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57)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57화(57/439)
57―――――
파티는 끝났다
“바로 떠나겠다고?”
들고 있던 찻잔이 흔들리며 안의 내용물이 넘칠 듯 찰랑거린다.
바네사는 애써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상대의 답을 기다렸다.
“네.
파티도 끝났고, 이제 그만 영지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제가 후계자가 되어도 왕실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씀도 하셨고 말이죠.”
“그래도··· 시온 공자.
조금만 더 머물다가 가는 건···.”
“할 일이 많습니다.”
얼른 가서 트리샤 페이커 줍줍하고, 남는 시간은 그냥 쉬고 싶은 시온이었다.
시작부터 김유현과 만나서 생존 신고를 치르고 릴리트와 계약을 했다.
그리고 바로 전쟁에 참전해서 개고생을 하고, 그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왕성까지 올라와서는 파티 일정을 소화했고 그 사이에 폭발에도 한 번 휘말려주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강행군이냐고.’
김유현 멘탈이 터지는 걸 방지하고자 조금 나서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는 영지로 돌아가서 마음 편히 잠 좀 자고 싶은 것이 시온의 속마음이었다.
‘···역시 왕성의 번잡함이나 호화스러움은 즐기지 않겠다는 것인가.’
물론 이번에도 단단히 오해한 바네사였다.
“돌아가게 되면 나중에 다시 만날 때는 그대가 정식 후계자가 되어서, 혹은 새로운 클라우젠 변경백이 된 이후가 되겠군.”
“어쩌면 저는 왕녀님이 아니라 여왕님을 뵙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바네사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살짝 굳은 표정으로 찻잔을 입에 머금을 뿐이었다.
“왕녀님.”
“뭔가.”
“북쪽을 예의주시 하시길.”
갑작스레 흘러나온 시온의 경고에 바네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왕녀님께 드리는 부탁 같은 것입니다.
저희 클라우젠은 누디아와의 국경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바쁘니까 말이죠.
북부에도 왕국을 성가시게 하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침묵한 지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갑작스럽군, 시온 공자.”
“원래 시끄럽던 자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면 이상한 법입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제법 긴 시간이지만 한 집단이 창칼을 다듬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이 말을 여느 귀족들이 했으면 바네사는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북부의 야만족들이 왕국과 협약을 맺고 일정량의 식량과 제 물건들을 교환하기 시작하면서 매년 이어지던 약탈은 거의 중지되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북부를 예의주시하라는 건 지금의 평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하는 저 말은 웃으면서 넘기기 힘들었다.
확신에 가득 찬 눈동자, 목소리, 그리고 행동까지.
마치 북부에서 무슨 일이 터질 수밖에 없다는 듯 시온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알겠네.
은밀히 사람을 풀어 주시하도록 하지.”
“왕자님께는 들키지 않도록 하시고요.”
당신만의 공을 세우라, 라고 시온이 돌려 말하고 있음을 깨달은 왕녀였다.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그대는 나와 만난 게 이제 겨우 두 번인데, 어찌 그렇게 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나를 위해 행동하는 거지?”
“···그냥 감입니다.
왕녀님이 더 좋은 군주가 될 것 같다는 감.”
“상당히 위험하고 또 믿기 힘든 이유군.”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딱히 싫다는 표정은 또 아니었다.
남자가 말하는 저 감이 정말로 ‘감’ 인지, 아니면 호감에 이끌려서 나온 말인지.
바네사는 되도록 후자라고 믿고 싶었다.
“···이제 정말 가야겠군.”
“예.
슬슬 왕궁에서 나서야겠군요.”
자리에서 일어선 왕녀가 손을 내민다.
청년은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조심스레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저번처럼 몇 년 뒤에나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되도록 없었으면 좋겠는데.”
“노력해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온은 작별의 예를 취해보이고는 왕녀의 방을 나섰다.
이미 국왕과 왕자에게는 인사를 해두었고, 마지막으로 바네사를 보기 위해 굳이 따로 만났던 자리.
“···.”
왕녀의 신분으로써 아직 한 가문의 주인도 아닌, 그저 귀족 자제를 궁 바깥까지 따라 나서서 배웅하는 건 여태 전례가 없던 일이다.
하여 바네사는 그저 방 안에 앉아서 창 바깥 너머, 점점 멀어지는 청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만간 다시 만나겠지.”
아주 잠깐이지만, 왕녀의 자리가 이리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정리한 그녀는 시온이 남기고 간 말들을 떠올렸다.
‘북부를 예의주시 하라.’
왕국 북부 너머의 황량한 땅에는 여러 부족들이 산다.
서로가 같은 민족임에도 도통 화합하지 못 하고 그저 서로 싸우며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것이 일상인 세상.
모든 것이 부족한 지역이었지만 식량이 특히 부족했기에 그들은 왕국의 방비가 조금만 허술해져도 바로 쳐들어와서 약탈을 자행하곤 했다.
결국 히스파냐 측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그들을 토벌하기는 했지만 서로에게 상처뿐인 전쟁이었고 결국 물품거래를 통해 평화를 도모하기로 했었다.
‘그게 3년 전.
그동안 북부 야만족들이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착실히 거래만 하며 조용히 지내왔는데.’
3년 동안 평화롭게 지냈지만, 그 전에 30년이 넘도록 왕국과 부딪치던 그들이다.
당장 서로가 죽고 죽이는 싸움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호전적인 천성이 고작 그 3년의 시간동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도 다 생각이 있어서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겠지.”
여왕님을 뵙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시온의 말.
바네사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알면서도 끝내 그를 타박하지 못 했다.
기분이 좋았다기보다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감을 느껴서였다.
왕녀인 자신에게 강력한 권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주변 이들을 동원해 북쪽의 소식을 접하고 모으며 상황을 예측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바네사는 시온의 말대로 북쪽에 신경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
“바로 떠나시는 건가요.”
데자뷰인가?
방금 전에 들었던 말 같은데.
시온은 피식, 하고 미소를 지으며 헬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제 앞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정말 아무 증서도 없이 구두(口頭) 계약으로만 이번 일을 마무리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래.”
시온은 자신이 낸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음료에 대한 모든 권한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시작 당시 유통은 하이네스 상단이 맡아서 했다지만 생산에 관한 상세한 부분은 시온이 스스로 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대신 그녀는 시온이 요구한 물품을 세 달 내로 전부 클라우젠 변경백령으로 이송하기로 했다.
제법 큰 규모의 거래를, 증서 하나 없이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냈다.
“···뭘 믿고요?”
“너를 믿는 거지.
헬렌 하이네스라는 여인을.
비록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지만 상단 하나를 만들어서 이렇게 크게 성장시킨 뛰어난 상단주를 말이야.”
낯간지러운 칭찬에 헬렌은 조그마하게 헛기침을 하곤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단주로서 많은 고객들한테 여러 칭찬들은 들어왔다.
외모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능력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칭찬들을.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저 남자만큼 솔직담백한 목소리로, 아첨하는 기운 하나 없이 담담하게 말을 하는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가치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 통에 헬렌은 저도 모르게 살짝 가시가 돋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저를 안 지 고작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시는 건 아니리라 믿겠습니다.
요정이라고 하여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아셨을 텐데요.”
“당연히 잘 알지.
미친놈들 마냥 인간들한테 세뇌를 걸어서는 그냥 죽으라고 왕궁 안으로 떠밀고, 아무리 혼혈이라지만 무슨 밑 사람 대하듯 강압적으로 대하는 것도.
요정이라고 인간과 다르지 않아.
아주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말도록.”
“그런데···.”
“그런데 왜 그렇게 당신을 좋게 보냐고?
당연한 거 아닌가?”
시온은 살짝 몸을 기울여 헬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가 되었든 참고 버티며 빈틈을 노릴 수 있다.
이름도 없던 상단을 왕성 내에서 꽤나 유력한 상단으로 일구어냈다.
이 정도면 합격 아닌가?
난 실력 있는 상단주를 찾고 있는 거지, 마음씨 좋은 요정 여인을 찾는 게 아니야.”
“···.”
“그리고 이미 나와 그쪽은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내용의 거래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했지.
이 정도면 서로에 대한 신뢰는 쌓고도 남았을 텐데.
내 착각인가?”
시온의 질문에 헬렌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본모습을 봤음에도, 복수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던 밑바닥을 봤는데도 저 남자는 아무런 거부반응이 없다.
고귀함이 자랑인 귀족이 말이다.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네요.
소문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분, 하지만 그 소문보다도 더 한 모습도 지닌,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분이랄까.”
“그런 소리 요즘 많이 들어.”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시온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헬렌은 잠시 이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유감이에요.”
“뭐가?”
“그··· 마나를 다루시지 못 한다는 거.”
“아, 그거?”
불행한 인생을 산 헬렌조차 동정하게 만드는, 마나 감응력 제로의 신체를 지닌 시온.
속으로 기가 막히네, 라고 중얼거린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불행이라고 여긴 적 없어.
그러니 상관 안 해.”
“···그러신가요.”
“어느 누구도 나 자신을 초라하고 비참한 이로 만들 수는 없어, 헬렌.”
“네?”
“나 자신이 비로소 초라해지고 비참해질 때는, 스스로를 그런 사람이라고 인정할 때야.”
그 말에 헬렌은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시려왔다.
마치 저 말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말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물론 내 관점이긴 하지만.
당신은 충분히 멋진 여자야.”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이미 다른 누군가에 의해 할퀴어지고 꺾인, 다 져버린 꽃송이일 뿐이다.
빛은 이미 다 저물어 언제 자신의 인생에 찬란함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만약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저 남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간신히 일구었던 상단마저 잃은 채 오직 세페르 카슈가르의 죽음만을 바라며 또 제 속을 다 썩어문드러지게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시온은 그런 헬렌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부탁한 건 차질 없이 이행해달라고.
늦어지면 나도 당신도 골치 아파질 테니까.”
“···차질은 없이 이행하겠습니다만,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
“전쟁도 끝나고, 왕국 전역에 이제 전운(戰雲)이 감도는 곳이 하나 없는데, 갑자기 그런 엄청난 양의 식량들을 구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단주라고 하더니, 역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다.
시온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가에 제 검지를 슬쩍 가져다 대었다.
거기까지는 설명할 이유가 없다는, 자신에게는 비밀이라는 뜻이었다.
“도대체, 당신이라는 남자를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소문 무성한 변경백령의 귀공자라고 해두자고.”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니 심히 이상하게 들립니다.”
헬렌이 그렇게 쏘아붙이자 시온은 ‘그런가?’ 하고 킥킥대며 상단을 나섰다.
끄응, 하고 허리를 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식량을 구비하는 이유라.’
왕성으로 갔던 김유현은 이후 북부 귀족들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그곳에 살고 있던 부족들과도 전투를 치르게 된다.
갑작스레 전쟁의 규모가 커지자 왕실은 다급히 지원 병력을 보내게 된다.
바로 그 타이밍에, 잠잠하던 남쪽의 해적들이 다시금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대난장판의 시대’ 가 열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걸 막을 생각이 없냐고?’
두 말하면 잔소리, 당연히 없다.
여태 자신이 활약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클라우젠 변경백령이라는 제 집의 안전.
그리고 엉망이 된 시온 클라우젠이라는 놈의 새로운 이미지 설계를 위해서 한 것뿐이다.
덤으로 멘탈이 반쯤 박살난 차원 이동자도 챙겨주고 말이다.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은 김유현, 네가 해라.
그게 원래 네 운명이잖아?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로 형이 멘탈 케어는 해줄게.’
사실 김유현을 형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아니, 많이 어폐가 있었지만 시온은 개의치 않았다.
‘멍청한 악당은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하고, 평범한 악당은 세상을 지배하겠다고 말하며, 영리한 악당은 그 두 악당 놈을 잡아서 영웅이라는 탈을 뒤집어쓰는 놈이다.’
시온의 최종 목표는 바로 그 영리한 악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