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715
상남자 715화
그 시각, 체육관 건물 앞에서 정민교가 서성이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그는 결국 유현을 찾아 나섰다.
전에 못다 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더블와이가 여기가 맞는데…….”
얼마 전 유현에게 들었던 회사명을 곱씹던 그가 어떻게 나설지 고민했다.
회사를 찾아갈까?
가서 무슨 말을 꺼낼까?
전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인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안에 유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웅성웅성.
그때 건물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몸을 피한 정민교는 일단 김밥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현은 박영훈과 미리내 증권의 계약 문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여러 가지 휘둘리는 정황이 있는 터라, 미리내 증권 임원들을 한번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의사를 충분히 전한 유현은 1층으로 내려갔다.
어느새 하늘에는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유현은 지금쯤 김밥이 나왔을 거라 생각하며 김밥집 문을 잡았다.
순간, 투명 창 안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조합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정민교와 정다혜였다.
‘장인어른이 왜 여길……?’
놀람도 잠시, 유현은 마주앉은 부녀를 살폈다.
두 사람은 어떤 말도 꺼내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놓인 김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인 건 확실했다.
지금은 두 사람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저벅.
한 발 뒤로 물러난 유현 앞으로 나도하가 다가왔다.
창을 통해 정다혜를 알아본 그가 반색했다.
“형, 저기 앉아 있는 게 엘리스 님이죠?”
“어.맞아.”
“안 그래도 할머니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했는데, 잘됐네요.형은 안 들어가요?”
나도하가 문을 열려 하자, 유현이 막아 세웠다.
“도하야, 형이랑 얘기 좀 할까?”
“무슨 얘기요?”
“그냥.이런저런 얘기.”
“일단 소개부터 하고요.할머니도 장우 이야기 듣고 엘리스 님을 궁금해하셨거든요.”
나도하의 동갑내기 챔피언 이장우는 김밥집 단골이었다.
이번에 그가 와서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줬던 모양이다.
나도하가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지만, 지금 분위기를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현은 그의 호기심을 잡을 만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도하야, 너 인스타그램 지분 받은 거 얼만지 아니?
“전에 형한테 1퍼센트 받은 거 말이죠? 얼만데요?”
“150억.”
“헐! 대박! 진짜요? 저 그걸로 서버 더 사들여도 돼요?”
“건물을 사도 돼.그러니까 일단 가자.”
유현은 나도하의 어깨에 팔을 두른 후,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걷던 유현이 뒤로 돌아봤다.
두 사람은 여전히 말없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엔 김밥 한 줄이 더 추가됐다.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했을까?
유현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오지랖도 떨지 않고, 그저 기다려 줬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한재희와의 약속도 뒤로 미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일요일 오후, 집 앞 공원에서 만난 정다혜가 애써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또 연락 못해서.”
“에이, 이제 옆에 있는데요, 뭘.집 주소도 알겠다, 필요하면 찾아가면 되죠.”
“그러게요.한국에 있는 게 실감이 나네요.”
정다혜의 표정이 왠지 아련해 보였다.
말없이 바라보는 유현에게 그녀가 물었다.
“유현 씨, 재희 씨 오늘 만날 수 있을까요?”
“네.그런데 왜요?”
“그냥요.그날 못 만났잖아요.”
“괜찮아요.나중에 여유 생기면 봐요.”
만나는 건 문제가 안 됐지만, 타이밍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업체가 더블와이였어? 우리가 협업하는 게 도하 메신저였고? 게다가 그걸 주도한 게 다혜 언니라고?
엊그제 진실을 알게 된 한재희는 뒷목을 잡았었다.
그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이어진 정다혜의 말이 유현의 생각을 바꿨다.
“아니에요.오늘 만나고 싶어요.술도 한잔하고 싶고요.”
“술이라…….그러면 오늘이 좋겠네요.”
유현이 바로 전화를 들었다.
그날 저녁, 유현의 집에서 세 사람이 모였다.
한재희의 기분이 안 좋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정다혜의 선물을 본 여동생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언니, 뭘 이리 많이 사 왔어요.게다가 하나같이 다 고급술이네.”
“재희 씨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요.”
“에이.언니, 말 편하게 해요.”
“편하게요?”
“네.말 놔요, 언니.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괜히 거리 둘 거 없잖아요.”
“그럼 재희 씨도 편하게 해요.”
정다혜가 제안하자, 한재희가 기다렸다는 듯 응했다.
하여간 사교성 하나는 남다른 여동생이었다.
“콜.이제 좀 가까워진 거 같네.언니, 술 잘해?”
“잘은 못하고, 분위기는 즐겨.”
“어라? 나랑 똑같네.우리 은근 통한다니까.”
“뭐래?”
어이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유현에게 한재희가 턱짓했다.
“오빠, 뭐 해? 손님 대접 안 해?”
“끙.알았어.있어 봐.”
평소라면 한 소리 했겠지만, 정다혜가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유현이 일어서자, 등 뒤에서 한재희의 얄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가 좀 굼뜨니까 언니가 이해해.”
“그럼.이해하지.”
“어쩜! 얼굴도 이렇게 예쁜데, 이해심도 많으실까.”
“재희 너보단 아니야.”
“하하! 사람 보는 눈 있네.언니 짱.”
“…….”
어째 술 한 잔도 안 마신 두 사람이 죽이 참 잘 맞았다.
달칵.
술병을 깐 한재희는 얼음 잔에 고급 위스키를 따라 준 후, 연거푸 원샷을 했다.
정다혜는 그걸 또 곧이곧대로 다 받아 마셨다.
벌써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터라, 유현이 바로 말렸다.
“다혜 씨, 릴랙스, 릴랙스.”
“오빠, 좀 내버려 둬.언니가 마시고 싶다잖아.”
“그래요, 유현 씨.이렇게 편한 분위기는 정말 오랜만이라서 그래요.”
“아니, 그래도…….”
유현이 뭐라 할 새도 없이, 한재희가 한술 더 떴다.
“오빠, 언니한테 집착 좀 하지 마.”
“내가 무슨 집착을 한다고 그래? 몸에 안 좋으니까 그러지.”
“됐고.언니, 정말 만나고 싶었어.”
“왜?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오빠가 푹 빠져서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미국까지 간 건지 궁금했거든.엄마는 괜히 나한테 뭐라고 하고.”
정다혜의 물음에 한재희가 어이없는 답을 내놓았다.
유현이 곧장 반박했다.
“야, 그건 아니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아빠는 오빠 이민 간 줄 알았다잖아.”
“그건 농담한 거고.”
한재희는 유현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채, 정다혜를 바라봤다.
“하여튼 우리 가족 다들 언니 궁금해하고 있어.”
“그랬어? 괜히 부모님께 죄송하네.”
“에이.오히려 좋아해.오빠 장가가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야.”
갑작스러운 말에 유현이 마시던 술을 뿜었다.
“풉!”
“뭐야! 침 다 튀었잖아.언니한테도 이래?”
한재희는 팔등을 닦아 내며 툴툴댔고, 정다혜는 쿡쿡 웃었다.
유현의 입에선 한숨만 나왔다.
어느새 위스키 1병이 다 비워졌다.
알딸딸한 분위기 속에서 한재희는 유현의 온갖 이야기를 다 꺼냈다.
“언니, 오빠가 언니한테만 달달한 거 알아?”
“응?”
“아니, 오빠를 잘 따르는 회사 후배가 있거든.근데 얼마 전에 원주 공장에 가서 보니까, 오빠가 시킨 일 때문에 거기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던지…….”
대체 뭔 소린가 했더니, 장준식 대리의 이야기였다.
한재희는 유현이 금형 장비 셋업을 시킨 줄 아는 모양이지만, 그건 장준식 대리의 선택이었다.
유현이 한 거라곤 괜찮다고 한 것뿐이다.
물론 유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건 사실이라,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때 유현의 귀를 사로잡는 말이 들려왔다.
“뭐? 장비 셋업 엔지니어들이 집단 퇴사를 했어?”
“그렇다니까.그래서 장 대리님이 엄청 고생하고 있어.”
“그 자식은 왜 그런 걸 말 안 하는 거야.”
보아하니 방해 세력이 아직도 설치고 있나 보다.
어쩐지 장준식 대리가 너무 오래 원주 공장에 머문다 싶었다.
‘확인해 봐야겠네.’
잠시 생각하고 있던 유현에게 정다혜가 말했다.
“유현 씨는 재희 씨 같은 재미있고 귀여운 동생이 있어서 좋겠어요.”
“좋긴요.얼마나 시끄러운데요.”
“진짜 시끄럽게 해 줘?”
“봐 봐요.한마디도 안 져요.”
“제 눈엔 너무 행복한 가족의 모습인데요.”
미소 짓는 정다혜에게 한재희가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냈다.
“언니, 그럼 우리 가족 하면 되겠네.기왕이면 예쁜 조카도 얼른…….”
꾹꾹.
유현은 한재희의 한쪽 어깨를 주무르며 이를 꽉 물었다.
“우리 재희 술 많이 취했구나.이제 그만 좀 하자.응?”
“뭐래? 오빠 속마음 대신 말해 줬더니.나한테 고마워해야지.”
한재희가 물러서지 않고 반박하자, 정다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틀어막았다.
“푸흡!”
“에휴.네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유현은 완전히 자포자기했다.
술이 많이 취해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정다혜는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진짜야.유현 씨 덕분에 내가 땡땡이를 처음 쳐 봤는데…….”
“그랬어? 난 땡땡이가 일상이야.”
“푸하하! 진짜? 재희 너 대단하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정다혜는 심할 정도로 어깨를 들썩였다.
유현이 처음 보는 그녀의 주사였다.
주사는 웃는 게 끝이 아니었다.
한참 웃던 그녀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혀는 분명 꼬였는데, 신기하게도 말은 또박또박 뱉었다.
“재희 너를 미국에서부터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나 그때, 너무 외로웠거든.”
“언니, 고생 많았구나.오빠는 도대체 뭐 한 거야?”
가만히 있던 유현에게 뜬금없이 화살이 돌아왔다.
“내가 한국에서 뭘 할 수 있었겠어.”
“오빠, 그게 아니지.멀리서라도 의지할 수 있게 든든한 모습을 보여 줬어야지.”
“아냐, 재희야.유현 씨 덕분에 힘낼 수 있었어.유일한 내 편이 되어 줬거든.”
“언니, 언니는 너무 착해.남자는 그렇게 다루는 게…….어? 언니, 울어?”
유현을 몰아가던 한재희가 화들짝 놀랐다.
정다혜가 바로 손을 내저으며 애써 웃음 지었다.
“아니.나 안 울어.잠깐 먼지 들어간 거야.하하.”
“…….”
“어라? 이상하다.왜 이러지?”
어느새 정다혜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정다혜를 뒤로하고, 한재희가 속삭였다.
“오빠, 언니 좀 달래 줘.나 바람 좀 쐬다 올게.”
“어디 가게?”
“요 앞 편의점.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서 그래.”
한재희는 눈을 찡긋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재희가 나가고 난 후, 유현이 정다혜에게 물었다.
“다혜 씨, 괜찮아요?”
“이제…… 좀 괜찮아요.”
“자요.이거 써요.”
유현이 손수건을 건네자, 그녀가 손을 저었다.
“아뇨.괜찮아요.이제 눈물 안 나와요.”
“그래도 받아요.”
“고마워요.”
손수건을 받아 든 그녀가 유현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