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Regeneration Life RAW novel - Chapter (99)
애독자의 갱생 라이프-99화(99/439)
99―――――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라
리히텐 변경백의 배려로 넓은 연무장을 쓸 수 있게 된 김유현과 릴리트.
‘적당히 해달라.’ 라는 부가 조건을 지키기 위해 힘을 조절해가며 대련을 벌이는 도중이었는데, 갑작스레 릴리트의 표정이 사납게 변하더니 기세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음?’
이세계로 떨어진 이후, 여태까지 자신을 능수능란하게 상대했던 적은 딱 하나였다.
자신의 스승이자 전 궁정 마법사, 그리고 극강의 무투술을 지닌 남자.
라이도.
그 외에는 강자로 부를 만한 이를 만났다고 생각지 않는 김유현이었다.
그나마 상급 기사라는 리시키다나 암셸이나 라이언 기사단장이 상당히 괜찮은 상대였다고 해둘까.
헌데 이 릴리트라는 인간, 아니 마족은 상상 그 이상으로 강했다.
검술만으로는 웬만한 기사 수준밖에 되지 않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그에 대처하는 능력이나 함정에 함정을 파두고 적을 가지고 노는 데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는 여인이었다.
대련 중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조차 등골이 서늘했던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갑자기 기세가 돌변했다?’
김유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꿨다.
혹 저 여인이 이제부터 진심으로, 대련이 아닌 진짜 싸움으로 임할 것이라면 자신 역시 꽤나 긴장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한편, 릴리트는 그녀대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김유현과의 싸움이 마음에 안 들어서?
설마 서큐버스 퀸이 그 따위 이유로 품위 없게 부들거리고 있겠는가?
‘시, 시온!
너 진짜!’
분명 감이 왔다.
이건 자신의 남자 옆에 다른 여인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
리시키다일까?
아니면 루시아?
하지만 그 둘 모두 요즘 들어 이런저런 일로 바쁘지 않은가.
거기에 릴리트가 보기에, 그 둘은 아직 부끄러움이 좀 남아있는지라 이런 대낮부터 시온과 진하게 사랑을 나눌 만한 위인은 되지 못 했다.
최소한 ‘아직’ 까지는 말이다.
‘도대체 어떤 도둑년이 대낮부터 시온을···.’
도둑 하니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하나.
정확히 말하자면 한 마리의 고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번에 마차 안에서 거의 발가벗은 채로 시온의 품에 안겨서 앙앙거리던 묘은족 여인을 떠올린 릴리트는 으득, 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 도둑고양이를 내 반드시 요절내리라!’
콰아아앙!―.
요 근래 아끼고 아끼던 마나까지 동원해서 그대로 김유현의 검을 후려치는 릴리트.
어찌나 강한 힘으로 밀어붙였던 것인지 그 김유현이 그대로 주우욱, 하고 뒤로 밀려서는 릴리트를 차가운 눈동자로 노려볼 정도였다.
진짜 제대로 할 생각이냐는, 이제부터 ‘전력’ 으로 겨룰 것이냐는 무언의 질문.
“아.
아아, 아아아아아악!”
하지만 눈앞의 릴리트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는 통에 김유현은 당황해서는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감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꼬리를 쳐?
하!
마차에서부터 그렇게 경계를 하면서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했더니!
이 빌어먹을 도둑고양이가!”
그렇게 외친 릴리트는 뒤도 안돌아보고 쿵쿵거리며 어딘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멍하니 연무장에 혼자 남겨진 김유현은 마치 임자 있는 여인에게 아무것도 모른 채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시원하게 개무시당한 남자마냥 눈만 껌뻑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지, 시발?”
천하의 김유현마저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럽다는 듯 혼잣말까지 중얼거릴 정도였다.
어어, 하고 탄식을 내뱉던 그는 긴장하고 있던 방금 전의 자신이 생각나자 괜스레 부끄러워진 듯 헛기침을 하다가 대충 연무장의 뒷정리를 마치고는 방으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한편, 릴리트는 무슨 한이 서린 처녀귀신마냥 두 눈에서 살기등등한 안광을 번뜩이며 시온의 방으로 내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자신의 남자인 시온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의 곁에 여인들이 자신 말고도 더 있는 것이야 진작 알고 있는 상황이었고, 질투나 불쾌함이라는 천박한 감정을 드러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서큐버스인 만큼 이성에게 지니는 호감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
지금 릴리트가 화가 잔뜩 난 이유는, 시온에게 관심이 있으면서도 매번 없는 척 스스로를 숨기다가 갑자기 막판에 와서 도둑고양이마냥 홀라당 다 훔쳐 먹은 것이 얄미워서였다.
리시키다나 루시아는 그래도 시온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릴리트의 눈에 비칠 정도였는데, 그 도둑고양이는 매번 ‘흥칫뿡!’ 시전하지 않았던가!
‘내가 다른 건 다 용서해도 내숭 떠는 건 절대 못 넘어가거든, 망할 고양이야!’
그야말로 진격의 몽마였다.
순식간에 시온의 방 앞에 들어선 릴리트는 미처 안의 묘은족이 자신을 감지하고 경계 모드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대로 덜컥!
하고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와, 왔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방 안에는 거사를 치르고서 자신의 남자 품에 안겨 있던 도둑고양이가 소스라치게 놀란 모습이었다.
“이이이익!”
머리끝까지 화가 난 릴리트는 단박에 저 고양이 녀석을 요절 낼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번의 그 질문이 저 여인에게 자신이 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었다.
시온 옆에 있고 싶으면 내숭 떨지 말고 좋다고 앙앙대며 달려들라고.
그런 노력이라도 한다면 자신은 충분히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저 고양이는 결국 제 본심보다는 자존심을 택했다.
때문에 릴리트는 더는 저 녀석을 인정하지도 않고,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방심한 사이에 기어코 도둑질을 하셨다?’
쿠구구!―.
성을 통째로 들어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위협을 줄 수 있는 기세를 내뿜는 릴리트.
잔뜩 겁먹고 멀리, 아주 멀리 도망이나 치라는 뜻이었는데 다음 전개된 상황은 뭔가 묘했다.
“아, 안 돼!
시, 시온은 잘못 없어!
저리 가!
하아악!
하아아아악!”
이 도둑고양이가 지금 뭐라는 건가.
자신은 시온이 아닌 바로 네놈을 처단하려는 것인데 말이다.
릴리트가 코웃음을 치며 계속 발걸음을 옮겨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시온의 품에 안겨있던 리아가 폴짝, 하고 내려오더니 더욱 날카롭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오지 마!
하아아악!
시온은, 시온은 잘못 없어!”
“뭐라는 거야.
지금 나는···.”
“절대 못 줘.
시온은 내 반려야.
해칠 생각이면 다가오지 마!
하아아악!”
지금 저 고양이는 자신에게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애써 하악질을 하며 경계심을 보이고는 있지만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건 분명 최악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존재가 가질 법한 두려움과 공포였다.
‘그런데도 버티고 서있다?’
이쯤 되면 시온의 뒤로 도망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도 저 여인은 끝끝내 자리를 지키며 송곳니와 손톱을 드러내고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
마치 제 짝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절대 지켜보고 있을 수 없다는 듯.
“···하아.”
릴리트는 한숨을 내뱉고는 그 너머에 서있는 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릴리트와 눈이 마주치자 뒷목을 긁적이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상황이 조금 꼬이기는 했는데, 오히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니냐는 반응.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게 나을 것 싶기도 하다.
이제는 길고양이,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완벽한 집냥이가 되어버린 여인.
‘오히려 이렇게 되면 서열 관리가 훨씬 더 편하단 말이지.’
릴리트의 생각은 빨랐고, 결정은 더더욱 빨랐다.
바로 기세를 거두고는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막아선 고양이를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 고양이.”
“···하아악!”
“이제 그만 해.
더는 너나 시온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 없으니까.”
거짓이 아니라 진실임을 밝히듯 릴리트는 가볍게 두 손을 들어보였다.
상대가 더는 싸울 의지가 없다는 걸 리아 역시 눈치 챈 듯, 입을 다물고는 슬쩍 손톱을 숨겼다.
그러면서도 경계의 눈빛은 거두지 않는 걸 보니 릴리트가 시온에게 다가가는 걸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느낌이 강했다.
“너, 시온이랑 했지?
너희 기준에서 보자면, ‘짝짓기’를 말이야.”
그 말에 리아는 물론이고 시온까지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본처가 강림했는데 남자고 여자고 멀쩡히 서있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법일 것이다.
리아가 슬쩍 릴리트의 눈치를 보자 여왕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원래는 둘 다 아주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거짓말이다.
자신은 저 도둑고양이만 손봐줄 생각이었지, 시온은 건드릴 생각 없었으니까.
굳이 손을 댄다면, 오늘 밤에 그대로 잡아먹을 계획이었지만.
“위니.”
“···리아야.”
“응?”
“시온이 지어준 이름, 이제부터 그게 내 새로운 이름이야.
리아 위니 포터블.”
그러자 릴리트는 다시 리아 너머의 시온을 바라보았다.
‘너 어쩌다가 이름까지 다시 지어주는 사이가 된 거니?’ 라고 묻고 있는 듯한 눈치.
그에 시온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름 지어준 거예요.’ 라는 뜻으로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이 고양이가 진정되면 듣기로 한 릴리트였다.
“좋아, 그러면 리아.
너도 알다시피 시온은 원래 내 거야.
내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아서 리시나 루시아가 옆에 머물 수 있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냐옹.”
“그런데 만약 네가 시온의 소유권을 주장하겠다면,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면 누가 불리한 지는 너도 잘 알 거야.
동시에 피해를 보는 이들도 생기고.”
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 릴리트의 말은, 시온 옆에 계속 있고 싶다면 말도 안 되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원래는 너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거든.
내가 다른 건 참아도 내숭 떠는 꼴은 절대 못 보고 넘어가서 말이야.”
“냐옹.”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
위니··· 아니, 리아.”
마지막이라는 말에 리이가 바짝 긴장해서는 릴리트를 쳐다본다.
혹 공격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릴리트는 킥 하고 미소를 짓곤 입을 열었다.
“너, 시온 좋아해?”
다분히 놀려먹으려는 의도가 가득 한 질문.
리아는 물론이고 뒤의 시온까지 놀리려는 장난 말이다.
그리고 릴리트의 예상대로 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뒤에 서있던 시온은 연신 헛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해야지.
그래야 좋아하는 상대를 위해 굽힐 줄도 아는 여인이 되는 법이니까 말이야.’
당장 자신을 보라.
서큐버스 퀸, 몽마들의 여왕, 최고위 마족이라는 자신이 시온 하나를 위해 여인 둘을 허락한 모습을 말이다.
그냥 두 여자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버리고 남자를 독차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잠자리에서 그를 녹여버려서 두 여자에게는 신경도 안 쓰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 한다면 남자의 마음도 어느 순간 자연스레 자신에게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릴리트는 자신을 조금 굽히는 것으로, 대신 저 남자의 첫 번째이자 인간들이 말하는 ‘본처’ 자리는 확고히 하는 것으로 협상을 본 것이다.
“대답해.
이번에도 이상하게 넘어간다면, 그 때는 나 정말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단다?”
활짝 미소를 짓는데 어째 그 모습이 더 무서워 보이는 릴리트였다.
리아는 꼴깍, 하고 침을 삼키곤 가만히 서 있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던 시온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아직도 제 마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게 가진 마음의 빚인지, 아니면 이종족을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호기심인지, 그도 아니라면 정말 눈앞의 서큐버스 퀸이 말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것인지···.
‘얘가 또 헤매네.
딱 봐도 시온 품에 안겨서 앙앙거렸을 텐데 아직도 자신의 본심이 뭔지도 모르는 거야?
아무튼 여전히 꼬마라니까, 꼬마.’
속으로는 킥킥하고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다.
그러자 리아는 결심한 듯 다시 시선을 릴리트에게로 돌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해, 리아.
그렇게 몸짓으로만 하는 건 반칙이야.”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좋아해.
내 짝이야.
그러니까, 시온 옆에 있을래.”
“그래?”
릴리트는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짓고는 슬며시 손을 뻗어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래라면 ‘마족이 누굴 만지냐!’ 라고 식겁을 하며 도망가거나 경계의 하악질을 했을 텐데, 리아는 얌전히 자리에 서서 릴리트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릴리트가 자신보다 위임을 인정하고, 순응하겠다는 뜻이었다.
“좋네.
나도 도둑고양이보다는 귀여운 집고양이가 더 좋아서 말이야.”
휴우.
어디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릴리트는 그 소리의 근원지인 시온을 바라보고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시온.
내가 한 가지 조언해도 될까?”
“예?”
“네 매력이 엄청나다는 건 인정할게.
겉도 속도, 낮에도 밤에도 말이야.
그래서 여자들이 계속 모여드는 건 받아들일 수는 있는데··· 너 정말 괜찮겠어?”
“뭐, 뭐가 말입니까?”
시온이 그렇게 반문하자 릴리트는 킥킥, 하고 입가를 가리면서 웃어댔다.
“밤일 말이야.
너 그러다가 정말 빼빼 말라서 죽는 수가 있어.
네 체력을 생각하면서 여자를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
당장 내가 얼마나 먹을 줄도 모르는데 자꾸 다른 여자들을 곁에 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릴리트의 새빨간 눈동자가 더욱 빛을 발했다.
저건 마치 야생의 한가운데에서 단백질을 노리는 듯 한 베어그릴스의 눈빛.
시온은 저도 모르게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작품 후기―――――――
내놓아라 단백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