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12
상남자 12화
이틀 후.
드디어 면접의 날이 밝았고, 유현은 들뜬 마음으로 한성타워 앞에 섰다.
시간으로만 따지만 이곳에 들른 지 2주가 지난 셈이다.
하지만 유현의 신분은 사장이 아닌 면접자로 바뀌었고, 유현을 태운 고급 승용차는 지하철로 바뀌었다.
한성타워에 들어가 보니 인테리어 역시 20년 전 그대로였다.
‘이 안쪽이 대리석이었구나.’
겉으로 볼 땐 큰 차이가 없었는데 안쪽은 확실히 달랐다.
전면이 디스플레이로 되어 있던 높다란 벽은 대리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캡슐 모양의 접객실로 차 있던 한쪽 공간은 꽉 막힌 실내로 꾸며져 있었다.
로비 중앙에 배치된 홀로그램 안내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안쪽이 더 궁금했지만 지금 신분으론 게이트를 통과할 수도 없다.
“합격하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가볍게 미소 짓던 유현은 면접 안내 표지판을 따라 대강당으로 이동했다.
양쪽으로 열린 문 안으로 대강당의 전경이 보였다.
사장 취임사를 하기도 했던 대강당의 모습이란 유현이 기억하는 그것과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좌석 배치와 시트의 모양도 변했지만 가장 눈길이 가는 건 전면을 비추는 빔 프로젝트다.
그가 기억하는 한 오래전부터 빔 프로젝트를 본 적이 없다.
전면은 전부 고해상도 LED 전광판으로 교체되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디스플레이가 발전하긴 했다.
입구에서도 그렇고, 강당에서도 그렇고 확실히 디스플레이 차이로 인한 변화가 가장 크게 느껴졌다.
눈에 바로 보이는 것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성전자 LCD 사업부 면접 대기실
유현은 문 앞에 붙어 있는 안내지를 보며 과거를 추억했다.
한성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던 곳이 바로 LCD 사업부였다.
미래 한성그룹의 주축이 되는 한성 디스플레이의 기반이 된 곳이기도 했다.
“이거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유현이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때, 문 앞에 서 있던 안내원이 유현에게 번호표를 건넸다.
번호표를 목에 건 유현은 좌측 앞 열 대기석 쪽으로 이동했다.
30분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면접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저 중에 어딘가 권세중이 있을 수도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을 본 녀석이라 그런지 자꾸 눈에 밟힌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을 때, 누군가 놀란 얼굴로 유현을 바라봤다.
“어?”
하얀 피부에 살짝 처진 눈, 그 위에 씌워진 검은 뿔테 안경.
딱 착한 모범생처럼 생긴 남자는 학과 후배이자, 유현을 의식해 도서관에 공부하러 오던 정현우의 얼굴이었다.
그는 유현을 보자마자 말을 더듬었다.
“유, 유현 선배님.”
“어.안녕.”
“반갑습니다.”
“그래.반가워.”
유현은 허리 숙인 정현우의 인사를 가볍게 받은 후 다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권세중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 면접일 수도 있고, 내일 면접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인턴으로 입사해 면접 코스가 다를 수도 있었다.
‘신입사원 연수 때 보겠지.’
유현은 마음을 내려놓은 순간 아차 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권세중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정현우에게 데면데면했던 게 떠오른 탓이다.
그래도 학교 후배라고 일어나서 크게 인사까지 했는데 너무 성의 없이 받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자리에 앉아서 면접 준비에 한창인 녀석이 보였다.
뭘 그리도 외우려고 하는지 무릎 위에 올린 종이를 발발 떨면서 보고 있었다.
딱 봐도 엄청 긴장한 모습이다.
“에휴.”
한숨을 쉰 유현은 정현우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 보니 정현우가 보고 있는 건 LCD 기술에 관한 내용이었다.
도서관에서 그렇게 공부하던 녀석이 이런 걸 이제 와서 다시 볼 리는 없었다.
분명 조금이라도 더 잘하려고 어려운 기술까지 외우려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외우는 건 지금 녀석에게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유현은 정현우를 불렀다.
“현우야.”
“네?”
“커피 한잔할까?”
“네? 아, 네.네.”
정현우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받침대에 올려진 책을 와르르 쏟았다.
“미안합니다.”
허둥지둥 주워 담으며 옆 사람에게 얼굴이 벌게져서 사과했다.
유현은 괜히 면접 준비하는 데 방해한 건 아닐까 염려스러웠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역시나 기대감에 찬 정현우의 표정과 몸짓을 보며 기우였단 걸 알 수 있었다.
“형이 살게.가자.”
“넵.”
정현우를 데리고 나간 곳은 1층 후문에 연결된 작은 공터였다.
경비원이 따로 지키고 있었는데, 유현이 워낙 자연스럽게 인사하니 쉽게 나갈 수 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따라온 정현우에게 각성 음료를 하나 뽑아 줬다.
그 순간 정현우는 자기가 이거 먹고 싶어 하는 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유현을 바라봤다.
유현이 피식 웃었다.
“긴장할 땐 이게 최고야.”
“고, 고맙습니다, 선배님.”
“형이라고 해.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데.”
“어떻게…….”
딱 봐도 유현을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학교생활을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괜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유현은 억지로 정현우를 벤치에 앉혔다.
이후 자신은 세 발자국 정도 떨어진 벤치에 앉아 그를 마주 봤다.
정현우는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거라 생각했는지 허리를 만 자세로 음료를 홀짝홀짝 마셨다.
유현은 그런 정현우를 찬찬히 살펴봤다.
면접 스터디까지 했단 녀석의 자세가 아니다.
아무래도 녀석에겐 제대로 된 코칭이 필요해 보였다.
솔직히 그리 친분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면접 도와 달라고 부탁받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건 왜일까.
그간 선배 노릇을 못 해 줘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아니면 저 녀석이 떨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적어도 유현의 기억 속에 정현우와 같은 회사를 다닌 적은 없다.
아주 높은 확률로 녀석은 이번 면접에서 떨어졌단 의미가 된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말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현우야, 면접 준비는 좀 했어?”
“네.하긴 했는데…….”
“그게 뭐야.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했다고 해야지.”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돼요.형, 호, 혹시 도와줄 수 있어요?”
기대에 찬 표정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나.
정현우 저 녀석도 원하는 게 있었다.
그래, 다행이다.
안 그래도 도와주려고 했는데 본인이 먼저 나서 주면 훨씬 수월했다.
‘의지가 있었단 말이기도 하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2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핵심에 집중해야 했다.
“있어 봐.”
자리에서 일어난 유현은 정현우의 자세부터 바로잡았다.
바른 자세에서 바른 목소리가 나오는 법이다.
목소리가 바로 나오기 시작하면 여유가 생긴다.
면접에서 말할 내용은 이미 자기소개서에 빡빡이 적어 낸 상황이다.
지금 필요한 건 모르는 기술을 달달 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이 써 낸 내용을 진솔하게 말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오케이.좋아.자기소개 같은 거 준비했지?”
“네.”
“한번 해 볼래?”
“네.전…….”
유현의 적극적인 태도 때문인지 갑작스러운 상황임에도 정현우는 몰입하려고 애썼다.
서툴고 버벅거리던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 그걸 다 고칠 순 없었다.
유현은 정현우의 버릇들을 콕 집으며 최대한 부드러운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실은, 실은, 이거 하지 마.말할 때마다 이 단어가 너무 많이 들어가.”
“네.”
“네가 말하는 거 사실인 거 다 아니까 어색해도 불필요한 말 다 자르고 가볍게 말해.논리만 맞으면 돼.”
이런 식이다.
사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을 다시 말하는 거에 불과했다.
그러나 확실히 곁다리 말을 쳐내고 핵심만 전하니 내용이 확실히 간결해졌다.
정현우 본인이 느끼기에도 그런 변화가 놀라운 모양이다.
“와.”
“아직 멀었어.면접은 자신을 꾸미는 거야.”
“네.”
“네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면접관들은 이 잠깐의 시간이 널 판단하는 전부라는 걸 명심해야 해.”
유현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말할 때 손 모양과 시선 처리까지 일일이 신경 써 줬다.
자세는 그 사람을 보여 주는 척도다.
수백, 수천 명을 봐 온 면접관들은 들어오는 자세, 앉은 자세, 말하는 자세만 봐도 지원자들의 준비 정도를 알 수 있었다.
“다시.”
“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유현은 끝까지 정현우를 몰아붙였다.
반복하면 할수록 좋아지는 건 당연했다.
정현우도 다급한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이내 정현우의 모습이 훨씬 나아졌다.
그제야 유현이 빙그레 웃었다.
“오, 이제 좀 낫네.”
“감사합니다.”
“지금 익힌 거 잊지 마.그럼 대박나.”
끝으로 자신감을 올려 주는 사소함도 잊지 않았다.
‘여기까지.’
짧은 시간 안에 부족한 부분을 모두 채우는 건 불가능했다.
확률을 조금 더 올리는 것 정도밖에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승부를 걸 만했다.
유현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린 순간이기도 했다.
자리에 들어오자 딱 면접 시간이 되었다.
앞 번호부터 빠져나갔고, 곧이어 정현우도 따라나섰다.
“잘해라, 현우아.”
유현의 말이 들리지 않았을 텐데도 면접장에 걸어가는 녀석은 뒤돌아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저건 진심이다.
순간 가슴이 짠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좀 챙겨 줄걸.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정현우는 걸어가는 내내 끝까지 유현을 시야에서 놓지 않았다.
대학 시절 정현우에게 유현은 혜성처럼 등장한 신비로운 존재였다.
겉보기엔 키도 크고 잘생겨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는데 늘 혼자 다녔다.
과 행사에도 한번 참석하지 않아 더더욱 화젯거리였다.
그런데 발표 수업 때 보인 그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교수의 마음을 꿰뚫듯 원하는 걸 딱딱 집어 가며 청중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발표뿐만이 아니었다.
전과를 한 탓에 남들보다 많은 강의를 들으면서도 전부 상위권 성적을 거뒀다.
궁금했고, 닮고 싶었다.
그가 있는 도서관을 따라가며 공부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런 유현이 오늘 가까이 다가와 줬다.
면접 준비를 하느라 바쁠 텐데 자신의 시간을 버려 가며 성심성의껏 노하우를 알려 줬다.
단순히 알려 주는 데 그친 게 아니라 정말 놀라울 정도로 도움이 됐다.
꽉 막혔던 머리가 개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감사해요, 형.’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정현우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봤다.
그의 눈엔 힘이 들어가 있었고, 말린 주먹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합격해서 꼭 보답하고 말겠단 그의 의지가 전해졌다.
유현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기다렸다.
그의 시선은 강당 전면에 있는 대형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거기엔 면접 장소와 직군별 구분이 쓰여 있었다.
LCD 사업부의 면접 장소는 9층으로 공정/장비, 연구개발, 영업/마케팅, 스태프 4직군을 나눠 면접을 본다.
정현우가 지원한 건 스태프 직군이고, 유현이 지원한 부분은 영업/마케팅 직군이다.
만약 합격한다면 높은 확률로 그의 첫 번째 팀이었던 모바일 상품기획팀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유현이 과거 신입사원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 때, 차례가 다가왔다.
5명의 지원자가 줄을 맞춰 안내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9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안내원이 우측 복도 쪽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막 앞선 조가 들어간 참이었다.
바로 그다음이 유현이 속한 조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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