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94
상남자 94화
김현민 차장이 안타까운 듯 뒷말을 이었다.
“겉으론 엄청 강하지만, 속이 여려.약해.”
“네.그렇죠.”
“스트레스도 많을 거야.송 차장이랑도 원래 사이가 안 좋았거든.”
“그래요?”
유현이 눈을 크게 뜨자 김현민 차장이 속사정을 천천히 털어놨다.
“송 차장이 여직원들한테 좀 막하잖아.최 과장한테도 막말 좀 퍼부었었지.”
“…….”
순간 유현에게 잊힌 오랜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여자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아등바등대실까.이렇게 할 거면 그냥 접어.괜히 나대지 말고.
목소리만은 선명했다.
남자는 빈정대며 최민희 과장을 몰아붙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동조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여 댔다.
그녀의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현 역시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방관한 것이다.
그때 낄낄대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유현의 기억 속 짙게 졌던 안개가 걷혔다.
‘송호찬 차장.’
그가 족쇄를 차고 죽어라 노력하고 있던 그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이었다.
꽈악.
순간 유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유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김현민 차장이 다독였다.
“송 차장은 일단, 신경 꺼.당분간 죽어지낼 거야.”
“일은 잘 처리될까요?”
“그건 내가 신경 써 볼게.”
신경 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경훈 부장이 저런 식으로 나왔단 건 이미 그 윗선까지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 했다.
송호찬 차장 또한 언제 그랬다는 듯 이를 드러낼 터였다.
“…….”
“그러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어.알았지?”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유현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억지로 집어 눌렀다.
그러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하여튼 걱정 마.나도 이젠 참지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유현이 마지못해 고개 숙였다.
김현민 차장이 자리로 돌아간 후였다.
유현은 몸을 돌려 최민희 과장의 빈자리를 바라봤다.
“…….”
한참 동안 그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유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날 저녁.
퇴근길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무심결에 휴대폰을 들었던 유현은 흠칫 놀랐다.
아버지가 먼저 전화를 거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
-잘 지냈냐?
“네.무슨 일 있으세요?”
-뭐 하나 싶어서.통화 가능해?
아버지의 목소리에 약간의 취기가 남아 있었다.
유현은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이렇게 통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요.퇴근했습니다.”
-그렇구나.
“…….”
-…….
잠깐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유현은 한재희를 도마 위에 올렸다.
“아버지, 요새 재희가 말이에요…….”
-그래? 신기하구나.영 철없던 애가 오빠를 도와준다고 하고.
역시나 아버지는 노심초사하는 딸의 이야기에 단번에 반응했다.
“네.실력이 부쩍 늘고 있더라고요.잘하면 한성 휴대폰에 재희 디자인이 들어갈지도 몰라요.”
-살다 살다 별일이 다 있네.재희도 그걸 알아?
“조금요.그래서 애쓰는 것 같기도 하고요.”
-허허, 잘됐지.잘된 일이야.
물꼬를 한번 트니 다음 대화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요즘 어머니 반찬 가게는…….”
-안 그래도 산에 가야 하는데…….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가, 취미 이야기로 돌아갔다.
직접 대면할 때는 몰랐는데 술에 취한 아버지는 수다스러운 면이 있었다.
보이지 않기에 그럴 수 있는지도 몰랐다.
덕분에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게 좋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는 어때?
“잘 지내요.선배들도 다 좋고요.일도 잘되고요.”
-다행이다.그냥 궁금해서…….
여운이 남는 답에 유현은 직감적으로 아버지가 전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회사 생활에 해 줄 말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그렇게 쉽진 않네요.”
-그래.당연한 거야.이 작은 회사도 쉽지 않은데 한성은 오죽하겠어?
“아버지도 힘드세요?”
-나야 이게 체질이고, 넌 이제 처음이잖니.
‘20년을 했습니다, 아버지.’
유현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살가운 말을 더했다.
“네.인생 선배로서 조언 좀 해 주세요.”
-내가 뭐 말할 게 있겠냐.
“그래도요.”
잠시 숨을 고르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라.참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네, 아버지.”
-눈치 보고 애쓸 거 하나 없어.네 주변 사람만 잡아도 성공한 거야.
“명심할게요.”
-그래.그거면 된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 유현이 위트를 더했다.
“그러다 잘리면 아버지 회사로 가도 되나요?”
-여기도 만만치 않을 거다.
“그럼, 어머니 반찬 가게로 가야겠네요.”
-……생각보다 잘된다더라.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생각도 못 한 농담이 돌아왔다.
유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전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단면을 이렇게 또 엿보았다.
아버지는 민망한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럼, 이만 끊자.
“아버지.”
-왜.
유현이 아버지를 불렀다.
옅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목구멍 끝에서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유현은 다른 말로 대신했다.
“다음에 내려가면 술 한잔 해요.”
-그래.엄마한텐 꼭 비밀로 하고.
“네.그럴게요.”
유현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한참 동안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참지 말라는 말.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
아버지에게 들은 그 말이 유현에게 힘을 실어 줬다.
유현은 애써 지금의 기분을 감추지 않으려 했다.
화가 났다.
고작 송호찬 차장에게 최민희 과장이 힘들어할 거라 생각하니 짜증이 치솟았다.
이건 그냥 무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기분은 넘버원 체육관까지 이어졌다.
팡.팡.파팡!
“윽.야! 좀 살살 해.”
링 위에서 유현의 주먹을 받아 내던 박영훈이 앓는 소리를 냈다.
“헉헉.왜? 형이 속도 더 올리라며.”
“하아, 하아.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지.무식한 자식.”
“좀 쉬자.”
풀썩.
유현은 링 구석에 앉아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벗어 놓았다.
머리칼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그 모습에 박영훈이 혀를 내두르며 따라 앉았다.
평소 유현은 운동도 절제하며 하는 스타일이었다.
합을 맞추고 동작할 때도 힘을 빼고 하고 있단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박영훈이 본 오늘의 유현은 달랐다.
주먹에 제대로 힘이 실렸다.
분명 약속한 움직임인데도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기까지 했다.
‘녀석이 운동을 제대로 하려는 건 아닐 거고.’
말없이 물을 마시는 유현에게 박영훈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그냥 회사에서 짜증 나는 일이 좀 있었어.”
유현이 솔직하게 말하자 박영훈이 의외인 듯 물었다.
“웬일이냐.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왜? 이상해?”
“아니.난 네가 짜증도 없는 놈인 줄 알았지.”
“설마.지금껏 그런 상황이 안 벌어진 거지.”
유현의 말에 더더욱 박영훈이 호기심을 보였다.
“호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그냥.어떤 거냐 하면…….”
유현은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히 줄여서 말했다.
옆 팀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야기,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 등등.
박영훈은 충분히 공감하는 눈치였다.
“그 마음 알지.나도 팀장 허벅지에 로우킥을 날리고 싶단 생각을 맨날 한다니까.”
“하여튼 그래.그래서 나도 힘이 좀 들어갔나 봐.”
“힘준다고 되는 거냐?”
“뭐, 컨디션도 나쁘지 않고.”
박영훈은 유현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유현의 표정이 많이 풀어져 있었다.
안 그래도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쯤에서 흘려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유현이 별로 좋아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유현아, 네 친구 있잖아.”
“현수?”
투자 이야긴가?
친구 이야기에 유현의 귀가 솔깃했다.
“어, 그 친구가 말이지…….”
박영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뒷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링 아래에서 웅성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관장과 체육관 선배들이 누군가를 감싸고 있었다.
“뭐야?”
“몰라? 신입 들어온다던데 온 건가?”
“좋은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딱 봐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관장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선배들은 나서려는 걸 서로 말리고 있었다.
그 사이 보이는 낯선 남자는 빈정거리듯 입꼬리를 올려 댔다.
그때 관장과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링을 향했다.
유현을 본 관장이 손을 들었다.
“유현아!”
“네, 관장님.”
“신입 받아라.테스트는 막내인 네가 해야지.”
“네?”
유현이 황당한 듯 눈을 껌뻑이자 사람들이 유현을 몰기 시작했다.
“너도 처음 들어왔을 때 테스트받았잖아.그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
처음 유현을 상대했던 오정욱의 목소리였다.
그때 오정욱은 괜히 오기를 부렸다가 유현에게 헛주먹만 날렸었다.
심지어 이제 프로인 김태수도 웃으며 턱짓했다.
“유현아, 그냥 테스트만 해 줘.”
“저는요?”
그러자 박영훈이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댔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이런 테스트를 해 준 적이 없던 까닭이다.
그런 그를 김태수가 다독였다.
“너는 일단 유현이가 실패하면 그때 해.네가 체육관 선배 아니냐.”
“아…….네! 하하.당연히 선배가 먼저 나서면 안 되죠.알겠습니다.”
역시나 박영훈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하지만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 하면 안 될까요?”
“그래? 못 하겠어?”
충분히 땀을 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지하게 누굴 상대하기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였다.
링 아래에서 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애송이 말고 좀 쎈 놈 주쇼.괜히 병원 보내기 싫으니까.”
“애송이 아니고 회사원.”
거친 남자의 말에 관장이 말을 정정해 줬다.
남자는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미치겠네.회사원이라고?”
“운동한 지는 3개월쯤 됐나? 정욱아, 그치?”
“4, 5개월쯤 된 거 같은데요?”
“그렇다네.어때? 우리 막내?”
관장은 우측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마치 일부러 성질을 돋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현이 힐끔 보자 남자가 가슴을 탕탕 치고 있었다.
딱 봐도 운동깨나 한 몸이었다.
“하, 진짜.이거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형님, 나 몰라? 나 강동식이야.강동식.”
“그래.알았으니까 군말 말고 테스트를 받아.그래야 프로를 데뷔시켜 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그러니까 제대로 된 놈이랑 붙여 주쇼.”
“자신 없으면 말든가.”
관장의 말에 강동식이 씩씩대며 링 줄을 잡아 흔들었다.
그러곤 유현을 노려봤다.
“야? 너 괜찮겠냐? 내 주먹 맞으면 뒤질 수도 있다.”
“그럴 일 없으니까 그만하시죠.”
저런 도발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
애도 아니고 굳이 같잖은 감정싸움에 장단 맞춰 줄 생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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