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4
상남자 64화
20층 야외 테라스에 올라온 박승우 대리 손엔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쏜다더니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냐?”
“연말에 돈 모아서 제대로 된 커피 사 드릴게요.”
“푸하하, 이거 진짜 웃긴 자식이네.”
유현이 넉살 좋게 답하자 박승우 대리는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얼굴색이 좀 돌아오는 느낌이다.
그때부터 박승우 대리의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아이고, 진짜 장난이 아닌 게 뭐냐 하면…….”
“흰머리 나겠네요.”
신입사원에게 뭘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닐 터였다.
오죽 답답하니 하는 말이다.
“후우, 그래도 말 좀 하니까 좀 낫네.”
“제가 잘 들어 드린 덕분이죠.”
“하하, 요 녀석 좀 친해졌다고 기어오르는 것 좀 봐.”
박승우 대리는 혀를 차며 유현에게 손가락질했다.
결코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유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현이 어깨를 으쓱하는 거로 답을 대신하자 박승우 대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안 되겠다.너 담 주에 울산 갈 준비해.”
“안 그래도 세미나 준비 때문에 가 보고 싶었어요.”
“어쭈, 가볍게 생각하나 본데, 가면 진짜 힘든 회사 생활이 뭔지 알게 될 거야.겁 안 나?”
겁?
날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요.제가 여기서 20년을 구른 몸입니다.’
유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출장 가면 맛있는 거 사 주실 거잖아요.”
“푸하하하, 진짜 웃긴 놈이네.그래.알았어.내가 또 기가 막힌 곱창집을 알지.”
“맛없으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푸하하.”
”제 주먹 아픕니다.“
넉살 좋은 유현의 답에 박승우 대리가 크게 웃었다.
두 사람 사이는 불과 한 달 조금 넘게 만난 사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점심 나가서 먹을까?”
“아, 죄송합니다.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오, 여자?”
박승우 대리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자 유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동기요.”
점심시간.
유현은 민정혁, 권세중과 함께 밖에서 식사를 했다.
지난번 동기 모임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터라 세 사람 사이는 꽤나 돈독해져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권세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고, 죽겠다.난 아직도 세미나 주제를 못 정했어.유현이 넌 어때?”
“난 그냥 멘토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 하려고.”
“아, 괜찮네.그래야 도움을 받을 수 있잖아.그치?”
“그렇지, 뭐.”
권세중의 물음처럼 도움을 받기 위해 박승우 대리가 하고 있는 PDA 프로젝트를 세미나 주제로 잡은 건 아니었다.
유현에겐 반드시 이 주제로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 주제면 다른 선배들이 너무 잘 아는 거 아냐?”
“나도 세중이 생각에 동의.웬만큼 알지 못해선 엄청 털릴 거 같은데?”
“안 그러도록 준비해야죠.”
“조심해라.과로로 훅 간다.”
“체력 하면 접니다.”
유현을 힐끔 쳐다본 민정혁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빨리 세미나만 끝났으면 좋겠어.우리 팀은 벌써 이걸로 내기를 걸었어.내가 몇 번 만에 통과하는지 말이야.”
“저도요.제 멘토는 신경도 안 쓰면서 맨날 겁만 줬다니까요.”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처럼 OJT 세미나는 결코 만만치 않다.
팀원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할 뿐만 아니라 팀원들의 평가를 직접 받는다.
이미 과정을 다 겪은 데다가 관련 업무를 하던 사람들이기에 그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발품 팔고 정말 노력해야지만 간신히 통과할 수 있다.
만약 통과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팀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 물론 통과할 때까지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그만큼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유현아, 무슨 방법 없을까?”
“이렇게 한번 준비해 와.”
“뭔데.얼른 말해 줘.”
“나도, 나도.”
“별건 아니고.세미나를 준비할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벌써 한성타워 앞이었다.
같은 시각.
한성타워 앞엔 오전부터 같은 자리에 서서 진땀을 빼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는 영업을 위해 어떻게든 인연이 있는 한성전자 사람들을 찾으려 했다.
평소 연락을 하던 사람들도 웬일인지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직접 찾으러 왔건만 몇 시간째 허탕만 쳤다.
심지어 한 번 접대를 했던 사람도 바쁘단 핑계로 쌩하고 지나쳐 버렸다.
중소기업 영업직은 이래서 서글프다.
그때 그의 눈앞에 낯익은 남자가 보였다.
학교 후배였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아, 한유현!”
시기적으로는 이제 막 신입사원이 됐을 녀석이었다.
영업에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그냥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로비로 들어가려는 유현을 불렀다.
“유현아!”
고개를 돌리자 생소한 얼굴이 유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색한 정장 차림, 땀에 젖은 와이셔츠, 두툼한 서류 가방이 보였다.
복장만 봐도 한성그룹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누구세요?”
“나야.임한섭.인현대 경영학과 99학번.”
이름은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20년 전인 데다가 그 당시 학교생활에서도 선후배를 챙기지 않았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현은 일단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래.반갑다.회사 들어가는 길?”
“네.잠시만요.”
한성타워 앞에 있는 외부인들의 이유는 뻔했다.
초조하고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만 봐도 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선배지만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고 싶었다.
유현이 동기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먼저 들어가.나 잠시 이야기 좀 하고 갈게.”
“알았어.오늘 이야기 고맙다.”
권세중과 민정혁을 보낸 유현은 임한섭 앞으로 다가갔다.
장기간 밖에서 서 있었는지 그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 묻어났다.
“선배님, 들어가서 이야기하실까요?”
“응? 정말?”
임한섭이 대번에 반색했다.
외부인이 한성타워 안에 들어오는 건 쉽지 않다.
작정하고 들어오면 들어오기야 하겠지만 이내 보안요원에게 잡히게 된다.
하지만 안에 있는 임직원과 아는 사이면 1층 로비에 있는 고객 접견실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
고객 접견실 안.
유현은 임한섭에게 직접 뽑은 자판기 커피를 내밀었다.
임한섭이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내가 사야 하는 건데…….”
“아닙니다.제가 후배잖아요.”
“그래도…….”
임한섭은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연신 눈치를 보며 유현을 살피기도 했다.
유현은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성이라는 이름값 때문이지.’
아직 들어 보지 않았지만 임한섭의 입장에서 한성은 반드시 포섭해야 할 고객일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들이 한성 같은 대기업과 함께 일하는 걸 원했다.
그만큼 돈이 되고 경력이 된다.
그렇기에 임한섭이 친근하지 않았던 후배에게까지 절박한 모습을 보였다.
유현은 미소로 임한섭을 대했다.
과거였다면 설령 아는 얼굴이라고 해도 무시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들어라도 주고 싶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임한섭은 어떻게든 유현과의 친분을 알리려는 듯 학교생활 이야기를 꺼냈다.
대부분 가물가물했지만 그중에 언뜻 생각나는 대목도 있었다.
“그때 왜 너 경영 수업 발표할 때 같은 조였었잖아.내가 자료 만들어서 줬고, 네가 발표하고.다른 애들은 돕지도 않고.”
“아…….”
“마지막 발표 때 네가 걔들 이름을 조에서 싹 빼 버렸던 게 얼마나 통쾌하던지.크하하흐.”
이제야 임한섭이 기억났다.
6명이 조를 이루었던 조 과제에서 유일하게 유현에게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가 없었다면 1등을 하지 못했다.
“아, 기억났어요.그때 고마웠어요.”
“내가 뭘.네가 다 한 거지.하하.”
유현이 맞장구를 치자 임한섭은 긴장이 풀리는지 더 편하게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게 회사 이야기로 넘어오는 걸 보니 임한섭도 사회생활을 허투루 한 건 아닌 듯했다.
유현은 임한섭이 건넨 명함을 봤다.
-세미전자 영업팀 임한섭 대리.
“세미전자네요?”
“응.알아? 회사가 작긴 한데, 그래도 전자 부품 분야에선 괜찮거든.요새는 시스템 쪽도 만들고 있고.”
“네.알죠.”
알다마다.
얼마 전 친구 강준기가 취업한 곳이 세미전자였다.
몇 년 후에 한성전자 협력 업체로 선정되고, 규모도 꽤나 커졌다.
코스닥에 상장할 만큼 말이다.
지이잉.
그때, 유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회의실을 좀 잡아 달라는 박승우 대리의 메시지였다.
임한섭이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 가 봐야지.내가 너무 오래 잡았네.”
“아니에요.아직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눴는데요.”
“그게…….”
“괜찮다면 들을 수 있을까요? 혹시 나중에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그, 그럼 좋지.”
머뭇거리던 임한섭은 유현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후배에게 부탁하기 미안했는데 먼저 이야기를 꺼내 주니 고마운 마음까지 든 눈치다.
그런 임한섭에게 유현이 물었다.
“혹시 오늘 몇 시까지 계세요?”
“오늘? 저녁까지 있으려고 했지.”
“그럼 저녁에 같이 식사하실래요? 국밥 맛있게 하는 집 알고 있는데.”
“당연히 괜찮지.언제든 연락해.기다릴게.”
“네.조금 있다 봬요.”
동정심에 한 말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챙겨 주지 못했던 인연이었기에 방법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거기다 강준기가 있는 곳이니 잘 해 놓으면 친구에게까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유현은 환하게 웃는 임한섭에게 고개를 숙인 후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유현은 약속대로 임한섭과 국밥집에서 만났다.
하루 종일 허탕 치느라 피곤할 만도 하건만 후덕하게 웃는 모습이 정겹다.
그의 모습에서 언뜻 박승우 대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유현은 밥을 먹으며 그의 설명을 찬찬히 들었다.
“이건 말이야…….”
제품 포트폴리오의 설명을 늘어놓던 임한섭은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유현 앞에서 이야기를 하니 이상하게 말이 술술 나온 탓이다.
마치 자신이 엄청 중요한 일을 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는 뒤늦게 그게 유현이 경청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는 건 물론 다음 말까지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도록 화두를 던져 주기도 했다.
신입사원인 그에게는 도움이 될 일도 아닐 텐데 마치 자기 일처럼 신경 써 주는 게 고마웠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학교에서 만났던 유현은 자기 성적만 챙기는 부류였다.
다른 선후배와는 교류가 아예 없이 취업에만 목숨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쩌면 그동안 유현에 대해 오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임한섭은 그런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네?”
“아무것도 아냐.잠시만.”
따뜻한 국물과 함께 술잔을 들이켠 임한섭은 넥타이를 풀어 가방에 욱여넣었다.
그러곤 유현을 보며 씨익 웃었다.
유현에게 제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좀 답답해서 말이야.”
“거추장스럽긴 하죠.”
“사실 난 정장 입은 지 얼마 안 됐어.올 초에 영업으로 옮겼거든.”
“그러셨군요.”
세미전자로 입사한 임한섭은 초기 2년 동안 개발 쪽 업무를 맡았다고 했다.
전자 부품 한번 제대로 다뤄 보지 못한 인문학과 출신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터였다.
“기본을 알지 못하면 영업, 마케팅 이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나? 알잖아.중소기업은 경계가 모호한 거.”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그가 안 하던 프로그래밍까지 배우며 적응한 건 멀리까지 보기 위함이었다.
“도움은 확실히 됐어.회사에서 포지션도 괜찮게 잡았고.그런데 막상 영업을 하려니 막막하더라.”
“어떤 면이요?”
세미전자는 부품 소재 기업으로 시작한 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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