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751
상남자 751화
그 덕분일까?
당시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척.
검은 양복을 입은 보안 요원들이 경례한 후, 철벽같던 게이트 문을 열어 줬다.
보안 카드 등록 절차와 물품 검사 없이 바로 통과했고, 직원들은 마주칠 때마다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채널에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건물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유현과 정다혜를 존중하는 느낌이었다.
다들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추지 않도록 신경 써 줬다.
유현과 정다혜는 레베카 드보를 따라 V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3층에서 내린 유현은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좁은 복도를 걸으며 주위를 돌아봤다.
과거 로라파커와 친분이 있을 때도 들르지 못했다 보니, 이곳이 어딘지 전혀 감이 없었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확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레베카 드보가 안쪽을 손짓하며 말했다.
“지금부터 채널의 발자취가 담긴 제품들을 보실 예정입니다.”
“여긴 채널 전시관인가요?”
“네.일부 시즌품 빼고 다 모여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지금부터 하나씩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로라는요?”
“기다리고 계십니다.부사장님께선 스티브 님께서 전시품을 보고 오길 희망하셨습니다.”
왜 굳이 여길 보여 주려는 걸까?
로라파커가 의미 없는 짓을 할 사람은 아닌 터라, 유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영광이죠.”
살짝 고개 숙인 레베카 드보가 유리관 안에 걸린 바지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먼저 보이는 건 1913년 창립자이신 가브리엘 채널이 만든 최초의 와이드 팬츠로, 이는 여성의 해방을 상징하며…….”
옆에 놓인 스탠드에는 제품명과 출시 시기, 디자이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1913년부터 2013년까지.
100년의 역사 동안 채널의 디자인엔 수많은 발전이 있었고, 중요 변곡점마다 스타 디자이너들이 이름을 날렸다.
로라파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중후반쯤 왔을 때, 직원이 그 이름을 언급했다.
“지금 보시는 클래식 플랩 백의 디자이너가 현 부사장님이신 로라파커입니다.”
“알고 있습니다.페이던트 재질로 광택을 낸 표면과 다이아몬드 모양의 퀼팅 패턴, 그리고 마드모아젤 락을 유행시켰잖아요.”
“정확해요.잘 아시네요.”
“워낙 유명하니까요.”
유명하다고 해서 포인트를 정확하게 잡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레베카 드보가 물었다.
“혹시 어떻게 그 디자인을 만들게 됐는지 아시나요?”
“가브리엘 채널이 만든 클래식 백의 디자인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만든 걸로 알고 있어요.여기 체인 사이에 가죽이 들어간 걸 보면…….”
로라파커는 마케팅 책임자가 되기 전까지 채널 디자인의 최전방에 있던 사람이다.
유현은 당연히 그녀에 대해 깊이 공부했다.
아직도 머릿속엔 그녀의 인터뷰와 강연 때 했던 멘트들이 생생이 떠올랐다.
유현의 설명을 들은 레베카 드보가 눈을 반짝였다.
“역시 부사장님께서 초청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무슨 이유요?”
“부사장님께서 직접 설명하실 거예요.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빙긋 미소 지은 레베카 드보는 다음 디자인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최신 디자인까지 다 안내한 후, 자리를 비웠다.
옆에 있던 정다혜가 헛웃음을 지었다.
“유현 씨, 안목 좋다더니 진짜였어요?”
“그거야 다혜 씨 옷 고를 때 얘기죠.저 안목 없어요.”
“속이지 말랬죠? 그런 사람을 로라파커가 초청해요?”
“초청한 거랑 안목이랑 뭔 상관이 있어요?”
의아해하는 유현에게 정다혜가 조금 전 상황을 되짚어 줬다.
“아까 레베카 표정 못 봤어요? 딱 봐도 유현 씨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잖아요.”
“기대라니요?”
“로라파커가 유현 씨에게 오늘 보여 줄 게 있다고 했다면서요.전시품을 꼭 보고 오길 희망했고요.”
“그랬죠.”
“그게 무슨 의미겠어요? 분명 전시품 같은 디자인 컬렉션을 보여 주려는 걸 거예요.그것도 신규 디자인으로요.”
“네? 그걸 왜요?”
유현이 황당해하자, 정다혜가 추측했던 바를 전했다.
“이번이 채널 100주년이잖아요.대대적인 디자인 변화를 꾀하려니 불안해서, 한 사람에게라도 더 확인받고 싶은 거겠죠.”
“그래서 절 부른 거다? 천하의 로라파커가?”
“아마도요.”
채널 워치나 채널 에디션에 관한 이야기라면 또 모를까.
100주년 기념 디자인을 품평한다는 건 정말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로라파커가 그런 걸로 불안해할 사람도 아니었다.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유현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세상에 ‘절대’는 없다.
유현은 잠시 후 만난 로라파커를 통해 새삼 그 진리를 깨달았다.
세미나 룸에 들어선 유현이 눈을 껌뻑이며 되물었다.
“제게 디자인 품평을 맡긴다고요?”
“네.웬만하면 부탁드리고 싶지 않은데, 이번 일은 그만큼 중요해요.”
“혹시 100주년 기념 디자인인가요?”
“역시 스티브.정확히 아시네요.”
“제가 아니라…….”
유현의 옆구리를 쿡 찌른 정다혜가 입을 열었다.
“스티브의 안목이 필요해서겠죠?”
“네.맞아요.그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사람이니까요.”
아무리 안목이 있다 하더라도 로라파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패션 센스는 더더욱 없었다.
유현이 어이없어하는 반면, 정다혜는 무척 놀랐다.
“스티브가 그 정도예요?”
“그럼요.그 증거가 당신이잖아요.”
“저요?”
“네.엘리스, 스티브가 당신을 선택한 것만 봐도 안목이 증명된 거 같은데요?”
로라파커가 눈을 찡긋하자, 유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저런 농담도 할 줄 알았나?’
입꼬리를 씰룩이던 정다혜가 유현의 팔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유현 씨, 꼭 도와줘요.꼭이요.”
“정말 오해라니까요.”
“아니에요.유현 씨 안목 있어요.확실해요.”
“그게 무슨…….”
유현이 황당해하던 순간이었다.
미소 띤 로라파커가 손을 들자, 벽면이 열리며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치이이잉.
그 안에 유현의 선택을 기다리는 디자인들이 쫙 펼쳐졌다.
재킷부터 백까지.
디자인 톤을 일치시킨 컬렉션의 수만 10종이다.
“…….”
엄청난 규모 앞에서 유현은 할 말을 잃었다.
로라파커는 유현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말투와 시선 처리, 그리고 복장에 신경 썼다.
까다로운 자신의 시선에 거슬리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는 감각이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감각이 몸에 밴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만나면 만날수록 유현은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자신의 니즈에 정확히 맞춰 줬다.
직관이 무척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직관은 놀라운 디자인 센스로 나타났다.
-지금 보시는 디지털시계의 모습이 채널 워치의 미래가 될 겁니다.
약 5년 전.
유럽 전시회에서 유현이 건넨 디자인 시안은 아직도 집무실 벽에 걸려 있다.
기존 시계의 틀을 완전히 비튼 창조적 파괴는 현실이 되어 세상을 뒤흔들었다.
당시엔 누구도 상상 못했던 미래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게 유현을 부른 이유였다.
산업 디자인과 패션 디자인의 근본은 다르지만, 미래와 맞닿은 직관을 가진 그라면 분명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 줄 거라 믿었다.
유현에게 기대려는 게 아니라, 그의 감각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지금은 돌다리도 두드려 봐야 할 만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편, 유현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10종의 컬렉션 중에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동네 옷가게도 아니고, 세계 최고의 명품이라 불리는 채널이다.
아무리 유현이 연륜이 많다 한들, 세계 톱디자이너들의 결과물을 평가할 능력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로라파커가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그냥 빠지기도 애매했다.
그녀가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담 없이 하나만 골라 보라고 했으니까.’
이미 유현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유현의 선택은 그중 일부일 터.
유현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레베카 드보의 안내를 받은 유현은 가장 좌측의 디자인부터 살폈다.
앞에 서 있던 직원이 전시된 디자인의 철학을 언급했다.
“적나라한 아이템들로 브랜드 가치를 소비하기보다, 패션 하우스로의 정체성에 집중한 디자인으로 빈티지 스킨(송아지 가죽)을 중점적으로 차용하여…….”
낯선 용어들이 종종 나왔지만,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 컬렉션은 로라파커의 히트작인 클래식한 디자인을 계승한 작품이었다.
걸려 있는 옷과 모자 또한 마찬가지다.
채널 고유의 트위드 스타일을 한층 발전시켜,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다음은 보다 실험적인 제품이 소개됐다.
“2001년 유행했던 시즌 제품을 재탄생시킨 블랙 앤 화이트 컬렉션으로…….”
블랙 테두리에 화이트를 전면으로 내세운 게 특징이다.
직각 퀄팅 패턴에 반짝이는 소재를 더한 레더 백은 뒤에 놓인 다소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과 무척 잘 어울렸다.
무턱대고 고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유현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인상적인 디자인은 꽤나 많았다.
레드 컬러로 도발적인 관능미를 부여한 작품도 있었고,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변신을 꾀한 스타일도 있었다.
솔직한 말로 다 괜찮아 보였다.
정다혜도 마찬가지인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렇게 9종의 디자인 컬렉션을 지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였다.
유현의 눈앞에 자유분방한 복장의 남자가 서 있었다.
가느다란 얼굴형에 깊은 눈매를 가진 남자의 얼굴이 왠지 낯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차림새와 풍기는 기운을 보아하니, 단순 직원이 아닌 디자이너 같았다.
어려 보이지만 표정엔 자부심이 넘쳤다.
남자를 지나치자, 뒤에 있던 디자인이 확 들어왔다.
어라?
멈칫한 유현에게 남자가 자신의 디자인을 소개했다.
“제 작품은 럭셔리 하우스의 제품을 재창조하기 위해, 진이나 가죽 위에 자수를 놓는 과감한 방식을 접목한 것으로…….”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려 왔다.
다소 복잡한 내용은 꽃무늬 모양의 자수로 간단하게 정리됐다.
모자, 신발, 청바지, 재킷, 지갑, 백 등등.
종류마다 다른 꽃모양이 박혀 있었고, 일부는 꽃 패턴이 음영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간 클래식 디자인을 추구했던 채널에선 상상도 못할 파격이었다.
지금으로선 무척 이질감이 있지만, 유현에겐 익숙했다.
‘분명 채널에서 선보였던 디자인이야.’
로라파커 외엔 관심이 없었던 유현이 기억할 정도로 이 디자인은 꽤나 유행했었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기를 끈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보다 한참 미래의 일이다.
지금도 이 제품이 통할까?
단순히 통하는 걸 넘어, 채널 100주년 기념에 어울릴 만한 제품인지가 중요했다.
이런 관점에선 미래의 지식이 큰 소용이 없었다.
유현은 기존의 관념을 벗어던지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스윽.
직접 만져 보며 고민했다.
명품 디자인은 잘 모르지만, 명품을 즐겨 했던 사람들은 안다.
유현에겐 그간 수많은 VIP들을 만나고, 대화했던 경험이 있었다.
유현은 그들을 떠올리며, 디자인을 대입시켜 봤다.
그렇게 몰입하던 순간, 깨달았다.
어느새 유현 자신이 흠뻑 빠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휙.
몸을 돌린 유현이 뒤에 서 있던 로라파커에게 다가갔다.
“전 마지막 제품이 마음에 듭니다.”
“아니, 그건 너무 실험적인 작품으로…….”
레베카 드보가 놀라 끼어들려 하자, 로라파커가 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