지 않았고, 자신은 마음 놓고 부릴 수 있는 부하가 하나 정도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을··· 무조건 함구하겠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가 시온에게 약점 하나를 잡혀있다고 알고 있다.
그 부분을 잘 이용하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되리라.
―――――――――――
클라우젠 변경백령은 히스파냐 왕국의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띠고 있다.
때문에 일대의 모든 군사적 권한을 쥔 채 왕성의 명령을 받지 않고도 독단적으로 군을 조직하여 움직일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이웃 왕국인 누디아의 공격으로부터 히스파냐를 지켜야 하는 첫 번째 방어선을 맡아야 한다는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는 만큼의 권한을 준 것이었다.
때문에 백작이기는 하지만 그 명성이나 힘은 거의 후작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와.”
클라우젠 변경백의 성에 도달했을 때, 시온은 이곳이 이제는 자신의 집이라는 것조차 망각한 채 그 위용에 압도되어 연신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게임에서나 볼 법한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의 성이 아버지라는 남자의 것이며 언젠가는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온은 그저 살아남자, 라는 목표 외에 살아남는다면 변경백령에서 잘 먹고 잘 살아보자, 라는 또 다른 소박한 목표도 잡게 되었다.
“공자님!
왜이 리 늦으셨습니까!”
도개교를 지나 성문 너머 본성 안으로 들어섰고, 거대한 문을 지나 마침내 성 내부로 들어갔을 때 다급한 기색으로 가장 먼저 그를 맞이한 건 백발의 노인이었다.
구겨진 곳 하나 없는 깔끔한 정복에 자로 잰 듯 날카롭게까지 보이는 잘 정돈된 수염.
클라우젠 가(家)의 집사인 세바스찬이었다.
‘···아니, 잠깐만.
클라우젠 백작가의 집사, 세바스찬이라면···.’
지금이야 클라우젠 백작가의 집사이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백작가의 두 검 중 하나.
그 강하다는 김유현과도 전투 경험과 순간적인 판단, 그리고 초인적인 감각으로 대등하게 싸우던, 노인이라고 부르기조차 미안한 무시무시한 집사 양반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자신의 실력을 시온 클라우젠에게 보인 적은 없었고, 때문에 소설 속 시온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집사인 세바스찬이 그저 나이 좀 먹어서도 정정한 집사라고 알고 있었다.
“공자님.
이 늦은 시간까지 어디를 돌다 오신 겁니까.
다 늙은 노인이 심장마비로 죽는 꼴을 진정 보셔야겠습니까?
백작께서는 또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모르실 겁니다!”
다가오자마자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신의 손을 잡는 세바스찬.
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시온은 속으로 기막힌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다 늙은 노인은 무슨!
저 할아버지가 원래는 어디 소속이었더라?
무슨 기사단이었는데.
···맞아.
왕가 비밀 수호 기사단.
분명 거기 소속이었어.’
검선이라 불리던 김유현조차 감탄을 연발하게 만들었던 실력자다.
그 노인이 자신 앞에서 아무 힘없는, 그저 약하기만 한 집사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정말 시온의 속마음대로, 까고 앉아 있는 수준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김유현조차 어느 정도 애를 먹게 만들었던 괴물.
그의 눈 밖에 나는 멍청한 언행은 무조건 삼가고 싶었기에 시온은 가문의 공자로써 집사에게 보일 수 있는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그런 일이 좀 있었습니다, 세바스찬.
별 일 아니었으니 그렇게 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야말로 손님맞이하듯 영업용 미소 활짝 지으며 자신의 손을 잡은 노인의 주름진 손등을 쓰다듬어주는 시온이었다.
세바스찬은 그러면 다행이라며 변경백이 찾으니 어서 올라가보라는 말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시온은 트레이를 데리고 변경백의 집무실이 있을 성의 3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세바스찬.
하지만 이내 시온과 트레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 미소는 순식간에 거두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 나타난 건 싸늘하게 굳은 눈동자, 굳게 닫힌 입술, 매섭게 번뜩이는 안광이었다.
“세바스찬이라.”
지금의 시온은 모를 테지만, 원래 시온은 세바스찬을 절대 세바스찬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저 집사라고 부를 뿐이었으며 제 기분이 별로일 때에는 노인네라고 부를 정도였다.
존대를 하는 것도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을 나이만 먹은 노인이라고 강조하고 비웃기 위해서 하는 느낌이 강할 정도였다.
시온과 세바스찬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나온 적이 없고, 그저 작가의 설정집에만 적혀있는 부분이었기에 애독자라고 자신하는 이지훈이라고 해도 거기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신기하고, 수상하군.”
세바스찬의 입가에 아주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위층으로 사라진 시온의 발자취를 한 번 스윽, 훑어본 그는 끌끌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변경백의 집무실에 다다른 시온은 트레이에게 고갯짓을 해보였다.
이 정도면 되었으니 물러나라는 뜻에 트레이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보이곤 다시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후우.’
바로 이 너머에 시온 클라우젠의, 자신의 아버지인 리히텐 클라우젠 변경백이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와 한 나라의 백작이라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백작의 자리를 선택하고, 제 아들의 팔을 자른 원수를 중앙에 추천하여 그가 온갖 관심과 공을 독차지하도록 해주었다.
덕분에 그에 이를 갈던 아들에게 잔혹한 최후를 맞이한, 불쌍한 아버지이자 백작.
바로 그가 이 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똑―.
“들어 오거라.”
누구냐고 물을 만도 했지만 처음부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다는 듯,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안에서부터 들려왔다.
시온은 흐읍, 하고 숨을 들이 마쉬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변경백의 집무실은 거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절대자의 방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소탈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변경백이라는 호칭만 뺀다면 아들을 걱정하고 또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한 명의 아비가 앉아 있었다.
“앉거라.”
시온은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다음 떨어질 리히텐 변경백의 말을 기다리며 조심스레 그를 살폈다.
소설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시온과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인상을 지닌 남성.
젊었을 적에는 여인을 꽤나 울렸을 것 같은 외모는 중년 남성의 멋이 되어 여전히 자리에 남아있는 중이었다.
굵은 주름살이 패여 있는 이마는 그가 여태까지 겪어왔던 고뇌가 아로 새겨져 있는 듯 했고 볼에 새겨진 흉터는 그의 거칠고 험했던 전장 생활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었다.
“···.”
시온이 자리에 앉았지만 리히텐 변경백은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앞에 놓인 온갖 서류들을 확인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다.
그게 3분이 되고, 5분이 되고, 10분이 넘을 동안 두 부자(父子)는 그렇게 침묵 속에서 앉아있을 뿐이었다.
“시온 클라우젠.”
그 뒤로 몇 분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비로소 리히텐 변경백의 입이 열렸다.
시온은 다음 떨어질 말에 몸을 바로 하고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변경백의 다음 말에, 시온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시온 클라우젠.
여태까지 뭘 하다가 이 늦은 시간에 성으로 돌아온 것이더냐.”
“···.”
“혹, 백작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구나.”
그 먹칠이란 거 당신 아들이 거하게 하다가 덤으로 팔까지 잘릴 뻔 한 거 제가 사지 멀쩡히 구해내고 명예도 같이 구해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미친놈 소리를 들어도 모자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시온 개새끼, 시온 개새끼.’
즐거운 자아성찰의 시간도 아니고, 이게 무슨 개짓거리인지.
쉬지도 않고 쏟아지는 굵직한 사건들에 머리라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작가는 악역으로 빙의해서 살아남아보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뢰라고 불리는 시온의 몸뚱이에 빙의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그의 인생에 떨어진 최악의 난제였다.
[작품후기]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