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47
상남자 447화
오랜만에 동료를 만나서인지 박승우 과장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같이 할 것도 다 정해 놨어.뭐 할 거냐 하면…….”
차에 타서도,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가서도 그의 주절거림은 계속됐다.
말만 많은 게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놀라기도 했다.
“뭐야, 회사원들 출장이 뭐 이리 고급스러워?”
“뭘요?”
“아니, 출장 와서 벤츠를 끄는 것도 이상한데, 잠을 이렇게 넓은 데서 잔다고?”
거실 딸린 호텔 방은 무척 넓었고, 장식도 모두 초고급이었다.
학교 기숙사의 좁은 방에 머물던 박승우 과장도 이 방이 얼마나 비싼지는 대충 알았다.
답은 이미 지난 애플 품평회 출장에서 모든 걸 겪어 본 김영길 과장이 했다.
“됐고, 이거나 받아.”
“이게 뭐예요?”
김영길 과장이 건넨 노트북을 받아 든 박승우 과장이 눈을 껌뻑였다.
“사업부장님 발표 자료야.그거 좀 마무리 지어 줘.”
“제가 왜요?”
“나랑 한 대리는 애플 본사에 다녀와야 해.근데 넌 할 일 없잖아.”
“아니, 파트리더 되셨다고 지금…….”
너무 놀라 더듬거리는 박승우 과장의 등을 유현이 툭툭 쳤다.
“잘하시잖아요.MBA 출신 아닙니까.”
“뭐, 뭐?”
“저희 시간 좀 걸릴 거 같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내일 진하게 한잔해요.”
“우리 간다.”
유현이 윙크했고, 김영길 과장은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은 김영길 과장이 유현에게 말했다.
“이러다 삐치는 거 아냐?”
“걱정 마세요.그럴 분 아닙니다.”
유현이 답한 순간이었다.
철컥.
문이 열리며 박승우 과장이 대뜸 얼굴을 들이밀었다.
바로 앞에 있던 김영길 과장이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과장님.”
“왜? 애플 본사에 너 등록 안 돼서 못 들어가.”
김영길 과장이 몸을 물리며 답하자, 박승우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올 때 맛있는 거 좀 사 오라고요.”
“응?”
눈을 껌뻑이는 김영길 과장을 뒤로하고 유현이 답했다.
“과장님 좋아하는 페퍼로니 피자로 사 올게요.치즈 많은 걸로요.”
“콜.역시 내 멘티다.”
박승우 과장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은 살이 빠져도 그대로였다.
유현이 빙긋 웃으며 같이 엄지를 내밀어 주었다.
애플 본사에 도착한 유현은 김영길 과장과 갈라졌다.
김영길 과장은 애플폰4 패널 마케팅을 협의하기 위해 필립 실러를 만나러 갔고, 유현은 2층 디자인 연구실로 이동했다.
기다리고 있던 존 노만이 유현을 보자 버선발로 달려왔다.
“하하.우리의 구세주가 드디어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네요.”
“고생 많았죠?”
유현이 묻자, 존 노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헝클어진 금발과 짙어진 주근깨가 그의 고단함을 보여 줬다.
“죽는 줄 알았어요, 진짜.그래도 거들어 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디자인이 나쁘지 않다고 해 주셨잖아요.덕분에 스티브가 그 정도 선에서 타협한 겁니다.”
“천하의 스티브 잡스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에요.우리 사이에선 스티브가 스티브 말을 듣는다고 해요.”
참 별 희한한 말도 다 있다.
피식 웃은 유현이 테이블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한번 볼 수 있을까요?”
“아, 여기요.”
존 노만은 테이블 위에 놓인 애플폰4를 유현에게 건넸다.
100번 가까운 디자인 수정을 거친 최종 스티커가 안테나 면 위에 붙어 있었다.
스윽.
받아 든 유현이 스티커 부분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금속 느낌이라 옆면과 크게 이질감이 없었고, 두께도 얇아 티가 잘 나지 않았다.
각도에 따라 빛 반사 정도가 달라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이틀 전 봤을 때와 동일했다.
유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근데 지난번에 조나단이 보여 준 것에서 뭐가 변한 거예요?”
“로고 크기가 1.2퍼센트 줄었고, 배열이 좌로 0.14밀리미터 옮겨졌어요.그리고 재질을 좀 더…….”
존 노만이 떠들어 댔지만, 유현의 눈에는 그게 그거로 보였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대단하네요.”
“하.진짜 죽어라 고생했는데 다행히 죽진 않았네요.”
“디자인 하는데 죽을 일이 뭐 있나요.”
유현이 웃자, 존 노만이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만약 스티커 아이디어가 없었으면 우리 정말 다 죽었을지도 몰라요.하드웨어 담당한 데이비드가 가장 먼저 무덤에 갔겠죠.”
“농담도 살벌하시네요.”
“절대 농담 아닙니다.”
존 노만이 정색한 것처럼 농담이 아니라는 건 유현도 잘 알았다.
안테나 게이트가 터지자 하드웨어 책임자 샘 페이스터가 옷을 벗었단 건 IT 업계에서 유명한 일화이니 말이다.
그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볼 것도 없었다.
유현이 모른 척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근데 저한테 건넬 게 있단 게 뭐예요?”
“아차차.이거요.샘 페이스터가 당신에게 꼭 전해 달라고 한 거예요.”
존 노만이 테이블 아래에 있는 박스를 건넸다.
애플폰4 그림이 위에 그려진 흰 박스였다.
“애플폰4?”
“시리얼 넘버 1인 제품이죠.스티커는 제가 직접 붙였습니다.”
“와.놀랍네요.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유현이 감탄했다.
이건 당장 팔아도 수천만 원의 값어치를 하는 제품이었다.
가치보단 신경 써 준 마음이 고마웠다.
그런 유현에게 존 노만이 물었다.
“저도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죠?”
“이거면 충분합니다.”
“아뇨.다르죠.뭘 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존 노만에게 유현이 물었다.
“아.존, LA 디자인 스쿨 출신이죠?”
“네.이래 봬도 장학생입니다.교수로 모시겠단 요청도 많다고요.에헴.”
어깨를 으쓱이는 존 노만에게 유현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럼 제가 뭘 주실지 정해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당연하죠.”
존 노만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유현은 두 과장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위치한 모스콘 센터로 이동했다.
눈뜨자마자 헐레벌떡 차에 탄 박승우 과장이 투덜댔다.
늦은 시간까지 놀지도 못하고 일만 했으니 짜증날 만했다.
“뭘 이렇게 일찍 가?”
“지금 가도 사람들 잔뜩 있을 겁니다.”
운전대를 잡은 유현의 말에, 박승우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애플이 잘나가도 그 정도는 아니지.”
그리고 잠시 후, 박승우 과장은 말을 바로 정정해야 했다.
이미 모스콘 센터 주변 주차장은 만차였고, 행사장을 둘러싸고 길게 들어선 행렬은 300미터에 달했다.
전 세계에서 파견된 취재진 500여 명도 닫혀 있는 입구 앞에서 장사진을 쳤다.
CNN, BBC, CNET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뉴스 기자들이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오전 7시, 공식 행사 시작 3시간 전의 풍경이었다.
“헐.이게 뭐야.”
“보세요.많죠?”
“그럼 우리도 기다려야 해?”
“설마요.우린 다릅니다.”
유현이 휴대폰을 들자, 1분 채 안 되어 건물 안에서 존 노만이 튀어나왔다.
유현에겐 그저 친근한 애플 직원일 뿐이지만, 존 노만은 디자인 업계에 떠오르는 샛별로 유명했다.
웅성웅성.
그를 알아본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존 노만은 유현 일행을 깍듯이 대했다.
“제가 너무 늦게 나온 건 아니죠?”
“설마요.”
“들어오시죠.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존 노만이 경비가 서 있는 후문 쪽으로 팔을 뻗어 안내했다.
유현은 옆에 있는 박승우 과장을 끌었다.
“가시죠, 박 과장님.”
“어? 어.”
박승우 과장은 느닷없는 VIP 대우에 눈을 껌뻑였다.
박승우 과장이 놀란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필립 실러가 유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디자인의 전설이라 불리는 조나단 아이브가 두 팔 벌려 유현을 반겼다.
차기 CEO 물망에 오른 팀 쿡이 유현을 치켜세웠다.
심지어 스티브 잡스가 직접 나오더니 유현을 끌고 시크릿 룸 안으로 들어갔다.
박승우 과장은 너무 놀라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털썩.
구석 벤치에 앉은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이, 이게 뭐예요?”
“뭐긴, 네 잘난 멘티가 대접 받는 모습이지.”
“와, 저 자식, 진작 말해 주지.”
혀를 내두르는 박승우 과장을 보며 김영길 과장이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먼저 미국에 도착한 그가 했던 일을 들었을 땐 정말 기겁했었다.
그리고 애플 본사에 들러 그 결과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미 품평회 때도 대단한 모습을 봐 왔던 자신도 놀랄 정도인데, 박승우 과장은 오죽할까?
김영길 과장은 멍한 표정의 박승우 과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조금 있다 봐 봐.네 멘티가 얼마나…….”
그때 박승우 과장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지금이라도 말해야겠어요.”
“뭘?”
“스티브 잡스 사인 말이에요.지금 아니면 또 언제 받아 보겠어요.”
“…….”
눈빛을 반짝이는 박승우 과장을 보며 김영길 과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이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박승우 널 잠시 잊었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승우 과장은 스티브 잡스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며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애플 발표회 시작 10분 전이었다.
유현은 발표회장 객석 중앙 앞에서 3열 좌석에 자리했다.
웅성웅성.
뒤로 돌아보니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보였다.
우측의 가장 구석 자리에 유현의 시선이 닿았다.
금발의 여자가 앉아 있는 그곳이 20년 전 유현의 자리였다.
스피커 바로 밑 자리다 보니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땐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로 불편했었다.
달라진 건 자리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엔 신찬용 과장이 옆에 있었지만, 지금은 김영길 과장과 박승우 과장이 함께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박승우 과장이 감탄했다.
“와.카메라 진짜 많네.”
“촌놈 티 좀 내지 마.”
김영길 과장이 한 소리 하자, 박승우 과장이 틱틱댔다.
“뭐 어때요.한국말도 못 알아들을 텐데요.”
“아이구, MBA에서 염치는 안 가르쳐?”
“염치 배울 거였으면 유현이한테 진즉에 배웠겠죠.안 그러냐, 유현아?”
친근하게 묻는 박승우 과장을 보며 유현이 카메라를 가리켰다.
“이거 지금 전 세계에 생방송되고 있는 중이에요.”
“진짜? 우리나라에도?”
“그럼요.다들 밤새워서 보고 있어요.회사에서도요.”
“헉.비비 크림 바르고 올걸.”
박승우 과장이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런 미친놈.”
“하하.”
김영길 과장이 헛웃음을 지었고, 유현은 어깨를 들썩였다.
유현이 지금 이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겼다.
과거의 바짝 얼어 있던 유현은 절대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발표 시작을 앞두고 애플 생중계 화면이 켜졌다.
발표회장의 열기가 전해졌고, 곧이어 대기실 화면이 비춰졌다.
대기실을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에 그간 모습을 꽁꽁 감추고 있던 스티브 잡스가 잡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발표 현장에 있는 사람들도 아직 모르는 뉴스가 속보로 나왔다.
동시에 애플 발표회 시청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들썩였고, 인터넷 뉴스에는 관련 뉴스들이 범람했다.
미국은 한국보다 더했다.
많은 회사들이 일을 멈추고, 애플 발표회에 주목했다.
심지어 공부를 멈추는 교육기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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