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377
상남자 377화
또르르르르.툭.
굴러간 공이 누군가의 발끝에 닿아 멈춰 섰다.
공을 따르던 유현의 시선에 단정한 여자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타지인인 터라 유현은 정중하게 인사하며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
검은 구두 위에 검은색 타이즈.
겨자색 롱 코트와 손목에 찬 얇은 은테 시계.
자주색 터틀넥 티셔츠 위에 올려진 스카프.
핸드백을 메고 있는 자세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은 터라, 유현이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겨울바람을 뚫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일으킨 유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서울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지금 이렇게 연태리에서.
또다시 마주한 두 사람이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휘우웅.
바람이 불었고, 두 사람의 머리칼이 날렸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과 같은 분위기가 아주 잠시 이어졌다.
눈치 없는 꼬마가 소리를 치기 전까지 말이다.
“형.패스요, 패스.”
“잠시만요.”
정다혜의 발밑에 있는 공을 빼낸 유현은 저 멀리 숲속으로 뻥 차 버렸다.
발 등에 묵직한 느낌이 오는 게 이번엔 제대로 맞았다.
“아, 형.왜 이렇게 멀리 차요.”
“민수야, 형 일 있어서 다시 돌아가 봐야 해.그럼 안녕.”
정민수에게 크게 손을 흔든 유현은 바로 몸을 돌리며 정다혜를 바라봤다.
입을 오물거리는 게 왜 여기 왔는지 변명을 생각하는 모습이라, 유현이 선수를 쳤다.
“마을 둘러보러 오신 거죠?”
“네? 아, 네.그렇죠.”
“저랑 같은 방향으로 가시는 거고요.”
유현이 정다혜가 걷던 방향으로 팔을 뻗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맞아요.근데 유현 씨는 반대쪽으로…….”
“뭐 해요? 빨리 안 오고.”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은 걸어가며 능청스럽게 손짓했다.
정다혜는 얼떨떨하게 따라 걸었다.
걷고 있는 방향이기도 해서 거절하기 애매한 탓이다.
저벅저벅.
한 발짝 앞서 걷던 유현이 속도를 늦춰 정다혜와 발을 맞췄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먼저 입을 연 건 정다혜였다.
“제가 지금 하는 일 때문에 국내 관광지를 여러 군데 다니고 있거든요.여수에 들렀다가 이 마을도 요즘 주목받는다고 해서…….“
“그렇군요.”
유현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빙긋 웃었다.
또박또박 변명거리를 길게 늘어놓는 모습이 무척 풋풋하고 귀여워 보인 탓이다.
그런 유현의 태도가 못마땅한지 정다혜가 입을 삐죽였다.
“혹시 못 믿는 거예요?”
“당연히 믿죠.중대 과제를 맡으신 분의 말인데요.”
“빈정거리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설마요.오해하신 겁니다.전 정말 다혜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어린 나이에 이렇게 눈에 띄는 커리어를 쌓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
유현은 진심으로 정다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유현의 마음이 느껴졌는지 정다혜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운이 좋았던 거죠.좋은 회사에 있었고, 때마침 한국인은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운도 실력이라더군요.”
“네.그래서 운 좋게 온 기회를 한번 잡아 보려고요.”
당차게 말하는 그녀에게 유현이 의미심장한 답을 했다.
과거엔 이뤄지지 못했던 그녀의 소망이 이번엔 이뤄지길 바란 마음이 담긴 말이었다.
“멋지십니다.무조건 잘될 거고요.”
“…….”
정다혜는 머쓱한지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 옆에만 있으면 왜 계속 쓸데없는 말이 나오는 걸까?
자신의 이야기만 한 것 같아 정다혜는 슬쩍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유현 씨는 왜 여기 계시는 거예요?”
-유현 오빠 잠시 전출 간 것뿐이래.네 말대로 좌천당하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야.유현 오빠 엄청 일 잘하기로 유명했거든.
정다혜는 사촌 정다빈을 통해 그가 여기 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상실감에 우울해야 정상이건만, TV 속 유현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 호기심이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었다.
“그건…….”
유현이 답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후다닥.
숲속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정다혜가 고개를 돌렸다.
큰 나무 뒤로 삐쭉 튀어나온 머리가 보였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시선의 이유를 알아차린 그녀가 실소했다.
“마을 사람들이 유현 씨에게 관심이 많나 보네요.”
“워낙 미인이 와서 그런가 봅니다.”
“실없는 소리 잘하시는 건 여전하시고요.”
“제 특기를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네요.”
유현의 넉살에 정다혜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어째 사람이 날이 갈수록 능청스러워지는 거 같아요?”
“과분한 관심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에휴.”
결국 정다혜가 졌단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문득 꽤 많이 걸어왔단 걸 깨달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근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저도 낚시터에 갈 겁니다.”
“저도라니요?”
“아까 마을 둘러보러 오셨다면서요.그럼 이번에 관광지로 개발한 낚시터를 보실 게 당연한 거죠.그것도 안 보고 가시면 여기 온 의미가 없잖아요.”
“…….”
정다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계속 말리는 기분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유현이 빙긋 웃음 지었다.
-전 여태껏 낚시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시간 버리면서 낚시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실장님은 이해되세요?
과거 정다혜는 같이 낚시하러 가자는 말에 눈치를 보며 돌려 거절했다.
그땐 뭐라 그랬더라?
정확히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시간 아깝게 왜 그런 바보짓을 하냐는 식으로 답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가 오면 꼭 낚시를 같이 해 주고 싶었다.
다행히 이곳은 충분히 그럴 여건이 됐다.
그 시각.
몸을 숨긴 채 숲을 걷던 식당 아주머니가 뒤따라오던 문정구를 타박했다.
“정구야, 좀 조용히 다녀.너 때문에 들켰잖아.”
“이모님, 제가 아니라 이모님이 너무 고개를 내밀어서 그래요.”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 뒤로 심현지가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진짜 화보 같다.저렇게 미인이 여자 친구니까 나한테 관심도 안 줬구나.”
혼잣말을 하는 심현지를 보며 문정구가 눈빛을 이글거렸다.
“누님, 누님에게는 이 사나이 문정구가…….”
식당 아주머니가 말을 이으려던 문정구의 등을 찰싹 때렸다.
“지금 그럴 때가 아냐.낚시터로 가잖아.바로 배 씨에게 전화해.”
“알겠습니다.근데 뭐라고 하면 돼요?”
문정구가 눈을 껌뻑이자, 식당 아주머니가 답답한지 가슴을 쳤다.
“낚시하는 데 좀 도와야 할 거 아냐.안 되겠다.현지 네가 정구 도와서 낚시터에 필요한 것 좀 세팅해 줘.난 숙소에 보일러 넣고 낚시터로 갈게.”
“숙소요? 딱 봐도 손도 아직 안 잡은 사이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에휴.어린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그렇게 되도록 도와야 할 거 아냐.빨리 준비나 해.”
그 말을 남긴 식당 아주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숲속을 걸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졌다.
계단 아래로 보이는 저수지가 노을에 붉게 물들었다.
주위를 비추는 환한 가로등 불빛과 어둑한 산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간 정다혜의 눈에 저수지 옆 낚시터 풍경이 들어왔다.
낚시터 팻말이 붙어 있는 나무 집, 그리고 물 위로 길게 뻗어 있는 나무판자.
저수지 옆에 놓여 있는 평상과 물가에 드문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딱 좋은 자리에 쳐져 있는 텐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매우 운치 있게 느껴졌다.
텐트?
정다혜가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겨울인데 텐트가 쳐져 있네요.낚시 마니아인가 봐요.”
“그러게요.아주 대단한 사람 건가 봅니다.”
“…….”
피식 웃은 유현이 걸음을 이었고, 정다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따랐다.
그러곤 텐트 안으로 몸을 넣는 유현을 보며 깜짝 놀랐다.
“이거 유현 씨 거예요?”
“네.맞습니다.잠시만요.”
텐트 안을 본 유현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조명과 난로를 받아 오려 했는데, 이미 번듯하게 세팅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심지어 식당 아주머니가 종종 따뜻한 커피를 건넬 때 쓰던 보온병도 있었다.
이래저래 참 신경 많이 써 주는 사람들이다.
스윽.
유현은 일단 구석에 쟁여 뒀던 박스부터 꺼내 들었다.
“이게 뭐예요?”
“구두 신고 낚시할 순 없잖아요.새 거니까 신으셔도 됩니다.”
예전에 이영남이 낚시할 때 쓰라고 줬던 털 장화였다.
정다혜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낚시는 안 할 건데요.해 본 적도 없고요.”
“걱정 마세요.다 준비되어 있어서 그냥 채만 던지면 됩니다.”
“그래도…….”
팍.
유현이 텐트 옆 조명을 켜자 저수지 앞 풍경이 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이미 앞엔 낚싯대 2개와 의자 2개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안 해 보셨으니까 더 해 보셔야죠.이런 기회 자주 없어요.”
“…….”
“혹시 자신 없어서 그런 건 아니죠?”
유현은 빙긋 웃으며 신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신발을 받아 든 정다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러곤 언제나처럼 승부욕을 내뿜었다.
어렸을 때부터 여전했구나.
유현은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툭.
“이것도 쓰세요.”
낚시 의자에 앉은 정다혜의 무릎에 담요가 올려졌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어깨를 으쓱한 유현이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화롯불이, 각자의 손에는 따뜻한 커피 잔이 들렸다.
손수 내린 느낌이 물씬 나는 진한 커피가 은은한 향을 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낚싯대를 들었다.
“미끼는 제가 꽂아 드릴게요.”
“아니에요.알려만 주세요.제가 할 수 있어요.”
“지렁이를 꽂아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씩씩하게 답한 정다혜가 유현이 건넨 통을 열었다.
거기엔 겨울이라 몸이 굳은 지렁이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유현의 눈치를 살핀 그녀가 눈을 질끈 감은 후 지렁이를 잡아 들었다.
유현이 건넨 장갑을 끼고 있지만, 손끝에 드는 께름칙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순간 그녀의 손이 미끌거리며 미끼통이 떨어졌다.
“어머.”
정다혜가 두 손을 뻗어 떨어지던 미끼통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유현의 손이 빨랐다.
때문에 그녀의 두 손이 미끼통을 잡은 유현의 한 손을 감싼 모양새가 됐다.
“미, 미안해요.”
화들짝 놀란 정다혜가 손을 뺐다.
빙긋 웃은 유현이 지렁이를 갈고리에 끼워 줬다.
“미안하긴요.제가 끼워 줄게요.”
낚싯줄을 당기는 유현의 손을 보며 정다혜가 고개를 돌렸다.
자꾸 신경이 쓰여서 차마 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뭐라도 하려 했다.
“낚싯대를 던지면 되는 거죠?”
“네.해 보세요.”
휙.
어설프게 날아간 찌가 바로 앞에 툭 떨어졌다.
몇 번을 다시 날리고 나서야 제법 멀리까지 찌를 보낼 수 있었다.
그 후로 정다혜는 무척 열심이었다.
처음에는 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니, 어느새 미끼를 직접 갈아 끼우기까지 했다.
옆에서 미끼도 없이 잘도 낚는 유현이 자극제가 된 까닭이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 눈에 불을 켜고 어떻게든 물고기를 잡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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