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874
상남자 874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재희 그 녀석은 참 자유로워.”
“그러게요.재밌게 사네요.”
“말만하지 말고 너도 그렇게 살아.난 너랑 다혜에게 좀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많은 걸 이뤘으니 이젠 좀 천천히 쉬어가도 돼.”
리비버를 시작한지 벌써 3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 정다혜와 약속했던 대로 정말 최선을 다했고, 원했던 그 이상을 이뤘다.
이젠 내려놓아도 될 만큼 방향도 잘 잡힌 터라 부담이 없었다.
“명심할게요.”
“그래.그건 알아서 하고, 반지는?”
“집에 있어요.”
“잘 챙겨라.이건 비밀인데 말이다, 사실 내가 네 엄마에게 프로포즈할 때 실수로 반지를 깜빡해버렸었다.그때 임기응변으로…….”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꺼낼 때가 되어서야 반지를 놓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 아찔했던 경험이 생생하게 이어질 때였다.
팍!
“깜짝이야.”
갑작스레 들린 스크린 화면이 켜지는 소리에 아버지가 움찔했다.
2층 야외 테라스에 있던 박원영이 오히려 더 놀랐다.
“어머.사장님.괜찮으세요?”
“흠흠.괜찮다.난 아무렇지도 않아.”
“죄송해요.영상 테스트 한번 해보려고요.유현 오빠, 프로포즈 영상 준비했는데 한 번 보실래요?”
“이젠 봐도 돼?”
“네.편집 끝났어요.오늘 리허설 해봐야죠.”
프로포즈 계획을 전해들은 박원영은 유현과 정다혜의 프로포즈 축하 영상을 선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었다.
어떤 걸 준비했을까?
“나야 좋지.기대되네.”
“잠시만요.오빠, LED 조명 좀 꺼줘.”
“알았어.”
1층에 있던 박원석이 허공에 떠있던 LED를 끄자, 스크린에 영상이 떠올랐다.
낮이지만 햇빛이 구름에 가려 화면을 보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첫 장면부터 예기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유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화면엔 박승우 차장이 얼마 전에 출산한 아기를 안은 채 손을 흔드는 모습이 비쳤다.
그는 자꾸 우는 아이를 달래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사랑하는 멘티야.이거 보이지? 2세 계획은 신중해야한다.신혼을 즐겨.
-으이그, 이 화상아.지금 프로포즈 하는데 그게 할 말이야? 다혜 씨.유현 씨가 이 사람보다 백배 나으니까 꼭 받아줘.알았지?
강혜진 차장의 타박에 유현이 쿡쿡 웃음 지었다.
곧이어 김영길 팀장을 비롯한 한성의 동료들, 체육관 관원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렇듯 하나같이 너무나 소중한 인연들이 유현과 정다혜를 축하해줬다.
유현은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다들 참 많이 달라졌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가 느껴진 건 리비버 초창기 멤버들이었다.
자신이 프로포즈를 하는 듯 열연을 펼치는 장만복은 얼마 전 드라마 조연이 됐고,
대인관계를 기피하던 이지현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혀 떨지 않을 정도로 담대해졌다.
혼자서 모든 걸 다 끌어안았던 원기준.
유현에게 자격지심이 있던 공현준.
자신이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윤보미 모두 과거의 틀을 깨부수고 한층 성장한 모습이었다.
씨익.
웃고 있는 유현에게로 강준기와 하준석이 차례로 소리쳤다.
-다혜 씨, 유현이 자식 독한 놈입니다.한 번 잡히면 안 놓아줄 테니까 도망치려면 지금밖에 없어요!
-유현이 녀석 은근 성격 있는 거 알죠? 초장에 잡아야 해요.꼭이요!
-흠흠.다혜 씨, 유현이가 프로포즈 준비를 1년 내내 한 놈입니다.거절하면 울지도 모르니까 그냥 받아주세요.
뭐야, 이놈들은.
그나마 가장 점잖은 김현수도 짓궂은 말을 꺼내는 모습에 유현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나저나 대체 이걸 어떻게 찍은 걸까?
궁금함도 잠시, 이번엔 너무나 의외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대표.그리고 정 대표.두 사람 너무 잘 어울려.축하하고 어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
바로 한성의 신현호 전 회장이었다.
“헐.”
유현이 놀라 입을 못 다물자, 어느새 옆에 온 박원석이 설명했다.
“신경욱 회장님께 전해 들었는지, 먼저 찍으시겠다고 연락주시더라.”
“정말? 아, 이걸 다 네가 준비했어?”
“다들 협조 잘 해주던데? 네가 잘 살긴 했나봐.물론 이거 완전 비밀이야.”
유현 덕분에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던 친구 박원석이 건치를 드러내며 웃었다.
신현호 전 회장을 시작으로, 전경련 회장들, 폴 그레이엄과 크리스티나 메르손도 짧게 영상을 보내왔다.
누군가에게 축하받는 기분.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에 감동이 밀려왔다.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매만진 유현이 스친 모든 인연들을 마음 깊이 새겼다.
영상이 막 끝날 무렵이었다.
지이잉.지이잉.
휴대폰이 울리며 정다혜의 번호가 화면에 떠올랐다.
유현이 검지를 입에 대자, 박원석이 즉각 사인을 보내 스피커를 끄게 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유현이 전화를 받았다.
“어.다혜야.”
-유현씨, 뭐해요?
“나? 안 그래도 너한테 전화하려고 했지.일 잘 마무리됐어?”
설미진은 정다혜가 어릴 적 불타 사라졌던 옷가게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정다혜는 그런 설미진을 위해 오늘 함께 상가를 둘러보러 갔었다.
-생각보다 좀 빨리 끝났네요.어디에요?
“음.남산 쪽?”
-잘됐다.저도 근처인데 얼굴 볼까요? 가보고 싶은 곳도 있고요.
“가고 싶은 곳?”
의아해하던 유현은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정다혜가 가고 싶은 곳은 남산타워였다.
케이블카에 오른 유현이 물었다.
“갑자기 남산타워는 왜?”
“그냥 확인하고 싶어서요.약속했던 3년이 지났잖아요.”
정다혜는 오랜만에 찬 목걸이를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큐피트 화살 모양의 팬던트는 남산타워에 걸린 자물쇠의 열쇠였다.
예상치 못한 답에 유현이 눈을 껌뻑였다.
“지금 자물쇠를 열려고? 열쇠가 하나 더 필요하잖아.”
“유현 씨는 지갑에 늘 가지고 다니잖아요.아니에요?”
“응? 그렇긴 한데…….”
자물쇠 안엔 6년 전에 적어놓은 유현의 고백이 담겨 있었다.
당시 서로에 대한 약속을 적자고 한 게 아니었기에 정다혜는 분명 개인적인 소망을 쪽지에 남겼을 터다.
그런 그녀에게 뜬금없이 자신은 교제하기도 전 부터 프로포즈를 준비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일까?
아무리 진심이었다 한들 너무 가벼운 감정으로 치부될 여지가 있었다.
이게 유현이 오래 염두에 뒀었던 자물쇠 프로포즈를 배제한 이유였다.
유현이 표정이 어둡자 정다혜가 물었다.
“왜요? 자물쇠 열기 싫어요?”
“아니.그냥.”
“전 꼭 열었으면 좋겠어요.그때 마음을 다시 느껴보고 싶거든요.”
“그래…….그러자.”
유현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유현은 남산타워와 연결된 야외 테라스로 향했다.
좁은 철제 계단을 올라가니 울타리를 가득채운 자물쇠들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천천히 걷던 유현은 자물쇠 안에 담긴 쪽지를 떠올렸다.
사랑한다.
나와 결혼해줄래?
처음부터 유현에겐 정다혜 뿐이었다.
과거에 놓쳐서 너무나 후회했고, 꼭 다시 잡고 싶었던 그녀를 향한 진심어린 마음이 그 안에 담겼다.
반지라도 있었으면 지금 당장 프로포즈 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준비한 반지도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냥 가자고 할까?
꼬옥.
정다혜가 손을 잡는 순간 유현의 고민은 무색해졌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유현은 체념한 채 미소 지었다.
정다혜는 유현을 바라보며 9년 전, 처음 명동 커피숍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처음 만난 사람인데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잘 아는 듯한 그의 모든 행동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알 수 없는 신비한 감정과 함께 떠오르는 문구가 있었다.
-운명의 상대는 붉은 실로 이어져있다.
어릴 적부터 가슴속에 새겼던 그 말이 현실로 다가온 듯 유현과 붉은 실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마치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나타난 사람처럼, 그는 언제나 옆에서 힘을 불어넣어줬고 또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주었다.
때론 부인하고 밀어냈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잊힌 적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6년 전, 이곳에 와서 자물쇠를 달 때 결심했었다.
언젠가 정말 붉은 실로 이어진 인연인 게 맞는다는 확신이 들 때, 다시 오겠노라고.
정다혜는 그 자리에서 고백할 마음을 쪽지에 담았다.
그 말을 오늘 꼭 전하고 싶었다.
두근두근.
정다혜는 떨리는 마음으로 자물쇠 앞에 섰다.
목걸이를 앞으로 내민 그녀에게 유현이 물었다.
“그럼 열까?”
“그래요.”
“그전에 잠시만.”
큰 자물쇠에 달린 두 개의 구멍을 바라보던 유현이 멈칫한 채 말을 이었다.
“다혜야.난 너와 이 자리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진심이었어.쪽지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으면 좋겠어.”
“이상하게라뇨?”
“좀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당시엔 교제하기도 전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사랑한다고 결혼해달라고 쓴 말을 누가 믿을까.
유현의 당부에 정다혜가 같은 말로 화답했다.
“유현씨도요.”
“나?”
“우리 그러지 말고 일단 열어봐요.”
“그래.그러자.”
달칵.
두 개의 열쇠가 꽂히자, 6년 만에 큰 자물쇠가 열렸다.
안에는 당시 남긴 쪽지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꺼낸 유현은 자신의 쪽지를 정다혜에게 건넨 후, 그녀가 남긴 글을 읽어 봤다.
“어?”
순간 유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거기엔 반듯한 손글씨로, 자신을 향한 고백이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내용이 유현의 것과 거의 똑같았다.
“…….”
“우리,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놀란 유현을 보며 정다혜가 싱긋 미소 지었다.
하늘에선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휘우웅.
바람에 흩날린 눈꽃송이가 벤치에 앉은 유현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첫 키스를 나눴던 그 자리에서 정다혜가 유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새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 하늘은 오늘따라 더 아름다웠다.
가만히 보고 있던 유현이 뭔가 결정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나쁜 꿈을 꾼 적이 있었어.”
“전에 유럽에서 말했던 꿈이요?”
“그래.혼자 앞만 보고 달리다가 소중한 모든 걸 잃는 그 꿈 말이야.”
“기억에 오래 남았나 봐요.”
“아주 끔찍했거든.혼자서만 차지하려고 주위 사람들을 내팽겨 쳤어.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도 잃었지.아마 모두가 날 미워했을 거야.”
그토록 바라던 사장이 되었을 때, 주위에 남은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
유현은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때의 후회가 아직도 절절히 남아 있었다.
그런 유현의 손을 정다혜가 잡아줬다.
“꿈일 뿐이에요.”
“아니, 너무나 생생해.그래서 생각했어.다시 기회를 주면 꼭 달라지고 싶다.많은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다.그게 딱 한성에 입사하기 전의 일이야.”
“그래서 그렇게 주위 사람들을 챙기게 된 거예요?”
“어쩌면 그 꿈이 큰 원동력이 된 건지도 몰라.아니, 맞을 거야.무척 아팠던 그 꿈이 나를 바꿨어.”
다시 되돌아온 그날, 모든 게 바뀌었다.
“가족도, 친구도, 동료들도,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너도.그 꿈 덕분에 절대 놓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었어.”
가슴 아팠던 과거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젠 과거를 꿈으로 묻고 결혼이라는 새 출발을 하기 전에 정다혜에게 꼭 말하고 싶었다.
그래야 비로소 모든 게 정리될 거 같은 기분이었다.
스윽.
유현의 얼굴을 매만진 정다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응?”
“꿈이 원동력이 아니에요.선택의 기로에서 이전과 다른 결정을 내린 건 유현 씨잖아요.같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누구나 달라질 순 없어요.”
“정말 그런 걸까?
유현의 의문에 정다혜가 흔쾌히 답해줬다.
“저 믿어도 되요.몰랐는데 제가 은근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랬어?”
“그럼요.덕분에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잡았잖아요.유현 씨, 당신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에요”
다시 주어진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었던 그녀의 미소.
유현은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내가 이 말했었나?”
“뭘요?”
“너무 사랑한다고.”
“저도 사랑해요.”
꼬옥.
유현은 정다혜를 품에 안으며 먼발치 풍경을 바라봤다.
어두워진 하늘 위로 꿈속의 기억이 스쳤다.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던 그때, 노년의 바텐더가 칵테일 잔을 내밀었다.
-이 한 잔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기적이 벌어졌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다시 주어진 삶, 소중한 것들을 지키며 잘 살겠습니다.”
허공에 세상을 향한 유현의 의지가 나지막이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