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307
상남자 307화
유현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는 이미 식사가 다 치워져 있었다.
그리고 링 위에 아까 봤던 남자가 서 있었다.
링 아래에 있던 관장이 유현에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입은 막내가 테스트하는 게 우리 전통인 거 알지?”
“제가 신입인가요?”
“그럼.빠진 기간이 얼마인데 당연히 신입으로 리셋이지.여기서 통과 못하면 유현이 네가 다시 막내야.”
관장이 억지를 부리며 글러브를 툭 하고 건넸다.
두툼한 글러브를 받아 든 유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역시.넌 받아들일 줄 알았어.올라가자.”
관장이 미소 지으며 링 쪽으로 턱짓했다.
유현은 주저 없이 링 위로 올랐다.
대결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이 또한 유현이 바라던 바였다.
그 역시 오랜만에 진하게 땀을 빼고 싶었다.
함께 링 위에 오른 관장이 유현을 보며 말했다.
“유현이 네 상대 이름은 이장우.장우야, 너 언제 들어왔지?”
관장이 이장우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짤막한 답을 내놓았다.
“2개월 됐습니다.”
“그래.이쪽은 한유현.얼마 전에 기사에서 본 적 있지?”
“네.봤습니다.”
관장의 말에 이장우가 눈빛을 번뜩였다.
느닷없이 나온 기사라는 말에 유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장은 한 발 더 나아가 겁을 줬다.
“그래.날아차기 한 방으로 불량배들 3명을 무찌른 무시무시한 녀석이지.”
“알고 있습니다.”
“지금만큼은 네가 녀석을 테스트하는 선배야.대충 하면 되겠어, 안 되겠어?”
승부욕을 자극하려는 듯 관장이 이상한 논리를 앞세웠다.
참 어이없는 광경이었지만, 이장우는 진지하기만 했다.
심지어 목소리에 더 힘이 들어갔다.
“안 됩니다.”
“오케이.”
팡.
이장우의 등을 친 관장이 유현을 보며 빙긋 웃었다.
“유현아, 다시 신입은 되지 말아야지.”
“그래야죠.”
담담하게 답한 유현이 글러브를 매만졌다.
푹신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관장이 준 자극 때문일까?
얌전해 보이던 이장우에게서 맹렬한 기백이 느껴졌다.
유현은 자세를 고쳐 잡곤 진지한 눈빛으로 상대를 살폈다.
키가 작고 몸이 단단한, 전형적인 인파이터 스타일로 보였다.
2개월 경력치곤 자세가 꽤 안정됐다.
특히 하체 종아리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땡.
종이 울린 순간이었다.
팍.
몸을 웅크린 이장우가 들소처럼 맹렬하게 달려 나왔다.
그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워낙 빠른 동작에 유현조차 물러설 정도였다.
쐐액.
그런 유현을 놓치지 않고 이장우의 주먹이 쏟아졌다.
이장우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지는 동안이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관장에게 김태수가 말했다.
“관장님, 유현이에게 왜 테스트 통과 기준은 안 말해 줬어요?”
“1라운드 버티면 된다는 거? 그걸 말해 뭐해.”
관장의 무덤덤한 답에 오정욱이 끼어들었다.
“유현이 녀석, 반년 쉰 놈이에요.장우는 프로급 이상이고요.”
그러자 옆에 있던 강동식이 고개를 저었다.
“유현이가 질 리가 없어.녀석은 나한테도 이긴 놈이라고.”
“형님, 장우도 형님보다…….”
오정욱의 말에 강동식이 눈을 부라리던 순간이었다.
관장이 링 쪽으로 턱짓하며 말했다.
“걱정할 거 없겠다.유현이 녀석 아직 살아 있네.”
쉬익.
유현은 횡으로 이동하며 이장우의 주먹을 피했다.
처음엔 링 전체를 돌며 피했으나, 그 간격이 점차 좁아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장우와 최대한 밀착해서 돌고 있었다.
쉬, 쉭.
그러면서도 공격을 다 피해 냈다.
유현이 링 위에 선 건 반년 만이지만, 그간 기본 훈련은 꾸준히 했었다.
특히 울산에선 아침마다 달리는 거리를 늘렸다.
체육관의 공백을 추가 훈련으로 메운 셈이었다.
덕분에 유현의 발은 더없이 가벼웠다.
파바박.
이장우가 안 되겠는지 하체를 이용해 태클을 걸었다.
유현은 몸을 돌려 피한 후, 정확히 그의 얼굴에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퍽.
그러곤 자세가 무너진 이장우의 옆구리를 뒤차기로 강타했다.
“크윽.”
넘어갈 만하건만 이장우는 버텨 냈다.
그냥 버텨 내기만 한 게 아니라 다시 달려들었다.
밸런스, 의지, 스피드, 뭐 하나 빠지는 데가 없었다.
유현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 살짝 비껴 내며 바로 펀치를 날렸다.
퍼억.
피하기 급급했던 과거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게 유현은 그간 실전 경험을 쌓았다.
여러 불량배들을 잡았고, 남종부 보디가드들을 쓰러뜨리기도 했다.
예전과는 공격에 대한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그 공격성이 동작 하나하나에 가감 없이 배어 나왔다.
쉐액.
유현은 달려드는 이장우에게 같이 달려들었다.
그러곤 완전히 밀착된 공간에서 주먹을 주고받았다.
스치듯 피하며, 또 강하게 때렸다.
퍼버버버벅.
치열한 공방전의 승자는 유현이었다.
“크윽.”
유현의 공격에 이장우의 몸이 밀려나더니 급기야 자세가 낮춰졌다.
한발 다가선 유현이 결정타를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만.거기까지.”
관장이 손을 들었고, 유현은 멈췄다.
“허억, 허억.”
그러곤 오랜만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던 체육관 식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장우가 1라운드를 못 버티네.”
“유현이 저 자식은 뭐야? 지옥 훈련 다녀온 거 아냐?”
“대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반면, 링 위에 올라온 관장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가 음료수를 내밀며 말했다.
“역시, 유현이 네가 선배가 맞네.”
“잘 마실게요.근데 장우도 2개월치곤 정말 괜찮은데요?”
“응? 어, 그, 그렇지.”
관장이 말을 더듬을 때였다.
이장우가 다가와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허억, 허억.선배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대단하십니다.”
“아냐.나도 여기선 초보야.”
“정말이십니까?”
“그럼.다른 선배들이 훨 나아.”
유현의 말을 들은 이장우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역시, 저한테 일부러 맞춰 주신 거였군요.전 그것도 모르고…….”
링 아래에 있는 체육관 식구들을 향해 중얼거리던 그가 대뜸 허리를 꾸벅 숙였다.
“선배님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순간 체육관 선배들이 침묵했다.
여기서 이장우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는 까닭이다.
관장이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다.
“유현아, 넌 일단 내 방으로 들어와 봐.”
“네.알겠습니다.”
유현이 땀을 닦으며 답했다.
잠시 후, 관장실 안.
소파에 앉은 관장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앞으로 밀며 말했다.
“유현아, 여기 사인 하나만 하면 된다니까.”
“관장님, 저 대회 안 나간다니까요.그리고 이때 저 파견 중이에요.”
“하루만 빼면 되잖아.아직 기한도 몇 개월 남았어.”
“그래도요.전 진짜 관심 없어요.”
유현이 체육관에서 치열하게 운동한 건 사실이지만, 대회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건 진짜 꿈을 가지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나가는 게 맞았다.
유현에겐 어디까지나 격투기는 취미였다.
관장이 그런 유현의 생각을 아는지 이번엔 방법을 바꿨다.
“체육관에 할당제가 있어서 그래.너 빠지면 다른 사람도 못 나가.”
“다른 사람들 있잖아요.”
“프로는 안 돼.그렇다고 아무나 보낼 순 없잖아.”
관장의 계속되는 애원에 유현이 한숨을 쉬었다.
뻔히 속은 보였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안 할 수도 없었다.
도움을 많이 받은 만큼 유현도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했다.
“진짜 저 1라운드 탈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그냥 머릿수만 채우는 거라니까.”
“네.알겠어요.”
결국 유현은 사인을 했다.
관장의 입꼬리가 길쭉하게 올라갔다.
체육관에서 시원하게 땀을 뺀 유현은 남은 시간을 여유 있게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유현은 모처럼 출근길에 올랐다.
애플 품평회 후속 조치를 위해 이번 주까진 한성타워로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터라, 출근길 유현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물론 양손은 선물로 두둑했다.
출근한 유현은 선물이 담긴 종이 백을 자신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종이 백으로 가득한 책상이 휑하니 비어 있는 옆자리와 무척 대비되었다.
“깔끔하게도 치워 놨네.”
박승우 대리의 빈자리를 잠시 보던 유현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살짝 열려 있는 자신의 책상 서랍 안쪽에 뭔가가 보였다.
드르륵.
서랍장을 열자 편지 봉투와 포장된 상자가 튀어나왔다.
자리에 앉은 유현이 편지 봉투를 열어 보았다.
-사랑하는 멘티 유현에게.
유현아, 네 인생 멘토인 나는 이제 MBA를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난다.
너에게 모범이 되도록…….
몇 장에 나눠 쓴 장문의 편지였다.
그것도 손 글씨로 정성 들여 썼다.
자리에 앉아 끙끙대며 오랜 기간 고민했을 게 눈에 훤했다.
그 모습을 생각하니 유현의 입가에 절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힘 빼고 대충 하라니까.”
아무래도 천성이 열정적인 남자다 보니 바꾸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유현은 옆에 있는 선물 상자를 열어 보았다.
꽤나 비싼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사용할 일도 없는 만년필이지만, 그 마음이 고마웠다.
유현이 만년필을 매만지며 박승우 대리와 함께한 순간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최민희 차장이 다가와 먼저 인사했다.
“유현 씨 왔네.”
“네, 차장님.살아 돌아왔습니다.”
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넉살 좋게 인사를 받았다.
책상에 놓인 편지를 본 그녀가 슬쩍 물었다.
“박 대리 없으니까 허전하지?”
“허전할 게 뭐 있나요.”
유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뒤에 있던 김현민 팀장이 불쑥 고개를 내밀며 끼어들었다.
“유현이 말이 맞아.이미 떠난 놈 신경 써서 뭐 해.”
유현은 종이 백에서 초콜릿을 꺼내 내밀며 동조했다.
“맞습니다.입 하나 줄고 좋죠, 뭐.”
“어머, 이게 뭐야?”
초콜릿을 받은 최민희 차장이 놀라 물을 때였다.
김현민 팀장이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그놈은 입 하나가 아니야.두세 입 정도 돼.”
그 타이밍에 맞춰 유현이 몰아갔다.
축구 드리블은 자신 없어도, 말로 몰아가는 건 잘하는 유현이었다.
“팀장님, 그럼 입 준 기념으로 오늘 점심 사 주세요.”
“이야기가 뭐 그렇게 흘러가냐?”
유현이 굴린 공을 최민희 차장이 냅다 받았다.
“잘됐네요.식사하면서 사보 촬영 이야기도 좀 하고요.”
“최 차장까지 왜 그래?”
어느새 뒤에 다가온 김영길 과장이 눈치 좋게 거들었다.
“그럼 전 유현이와 담당님 뵙고 점심시간 맞추겠습니다.”
“그래.뭔들 못 사겠냐.가자고.”
결국 김현민 팀장의 한숨으로 골이 결정됐다.
유현이 곧바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팀장님.”
“박 대리보다 더한 놈이 여기 있어.”
그런 유현을 보며 김현민 팀장이 혀를 내둘렀다.
팀원들에게 초콜릿을 돌린 유현은 자리에 앉았다.
유유자적하려 했건만 당장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타다다다닥.
유현이 노트북으로 빠르게 타이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 다가온 김영길 과장이 말했다.
“유현아, 담당님 집무실 갈 시간이야.”
“네.잠시만요.다 했습니다.”
메일을 보낸 유현이 노트북을 덮고 일어났다.
그런 유현을 보며 김영길 과장이 혀를 내둘렀다.
“넌 무슨 일을 또 그렇게 하냐?”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그래? 난 네가 엄청 정신없어 보이길래 일하는 줄 알았지.”
“제가 여기서 일할 게 뭐 있겠습니까.푹 쉬다 갈 겁니다.”
유현의 말에 김영길 과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가시죠.”
빙긋 웃은 유현이 앞으로 손짓했다.
# 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