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70
상남자 70화
사우나 안에서 입을 쩍 벌린 그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너, 너…….
-아, 몸요? 요즘 운동해서 그래요.
-응? 어, 어…… 그렇구나.
그는 유현의 몸을 아래위로 훑은 후부터 계속 먼 산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가끔 한숨도 내쉬었다.
심지어 말할 때 눈 마주치는 것도 피하는 듯했다.
꼭 얼마 전 양아치와의 일전이 있었을 때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유현이 봐도 지금 자신의 몸은 과거보다 확실히 좋았다.
아침에는 달리기를 하고, 저녁에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며 단련한 몸이다.
음식도 잘 챙겨 먹어서 체지방 대비 근육량이 높은 편이었다.
프로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근육이 도드라져 보였다.
배 불룩한 회사원들만 보던 박승우 대리 입장에선 놀랄 만도 했다.
식당에서 나온 박승우 대리는 유현이 음료수를 사러 간 동안 벤치에 앉아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후우…….”
세상엔 노력으로도 절대 안되는 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 현실과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패배감은 쉬이 떨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이야 운동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사우나에서 본 유현의 몸을 떠올린 박승우 대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오전 11시.
유현은 박승우 대리와 함께 2공장과 연결되어 있는 3공장에 들어섰다.
이곳에 위치한 HPDA3용 개발 이벤트 라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입구 앞에는 공정팀 손민한 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승우 대리와 동기이기도 한 그가 틱틱대며 말했다.
“정장 입고 일하는 놈이 무슨 라인에 들어와.”
“그냥.궁금해서.”
박승우 대리가 라인에 들어온 건 유현 때문이었다.
라인을 소개하던 손민한 대리가 물었다.
“너 엄청 들들 볶이겠더라.괜찮냐?”
“어.잘 마무리됐지.근데 어때? 이벤트 통과할 만해?”
“글쎄.여기저기서 문제가 많아.아마, 보고된 건 극히 일부일걸?”
“흠, 역시 그렇구나.”
유현은 고개를 끄덕거린 박승우 대리 옆을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이미 모듈화된 수십 개의 패널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움직이는 게 보인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은 화면이 들어오는 패널을 살피며 불량을 확인하고 있다.
다른 곳에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패널이 빨강, 파랑, 초록 화면을 차례로 껌뻑였다.
‘오랜만이네.’
과거 파견 왔을 때 가끔 봤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흐릿했던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양복 입고 다녔다고 라인 안 들어가면 쓰나.왔으면 우리 팀 법을 따라야지.
그때 팀장이 파견 온 유현에게 참 많은 걸 시켰다.
납땜도 하고, 실험도 하고, 부품도 찾고, 모듈 작업도 하고.
육두문자가 나올 때도 부지기수였지만 그 덕분에 많은 걸 배웠다.
확실히 책상에 앉아 숫자와 싸우는 일과 현장에 있는 건 다르단 걸 깨달았던 순간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좋았던 경험이었다.
덕분에 큰 성과를 올렸으니 유현의 커리어에도 상당히 도움이 됐단 걸 부인할 수 없다.
“뭐 하냐?”
박승우 대리의 물음에 유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아, 그냥 신기해서요.”
“하하, 라인 처음 보면 신기할 만도 하지.더 볼 거 있어?”
“아뇨.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세미나 자료 준비에 도움이 되겠어? 현장 사진은 촬영 불가능하니까 내가 나중에 따로 구해서 줄게.”
“감사합니다.”
유현이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다.
손민한 대리에게 인사한 유현은 라인을 빠져나왔다.
회사 밖으로 나온 유현은 도로가에 세워져 있던 회색 승용차를 힐끔 보았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차다.
트렁크 위에 패널을 담는 트레이가 겹쳐 올려져 있단 걸 빼면 말이다.
부르릉.
그때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석과 조수석 안에 있는 두 남자는 이미 안전벨트를 한 후였다.
‘뭐야? 저렇게 두고 설마 그냥 가려는 거야?’
두 사람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저대로 달렸다간 트레이가 쏟아지며 길거리에 깨진 패널이 널브러질 게 뻔하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실수를 그냥 내버려 둘 만큼 유현은 야박한 성격이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앞으로 뛰어나간 유현은 닫힌 창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창문이 열리고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네? 왜요?”
순간 유현의 몸이 움찔했다.
그의 기억에 박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도 얼굴이 같다.
원래부터 노안이었구나.
“아뇨.트렁크 위에 트레이가 있어서요.”
유현의 말에 백미러로 뒤를 살핀 남자는 운전석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김선동 이 미친놈아.트레이 왜 안 넣었어!”
“헉! 죄송합니다, 선임님.당장 넣겠습니다.”
철컥.
운전석에 있던 김선동은 트렁크로 뛰어갔고 조수석의 남자는 문을 열고 내렸다.
그는 허겁지겁 트렁크 문을 열려는 김선동을 향해 다시 버럭 했다.
“정신 차려, 좀! 그러다 쏟는다!”
“죄송합니다.”
김선동이 쩔쩔매는 모습이다.
그제야 남자는 유현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하아…….아, 죄송합니다.그리고 너무 감사합니다.”
“아뇨.저도 그냥 지나가다 봤을 뿐인데요.”
“큰 사고 날 뻔했습니다.감사…….”
쾅!
“야! 인마! 그렇게 세게 닫으면 패널 깨진다고!”
“죄송합니다.”
버럭 화내는 남자, 그리고 그 앞에 잔뜩 기죽어 있는 남자.
유현이 기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겹쳐졌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회색 승용차가 지나간 후, 박승우 대리가 혀를 내둘렀다.
“어휴, 저러니까 욕먹지.”
“아는 사람이에요?”
“알다마다.4담당 선행제품팀 사람들이잖아.지난번에 잠깐 같이 일했었어.어휴, 그때 고생한 거 생각하면…….”
“별론가 봐요?”
“실력은 있는 것 같은데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담당님이 나서도 컨트롤 안 돼, 거기는.”
그렇겠지.
그 팀 자체가 보통이 아니니까.
“왠지 악동 느낌인데요?”
“하하흐, 너도 겪어 봐라.”
파견까진 아직 한참 남았지만 어쩌면 그들을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을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출장을 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쯤엔 이미 어둑한 밤이었다.
유현은 노트북 가방을 내려놓고,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나머지 옷가지를 정리하려 할 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지이잉.
-잘 들어갔지? 고생했다.잘 자고 내일 보자.
박승우 대리의 문자를 본 유현은 픽 하고 웃었다.
곧바로 유현은 책상 위에 노트를 폈다.
거기엔 유현이 계획했던 3개월 단기 일정이 항목별로 나와 있었다.
이 모든 항목이 동그라미로 채워졌을 때 박승우 대리의 표정이 어떨까?
그가 노력한 만큼의 성취를 얻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유현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토요일 오후.
유현은 관장의 부탁으로 체육관에 들렀다.
잦은 회식과 출장으로 인해 최근 운동을 못 한 터라 몸을 풀고 싶던 차였다.
그런데 상대가 프로인 김태수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 제 실력으로는 무리인 것 같은데요?”
“괜찮아.그냥 몸 푼다 생각하고 한 번만 해 보자.”
그냥 몸 푼다고?
유현은 링 위에 마주 선 김태수를 바라봤다.
맹렬한 기운에 몸이 움찔할 정도였다.
프로 데뷔 첫 경기를 1라운드 만에 KO시킨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그가 내뿜는 진지한 눈빛은 그때와 비교했을 때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장난으로 링에 올라온 게 아니었다.
“언제든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해도 돼.테스트해 볼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제가 도움이 되는 건가요?”
“그래.태수는 지금 네 도움이 필요해.”
“…….”
관장의 말에 유현은 답 없이 글러브를 낀 양손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주먹 끝에 느껴지는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승패를 떠나 유현은 확인하고 싶었다.
체육관에 처음 왔을 때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말이다.
결심을 굳히자 거짓말처럼 긴장감이 가라앉았다.
쿵.쿵.
가슴이 고요하게 뛰고 있었다.
유현의 몸속에 잠자고 있던 도전정신이 그를 자극했다.
‘그래.해 보자!’
결심을 굳힌 유현이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관장님, 가시죠.”
“자식, 하여튼 겁 없다니까.그래.해 보자.”
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링 밖으로 나섰다.
땡.
종이 울리고 연습 게임이 시작되었다.
관장은 링 밖에서 두 사람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유현의 실력이 최근 많이 올라온 게 사실이지만 그는 반쪽짜리였다.
아직 킥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 수준으로 김태수를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관장이 유현을 급히 부른 이유가 있었다.
쉬익!
순간, 김태수의 긴 팔이 유현에게 날아들었다.
동시에 킥을 섞은 그의 콤비네이션이 유현에게 들어갔다.
하지만 유현은 그걸 모조리 피해 버렸다.
“허, 참.봐도 봐도 놀랍단 말이야.”
그걸 본 관장이 탄성을 뱉었다.
역시 유현의 스타일은 김태수의 다음 대전 상대와 똑 닮았다.
아웃복서 출신인 상대는 빠른 반응 속도와 거리 재기가 특기였다.
지금 유현처럼 발을 이용해 링을 돌며 경기 운영을 했다.
덩치 큰 김태수의 체력을 뺏기엔 제격이었다.
하지만 김태수는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있었다.
쉬익!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법.
어느새 코너로 유현을 몬 그가 연타를 날렸다.
파파파파팍.
유현은 피할 수 없는 주먹은 가드로 막아 냈지만 곧 한계에 부딪혔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유현의 가드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쉭!
유현은 찰나의 순간 보이는 김태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코끝을 스치는 주먹이 매서운 바람을 일으켰다.
아찔했지만 두려움보단 짜릿함이 앞섰다.
‘보인다.’
예전보다 더 확실히 보였다.
이제 딱 원하는 간격만큼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펀치와 킥.
수많은 조합의 패턴은 유현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물론 이걸 안다고 이길 수는 없다.
한 대라도 때려야 하는데, 섣불리 움직였다간 김태수의 노림수에 빠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대는 확실히 때릴 수 있다.
그걸 위해 유현은 함정을 팠다.
퍽!
“크윽.”
김태수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라이트 훅이 유현의 가드 위를 스쳤다.
스쳐도 아플 만큼 강한 주먹이었다.
하지만 유현은 참아 내며 일부러 틈을 만들어 줬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며 먹잇감을 기다리듯 조금씩 가드를 내렸다.
김태수가 딱 오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파파파파팍!
코너로 유현을 몰아넣은 김태수는 다시 한번 콤비네이션을 날렸다.
그러자 유현의 왼손이 점점 내려왔다.
‘됐다!’
유현의 턱이 가드 위로 훤히 드러날 때였다.
왼쪽으로 페이크를 준 김태수는 그대로 라이트 훅을 뻗었다.
헤드기어 위라도 너무 세게 때리면 안 되니 살짝 힘을 뺐다.
그 순간 유현의 모습이 잔상처럼 사라졌다.
‘어?’
퍽!
그리고 귀에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
유현의 레프트가 정확히 그의 얼굴에 적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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