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51)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51화(51/439)
51―――――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탄산과 탄산과 탄산 뿐이다
이른 새벽.
아직 해도 제대로 채 뜨지 않아 어둑어둑한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맨발로 살금살금 소리를 죽여 걸음을 딛고 있었다.
빛이 제대로 들지 않아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매끄러운 종아리와 탄탄하면서도 유려한 선을 그리는 허벅지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애매한 곳이 찢어진 하의는 대충 말아서 손에 든 채, 대충 옷을 걸친 채 문고리를 잡은 후 혹 누군가가 깰까봐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
그러다 말고 잠깐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무척이나 따스한 기운이 가득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던 여인은 복도로 나서고는 혹 소리가 들릴까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달칵―.
이 정도면 깨지 않으셨겠지.
하고 막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안녕.”
“···?”
순간 검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어제 밤 자신은 비무장으로 시온의 방에 들어갔었다.
당연히 허리춤에 검 따위가 매여져 있을 리는 없었고, 리시키다는 반사적으로 이 방으로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 하게 하겠다는 듯 앞을 막아섰다.
여차하면 제 목숨이라도 던져서 안의 남자를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걱정 마.
내가 미쳤다고 ‘내 남자’ 를 해칠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리시키다는 적의는 거둔 채, 하지만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여전히 경계심은 유지한 채 상대방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좋은 아침.
아, 좋은 새벽인가?
리시.”
“···릴리트님.”
“어머.
뭐 좋은 일 있었니?
리시 얼굴이 엄청 좋아 보이는데?”
그 말에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매만지는 리시키다.
그러다가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니 발갛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척을 해본다.
하지만 상대는 서큐버스 퀸, 심지어 방 안의 남자와는 예속의 계약까지 한 여인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남녀 간의 관계에서만큼은 어느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존재다.
“리시.”
“네.
릴리트님.”
“시온은 분명 신기하고 알 수 없는 오묘한 면을 지닌 남자야.
그렇지?”
“그, 그렇습니다.”
“그리고 묘하게 여자들을 잡아끄는 매력도 있고.
외모만 반반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게 이리도 여인들 마음을 잘 알고 대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발 더듬지 말라고 제 혀와 입을 타박하는 리시키다였다.
하지만 기사의 인생을 살면서 거짓말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기에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장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이 양심이 쿡쿡 찔리는데, 릴리트가 비록 마족이라곤 하지만 내심 그녀가 시온의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리시키다였다.
그런데 이 상황은 마치 그의 부하이자 기사인 자신이 릴리트의 자리를 몰래 빼앗고 독차치한 것 같아 리시키다는 갑자기 차오르는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걱정 마렴.”
“네, 네?”
“어차피 이럴 거라고 예상했어.
뭐,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다른 여자였지만.
아무튼 조만간 시온의 품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안길 거라고는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는 말이야.”
릴리트는 어깨를 으쓱이곤 리시키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얼굴을 쑥, 들이밀더니 이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으으, 시온 냄새가 진하다 못해 아주 깊이 배인 수준이네.
도대체 얼마나 진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거니?
이런 향은 그저 몸만 섞었다고 해서 날 수가 없는 냄새인데.”
“저, 저는 그저···.”
“쉿.
설명 안 해도 된단다.
여자 마음은 내가 더 잘 알거든.
걱정 마렴.
난 네가 시온과 이어졌다고 해서 딱히 타박할 생각도, 꺼지라고 협박할 생각도 없어.
오히려 언제쯤 시온 곁에 다른 여자가 생길까 내심 궁금하던 참이었다고 할까.”
흥흥거리며 가벼운 콧노래를 부르던 릴리트.
하지만 눈동자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차가운 빛이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리시키다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성을 지닌 생물은 결국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기 마련이지.
난 그걸 뭐라고 하지 않아.
애초에 나도 이성보다는 본능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편이니까.
당연한 거야.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지.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네.”
“그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릴리트가 미소를 짓곤 리시키다를 바라본다.
붉은 루비 같은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새빨간 빛을 번뜩이며 기세를 내뿜었다.
“독점하려고 들지는 말라는 거야.
그리고 첫 번째는 항상 나라는 거.
이 둘만 명심해주면 될 것 같아.
그러면 우리 둘 모두 아주 친한 언니 동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독점하지 말라는 건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첫 번째 라는 것인지.
리시키다는 그 의미들을 단박에 눈치 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렇게 시온과 함께 잠자리를 가진 것조차 꿈이 아닐까 생각하던 그녀였다.
독점하겠다는 마음은 결코 지니지 않았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그의 기사이자 부하로 남을 생각이었다.
‘무, 물론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여, 여인으로 잠시 있는 거고···.’
지난밤에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가랑이 사이가 간질거렸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는 남자의 품을 비집고 들어가서는 그 품에 제 몸을 맡기고 싶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강렬한 유혹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고개를 내저어 그것들을 떨쳐냈다.
어차피 시온은 언제든지 네가 원하는 때에 여인으로 변해도 된다고 했다.
그러니 이 이상 불필요하게 뜨거워질 필요도, 조급해 할 이유도 없었다.
“그,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슬슬 아침 수련 시간인 터라···.”
“아아, 알겠어.
오늘 하루도 힘내렴.
리시.”
그렇게 복도 끝으로 멀어져가는 리시키다를 바라보며, 릴리트는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네.’
리시키다에게 미약하게나마 열기를 불어넣었던 그녀는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보통의 여인, 특히나 얼마 전까지 남자와 관계를 가졌던 여인이었다면 자신이 보낸 열기에 버티지 못 하고 다시 남자의 곁으로 달려가거나 그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수음(手淫) 이라도 했을 텐데, 이 여기사는 그걸 용케 버텨냈다.
‘시온 녀석.
아무튼 사람 보는 눈은 끝내준다니까?’
루시아도 그렇고, 리시키다도 그렇고.
다들 꽤나 전도유망한 실력자들이었다.
거기에 요즘 들어서 또 그를 묘한 눈길로 쳐다보는 왕녀나, 요정 혼혈까지.
‘에휴.
내 팔자야.
그저 그런 남자한테 붙잡혀서 매일 같이 범해질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많은 여자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불쌍한 서큐버스가 될 줄이야.’
몽마의 여왕이라는 자신의 체면이 참 말도 아니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경쟁자가 늘어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쟁취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릴리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걸어가서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미처 안의 남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방문을 열어버렸다.
“게엑!”
쿠당탕!
덕분에 문 바로 뒤에 귀를 붙이고 바깥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시온은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깔깔대던 릴리트는 방문을 닫고서는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들의 대화를 엿듣다니.
이건 신사가 할 짓이 아니잖아, 시온?”
“아, 아니.
그게 말입니다.”
“안이고 밖이고.
그보다 저 여기사, 귀엽더라.
진짜 강아지 보는 느낌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낑낑대는 모습이 안쓰럽더라고요.”
“그래서 어제 밤새도록 리시를 안은 거야?
툭 하면 부러질 것 같다.
뭐, 그건 인정해.
당장 어제 밤에 네가 안아주지 않았다면 쟤 엄청 힘들어 했을 거야.”
시온의 말이 맞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릴리트.
하지만 그런 서큐버스의 두 눈동자는 붉은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혹시나 오해할까 미리 말해둘게.
난 질투 안 해.
그런 건 너무 찌질해 보이잖아?
애초에 이런 반반한 외모에, 비상한 잔머리에, 절로 상대의 기를 죽이는 범상치 않은 말재주까지 겸비한 남자를 어느 여자가 가만히 놔두려고 할까.”
“아하하···.
칭찬 아주 감사합니다.
그런데, 릴리트님?”
“응?”
“왜 제 바지를 붙잡고 계시는 건지···.”
시온의 질문에 릴리트는 ‘당연한 거 아냐?’ 라고 반문해마 제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고혹적이었으며, 동시에 엄청난 색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덕분에 눈치 없이 자신의 똘똘이가 벌떡 일어서자 급히 가리려는 시온.
하지만 릴리트는 그런 남자의 두 손을 잡아채곤 고개를 저었다.
“다른 여자한테는 실컷 싸고 나한테는 안 주겠다는 거니?
이러면 이 누나 좀 실망인데.”
“저, 어제 밤에 많이 해서요.
상당히 피곤한데 일단 더 자고 오늘 밤에 다시 오시는 게···.”
“응.
싫어.
나 배고파.
지금 싸줘.”
그렇게 말하며 시온을 잡아끌어서는 침대로 끌고 가는 릴리트였다.
‘와.
이거 또 잔뜩 빨리겠네.’
아무래도 정력에 좋은 뭔가를 더 챙겨 먹거나, 하다못해 체력 관리라도 이제부터 제대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시온이었다.
복상사는 그의 계획 어디에도 없는 결말이었으니까 말이다.
―
“···공자님.”
“···.”
“시온 클라우젠 공자님.
혹시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아, 아니.
전혀.”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왕성에서 왔다는 이는 에드가 4세의 전언을 전하기 전, 안부부터 물어왔다.
그럴 만한 것이, 현재 시온은 눈에 띄게 피골이 상접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와···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도 드리고 용돈까지 받은 수준이었다.
복상사 당하는 것이 한 때는 남자가 맞이하는 가장 괜찮은 최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미치도록 병신 같아지는 시온이었다.
어떻게 죽든 결국 죽는 건 다 최악이었다.
“그보다 정말인가?
파티를 오늘 밤부터 다시 열겠다는 국왕 전하의 뜻이?”
“그렇습니다.
주변 여러 사람들이, 심지어 왕자 저하도 말리셨지만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흠.”
“해서 오늘 저녁부터 다시 파티를 재개하시겠답니다.
다만 남은 귀족들에게는 강제하지 않을 것이니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는 그리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왕궁에서 나온 이는 다른 귀족 별장으로 이동했다.
시온은 자리에 앉아서는 어떻게 할지 고민에 빠졌다.
‘원래는 이렇게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제 가문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여기서부터는 완벽하게 소설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이대로 클라우젠으로 돌아가서 계획대로 움직이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왕성에 조금 더 남아서 이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야 할까.
‘클라우젠으로 돌아가는 일수까지 생각하면 지미 페이커의 부상도 많이 나아서 거동을 할 수 있을 텐데.
만약 그놈이 혼자서 돌아가면 트리샤를 만나러 가는 것이 상당히 부자연스럽고.’
그렇다고 국왕이 직접 파티를 재개하겠다고 했는데 명색이 그 주인공인 자신이 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상당히 그림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왕자도 반대했다는데, 정작 바네사 왕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둘 중 하나.
왕녀는 딱히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던가 아니면 역으로 파티를 다시 이어가자고 요청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왕녀의 편에 섰다는 확실한 모습을 주기 위해서는 파티에 나가는 편이 좋겠는데.’
지미 페이커에게는 이미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을 해두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그를 붙잡고 있으라고 동료 병사들이나 기사들에게도 언질을 슬쩍 했다.
무엇보다 생명의 은인이자 클라우젠 백작가의 장자가 그렇게 말했는데, 어떤 병사가 그걸 쌩까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을 끝낸 시온은 오늘 저녁 왕실 파티에 다시 나서기로 했다.
국왕의 뜻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고, 기껏 가까워진 왕녀에게 밉보이는 짓은 더더욱 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싸하게 굳은 파티 분위기만 이어질 뿐이니,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새로운 뭔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시온은, 이미 그것마저 전부 생각을 끝내두었다.
“리시.”
“네, 주인님.”
어제 밤 이후로 눈에 띄게 화사해진 여기사, 리시키다 암셸.
입가에 지어져있는 미소를 보고 있자니 절로 같이 웃고 싶어지는 시온이었다.
“잠깐 외출 좀 할까 하는데.
릴리트님한테도 말해주겠어?
아, 나가는 일행은 너랑 릴리트님.
이렇게 둘이면 충분할 것 같고.”
“호위 기사들이 걱정할 텐데 괜찮을까요?”
“너무 많으면 오히려 눈에 더 띄는 법이라고 둘러대.
거기에 상급 기사인 네가 근접 호위를 하겠다는데 어떤 기사가 네 실력을 의심하겠어.”
상급 기사의 실력은 웬만한 기사 열댓은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정도.
말 그대로 엄청난 실력자라는 소리였다.
“알겠습니다.
릴리트님께 말씀을 전달해드리고 오겠습니다.”
“아마 한창 늦잠을 주무시고 계실 테니 잘 깨워봐.”
“네.
그보다, 어디로 가시려는지 여쭈어도 될 런지요?”
리시키다의 질문에 시온은 피식, 짧은 웃음을 내뱉곤 답했다.
“하이네스 상단으로 가보려고.
지금쯤이면 헬렌 상단주도 궁에서 제 상단으로 복귀했을 거야.
이참에 진지하게 논의해봐야지.
아주 왕창 돈을 벌 논의 말이야.”
시온의 인생 모티브 중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머니(money) 가 최고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