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5
상남자 45화
사람은 절대 갑자기 변하지 않았다.
연말이라 남은 돈을 다 써야 하거나, 업무에 여유가 있을 때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서 아니다.
이번에 문화 회식을 한단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다른 팀장은 모르지만 조찬영 상무의 눈치에 껌뻑 죽는 시늉까지 할 오재환 팀장의 경우는 더 그랬다.
안 그래도 말 많고, 술 좋아하는 팀장이 상황도 여의치 않은데 새로운 시도를 할 리가 없었다.
그것도 예산을 초과하는 회식은 절대 하지 않았다.
가깝고 술 먹기 좋고 저렴한 곳.
끝나고 바로 노래방으로 갈 수 있는 곳.
딱 오재환 팀장의 취향이다.
지금껏 팀 회식한 곳들의 장소만 봐도 안다.
물론 대놓고는 말 못 하지.
젊은 사람들에게 감각 있는 팀장으로 보이고 싶을 테니까.
그래서 유현이 신입사원이 원하는 장소란 면죄부를 준 거다.
김영길 대리 입장에서야 삼겹살집이 되면 황당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지고 돌아와서 다시 자료 작성하다가 결국 삼겹살집으로 가는 것보단 백번 낫다.
삼겹살집 사건과 상관없이 박승우 대리는 마지막 보고 준비에 막바지였고, 팀 역시 정신없이 돌아갔다.
영업, 마케팅 팀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개발부서를 관리해 일정을 챙기기도 벅찼다.
게다가 다가올 전시회 기획 준비를 하고, 업체 사람들과 미팅을 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정작 주도적으로 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일과 시간엔 정신없이 바쁜 상품기획팀의 현실이었다.
따르르릉.
그때 또다시 책상 위에 올려진 유선전화가 울렸다.
빈자리에서 울리는 전화를 받는 것 역시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다들 정신없는 상황이라 유현이 수화기를 든 다음 별표 버튼을 두 번 눌러 당겨 받았다.
“모바일 상품기획팀 한유현입니다.”
-최민희 과장님 부탁합니다.
“지금 자리 비우셨습니다.어디라고 전해 드릴까요?”
현일자동차 내장 제품 기획팀 소속이란 그는 담당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단 정석적인 답변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제품 디자인이 바뀌어서 LCD 패널 인치도 바뀌어야 하거든요.갑자기 또 그래서 미안하긴 한데 이거 대응 안 되면 저희 한성 거 못 써요.
“네.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냥 전하는 게 아니라 빨리 답변을 주셔야 해요.지금 일성전자 쪽에서도 계속 컨택 오고 있거든요.
이 사람 성격이 그런 걸까?
유현이 같은 파트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불필요한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만큼 중요하단 걸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다.
최민희 과장의 업무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어떤 상황인지는 쉽게 이해했다.
현일자동차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내비게이션의 패널 스펙을 바꾸고자 함이었다.
문제는 그게 규격 외 제품이란 점이다.
내비게이션은 주로 중소기업에서 만들었다.
다만 터치까지 되는 패널은 중국에서 구하기 힘들어 한성이나 일성의 패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워낙 다양한 기업들이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한성에선 마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같은 규격의 제품을 팔아 왔다.
덕분에 고객사에서 알아서 제품을 부품에 맞췄다.
한마디로 을이지만 갑 같은 을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일자동차란 대기업이 고객군으로 들어오며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떻게든 맞춰 줘야 하는 상황이 온 거다.
하지만 많이 팔리지도 않는 제품을 규격 외로 하며 단가를 맞추기엔 제품성이 너무 떨어졌다.
무엇보다 그 과정을 위해 개발부서 설득은 둘째 치고, 영업팀에게까지 허락을 구해야 한다.
애초에 영업팀이 벌여 놓은 일인데 최민희 과장이 책임을 져야 하는 이상한 구조다.
거기다 담당까지 설득해야 하는데 그 과정 또한 만만치 않다.
안 그래도 2명이 퇴사하며 갑자기 떠안은 프로젝트였다.거기에 영업팀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이런 프로젝트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가 또 있었다.
여성 비율이 낮은 LCD 사업부에서 여자의 몸으로 과장까지 조기 진급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만큼 성공을 위해 갈망하며 열심히 일해 왔단 의미였다.
하지만 결혼하고, 긴 출산 휴가를 갔다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주요 프로젝트에 빠졌고, 3파트로 옮겨 남들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게 바로 지금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이 안 좋은 환경에서 꾸역꾸역 성과를 냈다.
어느 정도 성과를 인정받으려던 찰나, 결국 그녀는 가정에 문제가 생겨 퇴사하고 만다.
-내가 쌓아 온 건 다 유현 씨에게 넘겨줄게.욕심내는 만큼 꼭 성공했으면 좋겠네.
유현과 그리 친분 있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 가는 길에 많이 배려해 줬다.
그땐 왜 그런지 몰랐는데, 최민희 과장은 유현을 과거의 자신으로 본 듯했다.
별것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받은 게 많았다.
외국계 자동차 업체까지 다 뚫어 놓은 상태라 유현은 크게 손 안 들이고 성과를 챙길 수 있었다.
만약 같은 입장이라도 그럴 수 있었을까?
당시엔 받아도 고마운 줄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최민희 과장을 꼭 다시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사이 상대방 목소리가 들렸다.
-제 목소리 들리시죠? 네?
“네.그럼요.”
유현은 적당히 응대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최민희 과장이 겪고 있는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돕고 싶었다.
불필요한 프로세스를 다 걷어 내고, 주도적으로 일하게 할 순 없을까?
그때 귓가에 조찬영 상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또 돌아다니며 팀을 감시하다가 복도에 있는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유현의 머릿속에 신입사원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무식한 방법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상대방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렀다.
-……저도 좀 답답한 상황이라 하소연을 늘어놓았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여튼 빨리 좀 재기획안 좀 보내 주세요.안 되면 저희가 그쪽 담당님께라도 메일을 보내 줄게요.
쓸데없이 말 많은 사람이라 참 고마웠다.
유현은 조찬영 상무의 시선을 힐끔 살폈다.
면담을 통해 거리를 좁혀 두었기에 충분히 반응하리라 예상했다.
유현은 큰 목소리로 답했다.
“네? 저희 담당님이요!?”
순간 무슨 일인가 싶어 근처에 있던 조찬영 상무가 고개를 돌렸다.
함께 있던 팀장은 당황했지만 이미 통화에 관심이 쏠린 후였다.
-네.그게 무슨…….
수화기 너머론 고객사 직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민희 과장은 머리가 지끈 아팠다.
제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성과 낼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바쁘기만 엄청 바빴다.
휴가 기간 동안에도 어찌나 전화벨이 울려 대던지 미칠 지경이었다.
일하지 않을 때는 핸드폰을 아예 무음으로 해 버린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10층 실내 쉼터에 앉은 그녀 앞엔 여직원 여러명이 자리했다.
최민희 과장은 모처럼 친한 후배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같은 파트였던 1파트 후배 김은영 사원과, 담당 비서로 있는 이애린 사원이 있었다.
이애린이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과장님 정말이라니까요.여기 앞에서 넘어지는 청소 아주머니를 유현 씨가 갑자기 튀어 나가더니 딱 잡았어요.”
“에이, 여기서 저 앞까지는 너무 멀지 않아? 반응 속도가 되나?”
“제가 봤다니까요.그리고 있잖아요.”
“그리고 뭐?”
“어제 유현 씨가 조 담당이랑 면담했는데 글쎄, 끝나고 조 담당이 껄껄대며 웃더라고요.그 인색한 양반이 그러는 거 처음 봤어요.”
그 말을 김은영 사원이 받았다.
“하긴, 듣다 보니 생각난 건데 지난번에 유현 씨가 고재윤 차장이랑 엮였잖아요.”
“헐.그 쓰레기가 유현 씨보고 또 지랄했겠네요?”
고재윤 차장의 이름이 나오자 이애린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담당 전체에서 사이코로 유명했다.
“예.하려고 했죠.제가 맞은편에서 긴장하면서 보고 있었거든요.그런데 갑자기 유현 씨가 엄청 소리 지르면서 잘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왜요? 유현 씨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요?”
화들짝 놀란 이애린을 보며 김은영 사원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잘못은 없었죠.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뭔데요?”
“하필 그때 지나가던 담당한테 딱 걸렸단 거예요.”
“어머! 오지랖 넓은 담당이 또 끼어들었겠네?”
“맞아요.덕분에 팀장은 담당에게 대판 깨지고, 고재윤 차장은 팀장에게 엄청 털렸죠.뭐, 그건 좋더라고요.”
“호호호, 그건 쌤통이네요.”
김은영 사원과 이애린은 모처럼 죽이 맞아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민희 과장이 물었다.
“좀 개념이 없는 건가?”
“신입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죠, 뭐.하여튼 좀 특이한 사람이에요.”
“에이, 특이한 사람 아니고, 특별한 사람.”
김은영 사원의 말을 이애린이 정정해 줬다.
최민희 과장은 의아했다.
오늘 오전에 인사했을 땐 그리 특별해 보이진 않아서다.
그냥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정도였다.
“과장님이 같은 파트니까 잘 챙겨 주세요.”
“애린 씨가 마음에 들어 하긴 하나 보네.”
“우리 담당에선 그만한 사람 없으니까요.호호.”
남자에게 까칠하던 이애린의 마음마저 돌린 한유현이란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최민희 과장의 머릿속에 궁금증이 생겨났다.
간단한 티타임을 끝낸 최민희 과장은 1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자신의 자리 앞엔 팀장과 담당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를 들은 한유현 사원이 있었다.
“어.왔네.최 과장, 이리 와 봐.”
“네, 팀장님.”
심각한 표정으로 부르는 오재환 팀장 앞으로 최민희 과장이 다가갔다.
입을 연 건 미묘한 표정의 조찬영 상무였다.
“현일자동차 들어가는 패널 새로 해야 한다며?”
“네? 아, 네.그게 갑자기 고객사에서 연락 온 거라…….”
아직 보고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당황한 나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앞에 벌어질 상황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담당은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했냐며 불같이 화를 낼 거고, 또 자료를 만들라고 할 건 너무도 뻔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면 얼마든지 하겠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영업팀, 개발팀 설득해 가며 납득 가능할 때까지 노력해야했다.
별 의미도 없는 자료들을 만들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했다.
최민희 과장은 담당과 팀장 사이에서 공손하게 서 있는 유현을 바라봤다.
신입 짓인가?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최민희 과장은 아랫입술을 질끈 문 채 담당의 고성을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온 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중요한 프로젝트지 않나.현장 가서 직접 부딪히며 한번 만들어 봐.해야 하는 프로젝트면 바꿔서라도 해야지.”
“담당님.”
조찬영 상무는 최민희 과장의 말을 자르며 말을 이었다.
“아, 대충 내용은 들었어.간단히 상황 설명하는 보고서만 한 장 만들어 보내 봐.영업팀과 개발팀엔 내가 말해 놓을 테니까.”
“…….”
침묵하던 최민희 과장에게 조찬영 상무의 다음 지시가 떨어졌다.
물론 부드러운 말투였다.
“최 과장은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신규 기획에만 포커싱해.무슨 말인지 알지?”
“네?”
“당찬 모습을 한번 보이란 말이야.이 정도 쉬었으면 예전 모습으로 돌아올 때 됐잖아.”
뭐지?
최민희 과장은 눈을 껌뻑거리며 갑자기 성인군자가 된 조찬영 상무를 바라봤다.
짧게 잡아도 일주일 내내 걸려야 할 담당 설득 작업이 몇 분 안에 된 느낌이다.
그녀는 일단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래.오 팀장도 잘 챙겨 주고.”
“네, 담당님.”
오재환 팀장이 조찬영 상무가 가는 길을 배웅하러 간 사이 최민희 과장은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유현의 얼굴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눈빛에, 유현은 말 대신 살짝 지어진 미소로 답했다.
‘한번 잘해 보세요.’
과거엔 이 부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최민희 과장은 잘 해낼 거라 믿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업계와의 계약에도 공헌했던 그녀 아니던가.
외부 태클만 없었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역량을 가졌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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