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21
21
가슴 한가운데에는 심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알고 보니 심장이 아니라 은은한 붉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엔 작은 방울만 하던 홍등이 점점 부피를 키우더니 곧 온몸을 잡아 삼킬 듯 커져 요요한 붉은 기운을 뿜어낸다.
‘두려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어찌 된 셈인지 입만 뻐끔거릴 뿐 목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는다.
일렁이며 타오르는 불빛에 숨이 막혀 이젠 어쩔 도리가 없겠구나 싶을 때, 홍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나큰 검은 날개가 윤희를 감싸 안았다. 증오를 상징하는 붉은 불빛이 사라진 짙푸른 어둠 안, 날개의 주인을 향해 감사의 뜻을 전하려 고개를 들자, 이번엔 냉혹한 눈빛의 이정후가 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다.
‘안 돼!’
비명을 지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홍등도, 타락한 검은 날개도 아닌 하얀 시트와 흰색 천장, 그리고 어깨를 조심스레 토닥이는 따뜻한 손이었다. 꿈이 너무나도 생생했던 탓에 상황판단이 잘 되지 않아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이마의 식은땀을 훔쳐내는 부드러운 손길에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악몽이라도 꿨나 봐.”
이정후였다.
맞아, 악몽. 당신 꿈.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듯 붉은 혀를 날름거리던 홍등, 그리고 화마에서 저를 품어 지켜주던 검은 그림자. 그러나 저를 구해낸 어둠의 주인은 한없이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뭘까. 잠시 곱씹어 보다 고개를 저어 생각의 끄트머리를 잘라냈다. 꿈이야 어떻든 이정후가 냉혈한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배고프지. 조금 식었는데 다시 데워오라고 할까?”
계속 누워있자니 옆에서 뚫어지게 저를 살피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몸을 일으켜 기대자, 이정후가 기다렸다는 듯 조반이 차려진 쟁반을 내밀며 다정스레 물었다.
지난밤도 그랬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자신을 안고 어를 때에도, 그리하여 처음 제 안에 파고들던 순간에도, 다리 사이로 흐르는 핏줄기에 놀라 왈칵 울음을 터트렸을 때에도, 혹시나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시종일관 다정하게, 겁먹지 말라고, 괜찮다고. 따스한 속삭임 끝에는 녹아내릴 듯 달콤한 입맞춤이 이어졌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것을 머금은 듯 제 입술 위에서 녹진하게 굴려지던 말캉한 혀가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았다.
이전 같았으면 응당 기뻤으련만, 침대에 눕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거칠게 다루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상반된 모습에 도리어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해서 제 안 깊숙이 몸을 묻곤,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저를 향해 ‘울어도 돼.’하며 달래는 이정후에게 적개심을 담아 답했었다.
“손님 앞에서 우는 건 예의가 아니라면서요.”
“…….”
“안 울 거예요. 손님이니까.”
“……입 다물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입 다물랬지.”
악에 받쳐있던 것이 터졌던 걸까, 그도 아니면 속이 곪을 대로 곪아 문드러진 탓이었을까, 한번 시작된 독한 말이 멈출 줄 모르고 이어지더니 결국 화를 키웠다.
“값은 그동안 키워준 걸로 칠게요.”
“뭐?”
“다시 말해 드려요?”
대답 대신 이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다시 마주친 눈빛은 어둡고 탁했다.
“그럼 손님이 만족할 때까지. 어디 한 번 제대로 응해봐.”
분명 참을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까와는 달리 거세게 치고 들어오는 몸짓에 순간 숨이 멎어 버렸다. 가쁘게 몰아쉬는 호흡에도 아랑곳 않고 몰아붙이던 무자비한 입맞춤. 그제야 그가 답해주지 않았던 키스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건 입술과, 혀와, 치아가 만들어낸 또 다른 언어라고. 몇 번이나 욕구를 채우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샅샅이 제 것이라는 흔적을 새기던 입술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상냥하게 식사를 종용했다.
“생각 없어요.”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다시 준비하라고 할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먹어.”
“싫어요.”
“네가 먹은 만큼만 최환에게 줄 거야.”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
문득 제가 잘못한 만큼 최환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어제 밤 화나게 한 걸로 환에게 앙갚음을 한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 없겠지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확인했다.
“환이, 환이는 잘 있는 거죠?”
“…….”
“무사한 거죠?”
무언의 응답에 초조해져 재차 확인하자 이정후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신경이 거슬린 게 분명해 보였다.
“먹어.”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환에게 해가 될까 싶어 하는 수 없이 밥술을 뜨자, 어릴 때 해줬던 것처럼 생선 가시를 발라 먹기 좋게 올려놔주었다. 환의 배를 채우기 위해 윤희의 입에 음식물이 들어가야 하는 기이한 식사가 시작됐다. 늦은 아침은 후식까지 배불리 챙겨 먹고 나서야 끝이 났다.
“제가 먹은 만큼만 주지 말고, 환이도 배부르게 줘야 해요. 네?”
“최환이 그렇게 좋아?”
“당연하잖아요. 남매인데.”
“그래, 그랬지.”
“…….”
“처음 혈육을 알게 된 기분이 어때?”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혈육이란 단어에 자연스레 환이 떠올라 조금은 긴장이 풀어졌다.
“그냥,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힘이 돼요.”
“…….”
“또, 이유 없이 잘 해주고 싶고,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 그러니까,”
“…….”
“그러니까 해치면 안 돼요. 네? 제발, 제발요.”
아래가 욱신거리는 것도 꾹 참고 무릎을 꿇듯이 앉아 간곡히 청했다. 그런 윤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정후가 이마에 손을 얹고 기대 누웠다.
“편히 앉아.”
자세를 풀라는 말에 조심스레 다리를 움직여 바로한 몸은 편해졌지만, 환을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제 부탁에는 답이 없어 마음이 불편했다.
“안 그럴 거죠? 제가, 제가 말 잘 들을게요.”
다시 한 번 간절히 얘기하자 좁아지는 미간에 행여나 심기를 상하게 할까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비슷한 날이 벌써 며칠이나 흘렀다.
‘최환은 어디에 있는 걸까.’
가둘만한 곳은 지하뿐인데. 본가에서 몇 년을 지내면서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계단 밑 저 어둑한 곳. 기회를 봐서 잘 지내는지 내려가 확인하고 싶지만, 잡혀 온 순간부터 이정후는 거의 제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최환의 상태에 대해 물어보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면서도, 식사를 거부하거나 손길을 피하면 어김없이 환의 이름 세 글자를 내세워 목적을 이뤘다.
‘어째서.’
단 한 마디도 해주지 않는 것일까. 날이 이렇게 추운데 냉골에 가둔 건 아니겠지. 잠은 잘 자는지, 그가 약속한 대로 식사는 잘 주는지, 환의 성격에 반항의 의미로 부러 배를 곯고 있는 건 아닌지.
처음엔 단순한 안부 걱정이었는데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니 불길한 쪽으로 번져 간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 아니면 끌려오는 와중에 다치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걸까.
‘잠깐, 설마,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이미 세상에 없으니까.’
한 번 똬리를 튼 의구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확신으로 변해가, 도저히 제 눈으로 직접 알아보지 않고서는 못 견딜 지경이 되고 말았다.
“……또 시작이야?”
“환이 먹는 거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엔 저도 안 먹어요.”
“왜, 내가 죽이기라도 했을까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잖아요.”
“…….”
서로 노려본 채 꼼짝도 하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을 깬 건 석우였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야.”
“주문하신 것 찾아왔습니다.”
“들어 와.”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서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파악한 석우가 우뚝 멈춰 섰다.
“놓고 가.”
“네. 그럼 여기.”
작은 상자를 꺼내 내려놓고 뒤 도는 석우를 보며 어쩌면 기회가 온 것이라 생각했다. 석우라면, 최환에 대해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저기!”
다급하게 목청을 높여 부르자 멈칫하며 돌아보는 표정이, 윤희가 부를 줄은 몰랐던 듯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환이는 잘 있어요? 어디에 있어요? 아픈 건 아니죠?
“…….”
“설마, 죽……죽인 건 아니죠? 아직 살아 있는 거 맞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제 질문들에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죽였냐는 제 말에 크게 당황하며 이정후의 눈치를 살피는 석우의 기색에, 역시 제 예상이 맞았구나 싶다. 적어도 최환의 신변에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하다고. 차마 제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거라고. 저는 그동안 그것도 모르고 그의 말만 믿고 호의호식하며 지낸 거라고. 애초에 믿어선 안 될 사람을 왜 그리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걸까. 이정후에게 최환은 당장 찢어발겨도 시원치 않을 원수의 자식일 뿐인데.
어쩔 줄 모르고 어정쩡하게 입술을 달싹이는 석우에게 이정후가 차갑게 명령했다.
“석우, 나가.”
“나도 내보내 줘요!”
“…….”
“당신 옆에 있는 거, 역겹고, 징그럽고, 소름 끼쳐.”
“…….”
“끔찍해!”
말에 가시가 돋친다는 게 뭔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명확하게 알 것 같다. 비수 같은 말에 석우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저, 오야께선…….”
“나가랬지, 석우.”
그래봤자 바로 막혀버렸지만. 그게 윤희의 말에 살기를 더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Ange noir에서 몸이나 파는 게 더 속 편할 것 같아.”
“…….”
“좋네. 이젠 흰둥이도 아니어서 막 굴러도 될 테니.”
“식사나 해.”
“미쳤어? 당신이 주는 걸 내가 왜 먹어? 비위 상해. 할 수만 있으면 내장을 긁어서라도 그동안 먹었던 거 다 토해버리고 싶어!”
“돌아올 때까지 다 비워놓지 않으면, 시체 구경도 못 할 줄 알아.”
“저, 오야, 말씀이…….”
“차 대기 시켜.”
싸늘하게 내뱉고 나가는 이정후의 뒷모습과 윤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쉰 석우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이딴 게 다 뭔데.’
소담한 찬들이 가득 들어있는 쟁반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라 그대로 쓸어버리려고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다가 다 비워놓지 않으면 시체 구경도 못 할 줄 알라는 이정후의 말이 떠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릎을 세워 고개를 묻었다.똑똑.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헬퍼가 들어와 탁자를 정리하려다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걸 보고 난처한 듯 물었다.
“나중에 내갈까요?”
“저…….”
“네?”
“지하에 식사 잘 들어가고 있나요?”
이 아주머니라면 예전부터 주방 쪽 일을 돕고 있었으니 소식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은근히 돌려 묻자, 오히려 저쪽에서 반문했다.
“지하요?”
“네, 지하에 따로 식사 챙겨주는 사람 있잖아요.”
“이렇게 따로 준비해서 들어가는 덴 여기뿐이에요.”
“네? 언제부터요?”
“글쎄, 처음부터 여기 말곤 없었는데.”
순간, 미친 듯이 지하를 향해 달려 내려갔다. 지키고 있는 이정후가 없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차례로 문을 벌컥벌컥 열어 확인해 봐도 지하 창고에는 대개 텅 비어 있거나 연장 같은 것들만 채워져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막다른 복도 끝에 다다랐다. 마지막 문이었다.
철컥, 철컥.
거세게 당겨도 보고 돌려도 봤지만 이 문만은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았다.
‘여기 있는 게 분명해.’
기척이라도 들릴까 싶어 가만히 귀를 대어 보지만, 들려오는 건 쿵쾅거리는 제 심장 박동뿐.
“환아, 최환!”
굳게 닫힌 문을 쾅쾅 두들겨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보아도 안쪽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미 끝난 건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벌써 며칠을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데, 제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 냉기 가득한 지하에서 버틸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결론짓자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더운 피가 빠져나간 자리에 서늘한 분노가 자리 잡았다.
‘용서 못해.’
발걸음을 돌려 다시 일 층으로 향하자, 마침 유난히 차갑게 빛나는 과도가 눈에 들어왔다. 날카롭게 벼려진 미끈한 칼날에 길이도 한 뼘 정도로 적당했다. 손에 쥐어보자 이 정도면 자기도 충분히 다룰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주위를 살핀 후 잽싸게 품속에 숨겨 다시 방으로 향했다.* * *“다 먹었네.”
밤이 이슥할 무렵 돌아온 이정후의 표정이 빈 그릇들을 보고 누그러졌다.
‘힘을 쓰려면 먹어둬야 하니까.’
이런 제 속도 모르고 옆자리에 걸터앉은 이정후가 낮에 석우가 두고 간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조심스레 매트리스 아래를 더듬어 다시 한 번 칼의 위치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똑같이 갚아 주리라.
“이리 와.”
“뭔데요?”
여전히 칼이 있는 쪽에 주의를 기울이며 관심 있는 척 묻자 윤희의 마음이 풀렸다 여겼는지 이정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너한텐 다이아가 어울려.”
“…….”
“최고니까.”
한 눈에 봐도 눈부시게 화려한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가 오른쪽 귀에 묵직하게 걸렸다. 이어 왼쪽에도.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색한 미소를 띠며 응하다가 귀걸이를 마저 걸기 위해 이정후가 제 쪽으로 몸을 숙인 순간 잽싸게 목 한가운데를 향해 칼끝을 겨눴다.
“…….”
“최환, 시체라도 좋으니까 보여줘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천천히 왼쪽 귀에도 귀걸이를 끼우는 이정후는 침착했다.
“예쁘다.”
“장난 아니야. 진짜, 진짜로, 당신 진짜로 죽일 거야.”
“…….”
“최환 털끝 하나라도 다쳤으면, 다치게 했으면, 진짜, 정말…….”
피식.
웃는다. 흉기를 든 윤희는 이렇게나 떨리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는데, 긴장감에 손끝 발끝에 감각이 없는데, 이정후는 웃는다. 자길 향한 칼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똑바로 눕더니 미처 따라가지 못한 손목을 잡아 제 목 중앙으로 가져갔다.
“거기 말고.”
칼을 쥔 손목을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옆으로 끌어당기자, 예리한 날을 따라 붉은 길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그 길을 따라 배어 나오는 핏물을 보자 칼을 쥔 손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여기.”
귀밑 사선으로 반 뼘쯤 아래, 동맥이 팔딱거리는 지점 위에 칼끝을 세워 곧게 겨누도록 만든 이정후가 잡았던 손을 풀었다. 칼자루를 통해 울려오는 이정후의 맥박에 덩달아 윤희의 심장이 세게 요동쳤다.
“한 번에 세게, 깊이 찔러야 해.”
잔뜩 질려 있는 저와는 달리, 평온하게 눈을 감은 이정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고마워.”
고맙다니 뭐가. 손에서 시작된 작은 떨림이 팔을 타고 어깨로, 다시 상반신 전체로 퍼졌다. 도저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포기하고 칼을 내동댕이친 것이 먼저인지, 신음과도 같은 울음이 터진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석우에게 이끌려 잠겨 있던 지하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있겠니.”
“…….”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
“입술이 없으니까.”
“무슨 소리에요?”
“눈도, 코도, 귀도.”
“…….”
“다 도려냈지.”
“환이……를요?”
끄덕. 아득히 가라앉은 석우의 눈빛에 제가 들은 끔찍한 일이 실제 벌어졌음을 안다. 듣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볼 테냐.”
금방이라도 발작할 것처럼 두렵지만, 벌써부터 눈에 띌 정도로 경련이 일고 있지만, 그래도 결심했다. 아무리 참혹한 몰골이어도 그게 최환인 건 변함없으니까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줘야 한다고. 최환이 겪었을 아픔을 하나하나 새겨서 죽을 때까지 같이 아파할 거라고.
“볼래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하자, 석우가 열쇠를 넣어 문고리를 돌렸다. 서서히 열리는 문,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검은 내부. 석우가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켰다. 순간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들이켜 참았다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완전히 눈을 뜨고 안을 확인한 순간, 허탈함에 맥이 탁 풀어짐과 동시에 다리에도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예요?”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바와 술병 몇 개가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꽤 다정한 부자지간이었다.”
망연자실한 윤희를 내려다보며 석우가 느릿하게 과거를 더듬었다.* * *“또.”
“…….”
“또 날 속였어요.”
“…….”
이정후가 누워있는 침대 주변은 제가 방을 나서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과도와, 말라붙어 녹슨 것처럼 보이는 칼날의 혈흔, 더 이상은 생에 미련이 없다는 듯 처분만을 기다리는 단두대의 사형수처럼 고요히 눈감은 채 미동도 않는 그의 모습 모두.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윤희의 마음뿐일 거다.
‘이유가 뭘까?’
긴 이야기의 끝을 마무리하던 석우의 질문. 답을 알려주려는 듯 제 눈을 맞춰오며 물었지만, 굳이 그렇게 저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아도 이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어떻게.”
“…….”
목멘 사이사이 물기가 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건데요.”
갈라진 음성의 틈을 따라 눈가에 고인 뜨거운 열기가 이윽고 한줄기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얼굴을 적시던 애달픔은 턱 끝에 맺혔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뚝 떨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애달픈 남자의 목에, 얕게 베였지만 깊이 쓰라렸을 상처를 향해.
가느다란 상흔 위로 굵은 눈물이 겹치자 영원히 떠지지 않을 것 같던 이정후의 눈이 윤희를 담았다. 죽은 것처럼 굳어있던 팔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젖은 볼을 감싸 쥐었다.
“미워요.”
밉다고 말하면서도 볼을 감싼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널 보면 그 남자가 떠올라.”
“…….”
“미운 건 피차일반이니까.”
“…….”
“서로 이렇게 미워하면서 살자.”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심지가 마지막 말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가슴 정중앙에 박혀 끊임없이 일렁이던 붉은 그림자도 순식간에 훅 꺼져 그 빛을 잃었다. 남은 것이라곤 숨죽여 흐느끼는 저를 힘주어 그러안은 품속의 온기뿐.* * *밤인데도 온통 붉었다. 벽지도, 대리석 계단도,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도 분명히 흰색이었는데, 지금은 어찌 된 셈인지 온통 붉기만 하다. 환을 찾기 위해 도달한 지하의 저 끝자락, 닫혀있던 문이 열려 있어 가만 들어서자, 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은 제 모습과 입술을 굳게 다문 석우의 얼굴이 보였다.
‘꿈이구나.’
아까의 꿈을 꾸는 거다. 그제야 온통 사방이 붉은 이유를 깨닫는다. 저택이 거대한 홍등 속에 갇혀 있음을. 저는 지금 홍등을 밝히는 수많은 불꽃 중 하나라는 것을.
“꽤 다정한 부자지간이었다.”
잠자코 서 있기만 하던 석우의 입술이 움직였다. 비구니가 된 부인을 보기 위해 단신으로 절에 다녀오던 날, 이정후의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잔혹한 살인의 배후는 누구였는지.
“말해봐라. 최환이 잔인하게 죽임당했다고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순간 작은 불꽃이었던 윤희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똑같이 갚아주고 싶다고. 이때껏 넋을 놓고 있던 아까의 저도 같은 생각인지 눈빛이 살기로 빛났다. 앙다문 입술과 빳빳이 치켜든 고개, 증오를 못 이기고 잘게 떨리는 어깨가 분노를 짐작케 한다. 그런 윤희를 지켜보는 석우의 표정이 한층 씁쓸해진다.
“듣기만 해도 이럴진대,”
“…….”
“오야는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봤어.”
“…….”
“장담하지. 넌 감히 짐작도 못 할 거다.”
장담할 필요도 없이 석우의 말이 맞았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참담함에 고개가 힘을 잃고 푹 꺾였다. 오랜 시간 혼자서 힘겹게 고통스런 시간을 버텨왔을 것이다. 당장 사지를 찢어 남김없이 씹어 먹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상대가 약해지기를 기다리며 다신 일어설 수 없도록 온 세상 구석구석 치밀하게 덫을 놓았을 것이다. 이제 걸려든 쥐새끼를 무참히 짓이기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기만 하면 됐는데.
“오야는 그걸 깨끗하게 단념했어.”
“…….”
“이유가 뭘까?”
석우의 시선 끝에 윤희가 놓여있다. 혈육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말했던 자기 때문에, 환의 생사를 알려달라며 비수를 들이밀었던 자기 때문에, 그간 쌓아온 모든 걸 일순간에 포기한 남자가 있다고.
“오야를 이해해 달라곤 안 해.”
“…….”
“하지만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
“…….”
석우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죽은 듯 꼼짝도 않는 윤희를 일으켜 세웠다.
“이건 전부 오야 혼자 마신 거야.”
“…….”
그제야 코를 마비시킬 것 같은 독한 알코올 냄새가 풍겨왔다. 그전까진 처음 이 안을 확인하고 받은 충격에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곁에 네가 없으면 여기 틀어박혀서 곤죽이 될 때까지 마시곤 해.”
“…….”
“그래서 잠가 놨었다.”
할 얘기는 이제 끝났는지, 석우가 윤희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석우가 걸쇠를 잠그는 동안, 고개를 들려 다시 한 번 문틈으로 안을 확인한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빈 병과 벽장에 가득한 양주며 와인 병들 말고는.
여기까지 보고 나자 갑자기 꿈속의 장면이 바뀌었다. 비틀거리며 이정후에게 다가가 채근하듯 말하며 울다 쓰러지는 자신과, 그런 저를 가만가만 안아 토닥이는 그. 그의 등 뒤로 칠흑 같은 어둠이 돋아나 서서히 날개를 펼친다. 사방을 덮었던 붉은 빛이 점차 어둠에 먹히기 시작한다. 지금껏 아른거리는 작은 불꽃이었던 저도 점점 아스라이 사그라져 정적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 *‘윤희는 어떻게 됐을까.’
좀 더 주의했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집에서 나올 때 차도 간신히 빼온 것이라, 이것저것 준비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저 일단은 어떻게든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뿐, 뒷일은 차차 생각하기로 했었는데 이렇게 쉽게 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들어보니 민박집에 도착한 첫날부터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초조하게 어떡하지, 궁리하는데 창밖 풍경이 익숙하게 바뀌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이정후 그 자식이 있는 곳? 아니면 혹시 쥐도 새도 모르게 험한 일을 당하는 건 아닐까? 어느 쪽이든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아 온몸의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는데, 뜻밖에도 집 근처에서 차가 멈추었다.
“내려.”
“윤희는? 어디로 빼돌렸어!”
내리지 않고 버티며 묻자 어이가 없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린 남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모르나? 하긴.”
“윤희 어디 있냐니까!”
“걔랑 넌 아무것도 아냐. 덕분에 운 좋은 줄 알아.”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함께 귀찮다는 듯 짐과 함께 완력으로 끌어내리곤, 그래도 달려드는 최환을 세게 밀쳐 넘어트린 남자가 그대로 떠나 버렸다. 잽싸게 다시 일어났지만 이미 차는 멀어지고 난 뒤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얼이 빠져 있다가 이럴 때가 아니지 싶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승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환아.
– 승수야, 나 잡혔어.
– 잡혔다고? 지금 어디야?
– 지금은 집 앞이야, 다시 집 앞에 데려다줬어. 아, 아니, 이건 중요한 게 아니야. 다른 건 모르겠고 윤희가 걱정인데, 어떡하지? 따로 잡혀 와서 소식을 몰라. 어쩌면 좋을지 갈피가 안 서. 승수야, 윤희한테 무슨 일 있으면 어떡해? 응?
– 환아, 최환.
유난히 침착한 승수의 목소리에 어쩐지 이상한 낌새를 챘다.
‘급박해야 할 이 시점에 승수는 왜 이렇게 침착하지? 잠깐.’
이건 침착함과는 다르다. 그제야 핸드폰 저 너머의 무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뭔가 더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다. 지금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있을까. 그게 뭘까.
– 승수야, 무슨 일 있어? 너 혹시 나 도운 것 때문에 앙갚음이라도 당한 거야?
– …….
– 맞지! 너 어디야? 당장 나와!
– 그런 것 아니야. 환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승수가 차근히 전하는 얘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이어서, 어느 순간 뇌를 겉돌던 단어들이 마구 뒤엉켜 고막을 먹먹하게 틀어막았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은 어지러움에 이마를 짚자 손끝에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그럴 리 없건만 마치 칼자국이 그어진 것처럼 눈가에 상흔이 길게 솟아오른 것 아닌가. 꼭 승필의 그것처럼. 깜짝 놀라 근처의 쇼윈도에 서서 확인하자 역시 아무 상처도 없다. 하지만 유리에 비춰지는 제 모습에 어떤 얼굴이 선명하게 겹쳐지는 것을 보고 말았다.
‘내 친아버지가, 아저씨라고?’
살얼음 같은 바람에 볼이 얼얼해지는 것도 모르고 온힘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 *‘아버지! 위험해요!’
자신을 향해 날리는 칼을 막아서며 소리치던 환의 목소리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잠시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착각했던 탓이다. 자신이 친부라는 것을 알 리가 없건만. 비록 착각이었지만 기분만큼은 최고였다. 이대로 평생 그림자로 살아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피가 철철 흐르는 환의 팔을 보자 그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분노만이 자리를 채웠다. 과거의 환상에 사로잡혀 아직도 자기가 호령하기만 하면 세상이 벌벌 기는 줄 아는 저 늙은 남자는 환의 앞길에 해가 될 뿐이다. 더불어 흰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 계집도.
어째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영 좋지 않다 했더니, 저 탐욕스런 늙은이의 핏줄일 줄이야. 게다가 사정을 모르는 환은 계집이 제 이복남매인 줄로만 알고 몰래 차를 훔쳐 달아나기까지 했다. 이미 저쪽 패거리들이 따라붙어 오합지졸이 된 이쪽으로선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었다.
‘기회를 봐서 씨를 말려야 해.’
때마침 환도 없고, 이제 슬하에 남은 이도 손에 꼽았다. 석우 패거리에 깨진 것도 한 몫 단단히 하긴 했지만, 돈이 사라지자 의리도 같이 사라졌는지 제 발로 떠나간 무리들이 보다 더 많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오히려 잘 됐다 싶다.
“그럼 이제 우리 둘이, 아니 셋이 사는 건가?”
육감적인 입술이 즐거움에 꿈틀거렸다. 자기 남편을 죽이겠다는 계획을 털어놓자 두말 않고 오케이 하며 가슴을 붙여 온다.
“그럼 우리 환이한테는 자기가 생부라고 밝힐 거야?”
“아니. 그냥 이대로가 좋아.”
흐흥, 코웃음과 함께 흘겨보는 눈초리에 고개를 가로저어 끝까지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환이 자기를 바라보는 신뢰 가득한 눈빛을 알기에. 무용을 하도록 뒤에서 적극 지원한 것도, 환이 제 부모에겐 말할 수 없는 자잘한 부탁을 들어준 것도, 틈나는 대로 사춘기 고민 상담을 해주며 진짜 아버지 역할을 해준 것도, 모두 자신이다. 이제 와서 그걸 깨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럼 언제? 내가 도울 거라도 있어?”
“뭘 도울 건데.”
“글쎄? 예를 들면 침대에서 무방비 상태로 다 벗고 있게 만들어 준다든가 하면, 어때?”
“일단 좀 더 지켜보고.”
“나 못 믿어? 자신 있는데.”
“도울 생각 말고 방해나 안 되게끔 조심해.”
가볍게 으름장 놓고 아까부터 하초를 간질이며 장난치는 다리를 들어 올려 허리에 걸치고, 속옷을 젖혔다.
“흐으, 얼른, 하, 죽어버렸음 좋겠어, 아흑! 이젠, 꼴도 보기 싫어, 아, 아아! 승필 씨!”
스트레스를 풀려는 듯 평소보다 질게 요분질을 하던 여자의 입에서 얼마 되지 않아 교성이 터졌다. 무늬만 우두머리인 늙은이를 처리하고 나면 이렇게 몰래 숨어서 급하게 일을 치르지 않아도 되겠지. 할 수 있는 한 빨리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토정했다.
그런데 기회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