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91
상남자 691화
당시를 떠올린 유현이 피식 웃었다.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떨었대요?”
“언제요?”
“장우 계체 통과할 때 눈물을 글썽이던 거 같아서요.”
“아니에요, 그런 거.”
“제가 잘못 봤나 보네요.”
유현이 한 발 물러나자, 정다혜가 조금은 솔직해졌다.
“사실 눈가가 좀 촉촉해지긴 했던 거 같아요.”
“고생하는 걸 옆에서 봐서 그런가 봐요.”
“네.저 사실 처음 봤거든요.사람이 그렇게 노력할 수 있다는 거.”
“괜히 챔피언 자리에 오른 게 아니죠.”
유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다혜가 이장우가 걸어 온 길을 애써 담담히 읊었다.
“정신력이 대단한 거 같아요.어젠 장우 선수가 매트를 구르다 구토를 했는데, 나오는 물이 없어 고통만 호소했어요.다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땀복을 입고 또 뛰는데…….”
그녀의 말에서 이장우가 겪었던 고통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유현은 이쯤에 그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다혜 씨가 옆에 있어서 장우가 버텨 낼 수 있었던 거예요.”
“제가 한 게 없어요.전 오히려 속으론 미친 짓이라 생각했어요.말리고 싶은 마음이었죠.”
“그럼 말리지 그러셨어요.”
“어떻게 그래요.장우 선수가 끝까지 하겠다고 하는데요.응원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꼭 해내고 싶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말려요.”
이장우에게 많이 몰입했는지 그녀가 울컥했다.
많이 걱정되겠지만, 그녀도 이번 경기가 끝나고 나면 알 터였다.
이장우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본인이 빛나고 행복하기 위해서 링 위에 서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현은 겪지 않으면 모르는 사실을 전하는 대신, 직관적인 말을 꺼냈다.
“걱정 마요.이젠 마음껏 먹을 테니 무척 좋을 거예요.”
“지금도 식사하고 있는 거죠?”
“네.아마 죽어라 먹고 있을 겁니다.지금쯤 3단계에 돌입했겠네요.”
부드러운 죽으로 텅 빈 위장을 조금씩 달래는 게 1단계, 염분기 있는 음식과 함께 물을 다량 섭취하는 게 2단계다.
소고기 등 고단백 음식을 통해, 그간 억제한 식욕을 폭발시키는 게 3단계다.
3단계에선 먹는 걸로 최고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많게는 10킬로그램이 늘어난다.
그간 체중 감량의 보상을 제대로 받게 되는 셈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정다혜가 물었다.
“3단계부턴 영양 코치님 외에 다른 사람들과 식사하는 게 가능한 거 아니에요?”
“그렇죠.아마 체육관 동료들도 붙었을 거예요.”
“그럼 유현 씨도 가 봐야죠.”
“아니에요.전 오랜만에 다혜 씨랑 밤을 보내려고요.그간 너무 떨어져 있었잖아요.”
뭐래?
유현의 진지한 표정에 정다혜가 황당해할 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유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이잉.
-유현아, 소고기 먹으러 와.진짜 여기 끝내준다.(사진 첨부)
관장의 메시지였다.
잘 먹고 있는 이장우의 얼굴도 화면에 띄워졌다.
얼굴 혈색이 확실히 좋아 보였고, 눈동자도 또렷해졌다.
그걸 본 정다혜가 피식 웃었다.
“어서 가 봐요.”
“하! 관장님은 정말 도움이 안 되네요.”
“한숨 쉴 시간에 가요.저는 끝나고 따로 보면 되잖아요.”
“알겠어요.”
아쉬운 소리를 내는 유현의 볼에 정다혜가 입을 맞췄다.
쪽.
유현이 눈을 껌뻑하자, 그녀가 말을 돌렸다.
“내일 장우 선수가 이길 수 있을까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유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럼요.누구 후배인데요.”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될 거예요.옆에서 함께해요.”
“그래야죠.”
유현이 내민 손을 정다혜가 꼬옥 잡았다.
함께하고 싶다는 의지가 손의 온기와 함께 전해졌다.
다음 날 저녁, 커다란 원통 모양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 외관이 화려하게 빛났다.
뉴욕에서 처음 열리는 UFC 대회를 위해서였다.
입구 앞으로 일찍부터 관중들이 길게 늘어섰다.
웅성웅성.
어느새 내부 홀엔 20,000명의 관중석이 가득 메워졌다.
3층으로 분리된 관중석 한가운데, 경기가 열리는 8각형 옥타곤이 위치했다.
그 위, 원형으로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선수들의 인터뷰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마틴 요르테에 이어 이장우의 얼굴이 비쳐졌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이 통역사인 정다혜의 입을 타고 영어로 흘러나왔다.
-컨디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오늘 이벤트 첫 경기에 출전하는 만큼, 화끈하게 1라운드에 K.O승을 거두겠습니다.
이장우가 주먹을 쥐어 보이자, 관중석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코리안 탱크! 멋지다!”
“와아아아! 탱크!”
다른 인기 선수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현장 반응이 꽤 있었다.
경기장 외곽 복도에서, 스크린을 통해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유현이 감탄했다.
“장우 녀석, 그래도 인기가 좀 있네.”
“슈퍼펀치에 들어가서 인지도가 확 뛴 거지.슈퍼펀치도 그만큼 장우를 잘 홍보해 줬고.”
옆에 서 있던 박영훈의 설명에 유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홍보? 어떻게?”
“못 봤냐? 이장우 하이라이트 영상들, 슈퍼펀치 홈페이지에 올라왔잖아.”
“그랬어?”
유현도 몰랐던 일이다.
이젠 유현의 입김과는 별개로, 슈퍼펀치가 이장우를 알아서 챙겼다.
그만큼 이장우가 훈련 때 보여 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것보다, 마크 콜빈이 인터뷰로 장우를 언급한 게 컸어.그만큼 챙긴다는 의미니까.”
“그거 어제 일이잖아.”
“이미 쫙 퍼졌지.”
“거참, 반응 참 빠르네.”
“국내는 더 뜨거워.이거 봐 봐.지금 동시 접속자 수, 신기록이야.”
말을 잇던 박영훈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엔 국내에 송출되고 있는 인터넷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현은 그 아래 쏟아지는 댓글들을 살폈다.
-헐! 이장우 어제 계체 때 몸과 비교가 안 되는데? 대체 얼마나 불린 거야?
-슈퍼펀치 가더니 몸이 슈퍼탱크가 됐음.장난 아니네.
-아무리 그래도 1라운드 K.O는 오버 아니야? 마틴 요르테가 급이 있는데.
-인정.마틴 요르테가 리치가 워낙 길어서 이장우가 쉽지 않음.
-이장우가 저놈 제대로 발랐으면 좋겠다.저 자식은 입만 열면 짜증나.
-계체 때 시비 걸다가 마크 콜빈한테 한소리 듣고 깨갱했잖아.가넷파이트도 사과문 올렸고.그 정도면 정의 구현 한 거지, 뭐.
-정의 구현은 개뿔.저 자식 어제 백 스테이지에서 이장우한테 인종 비하 발언 심하게 했다고 이미 다 퍼졌음.무조건 때려 잡아야 함.
막 올라온 글을 확인한 유현이 실소했다.
“백 스테이지에는 카메라도 없었잖아.대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아는 거래?”
“글쎄다.현장에 있던 누군가가 알려 주지 않았을까? 인터넷에 글 쓰면 금방이잖아.”
“그때 우리밖에 없었는데? 목소리가 큰 것도 아니었고?”
유현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박영훈이 말을 돌렸다.
“흠흠! 됐고, 댓글이나 더 봐 봐.엘리스에 대한 내용도 있어.”
“웬 엘리스? 어?”
의아해하던 유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근데 이장우 통역사 예쁘지 않냐? 목소리도 귀에 팍팍 박히고.
-카리스마가 있음.어제, 마틴 그 자식이 시비 걸 때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더라.
-피부가 새하얀 데다, 몸매도 끝내줌.완전 내 이상형이야.
박영훈이 띄워 준 화면엔 정말 정다혜에 대한 댓글들이 있었다.
신기한 듯 바라보던 유현이 욱했다.
“이 자식은 뭔데 남의 외모 가지고 품평이야?”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그리고 네가 왜 발끈해? 네 여자도 아닌데.”
‘맞거든!’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여기서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경기 끝나고 말해요.지금은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정다혜가 했던 말 때문이다.
유현은 일단 둘러댔다.
“그래도 좀 그렇잖아.아는 사람인데.”
“뭐 어때.인기 많으면 좋지.팬 카페도 생길 거 같더라.”
“말이 되는 소릴 해.”
“원래 세상엔 별 이상한 놈들이 많은 거야.어쨌든 팬 카페 생기면 너도 가입해서 좋은 댓글 좀 많이 남겨 줘.”
박영훈의 말에 유현이 발끈했다.
“내가 왜?”
“왜긴.넌 엘리스랑 친한 덕분에 VVIP석까지 배정받았잖아.그 정도 덕 봤으면 뭐라도 갚아 줘야지.”
유현 덕분에 정다혜도 자리를 얻은 거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유현은 아쉬운 소리를 뱉는 박영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부러워?”
“그래.부럽다.관장님이랑 둘이서 저 끄트머리에 앉아서 볼 생각 하니 너무 부러워 죽을 거 같아.”
“왜, 둘이서 오붓하게 보면 되지.”
“오붓? 혹시 장우가 밀리기라도 해 봐.관장님 성격에 나한테 화풀이할 게 뻔해.차라리 태수 형처럼 스태프로 참여하는 게 백번 나아.”
박영훈이 툴툴댔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맘만 먹으면 코칭스태프로 참여할 수도 있었지만, 관장이 경기에 방해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관장은 슈퍼펀치에 모든 걸 일임한 채 뒤로 빠졌다.
이미 정해진 일인 터라, 더는 왈가왈부할 게 없었다.
툭툭.
유현은 그저 친한 형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아무리 그래도 관장님이 형을 때리진 않겠지.헤드록은 좀 걸겠지만.”
“에휴.참 위로가 된다, 위로가 돼.”
박영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화려한 조명 속에 웅장한 음악이 경기장을 채웠다.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이장우가 등장했다.
거침없이 걸어오는 이장우의 모습이 원형 스크린에 비춰졌다.
그는 어깨에 슈퍼펀치 로고가 박힌 수건을 두른 채로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슈퍼펀치 코치진이 양옆에 동행했고, 김태수가 커다란 태극기를 양손으로 펼쳐 든 채 뒤따랐다.
VVIP석에 앉아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유현의 뇌리에 문득 옛 기억이 스쳤다.
‘장우 국내 챔피언전 때, 내가 저 자리에 있었는데 말이지.’
당시, 유현은 이장우의 요청으로 잠시 코치를 맡았었다.
돌이켜 보면 너무 터무니없는 결정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유현의 인생에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아끼는 후배가 정상에 서는 데 함께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그런 순간을 이번엔 정다혜와 맞이하게 됐다.
유현은 옆에 앉은 채 집중하고 있는 그녀를 힐끔 봤다.
-첫 번째 경기, 라이트급에 출격하는 코리안 탱크 이장우 선수는 키 5.4 피트(166센티미터), 몸무게 155파운드(70.3킬로그램)으로, 현재 2승 0패를 기록하고 있으며…….
UFC 사회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정다혜가 한마디 덧붙였다.
“장우 선수 키가 상대적으로 작고 팔 길이가 짧지만, 순간 가속력이 워낙 좋아서 가동 범위가 꽤 넓은 편이에요.”
“그래요?”
“네.코어가 잘 단련되어 있어서 무게중심이 좋고, 위빙도 빠르죠.저기 보세요.”
이장우는 링 위에서 가볍게 상체를 좌우로 움직였다.
휙.휙.
유현은 자주 봤을 뿐만 아니라, 직접 스파링을 하며 맞서 봤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정다혜의 입을 통하니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유현이 새삼 신기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혜 씨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당연히 알아야죠.장우 선수 옆에서 훈련하는 걸 보면서 분석한걸요.신체 스펙이나 습관, 훈련 스타일을 모르면 제가 받쳐 주기가 힘들어요.”
‘통역사 맞아?’
어찌 된 게 그녀는 셰일오일 프로젝트 진행할 때와 변한 게 없었다.
얼떨결에 맡은 통역사 일에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
헛웃음을 지은 유현이 물었다.
“그럼 코칭스태프로 참여하지 그랬어요? 다혜 씨가 통역해 주면 좋을 텐데.”
“경기 중에 단순 통역은 필요 없어요.장우 선수도 어느 정도 알아듣는 데다, 부족한 건 태수 씨가 도와줄 거예요.”
“그래도 장우가 다혜 씨 말 잘 듣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코칭스태프는 전문가들이 맡아야죠.저처럼 선무당이 아니라.”
정다혜가 단호하게 선을 그은 순간이었다.
-UFC의 하이에나! 마틴 요르~테!
사회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마틴 요르테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