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48
상남자 448화
LA 디자인 스쿨의 한 강의실이 바로 그런 예였다.
단상 앞에 선 젊은 교수가 중앙 스크린 옆에 비치된 50인치 TV를 가리켰다.
“애플 발표회를 보는 게 웬만한 공부보다 나아요.특히 스티브 잡스의 발표는 디자인을 예술로 승화시키죠.”
교수는 이어서 스크린에 띄워진 로고를 언급했다.
한재희가 과제로 낸 로고로, 사용처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애플 발표 보고서에 신디의 로고가 나오는지도 보고요.당연히 거짓말은 아니겠죠, 신디?”
교수가 한재희를 저격하자,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터졌다.
“신디는 뻥쟁이야.스티브 잡스가 미쳤다고 저 로고를 띄워?”
“그러게.영어도 못하는 애가 허세만 있어.”
“능력도 없으면서 회사 뒷배 믿고 온 거지.재수 없어.”
한재희 옆에 앉은 여학생, 소피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교포 3세인 소피아는 어설프지만 한국어를 곧잘 했다.
“참아, 신디.다들 널 질투해서 그런 거야.”
“왜? 누가 뭐라 그랬어?”
“아, 아냐.아무것도.”
멍하니 눈을 껌뻑이는 한재희를 보며 소피아가 고개를 저었다.
한편, 한재희는 얼마 전 장혜민 책임의 품평을 떠올렸다.
-디자인이 괜찮아지긴 했는데, 여전히 수수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이 부족해.
대체 그게 무슨 의미일까?
한재희의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애플 발표회장 무대의 조명이 켜졌다.
팍.
객석이 기대감으로 들썩였다.
곧이어 핀 포인트 조명이 좌측 구석에 있는 대기실 쪽으로 향했다.
문이 열렸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트레이드마크인 검은색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스티브 잡스였다.
항암 치료로 인해 살이 많이 빠졌지만, 걸음걸이는 루머와 달리 건재했다.
그가 손을 들자 객석이 들썩였다.
“와아아아아아.”
박승우 과장이 감탄했다.
“이야.정말 슈퍼스타야, 슈퍼스타.”
“대단한 사람이지.”
김영길 과장도 거들었고, 유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스티브 잡스가 대단하단 데는 이견이 없었다.
무대 중앙에 올라선 스티브 잡스가 미소를 지으며 객석을 살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올렸다.
스윽.
동시에 화면이 전환되며 작년에 출시된 애플패드의 영상이 나왔다.
디테일한 제작 과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이 들게 했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제품을 쓰고 있구나.
반면, 옆에 있는 김영길 과장은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저런 대단한 제품에 우리 패널이 들어가네.”
“그러게요.”
유현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화면엔 애플패드의 놀라운 기록들이 주르르 나열됐다.
“와.”
그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애플패드는 역사상 그 어떤 제품보다 빠른 속도로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 가고 있으며…….”
스티브 잡스가 강조한 부분에선 으레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짝.
일방적인 자화자찬이었지만, 모두를 홀릴 만큼 스티브 잡스의 발표엔 짜임새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애플패드 발표만 30분이 넘어가자 객석이 점점 술렁이기 시작했다.
“애플폰4는 루머였나?”
“역시 유출돼서 그런가?”
“문제가 있단 게 맞는 거겠지?”
“하.이거 보려고 온 게 아닌데.”
시간이 갈수록 뜨거워진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 갔다.
모두의 얼굴에 절망적인 표정이 스쳤다.
휘릭.
그때 화면이 전환되며 애플폰4가 튀어나왔다.
“오오.”
극적인 반전에 청중들이 비명을 질렀다.
유출된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객석은 실망한 기색 따윈 없어 보였다.
뜸을 제대로 들인 덕분에 다들 애가 타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크린에 뜬 애플폰4를 보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리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전 건 잊어 주세요.이게 세계 최초로 소개되는 애플폰4입니다.”
기기 유출 건으로 스티브 잡스가 격노했단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관련 업체는 방문 초대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스티브 잡스는 굳이 그 건을 언급하며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하하하하하.”
덕분에 자칫 김이 샐 수도 있는 발표가 더 극적으로 변했다.
절망이 감돌았던 객석은 환희로 가득 찼다.
이렇게 청중들의 심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그것도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한 발표에서 말이다.
이건 유현도 불가능한 부분이었다.
유현은 여유 있게 객석을 훑는 스티브 잡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배우고 싶다.
더 발전하고 싶다.
두근두근.
모처럼 느껴지는 자극에 유현의 가슴이 뛰었다.
본격적인 쇼 타임은 지금부터였다.
스티브 잡스는 한 톤 높아진 목소리와 빨라진 리듬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애플폰4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위해 옆면을 알루미늄 처리 했으며…….”
화면에는 애플폰4의 해부된 모습에 이어 장점들이 떠올랐다.
20퍼센트 감소된 두께.
1.5배 길어진 배터리 타임.
4배 빨라진 정밀한 칩셋.
“와아아아.”
수치가 뜰 때마다 큰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런 대단한 변화가 서두에 불과하단 듯 스티브 잡스는 빠르게 넘겼다.
팍.
갑자기 화면에서 모든 게 사라졌고, 스티브 잡스의 목소리 톤이 변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꿀꺽.
극적인 긴장감에 청중들이 잔뜩 몰입한 순간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눈빛을 번뜩였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디스플레이 혁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화면에 큼지막한 글씨가 툭 떨어졌다.
스티브 잡스가 전에 없이 높은 톤으로 그 말을 강조했다.
“우린 인간의 망막을 초월한 이 디스플레이를 레티나 디스플레이라 정의합니다.”
“오오오오.”
객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유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20년 전, 과거 흥분했던 그 순간이 떠오른 탓이다.
마치 그 장면을 복사라도 한 듯 스티브 잡스는 유려한 말로 객석을 흔들어 놓았다.
스펙을 세부적으로 나열했고, 애플폰3와 비교해 시각적으로 차이를 보여 줬다.
초고해상도를 강조할 땐 기술적인 설명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다.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강조했다.
관심 없던 사람들조차 뇌리에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박힐 정도였다.
스티브 잡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례적인 극찬을 더했다.
“이런 세계 최고의 디스플레이가 애플폰4와 함께합니다.”
“와.”
청중들은 홀린 듯 그의 마법에 빠져들었다.
옆에서 두 손 모으고 있는 김영길 과장이나,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박승우 과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봐도 대단하네.’
유현은 감탄하며 기억의 페이지를 접었다.
여기까지가 과거 유현이 기억하던 스티브 잡스의 발표였다.
이 정도만 해도 패널을 독점 공급했던 한성전자의 주가에 날개가 달렸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유현의 시선이 새로운 페이지가 추가되는 현장으로 향했다.
모두 넋을 잃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스티브 잡스가 운을 띄웠다.
“누구나 만들 수 있다면 최고라 할 수 없겠죠?”
화면이 전환되며 애플폰4 옆에 로고 하나가 떠올랐다.
R을 형상화한 레티나 프리미엄 로고 아래 4개의 작은 알파벳이 반짝였다.
처음 보는 로고 앞에서 객석이 술렁였다.
웅성웅성.
스티브 잡스가 로고를 콕 집어 강조했다.
“애플폰4는 세계 최고의 디스플레이 회사로부터 인증 받은 레티나 프리미엄 제품을 씁니다.오로지 애플에게만 허용된 디스플레이죠.”
“오오오오.”
뭔지도 모르고 감탄하는 사람들에게 스티브 잡스가 말했다.
“이걸로 우리는 디스플레이 기준을 완전히 새로 정의했습니다.경쟁 제품들은 몇 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 없는 놀라운 수준의 화면을, 애플폰4에서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와아아아아.”
환호성은 점점 커졌다.
스티브 잡스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텐션을 더 올렸다.
“디스플레이 역사는 애플폰4 전후로 바뀔 겁니다.레티나 디스플레이가 바로 그 시작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스크린에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
삐익.
짝짝짝짝짝짝짝.
환호성과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보고 있던 유현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 시각, 한성타워 13층이 들썩였다.
팀 테이블에 올려진 TV를 보던 권세중 대리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진짜 미쳤다.어떻게 이렇게 띄워 줘?”
같이 밤샘 업무를 하던 이찬호 대리와 황동식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초대박이다.스티브 잡스가 이런 적 있어요?”
“아니.한 번도 없지.진짜 완전히 뒤집어질 거 같은데.”
그때 노트북으로 해외 뉴스를 체크하고 있던 장준식이 소리쳤다.
“지금 기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냥 기사가 아니었다.
CNN, BBC, CNET 등 해외 유력 언론들이 너도나도 한성전자를 띄우고 있었다.
보고 있던 임명환 과장이 감탄했다.
“헐.대체 광고비 얼마를 아낀 거야?”
마케팅팀 출신인 그는 해외 유명 언론에 이런 홍보성 기사를 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깨질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옆에 있던 최민희 팀장이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말했다.
“광고비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스티브 잡스가 직접 세계 최고라고 했잖아.”
“이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죠?”
유혜미 과장의 물음에 최민희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어쩌면 진짜 대격변이 일어날지 몰라.”
듣고 있던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한편, LA 디자인 스쿨의 한 강의실에 침묵이 드리웠다.
스크린에 띄워진 것과 같은 로고가 TV 화면에 나오는 순간 부터였다.
한재희 옆에 있던 소피아가 놀라 눈을 껌뻑였다.
“시, 신디, 네 로고를 스티브 잡스가 발표했어.”
“뭐야? 오늘이었어?
한재희가 뒤늦게 알아채고 화들짝 놀랐다.
“모, 몰랐어?”
“어.뭐라고 한 거야?”
“으응? 그게…….”
소피아는 어설픈 한국어로 설명했다.
그때 침묵을 깨고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신디의 말이 맞았군요.한성의 커넥션이 나쁘지 않네요.”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술렁였다.
“진짜 한성 뒷배가 대단하네.”
“그러게.잘난 것도 없으면서.”
질투 어린 시선들이 한재희에게 따갑게 꽂혔다.
주변을 힐끔 본 한재희가 소피아에게 물었다.
“내용 괜찮았다며?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너 진짜 몰라?”
“뭘?”
너무나 태연한 반응에 소피아는 황당했다.
‘너 설마 왕따 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거야?’
그녀는 목구멍까지 닿은 궁금증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그렇구나.”
한재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녀는 바쁜 학교 일정 속에 장혜민 책임이 내 준 숙제를 병행해야 했다.
잠잘 시간도 모자란데, 주변에 신경 쓸 여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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