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5)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5화(5/439)
<―>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잡아뗄까?
표정 연기 좀 하고 목소리도 낮게 깔고 하면 변경백도 그 정성을 봐서 대충 넘어가 줄···.
‘턱이 있나.
지금 이 본체는 전두엽 터진 수준인데.’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남자다.
그래서 끝내 제 아들보다는 김유현을 선택했고, 그래서 끝내 제 아들에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이미 시온 클라우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대충 예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오늘 일은 잘 모른다고 해도 다른 때에 시온의 뒤에 은밀하게 사람을 붙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게 되면 제 아들이 여인들을 강제로 데리고 와서 망측한 짓을 벌이려고 했다는 것 정도는 변경백이 아주 훤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쭙잖은 수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김유현과 루시아를 납득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도 야부리를 잘 털어서 만족하고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강구해야만 했다.
‘진짜 이승탈출 좀 막아보겠다고 하다가 뇌 정지 오겠네.’
1:1 면접을 연속으로 두 번, 세 번 보는 느낌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취업을 걸고 하는 면접이 아니라 생사여탈권을 두고 하는 면접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
시온의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오자 순간 리히텐 변경백의 눈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 변화를 미처 눈치 채지 못 한 시온은 제 말을 이어나갔다.
“다 알고 계시리라 믿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제 직속 시녀들을 직접 제 손으로 뽑기 위해 과한 방식을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직속 시녀들?”
“예.”
참고로 소설 속 세계관에서 시녀라는 존재는 그저 노예처럼 부리는 그런 존재가 결코 아니다.
귀족들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온갖 일을 해야 하는 ‘전문직’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귀족들 또한 아무 이들에게나 맡기는 일이 아니었다.
혹자는 밤 시중까지 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지만 그랬다가 아이라도 생기면 귀족 입장에서는 골 때리는 일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귀족 세계에서 큰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어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있어 시녀라는 존재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프로들’ 와 같았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당당한 이들에게 시녀의 자리를 권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말로만 보이는 당당함이 아니라 행동에서 나오는, 원래 가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자 했었습니다.”
“···.”
리히텐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제 아들의 약간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찌 반응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원래 시녀를 뽑는 일은 시녀장이 맡으며 최종 결재는 가주가 하게 되어 있다.
다만 직속 시녀라고 해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종사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업무 능력과 심성 등을 증명하여 시녀장의 추천 없이 바로 시녀 업무를 하는 경우였다.
다만 직속 시녀는 아무나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주나 혹은 그 가문의 후계자 같은 유력한 이만이 둘 수 있는 자리였다.
“직속 시녀를 뽑기 위해 여인들을 강제로 끌고 와서 힘으로 겁탈하려 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것이냐?
그 말이 심히 거슬리고 경우에도 맞지 않는 것 같구나.”
역시 알고 있었네.
잡아뗐으면 좆 될 뻔 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시온은 리히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 잘못은 확실히 알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후 그들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원한다면 직속 시녀로 임명할 생각이며 그렇지 않다면 충분한 보상을 할 생각입니다.
물론 제 직접적인 사과도 함께 말입니다.
‘클라우젠 변경백령의 후계자’ 로서 말이죠.”
직속 시녀를 임명하겠다는 말, 그리고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하겠다는 말.
모두가 자신을 이 변경백령의 후계자라고 강조하는 듯 한 내용들이었다.
덕분에 리히텐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어야만 했다.
여태까지 시온은 단 한 번도 자신이 후계자임을 자신 앞에서 강조하지 않았었다.
겸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건 당연히 자신의 것이 아니냐는 특권 의식에서 나오는 언행이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내어줄 것이 아니냐며 받아먹을 준비는 다 되어 있다고 자신만 바라보는 시온의 눈길에 리히텐은 절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던 적이 많았다.
아들이 자기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비록 배다른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경쟁자가 있음에도 저리 방심하고 있는 모습은 썩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헌데 갑자기 후계자 자리를 논하며 그에 따르는 특권과 의무를 말하고 있다, 라.’
이건 그냥 멍청하게 백작 자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후계 경쟁에 나서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갑작스럽지만··· 동시에 다행이기도 하구나.’
20살이 되도록 여태 단 한 번도 변경백령의 후계자다운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시온이다.
비록 그 시작이 상당히 거슬리고 마음에도 들지 않지만, 정말 여인을 겁탈하지는 않았고 직속 시녀로 임명할 생각이며 거부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사과를 한다고 하니 일단은 엄한 경고를 날리는 것으로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다고 결심한 리히텐 변경백이었다.
“시온 클라우젠.”
“네, 아버지.”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을 벌이지 말거라.
이건 네 아비로써 하는 경고이자 또한 이 영지의 주인으로써 하는 경고이다.
한 번만 더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짓을 했다가는 내 직접 너를 크게 벌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현대인의 기준에서 함부로 여인을 건드렸다는 이번 일은 경고 수준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기에 순순히 리히텐 변경백의 말을 받아들이는 시온이었다.
물론 리히텐 변경백은 제 아들이 별 불만 없이 바로 수긍하자 속으로 당황했지만 말이다.
헛기침을 한 번 한 그는 제 아들에게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 직속 시녀는 총 넷을 들일 생각인 게냐?”
“아닙니다.
셋입니다.”
“오늘도 그 이상한 짓을 하려고 나갔던 거 아니더냐?”
“그건···.”
라이도의 딸인 루시아와 만나 잠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는 답을 하려던 찰나.
시온은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뭔가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잠깐만.
이 당시의 시온이 루시아가 라이도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
아까 루시아를 달랠 때야 워낙 급해서 경황이 없었지만, 마음이 진정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등골이 절로 서늘해지는 시온이었다.
이때 라이도가 변경백령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리히텐 변경백이 유일했다.
원래 궁정마법사였던 그가 갑작스레 수도 왕성에서 떠나 비밀리에 외지로 흘러들어왔고, 그걸 숨겨준 이가 바로 리히텐 변경백이었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리히텐 변경백이 다른 이들에게 비밀을 떠벌릴 정도로 입이 가볍거나 뇌가 비어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라이도의 이름도 모르고, 그의 정체도 모른 채 그저 괴짜 마법사, 혹은 엉터리 소문의 현자라고만 그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영지 일은 물론이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 좆도 없던 아들이라는 빌어 처먹을 새끼가 라이도의 이름과 정체도 알고 있고, 그 딸까지 전부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 새끼 누구냐며 해부를 당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확실히 의심은 받을 만한 상황이다.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비밀을 영리한 놈도 아니고 병신 같은 애새끼가 알고 있다고 하면 어느 누구라도 의심 짙은 눈초리를 보낼 것이 확실하다.
‘아니, 잠깐.
시발, 잠깐만?
나 분명···.’
분명 루시아에게 라이도의 이름을 언급했었다.
홀연히 사라졌던 전(前) 궁정마법사인, 변경백 외에는 알고 있을 이가 없는 그 남자의 정체를 그 아들 새끼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 부르고 자빠졌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던 시온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거야, 라는 가사가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마치 어딘가에서 또 다른 괴물이 두 눈을 번뜩이며 입맛을 다신 채 자신에게로 똑바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네, 아버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루시아.
그녀의 말에 중년의 막바지에 다다른, 이제는 정말 노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남성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유현은 슬쩍 나서서 두 부녀(父女)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스승님.
혹시 스승님의 정체나 행선지를 변경백이 아닌 다른 이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날 뭐로 보는 거냐.
일처리도 제대로 못 하는 치매 걸린 노인네일까?”
“그건 아닙니다.”
“하다못해 왕궁의 대부분 이들도 내가 이곳으로 왔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해봤자 국왕이나 그 변변찮은 왕자 새끼, 그 외에 몇몇 머머리 대신들만이 알고 있지.”
“허면 리히텐 변경백이 아들에게 혹 말실수라도 한 건···.”
김유현의 의심은 꽤나 합당한 것이었지만, 남성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리히텐은 결코 그럴 녀석이 아니다.
심지어 제 명예를 걸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조까지 했어.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차라리 혀를 깨물고 뒈질 놈이지, 내 정체에 대해 발설할 놈은 결코 아니다.
물론 아들 사랑이 지극하다곤 하지만 앞뒤 분간도 하지 못 하고 천방지축 날뛰는, 극심한 정신 지체 장애가 있는 부모 새끼들은 또 아니란 말이지.”
낄낄거리며 찻잔을 입가에 대는 남성.
하지만 곧 그는 귀에 내리꽂힌 벼락 한 줄기에 식겁하고 말았다.
“아버지!”
“푸헙!
뭐, 뭐니, 루시아?”
“제발 그 말버릇 좀 어떻게 하시면 안 되나요?”
“말버릇?”
“궁정 마법사까지 하셨던 분이 언제까지 그런 상스러운 말을 하실 생각인가요!”
“아니, 이건 그냥 어쩔 수 없는 버릇···.”
씨알도 안 먹히는 궤변이었다.
루시아가 도끼눈을 뜬 채 사납게 눈을 부라리자 전(前) 궁정 마법사인 라이도는 깨갱하고 꼬리를 내린 채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해야만 했다.
그 반응에 한숨을 내뱉은 루시아는 제발 부탁이니 나잇값 좀 하시라며 한바탕 잔소리 폭풍을 퍼붓고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더니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
“···.”
찾아온 침묵에 두 남자는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 갱승 당한 정글러 수준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아무튼, 내 이름을 언급한 놈과 우리 루시아를 건드렸던 개새끼의 주인되는 놈이 동일인물이다?
그리고 그 동일인물이 바로 리히텐의 아들 놈이고?”
“그렇습니다.”
“흠.”
라이도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제 딸에게 험한 짓을 했다는 기사 놈의 사지를 뽑아버리고 그 주인이라는 놈도 손 좀 봐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루시아가 이미 제 아버지에게 단단히 경고를 해둔 상황이었다.
혹 시온 공자님께 해코지를 하신다면 그 때는 정말 아버지랑 말 한 마디도 안 할 거예요!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과 함께 말이다.
결국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물러선 루시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이도가 이번 일에 대해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루시아를 건드린 것도 문제이지만, 리히텐 만이 알고 있어야 할 내 정체를 마치 잘 알고 있다는 듯 루시아에게 직접 내 이름을 언급했다라···.’
백작가의 주인, 리히텐 클라우젠.
라이도와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가까운 형, 동생 사이로 그가 한 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꽉 막힌 놈이라는 걸 라이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가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의 정체를 떠벌렸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운 수준이 아니라 그냥 제로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하나, 그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녀석이 내 정체를 알아냈다는 것인데.’
세상일에는 관심을 끄고 산다고 하지만 자신도 나름 중앙 정계에 발을 담그고 있던 남자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백작가의 장자인 시온은 유력한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는 짓이나 내뱉는 언사 등이 영 젬병이라고 했다.
오죽하면 이제 겨우 5살이 된 이복동생에게 후계자 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개소리까지 나돌고 있을까.
시온의 나이가 벌써 스무 살, 진작 후계자로 낙점되고도 남았을 나이임에도 여전히 리히텐이 후계자 지명을 꺼리고 있는 걸 보면 말하는 것조차 피곤한 상황이 뻔했다.
‘그런 녀석이 이 몸의 정체를 알아냈다?’
순간 라이도의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리히텐이 변경백의 의무에 충실하느라 미처 자식 농사를 제대로 하지 못 해 평생 농사를 망친 줄 알았는데, 비밀리에 땅 속으로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피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 번 가봐야겠다.”
“스승님.
루시아가 이 일을 알면···.”
“걱정 마라.
이상한 짓 하려는 게 아니라 구경 좀 할 생각이니까.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기에 이리도 상큼발랄하고 괘씸한 짓을 제 아비 몰래 하는 지 말이다.”
가문의 여러 가신들은 물론이고 그 리히텐마저 속이면서 제 본 모습을 감춘 녀석이다.
이런 대단한 애새끼가 바로 근처에 있다는데 찾아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남근에 종기가 생길 것 같은 라이도였다.
‘그리고.’
그리고 대체 어떤 놈이기에 제 딸아이의 마음을 홀라당 훔쳐 먹었는지, 그것도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