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40
상남자 640화
매년 2월에 열리는 MWC(세계 모바일 전시회)는 최신 스마트폰의 각축장이다.
이곳에서 전 세계 스마트폰 업체들이 참여해 경쟁을 펼친다.
중요한 전시회이니만큼, 휴대폰전략팀에서도 다수의 인원이 참여할 예정이었다.
애플의 불참으로 인해, 가장 주목받는 기업은 바로 일성이었다.
벌써부터 일성의 최고 혁신상 수상 소문이 들려왔다.
일성의 빛이 강할수록 라이벌로 불리는 한성에는 그림자가 짙기 마련이다.
이번 역시 관련된 수많은 뉴스가 파생될 터였다.
이런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뜨지 않을까?
이 기회를 신경수의 세력들이 놓칠 리가 없다.
이미 관련 밑 작업이 착착 진행 중일 터였다.
유현의 눈엔 그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나도연 팀장과 헤어진 유현이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쯤이면…….’
유현이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권세중 대리가 여느 때처럼 머리를 들이밀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얼마 전까지 어깨 축 처져 있던 동기 생각.”
“야, 그때 잠깐 그랬던 거잖아.지금은 안 그래.”
발끈하는 권세중 대리를 보며 유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라고 한 적 없는데?”
“아, 현우.하긴 다 죽어 가던 녀석이 변하긴 했지.”
“세중이 넌 어때?”
아닌 척했지만, 변한 걸로 치면 권세중 대리도 만만치 않았다.
권세중 대리는 괜히 민망한지 말을 돌렸다.
“나야 뭐…….몰라.근데 우리 팀은 회식 안 해?”
“웬 회식?”
“보고도 다 끝났잖아.이 정도 큰 산 넘었으면 다 같이 술 한잔하면서 으쌰으쌰! 한번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권세중 대리 말에 유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하고 싶으면 네가 팀장님한테 건의해.”
“팀장님 스타일이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그래.”
“스타일이 어떻길래?”
“딱 봐도 개인주의잖아.회식은커녕 일 말고는 사람 상대도 안 할걸?”
감이 좋은 녀석이라 그런지 나도연 팀장의 성향을 제대로 짚었다.
이는 그룹전략실에서도 나름 잘나가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엘리트 의식이 강한 만큼 다들 인간적인 관계에 인색했다.
과거 유현처럼 말이다.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팀 분위기가 삭막하지.일 잘하는 건 좋은데, 너무 인간미가 없어.”
“그래도 지난번엔 점심 같이 먹었잖아.”
“그건 팀 운영비가 남아서였고.”
“그것도 용한 거야.”
“왜? 그룹전략실에 있을 땐 안 그랬어?”
권세중 대리는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차마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비밀스러운 내용이라서가 아니다.
-다들 장어를 먹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자네가 장어를 싫어한다니, 어쩔 수 없이 따로 먹어야겠군.
당시의 유치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심병직 팀장의 어이없었던 말을 떠올린 유현이 픽, 하고 웃었다.
“아니.그냥 하는 말이야.”
“그나저나 아쉽긴 하네.술이 좀 당기는데.”
“그럼 우리끼리 가.”
“팀 사람들은 두고?”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팀 전체가 같이 모이면 좋으나, 아직 그 정도로 가까워진 건 아니었다.
굳이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는 대신, 때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유현의 말에 권세중 대리가 대뜸 물었다.
“술값은?”
“설마 너보고 내라고 하겠냐?”
“오케이.바로 준비할게.”
최근에 너무 쪼여지다 풀어져서일까?
권세중 대리는 신난 듯 어깨를 들썩였다.
비단 권세중 대리만 술자리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고생한 동료들을 위해 유현도 술 한잔 사 주고 싶었다.
듣고 싶은 뒷이야기도 한가득이었다.
다들 같은 마음인지 퇴근 노래가 나온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이잉.
8층 입구 문을 열고 나온 순간이었다.
근질거리던 입을 꾹 닫고 있던 권세중 대리가 한마디 했다.
“현우, 넌 퇴근할 때도 신 과장님한테 허락받냐?”
“그냥 습관처럼 인사한 거예요.”
“인사는 무슨.눈치 살살 보면서 조심스럽게 얘기하더구만.”
그 말에 정현우가 발끈했다.
“그러는 형은요? 형은 김 차장님 안 계신다고 후다닥 나온 거잖아요.”
“야, 그게 아니지.난 공과 사는 철저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은 별것도 아닌 걸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둘 다 눈칫밥 먹는 거 뻔히 봤는데, 아닌 척하고 있으니 우스울 따름이다.
유현이 어이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였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걸어 나왔다.
얼굴을 확인한 유현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덩달아 분위기를 파악한 동료들도 차례대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중 구릿빛 피부에 딱딱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열패밀리 연회 당시 홍진희 여사를 보좌했던 박도권 차장이었다.
이번에 혁신전략실 경영전략 담당으로 이동한 그는 팀장 자리에 올랐다.
“한 과장, 오랜만이야.”
“네, 팀장님.이렇게 또 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참 인연이 얄궂어.”
이준일 실장을 통해 그와 만났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피식 웃은 박도권 팀장은 옆에 있는 남자에게 유현을 소개했다.
“아, 유 팀장은 처음 보지? 인사해.전에 잠깐 그룹전략실에 있었던 한유현 과장이야.”
“반가워요.유석원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한유현이라고 합니다.”
유현은 이어서, 길쭉한 얼굴에 부드러운 눈웃음이 인상적인 남자와 손을 마주 잡았다.
꽈악.
악수할 때 손에 힘을 세게 주는 버릇은 변함이 없었다.
손을 마주 잡은 유현이 미소 짓자, 그가 의외인 듯 눈썹을 들썩였다.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네.”
“감사합니다.”
“그래요.앞으로 잘 부탁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유현의 진심 어린 인사에 유석원 팀장이 빙긋 미소 지은 후 지나갔다.
유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인사를 통해 어떻게 기여하고, 또 개선시킬 수 있을지 근본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해.그걸 위해 밑바탕이 되는 수치 정도는 머릿속에 당연히 넣어야 하는 거야.
유석원 팀장은 과거 유현이 인사지원 담당으로 이동했을 때, 파트리더였다.
그는 그룹 전반에 걸친 인사 정보를 모두 머릿속에 담고 있기로 유명했다.
그 밑에서 유현은 정말 죽어라 고생했었다.
전 계열사와 인사 정보는 물론, 경쟁사의 내용까지 달달 외워야 했다.
당시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과정 덕분에, 유현은 전체를 보는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그룹 내 계열사 간, 경쟁사 간, 사회 안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그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만큼 유현은 유석원 팀장을 인정했다.
비록 오래 같이 일하진 못했지만, 그는 유현이 본 최고의 인사 전문가였다.
유현이 신경욱 부사장에게 꼭 데려와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신경욱 부사장 체제의 조직 혁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휴대폰 사업부의 통합 조직도 이미 범주 안에 포함되었다.
제안의 출발이 유현이었다는 걸 모를 뿐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현은 멀어지는 유석원 팀장을 향해 다시 한 번 인사했다.
회식은 장준식 대리가 유현과 처음 회식했던 곱창집에서 이뤄졌다.
한동안 안 먹었더니 곱창이 먹고 싶다는 장준식 대리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 결과였다.
둥근 테이블 위에 커다란 냄비가 올라갔고, 그 옆에 술이 놓였다.
지글지글.
곱창 익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빈 술잔을 채운 권세중 대리가 물었다.
“난 두 분이 팀장님이었는지도 몰랐어.”
“아까 만났던 두 분?”
“어.경영전략 담당 소속이라던 분들 말이야.”
권세중 대리는 두 사람이 경영전략 담당이라는 것도 따로 들은 바가 없었다.
그 이유를 유현이 간단히 설명해 줬다.
“조직도도 공유 안 된 데다, 따로 만난 적도 없으니 당연하지.”
“근데 혁신전략실을 왜 이렇게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거야?”
“전과는 다르지?”
“응.경영전략 담당이 생기면서 확 변한 것 같아.”
유현이 처음부터 인정하고 들어갔다.
유현 말대로 경영전략 담당의 경우는 그룹전략실 운영 방안을 따랐다.
이는 신경욱 부사장이 인원들을 스카우트하며 내건 조건이었다.
그 뒷이야기를 하면 조금 긴 터라, 유현은 적당히 답해 줬다.
“인사, 경영 전반을 다루기 위해 신설된 조직이잖아.보안이 그만큼 중요한 거지.”
“그런가? 이래선 같은 조직인 느낌이 안 나긴 한데.”
“위에선 나름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거야.”
“하긴 그렇겠지.그러려고 데려온 걸 테니까.”
시야가 넓은 권세중 대리조차 전반적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한 눈치였다.
그만큼 지금 물밑에선 많은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지금은 몰라도 곧 알게 될 터였다.
이 모든 게 휴대폰 사업과도 연결될 테니 말이다.
유현은 고생한 동료들을 위해 잔을 들었다.
“자, 일단 한 잔 하자.다들 고생했어.”
“고생하셨습니다!”
시원한 목소리와 함께 잔이 부딪쳤다.
잠깐 어긋났던 주제는 술이 들어가자 바로 자리를 잡았다.
다들 이번 조별 분업으로 쌓인 게 많은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이번에 김 차장님 밑에서 개고생하며…….”
“전 신 과장님을 통해 인생을 바닥부터…….”
그중 장준식 대리만 조용했다.
토 한 번 달지 않고 곱창을 볶는 그에게 권세중 대리가 물었다.
“준식아, 넌 불만 없어? 유현이 밑에서 고생 많이 하네.”
“없습니다.오히려 너무 많이 배웠습니다.”
“네가 이러면 우리 꼴이 뭐가 되냐?”
“진짜로 없어서 그럽니다.”
장준식 대리는 말을 칼 같이 자르며 주걱질을 했다.
그 모습이 아르바이트생 못지않게 화려했다.
주걱 잡는 법도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참 많이 컸다.
유현은 흐뭇한 표정으로 대견한 후배를 바라봤다.
“준식이 곱창 잘 볶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아냐.너 다른 것도 다 잘해.아주 많이.”
“감사…….아, 아닙니다.”
“감사한다고 말해도 돼, 이제.”
“감사합니다.”
유현의 말에 장준식 대리가 고개 숙인 순간이었다.
권세중 대리가 기가 찬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너 얘 말도 제대로 못하게 막았었어?”
“그런 거 아냐, 인마.”
“아니긴 뭐가 아냐.이거 순 악질이네.준식아, 네가 그간 이 녀석 밑에서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고생이 참 많았다.”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장준식 대리가 손사래 치자, 권세중 대리는 신이 난 듯 말했다.
“맞구만, 뭘.가만 보니까 넌 김성득 차장님보다 더한 거 같아.”
“뭘 더해?”
“뭘 더하긴.김성득 차장님 특유의 사람 피 말려 죽이는 스타일이 있어.말도 못하게 하는 그런 집요함이 있다고.너 하는 거 보면 그 이상이야.”
“…….”
“그리고 김 차장님이 사람을 얼마나 정신적으로 괴롭히는지 알아? 너처럼 말을 못하게 한 건 아니지만…….야,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정신없이 떠들던 권세중 대리가 순간 적막해진 분위기를 눈치채곤 멈칫했다.
정현우 대리의 조심스러운 눈짓을 본 그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스윽.
그 순간, 눈을 마주친 김성득 차장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신적으로 괴롭힌다는 내용까지 한 거 같아.궁금하니까 계속해 봐.”
“허억! 차, 차장님!”
“뭘 그렇게 놀라? 귀신이라도 봤어?”
“그, 그게 아니라…….”
“쯧쯧.”
벌떡 일어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권세중 대리에게 김성득 차장이 혀를 찼다.
참으로 다정한 선후배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