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11
상남자 611화
유현은 그 점을 파고들었다.
“그런 걸 능력으로 깨부수는 게 차장님 스타일 아닌가요?”
“누구 마음대로 내 스타일이래?”
“워낙 추진력이 좋으셔서 한 말입니다.”
유현의 칭찬에도 나도연 차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뭐, 좋은 말이긴 한데, 내가 깨부수러 가야 하나 싶어.”
“그러면요?”
“곧 신경수 이사님이 복귀할 거 아냐.굳이 지금 신경욱 부사장님을 선택해야 할까?”
신경수란 이름의 등장에 유현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안타까웠다.
이들은 지금 신경수의 본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땐 그룹전략실이 부활하실 거라 믿으시는 건가요?”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해.그래서 아마 다들 움직이지 않을 거 같고.”
“아마 아닐 겁니다.그랬다면 진작 연락을 했겠죠.”
“맞아.어쩌면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겠지.그래도 혁신전략실은 선뜻 손이 안 가는 게 사실이야.”
솔직한 말이었다.
나도연 차장은 그룹전략실로 입사해 쭉 그곳에 몸담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둥지를 옮기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유현은 그녀를 무작정 잡는 대신 현실적인 방안을 내밀었다.
“이럴 땐 선택을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뭔데?”
“조건 보고 판단하세요.자신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곳으로 가면 됩니다.아니면 안 가면 그만이고요.”
“그러다 한쪽에 찍히면?”
“어떻습니까.역으로 엿 먹여 주거나, 아니면 때려치우면 되죠.”
피식.
입꼬리를 올린 나도연 차장이 의외의 말을 뱉었다.
“그 좋은 방법, 신낙균 대리에게도 알려 줘 봐.”
“신 대리가 왜요?”
“주저하고 있는 눈치거든.아마 한 실장 연락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제 연락을요?”
놀란 유현에게 나도연 차장이 담담하게 뒷말을 이었다.
“그래.꽤 오래전부터.”
“…….”
생각지 못한 말에 유현이 눈을 껌뻑였다.
나도연 차장을 보낸 후, 유현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화면에는 신낙균 대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 녀석이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과거 유현에게 악랄했던 그와의 관계는 이제 많이 변했다.
주도권은 유현에게 있었고, 빳빳하던 신낙균 대리의 고개는 팍 숙여졌다.
그렇다고 신낙균 대리가 마음으로 따르느냐면, 그건 아니다.
유현이 아는 신낙균 대리는 득이 없으면 결코 움직일 인물이 아니었다.
한성디스플레이로 이동한 유현을 도와준 건 그 연장선상이었다.
-한 과장님이 넘겨준 프로젝트 덕분에 성과 인정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유현은 신화반도체 건을 급히 물어보기 위해 신낙균 대리와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
그땐 그의 입장에서 얻은 득이 있었지만, 이젠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그런데도 아직 연결고리가 남아 있을까?
사실 자기중심적이고 말을 막하는 경향이 있긴 해도, 시킨 일은 무척 잘해내는 편이었다.
그룹 계열사 인원들을 대하는 솜씨나 언어 실력도 나쁘지 않다.
특히 다양한 업체와의 실무 경험은 버리기 너무 아까웠다.
“흠.”
탄성을 삼킨 유현은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메시지창을 열었다.
막상 전화로 할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은 까닭이다.
-나 혁신전략실로 이동하려고.생각 있으면 같이 일하자.
미사 어구는 빼고 핵심만 전했다.
까탈스러운 그의 성격에는 이런 편이 차라리 낫다는 판단이었다.
어떤 답이 돌아올까?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 단출한 메시지가 들어왔다.
-생각해 보고요.
한 줄의 텍스트만으로 고개가 빳빳한 녀석의 모습이 그려졌다.
유현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녀석답네.”
아무래도 쉽게 데려오긴 어려운 모양이다.
유현은 아쉬움을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시각, 그룹 운영 본부의 한 사무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신낙균 대리에게 박근덕 차장이 물었다.
“신 대리, 뭘 보고 그렇게 웃어?”
“제가 언제 웃었습니까?”
“맞구만, 뭘.어디 좋은 곳에서 연락 왔어?”
정색하는 신낙균 대리에게 박근덕 차장이 엉겨 붙었다.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건만, 어떻게든 뭔가 얻어 내려는 모습이다.
하여간 생존력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이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가던 길 계속 가시죠.”
“에이, 뭔데? 무슨 일인데? 네가 풀면, 나도 좋은 정보 풀게.”
“정보 같은 거 아니에요.”
“그럼?”
“그냥…… 친한 선배에게서 안부 연락 온 겁니다.”
얼떨결에 둘러댔지만, 참 어이없는 변명이었다.
그 와중에 신낙균 대리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생각해 보겠다던 신낙균 대리에게는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나도연 차장도 일단 확답을 미뤘다.
결국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유현의 달콤한 말이 아니라, 현실적인 조건이다.
유현도 여기까지 손댈 생각은 없었다.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사장단 회의 전까지 한성디스플레이만의 내부 혁신 방안을 수립하는 게 바로 그 일이었다.
어느 정도 틀을 잡아 놓은 상태다 보니, 시간이 많이 들진 않았다.
유현과 미래기술TF 동료들은 오주환 전무가 불러 모은 실무진들과 소통하며, 그들이 완성본을 만들 수 있도록 서포트해 줬다.
“혁신전략실 의견으론 인사 시스템을 변경할 때…….”
“네.그 부분을 고려하여…….”
혁신전략실 단기 TF 의견을 더했고, 회사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했다.
이렇게 모은 안은 곧 임준표 사장에게 전해질 터였다.
실무진과 회의를 마친 유현에게 오주환 전무가 다가왔다.
이번 일 때문에 몇 차례 깊게 이야기를 나눠서인지 더 친근한 느낌이다.
최종 정리 사안을 간략히 리뷰한 유현이 불쑥 물었다.
“사장단 회의, 불안하진 않으세요?”
“불안할 게 뭐 있나.사장님이 직접 나서시는 건데.”
“그래도 틀어지면 회사에 피해가 있을 거라고 걱정하셨잖아요.”
맞는 말이다.
한성디스플레이는 로열패밀리의 입김이 닿지 않았다.
과거 방계혈족이 주축이 된 한경회와도 연이 없었다.
그룹 내에 특별한 라인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좋게 보면 독립적이지만, 나쁘게 보면 그룹 내 적이 많다는 걸 의미했다.
이런 상태에서 그룹의 주류 의견과 반대를 내비치면 어떻게 될까?
이전부터 이 부분을 걱정했던 오주환 전무가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니 크게 문제가 없겠더라고.”
“왜 그렇습니까?”
“신경욱 부사장님이 우리 회사 대주주잖아.대주주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설령 뭐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되지.”
잘못한 것도 아니지만, 굳이 책잡힐 일도 아니다.
혹시나 누가 따지면 이렇게 모르쇠로 넘기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네요.사장님도 같은 생각이세요?”
“사장님은 진즉에 마음 굳히셨어.자네가 했던 말 덕분에.”
“어떤 말이요?”
“자네가 그랬지 않나.내 돈 안 내고 직원들에게 생색 낼 수 있는 기회라고.”
유현이 처음 내부 혁신안을 들고 오주환 전무를 찾아갔던 날.
‘성과 분배 제도’ 설명을 듣고 놀란 그에게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했었다.
-회사에 쌓인 돈을 허튼 데 쓰는 게 아니라, 고생한 직원들에게 돌리자는 겁니다.그때, 직원들이 누굴 칭찬하게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랬죠.”
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주환 전무가 설명을 덧붙였다.
“사장님도 말년에 욕심이 있으셨을 거야.”
“어떤 욕심 말입니까?”
“늘 그룹 간섭을 받으셨잖아.이번 기회에 마음껏 하시고 싶으신 거지.”
“답답하셨나 봅니다.”
“누구에게나 내 사업을 하고 싶은 꿈이 있는 거야.난 그 마음이 이해가 가.”
오주환 전무가 사장은 아니지만, 회사 시스템을 다루는 사람이다.
그룹의 간섭을 가장 많이 받았으니, 공감하는 건 당연했다.
오주환 전무의 역할과 임준표 사장의 역할을 다 경험했던 유현으로서는 더욱더 공감 가는 말이었다.
“저도 이해가 갑니다.”
“꼭 경험해 본 느낌이야?”
“간접경험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현이 넉살 좋게 말하자, 졌다는 듯 고개를 저은 오주환 전무가 불쑥 제안했다.
“자넨 참 못 당하겠군.그런 의미에서 언제 술이나 한잔할까?”
“좋죠.”
“그래.자네 떠나기 전에 자리를 마련하지.”
“…….”
떠난다는 걸 알고 있었나?
눈을 껌뻑이는 유현에게 오주환 전무가 미소 지었다.
사장단 회의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막판에 임준표 사장이 마음을 돌릴지, 아니면 예정대로 직진할지는 모른다.
단지 뒤에서 최선을 다해서 받쳤으니, 잘해 줄 거라 믿을 뿐이다.
유현이 사무실을 이리저리 걸으며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타닥.탁.탁.
장준식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내려놨다 반복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유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준식아, 뭐 해?”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준식이 손을 젓자, 옆에 앉은 권세중 대리가 답했다.
“준식이 할 일이 없어서 그래.일중독 초기 증세야.”
“뭐야, 지금껏 열심히 달려왔잖아.”
“정작 우리가 하는 건 없었잖아.경영지원 담당 실무진들이 다 했고.”
어이없어하는 유현에게 권세중 대리가 설명했다.
어느새 다가온 정현우와 장준식도 각각 한 마디씩 했다.
“다른 건 혁신전략실 단기 TF에서 컨트롤했고요.”
“사실 제가 한 게 별로 없긴 합니다.”
“한 게 없긴.우리가 다 중재했잖아.여기까지 이끌어 오고.그 정도면 대단한 거지.”
유현이 황당해하자, 권세중 대리가 불쑥 물었다.
“너도 좀 허전하지 않아?”
“뭐가?”
“보니까 아까부터 괜히 어슬렁거리더구만.”
“내가 그랬다고?”
“어.가만히 결과만 기다리고 있는 거 답답해서 그런 거 아냐? 일은 우리가 벌였는데, 정작 다른 쪽에서 다 하고 있잖아.”
주위는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정작 유현만 여유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답답한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없는 단계는 이미 진즉에 지났다.
그보다 다른 이유가 유현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럼?”
“그냥, 조금…….아니다.그런 게 있어.”
대답하던 유현이 손을 내저었다.
유현에게 일을 떠맡고 홀로 가장 고군분투하고 있을 신경욱 부사장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담기도 쉽지 않아서였다.
분명 지금 하는 일이 그에게 좋게 작용하겠지만, 충돌이 있었다 보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현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아서일까?
눈치 빠른 정현우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이러지 마시고 회식이나 가시죠.”
“아, 현우아, 여의도 맛집 코스 몇 군데 남았지?”
물어 오는 권세중 대리에게, 정현우가 자랑스럽게 손가락 3개를 내밀었다.
“이제 세 군데밖에 안 남았습니다.떠나기 전에 마무리 지으셔야죠.”
“벌써 그렇게나 많이 돌아다녔군요.진짜 맛있었는데.”
맛집 이야기가 기꺼운지, 조금 전까지 일이 없어 안절부절못하던 장준식이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본 유현이 픽, 하고 웃었다.
“준식이가 참 먹을 거 좋아해.”
“네.저도 새로운 취미에 눈을 뜬 기분입니다.”
“먹는 것도 좋은 취미지.유현아, 어때? 콜?”
권세중 대리의 제안에 유현이 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지이잉.
유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내용을 확인한 유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오늘 아무래도 난 안 되겠다.너희들끼리 가.”
“왜? 중요한 일 있어?”
“어.많이 중요한 일.”
유현은 아직 꺼지지 않은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