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89
상남자 89화
오랜 기간 한성에서 얼마나 신경 써서 대응해 줬는지 알아서였다.
“그래도 상대가 한성인데…….”
“걱정 마.위쪽에서는 말 다 맞춘 것 같으니까.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네.알겠습니다.”
“개발팀 쪽엔 입 잘 맞춰 두고.완제품 쪽엔 말 다 해 놨으니까.”
“네…….”
권 대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기획한 내비게이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차량이 출시될 시기를 못 맞출 가능성이 컸다.
그 모습에 조치훈 대리가 혀를 찼다.
“으이구, 넌 신입 때나 지금이나 어떻게 똑같냐.어깨 펴, 인마.내가 을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됐고.이참에 한성이나 잡자고.”
“그럼 오늘 컨펌 안 하실 건가요?”
권 대리가 묻자 조치훈 대리가 씩 웃었다.
“당연히 그냥 돌려보내야지.한성 때문에 늦어졌단 말도 덧붙이고 말이야.”
“아…….”
“걔네는 그래도 따라올 수밖에 없어.이미 개발해 놨는데 어쩔 거야?”
“…….”
갑질 하루 이틀 해 보나.
밥알을 입에 구겨 넣은 조치훈 대리가 이죽거렸다.
거제 기업단지를 연결하는 지하상가의 규모는 꽤 컸다.
하지만 각 회사마다 자체 식당을 운영해서인지 따로 식사할 만한 곳은 없었다.
대부분 오래된 백반집이었고, 패스트 푸드점이 간간이 있을 뿐이었다.
최민희 과장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맛있는 거 사 주기로 했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그런 말씀 마세요.너무 맛있었어요.”
“커피 마실까? 커피는 비싼 걸로 사도 돼.”
유현의 미소에 최민희 과장의 목소리가 한 톤 밝아졌다.
최민희 과장이 이런 스타일이었나?
늘 차갑고 딱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평소와 분위기가 무척 달랐다.
유현은 어쩌면 자신이 최민희 과장을 너무 몰랐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딸랑.
두 사람이 커피숍을 들어간 순간이었다.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조치훈 대리였다.
“어이구,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네.케이크도 괜찮죠?”
어울리지 않는 그의 넉살에 최민희 과장이 꾹 참고 답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유현 씨 밥 제대로 못 먹었지? 마음껏 골라.”
그런데 아니었다.
이건 그녀의 소심한 복수였다.
유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답했다.
“두 개 골라도 되나요?”
“그럼, 그럼.조 대리님이 사시는데 괜찮지.그렇죠?”
“……뭐, 마음대로요.”
조치훈 대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여유 있게 답했지만, 쓰린 속을 숨기진 못했다.
미간에 주름이 팍 잡혀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유현은 아무도 모르게 휴대폰을 들었다.
“슬기야.여기가…….”
“알았어요.시간 끌면서 기다려요.”
최슬기의 시원한 대답이 들렸다.
잠시 후 테이블 위엔 음료와 케이크로 가득했다.
최민희 과장이 야무지게 먹으며 맞은편에 앉은 조치훈 대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음, 정말 맛있네요.감사합니다.”
“네.많이 드세요.”
“회의 때도 이 정도로 배려해 주시면 더 좋을 텐데요.”
물론 그 말 속에 뾰족 튀어나온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네.맛있게 드시는 모습 보기 좋네요.그만큼 패널에 신경 좀 써 주세요.”
“이 정도로 신경 쓰는 업체는 없을걸요?”
“뭐, 결과가 잘 나와야 말이죠.”
“결과는 서로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굳이 안되는 걸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는 거죠.”
조치훈 대리도 은근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이 먹는 걸 앞에 두고 유치한 심리 싸움을 펼쳐 댔다.
“그렇단 건…….”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살짝 선이 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었으나, 유현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업무 중도 아닌데 이 정도 자존심 싸움은 충분히 있을 법했다.
대신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심증은 대략적으로 굳힌 상황이었다.
현일자동차도 한성전자를 쉽게 놓을 수 없다.
접을 생각이었으면 조치훈 대리가 이런 식으로 몰고 가지도 않았을 터였다.
문제는 하나였다.
그가 오늘은 아예 협상할 의지가 없단 점이다.
그러던 중이었다.
조치훈 대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코 평수는 넓어진 만큼 호흡이 거칠었고, 얼굴도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인내심을 간당간당하게 잡고 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본 최민희 과장이 말했다.
“아니라면 죄송하고요.”
“최 과장님,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같이 협의를 해 보자는 의미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최민희 과장이 노련하게 선을 지키려 했지만, 조치훈 대리는 아니었다.
작정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라도 지를 양반이다.
그럴 리 없다고?
수많은 군상을 관찰해 온 유현은 높은 확률로 확신했다.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수습하는 건 당연히 손해다.
만약 문제가 생겨도 최민희 과장이 아닌, 유현이 덮어쓰는 게 협상에 유리했다.
조치훈 대리가 발끈하려던 찰나, 유현이 뭔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릉.
“최 과장님, 시간 다 된 거 같습니다.”
“그래?”
“아니, 잠깐만.신입이 버릇없게 선배들 대화 중에 끼어들어?”
순간 조치훈 대리가 일어나 삿대질했다.
아름아름 쌓인 화를 직급이 낮은 유현에게 푸는 모양새다.
카페 안이라 막말을 꾹 눌러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럴 땐, 확실하게 굽혀 줘야 한다.
“아니, 지금…….”
유현은 나서려는 최민희 과장을 막아서며 허리 숙여 사과했다.
“대리님, 정말 죄송합니다.”
“흠흠.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커피숍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터라 조치훈 대리 입장에선 더 나갈 수도 없었다.
유현의 사과 한 방으로 괜히 자신만 나쁜 놈 된 기분이었다.
조치훈 대리가 멋쩍은지 옷소매를 고쳐 매며 말할 때였다.
바로 옆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빠! 유현 오빠 맞죠?”
워낙 큰 소리라 모두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거기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긴 머리가 단발이 되었지만 유현이 몰라볼 리 없었다.
바로 신입사원 연수 때 같은 팀이었던 최슬기였다.
“슬기야.”
“오빠, 근데 지금 이게 무슨 일이에요?”
“고객분들 만나고 있지.”
“흐음…….”
팔짱을 낀 최슬기가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조치훈 대리가 움찔했다.
“하하, 슬기 씨.오랜만이에요.”
“대리님, 지금 카페에서 업체 사람들에게 행패부리는 건가요, 설마?”
“아뇨.그럴 리가요.”
“…….”
유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눈을 껌뻑거렸다.
딱 봐도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상하 관계가 뭔가 잘못되어 보였다.
오히려 어린 최슬기가 조치훈 대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런 모습 참 실망이에요.유 대리님도 무척 실망하실 거고요.”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유현 씨, 그렇지 않습니까?”
유 대리.
이미 최슬기에게 설명을 들은 여자였다.
유현의 입에 작은 미소가 걸린 순간이기도 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유현은 슬쩍 최슬기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곤 상황극에 몰입했다.
“네.그럼요.슬기야, 조 대리님께서 오늘 협상할 때 계약 컨펌도 주셨어.무례하게 하지 마.”
“어? 그래요? 조 대리님 진짜예요?”
“……하하하, 그, 그렇죠.”
최슬기는 갑작스러운 유현의 변화에 무척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조치훈 대리를 살살 코너로 모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렇다면 미안해요.사과의 의미로 유 대리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정말입니까?”
“진짜죠.다만, 조 대리님께서 거짓말하지 않았단 전제에서요.”
“…….”
사과를 했다가 타이밍 좋게 조건을 단 밀당 실력은 일품을 넘어서 예술이었다.
“설마.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이런 걸로 속이고 하진 않을 거잖아요.그렇죠?”
“그럼요.당연하죠.”
심지어 자존심까지 건드리며 확답을 받아 냈다.
신입사원 연수 시절 춤 지도를 하는 것을 보며 어느 정도 센스가 있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 이상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판을 내려다보며 연기를 펼치는 모양새였다.
유현은 그녀만 보이는 각도에서 엄지를 내밀어 줬다.
최슬기는 빙긋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조 대리님.그럼 믿고 갈게요.다음에 같이 식사 한번 해요.”
“물론이죠.날짜 잡겠습니다.”
“네.아, 유현 오빠.끝나고 전화해.회의 결과 꼭 알려 주고.”
“알았어.고맙다.”
최슬기가 떠난 후 묘한 침묵이 네 사람을 감쌌다.
“…….”
유현이 조치훈 대리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회의하러 가실까요?”
“……그러시죠.”
조치훈 대리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유현은 최슬기의 말이 어느 정도 먹혔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치훈 대리의 표정 변화만 바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드라마틱하게 회의 결과가 변할 거라고 믿진 않았다.
약간의 틈이 보이는 것 정도로 족했다.
그런데 웬걸?
오후 회의 시간 내내 보이는 조치훈 대리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다.
“아무래도 저희가 조심스럽다 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요.이해하죠.”
“첫 내비게이션 아니겠습니까.시작이 좋아야 하거든요.시작이.하하하.”
“감사합니다.그럼 스펙 확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네.개발 스펙은 확인했으니 이걸로 된 것 같습니다.요구 사항 다 확인했고요.”
갑자기 온순해진 데다 회의에 임하는 자세 또한 진지했다.
“네? 그 말은…….”
“이 정도면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확인 메일 주실 수 있나요?”
“네.그렇게 하시죠.”
최민희 과장의 직접적인 물음에 바로 답을 줬다.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심지어 유현을 향해 눈까지 깜빡였다.
“…….”
유현이 할 말을 잃은 사이, 옆에 있던 권승범 대리가 조치훈 대리에게 귓속말했다.
“대리님, 괜찮아요? 아까는…….”
“야, 괜찮아, 인마.팀장도 그냥 길들이라는 거지 연 끊겠단 소리라는 게 아니니까.”
“그럼 정말 하는 겁니까.”
“그래.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좋게 가자고.좋게.”
“아, 알겠습니다.”
유현에게 들리진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표정으로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권승범 대리도 조치훈 대리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이건 온전히 조치훈 대리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드디어 조치훈 대리는 아까와 전혀 다른 태도로 마무리 말을 꺼냈다.
“최 과장님, 이번 회의는 이만 정리하겠습니다.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네.감사합니다…….”
조치훈 대리의 확답을 들은 최민희 과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유현을 힐끔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출장을 같이 가자고 했지만, 솔직히 그리 도움 될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신입사원인 그가 할 수 있을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차장이나 부장급 인맥도 아니고 신입사원 인맥이 골치 아픈 현일자동차 대리를 움직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인사로 마무리를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고생하셨습니다.”
내비게이션 개발팀 사람들도 미안한 마음이 있는지 정중하게 인사했다.
비록 중간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무리는 프로다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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