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277
상남자 277화
필립 실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죠?”
“공장을 투자하는 것만으로 애플은 한성 물량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렇죠.”
“하지만 다른 업체가 한성 수준의 제품을 만든다면, 조건에 따라 애플의 투자가 손해가 될 수 있겠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근데 분명 다른 업체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전 단지 애플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김영길 과장의 말에 필립 실러가 미간을 좁혔다.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뻔히 보여서였다.
그럼에도 애플을 들먹이며 거래를 미루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필립 실러가 실소를 뱉으며 말했다.
“11월에 다른 업체들 상태를 보고 세부 조건을 정하겠다? 공장은 일단 짓고?”
“네.물량을 안정성으로 확보하기 위해선 공장은 빨리 짓는 게 좋으니까요.”
“근데 제 생각엔 그때 가도 세부 조건을 결정하긴 애매할 거 같군요.”
필립 실러처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비교도 다른 패널이 준비되었을 때나 가능했다.
11월은 아직 실물이 없는 다른 업체들 입장으로선 버거운 일정이었다.
김영길 과장은 준비한 말을 과감히 뱉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떻게요?”
“11월에 일성, 한성, 샤프가 동시에 애플폰4 패널 품평회를 하는 겁니다.미국에서요.”
“그 시기에 다른 업체가 대응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언론을 통해 본인들이 된다고 했지 않습니까?”
김영길 과장의 말에 필립 실러의 눈썹이 들썩였다.
패널 업체들이 공격적으로 대응하며 할 수 있다고 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슈를 살려 품평회를 한다면 애플폰 홍보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애플 마케팅 책임자 입장에선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만약 업체들이 준비가 안 된다면요?”
“준비한 상황을 보고 판단해도 괜찮을 겁니다.아예 판단 기준이 없는 지금보단 조건을 잡기가 더 좋을 테니까요.”
업체들이 준비가 돼서 한성보다 나은 패널을 들고 오면, 계약을 통해 한성 패널의 단가를 후려칠 수 있다.
만약 준비가 안 되더라도 가능성이 높으면, 그 또한 단가를 후려칠 조건이 된다.
완전히 가능성이 없으면 한성에 조건을 후하게 주면 그만이다.
어떻게 해도 최소 공장 투자금은 뽑아먹을 수 있다.
“…….”
유현은 침묵하는 필립 실러를 보며 결과가 정해졌단 걸 알았다.
애플이 거부할 이유가 없는 조건인 탓이다.
유현의 생각에 동의하는지 필립 실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그렇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해 보죠.”
“감사합니다.”
“일단 품평회 부분은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맞춰서 준비하겠습니다.”
김영길 과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임준표 부사장은 지옥과 천당을 오간 표정이었다.
지금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발표가 끝난 후였다.
필립 실러는 마크 호리슨과 함께 전화를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존 노만을 포함한 애플 직원들은 여전히 데모 패널 삼매경이었다.
임준표 부사장은 앞으로 나와 김영길 과장을 챙겼다.
“하하.잘했어.”
“여기 한유현 사원이 많이 도왔습니다.”
임준표 부사장이 유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허허.자네 말대로 됐군.”
“다행입니다.”
“정말 잘했어.내가 뭘 해 주면 좋겠나?”
“팀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당연히 챙겨야지.암, 그렇고말고.”
임준표 부사장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응어리로 남아 있던 공장 투자 건이 진행되었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공장 세부 계약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계약직 임원인 탓이다.
유현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에게 유현이 말했다.
“부사장님,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언론 대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터뷰할 분위기는 아닌 거 같은데?”
“지금 애플에게 필요할 겁니다.”
“왜지?”
“언론의 도움을 받으면 품평회를 진행하기 수월할 테니까요.”
유현의 말에 임준표 부사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통화를 마친 필립 실러가 다가와 말했다.
“윗선에서도 공장 투자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 잘됐군요.하하.좋은 제안 감사합니다.”
임준표 부사장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필립 실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네.근데 품평회가 문제군요.”
“왜죠?”
“아무래도 일정 때문이죠.”
필립 실러의 말에 임준표 부사장이 눈을 껌뻑거리며 유현을 보았다.
방금 전 저 어린 사원이 했던 말이 그대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임준표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럼 언론을 이용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냐 하면…….”
“괜찮은 방법 같은데요?”
필립 실러가 대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옆에 있던 마크 호리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얼굴도 확실히 살 거 같습니다.아무래도 업체에 직접 요구하는 건 부담이라서요.”
“그런가요?”
임준표 부사장의 물음에 필립 실러가 긍정과 함께 고민 섞인 답을 내놓았다.
“네.기왕이면 한국에서 기사를 쓰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유현을 힐끔 본 임준표 부사장이 필립 실러에게 말했다.
“우리일보라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언론사가 있습니다.”
“혹시 연결 가능합니까?”
“네.그렇습니다.안 그래도 울산에 일이 있어 대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지는군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하하.”
웃음을 터뜨린 임준표 부사장이 유현에게 손짓했다.
빨리 연락하라는 의미였다.
유현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임준표 부사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모든 게 유현 말대로 척척 맞아 들어간 탓이다.
유현에게 놀란 건 임준표 부사장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후, 목업을 만지고 있던 존 노만이 김영길 과장에게 말했다.
“대니얼, 혹시 이거 저희가 가져가도 됩니까?”
“아, 이건 여기 스티브가 답해 줄 겁니다.”
김영길 과장이 바통을 넘기자 유현이 답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도 보안 사안이라, 패널을 전달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안타깝군요.”
“대신 비교 사진은 저희가 배포하겠습니다.”
“네.그렇게 해 주시면 좋고요.”
존 노만의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어렸다.
그때 유현이 그가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그리고 목업과 내부 이미지는 전달해 줄 수 있긴 한데…….”
“어? 그래요? 전 패널보다 그게 더 중요합니다.이 디자인들, 엄청 마음에 들거든요.”
조급한 존 노만을 보며 유현이 입맛을 다셨다.
안타까운 표정은 덤이었다.
“근데 이것도 저희가 업체를 통해 구매한 거라서요.”
“당연히 디자인은 돈 주고 구매해야죠.돈을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아, 그럼 그 부분은 저희 담당님께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부탁드립니다.”
목업과 디자인은 애플에 넘어가도 회사엔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 결정을 유현이 혼자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회사의 자산이 들어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유현은 고준호 상무에게 의견을 구했다.
“담당님, 존 노만이…….”
“안 될 건 없지.근데 목업은 비용을 지불했잖아.우리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그 부분은 세미전자와 협의해 보겠습니다.”
유현이 답하자, 고준호 상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부 디자인은…….”
그러다 잠시 멈칫하곤 묘한 눈으로 유현을 봤다.
“혹시 여동생 디자인에 대금 지불 안 한 게 이걸 예상해선가?”
“그럴 리가요.”
“그렇긴 하지…….여동생 디자인이야 계약을 안 했으니 애플에 넘겨도 되겠군.”
“네.그럼 그렇게 진행하게 하겠습니다.”
꾸벅 고개 숙이는 유현을 보며 고준호 상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사이 유현은 신이 난 얼굴로 존 노만에게 돌아갔다.
그러곤 뭐가 그리 좋은지 존 노만과 악수를 했다.
그 모습을 고준호 상무가 멀뚱히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마.”
애플은 발표가 끝나고 나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임준표 부사장이 준비한 만찬을 즐겼고, 우리일보와 인터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날 때까지 임준표 부사장이 함께했다.
최선을 다해 애플에 예를 갖춘 셈이었다.
그가 남아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모든 일정이 끝났다.
정신없는 일정을 끝낸 유현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울산 시가지에 있는 바에서 김영길 과장과 마주했다.
유현이 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조 상무님 차 타고 올라갔으면 편하셨을 텐데요.”
“노노.차라리 밤새우고 새벽 기차 타는 게 훨 나아.”
김영길 과장이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챙.
오랜만에 두 사람만의 시간이었다.
김영길 과장이 감회에 젖은 듯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가 생각나네.”
“네.그때 좋았었죠.”
“네 덕분이었지.”
“제가 아니라 장혜민 선임님 덕이었죠.”
입꼬리를 올린 김영길 과장이 술을 마셨다.
그가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 덕분에 거기서 많은 걸 배웠어.”
“아뇨.과장님께서 하신 겁니다.”
“네 덕분에 신경욱 상무님을 따라 애플 직원들과 인연을 맺었으니까.”
“…….”
김영길 과장이 유현을 바라보았다.
유현의 시선을 피했던 과거와 달랐다.
그는 유현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네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도 할 수 있었지.”
“같이 한 거예요.”
“네 덕분에 발표도 잘할 수 있었고.”
“과장님이 한 겁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말이야.”
“잘하셨으니까요.”
말할 때마다 술이 한 잔씩 비워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김영길 과장은 유현에게 공을 돌렸다.
본인이 노력했고, 결과를 만들어 냈음에도 유현 덕분이라고 했다.
김영길 과장이 기분 좋은 상상을 한 듯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그 딱딱하던 마크 호리슨이 엄지를 내밀더라.그때 기분 참.”
“그럴 만했어요.오늘 정말 멋졌습니다.”
“그래, 그래.”
또 잔을 비운 그가 유현을 빤히 보았다.
늘 혼자 일했던 그가 유현의 손을 잡았다.
손의 온기로 그의 뜨거운 진심이 전해졌다.
유현은 머쓱한 마음에 말을 돌렸다.
“과장님, 많이 취하신 거 같습니다.”
“그래.네 덕분에 이렇게 기분 좋게 취하기도 한다.”
“자, 한 잔 하시죠.”
챙.
잔을 든 김영길 과장이 유현을 불렀다.
“유현아.”
“네, 과장님.”
“넌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냐?”
따뜻한 그의 눈망울 위로 과거 그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모든 걸 다 가졌다고 유현이 착각하던 그때, 그가 유현을 보았다.
-권세중이 죽었습니다.
그의 눈빛 속엔 무심함이 담겨 있었다.
또 다른 과거 김영길 과장의 모습이 스쳤다.
사람들을 이용하며 유현이 승승장구하던 그때, 그가 유현을 보았다.
-너같이 유능한 놈이 왜 여기 있냐?
그의 눈빛 속엔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찰나의 순간.
유현의 머릿속에 김영길 과장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는 단 한 번도 유현을 탓하지 않았다.
질투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쌓아 놓은 걸 빼앗긴 와중에도 못난 후배를 치켜세웠다.
그래서 그에게 미안하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잘해 주는 걸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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