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47)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47화(47/439)
47―――――
훌륭한 거래의 표본이로다
“국왕 전하.
세페르 카슈가르 백작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시종장의 말에 에드가 4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앞에 놓여있던, 다 식어버린 차가 들어있는 잔을 들어올렸다.
“자네 말이 전부 맞았군.”
에드가 4세의 말에 무척이나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묘령의 여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드니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뾰족한 귀가 드러났다.
“헬렌 하이네스.
하이네스 상단의 주인 되는 자.”
“네, 국왕 전하.”
“하나 묻지.
여태 카슈가르를 도와서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다가 왜 하필이면 거사 당일 날 그 내용 전부를 내게 고하겠다고 나선 겐가.”
국왕으로써도,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이상한 점이었다.
그 일을 강요받자마자, 혹은 준비 도중에 알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사건이 터지는 당일 날에 그 사실을 밝혔다는 말인가.
“이전까지는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제가 꽤나 커다란 상단의 주인이라고는 하나 결국 진짜 힘은 ‘무력’에서 오는 법입니다.
카슈가르 측에서 힘으로 찍어 누르니 아무리 저라고 해도 제대로 무엇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흐음.”
“그나마 마지막 날이 되자 감시가 조금 느슨해졌고, 거사 시간 전에 어떻게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렇게 전하께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자가 그 부분을 눈치 채곤 이렇게 일찍 일을 벌일 줄은···.”
손과 발이 꽁꽁 묶인 채 목에 칼까지 들이대져 있었다면 에드가 4세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빈틈을 발견하곤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것만으로도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헬렌 하이네스.
고생했네.
하지만 감사의 말은 전하지 않을 걸세.”
“···.”
“어찌 되었든 그대와 상단이 이번 일에 연루가 되었으니 말이야.
비록 강제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죄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목숨을 걸고 이렇게 알리러 온 공을 외면할 수도 없지.
하여 이번 일에 대해서 더는 그대와 상단에 죄를 묻지 않을 생각이네.
혹 내 처사가 부당하다고 여기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히스파냐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이런 끔찍한 일에 강제로나마 가담했다는 사실이 그저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에드가 4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단한 놈들이 카슈가르 백작가에 붙어있었군.
왕실을 공격하는게 아니라 귀족들을 습격해서 균열을 일으켜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무너트리겠다는 생각을 품었을 줄이야.”
“···습격자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대와 같은 요정 하나를 붙잡았고 나머지는 전부 사살했다고 하더군.
거참.
라이도, 그 노인장은 그런 무시무시한 청년을 언제 또 제자로 들인 것인지.”
시온이 미리 왕궁으로 들여보낸 루시아와 김유현이었다.
그리고 김유현은 언질을 받고서 이미 파티장으로 가는 길목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단순히 발목을 잡는 용도가 아니라, 아예 발목을 죄다 잘라버리고는 기어다니게 만들 수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자가 말이다.
“헬렌 하이네스.
혹 카슈가르 백작가가 왜 이번 일에 가담을 했는지, 정체불명의 세력들이 왕국을 분열시키려는 음모에 어떤 이유로 끼어든 것인지 혹 아는게 있나 묻고 싶군.”
“···정확히는 알지 못 합니다.”
“그런가.”
“대신 카슈가르 백작가에 방문할 때마다 그가 뭔가를 숨기려고 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확인한 부분입니다.”
노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 라는 포괄적이고 두루뭉술한 대답만을 할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애초에 이미 카슈가르를 쳐내기로 결정한 국왕에게 너무 상세한 정보는 의심을 사게 만들 수도 있는 부분이라는 점을 헬렌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고생했네.
오늘 하루는 왕궁에 방 하나를 내줄 터이니 잠시 그곳에서 머무르게.”
“감사합니다, 국왕 전하.”
혹시 있을지 모를 암살자에게서 보호해주겠다는 에드가 4세의 말을 바로 이해한 헬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물러나려는 찰나, 에드가 4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헬렌 하이네스.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는가?”
“하문하시길.”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어도 되었을 텐데, 왜 이번 일을 발설하기로 결정했지?”
그 질문에 헬렌은 자신의 복수 때문이었다고 말을 하려다가 관두기로 했다.
자신의 과거를 남에게 밝히는 건 정말이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에게 꽤나 괜찮은 거래를 성사시켜준 남자에게 선물 하나를 해주기로 결심했다.
“시온 클라우젠 공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음?”
“이틀 전 파티장에서 있었던 그 연설 말입니다.
자신은 그저 영웅의 옆에서 함께 싸웠을 뿐이라는, 이 나라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저 먼 곳에서 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기리던 시온 공자의 말을 전해 듣고는 무슨 짓을 하나 싶었습니다.
비록 하는 일이라곤 장사밖에 없는 저라고 하지만, 그들이 힘겹게 지키는 이 나라가 망가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헬렌의 말에 에드가 4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흘러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 하고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세페르 카슈가르 때문에 그동안 시온 클라우젠이 애써 숨겨오던 사실이 드러났다는 소식이 다시금 떠오른 것이었다.
‘마나를 전혀 다루지 못 한다.’
성벽 안에 부착되어 있던 마나 폭탄을 점화시킨 장치는 그 소지자가 마나를 주입하여 작동하는 원리였다.
만약 다른 이가 세페르와 함께 동행 했었다면 그도 같이 의심을 받았을 테지만, 애초에 마나를 전혀 다루지 못 하는 시온 클라우젠이 미쳤다고 그 장치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폭발의 여파로 부상을 입었다고 하니 그게 걱정이군.’
리히텐 클라우젠 변경백은 수 십년의 세월동안 자신의 등 뒤를 묵묵히 지켜준 충신.
그리고 그 아들인 시온 클라우젠은 이제 갓 성인이 된 나이에 믿을 수 없는 전공을 세웠다.
자신의 뒤를 이을 다음 군주에게 든든한 우군이 될 인물이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하마터면 전쟁 영웅을 축하하기 위해 연 파티에서 그 영웅을 잃을 뻔 했다.
“전하.
시온 클라우젠 공자가 당도했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에드가 4세는 안으로 들이라 답했다.
잠시 후, 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안색의 시온이 들어오자 그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세페르의 악랄한 수 때문에 폭발에 휘말린 그가 엉망이 된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흘러 넘칠 지경이었다.
“괜찮은가, 시온 공자?”
“별 것 아닙니다.
그보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냥 세페르 백작의 호의인 줄 알고 마차에 탄 것인데 갑자기 휘말리게 되어서···.”
원래라면 시온도 당연히 수사 대상에 들어가야 한다.
자의든 타의든 일단 세페르와 함께 마차 안에 있었고, 그의 말대로 점화장치를 시온이 내어준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봐도 그럴 가능성은 낮다 못해 거의 제로에 육박할 정도였다.
애초에 그는 왕성에는 몇 년 동안 오지 않다가 이제야 한 번 얼굴을 비쳤을 뿐이다.
그에 더해서 시온은 히스파냐를 위해 최전선에 누디아와 전투를 치렀으며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는데 왜 그런 그가 갑자기 왕궁을 공격하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겠는가.
그보다는 차라리 무언가 켕겨서 숨기는 것이 있다는 증언이 나온 카슈가르 백작가가 몇 억 배는 더 수상해보이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콜록, 콜록!
아, 죄송합니다.”
평소에는 수려하기만 하던 외모가, 갑작스레 병약미 돋보이는 청년으로 전환되었다.
보는 사람의 동정심을, 그리고 여인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모습은 어느 누구라도 감히 그를 이번 사건에서 용의자로 지목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부왕 전하!”
갑자기 문이 열리고, 바네사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무척이나 바쁘게 걸음을 했는지,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연신 거친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것이 도리다, 바네사 왕녀.”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러다 말고 시온이 자리해 있는 것을 확인한 바네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성벽이 허물어져 내리는 폭발의 여파 한가운데에 시온 클라우젠이 휩쓸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했던 그녀였다.
혹 그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지?
세페르 카슈가르,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이라고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붓던 바네사는 시온이 궁으로 들어와서 현재 국왕의 집무실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시온 클라우젠 공자.
괜찮··· 습니까?”
혹 자신의 속마음이 다 드러날까 바네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그에 시온은 상당히 힘겨워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왕녀님.”
아아.
시온의 대답에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 그렇게도 당당하던 청년이 지금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병약해 보였다.
폭발의 여파에 휘말린 것도 이유였지만, 세페르의 마수 때문에 갑작스레 드러난 그의 약점 때문이기도 했다.
‘마나를 전혀 다루지 못 한다니.
그런 최악의 성질을 다른 이도 아니고 시온 공자가···.’
하늘이 참으로 무심하다고, 신이 있다면 너무 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은 왕녀였다.
시골의 여느 평범한 평민도, 귀족도 아니고 자그마치 변경을 책임지는 변경백령의 유력한 후계자가 마나 감응력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거의 모든 이들이 기초적인 마나 활용이 되는 세상에서 마나를 다루지 못 한다는 건 치명적인 약점이자 난관이었고 명확한 한계였다.
그렇다고 해서 시온 클라우젠이 마나 활용이 필수적인 기사나 마법사는 아니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숨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마나를 쓰지 못함에도 무리없이 전쟁에 나섰고 공을 세웠으며, 귀족으로써 해야 할 일을 전부 수행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망할 놈의,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의 세페르 카슈가르 때문에 그걸 만천하에 밝히게 되었다.
이제 히스파냐의 모든 이들은 물론이고, 타국의 이들까지도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시온 클라우젠이 마나를 결코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전부 알게 되었다.
“시온 공자.”
“네, 왕녀님.”
“···히, 힘내세요.”
“예?”
잠시 왕녀의 말에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시온은 이내 미소를 짓곤 고개를 숙였다.
불미스러운 일에 얽히게 된 점, 그리고 그 외의 일들을 사과하듯이.
그 반응에 바네사는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오히려 사과해야 할 쪽은 자신인데, 그리고 왕국 전체인데.
“국왕 전하.
이 여성분이 기사들이 말하던 하이네스 상단주인 겁니까?”
바네사가 혼자서 사죄의 시간을 갖는 동안 시온은 앞에 앉아있는 헬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치 소문만으로 듣던 이를 처음 만난 것 같은 반응.
덕분에 헬렌 하이네스는 속으로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나보다 더 한 남자.’
자신은 한 남자의 죽음을 위해 준비를 해왔다.
상단을 세우고, 여러 귀족들의 신뢰를 얻으며 나중에 카슈가르 백작가를 묶을 올가미를 조금씩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저 귀족 청년은 단 며칠 만에 모든 것을 끝내버렸다.
마치 모든 것을 제 손바닥 안에 놓아두고 지켜보다가 일을 실행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확신이 있었고 그의 예측에 따라 일이 흘러갔으며 아주 당당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다녔다.
‘너무 자세한 정보는 주지 말고.’
‘그러면 역으로 의심을 받지 않겠습니까?’
‘원래 권력판에서 너무 상세히 알고 있는 놈, 자세히 말하는 놈들은 두루뭉술하게 하는 놈보다 훨씬 더 많은 의심을 받기 마련이야.
난 적당히 알고 적당히 모른다는 제스쳐를 취해야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주기 마련이지.
이건 진범을 찾는 ‘수사’ 가 아니라, 방해꾼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쇼’ 일 뿐이야.
그 점을 잘 알아두도록 해.’
이제 겨우 스무 살의 청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하는 말이나 행동은 마치 세상 전부를 겪어본 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부터 모든 일의 결말을 알고 있고, 그걸 마치 제 맘대로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겨질 정도인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 뒤로 치우는 헬렌이었다.
“끄응···.”
한편, 시온은 몸이 불편하다는 듯 살짝 눈을 찌푸리곤 팔을 만지작거렸다.
그럴 때마다 바네사는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고 에드가 4세는 침음을 내뱉었다.
‘아이고, 아파라.
여기요, 날 좀 보소―.
날 좀 보오오소오오오―.’
사실 몸에는 아무런 이상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폭발에 휘말렸다면 또 모를까, 이미 사건의 흐름은 전부 알고 있었으니 몸이 대비를 하고 있었고, 릴리트에게 미약하다지만 쉴드까지 받고 온 상태였다.
그냥 바닥에 엎어져서 일부러 바닥을 좀 구른 것이 다인 상황.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최악의 악당에 의해 약점까지 스스로 밝힐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청년으로 보일 뿐이었다.
‘외모는 속임수라지만,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으니 그걸 속임수라고 하는 법.’
그에 더해서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자제라는 점, 전쟁 영웅, 이틀 전에는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며 화합과 왕국의 안녕을 기원하던 이라는 부분까지.
이 시점에서 ‘그래도 혹시 시온 클라우젠이 그런 짓을 꾸미지 않았을까···.’ 라고 말하는 놈은 당장에 역적으로 분류되어 대갈통이 다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걸로 카슈가르는 아웃.
그리고···.’
시온이 굳이 카슈가르를 이렇게 폭사시킨 이유는 또 있었다.
대귀족 가문인 카슈가르가 몇 년 전부터 꽤나 친근하게 굴면서 교류를 넓히던 상대가 있었다.
그 상대는 바로 에라더 라곤 히스파냐.
히스파냐의 제 1왕자이자 차기 국왕으로 가장 유력하던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